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어톤먼트 (Atonement, 2007)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3. 4.

본문

  '속죄'라고 번역하면 머리가 반쯤 벗겨진 까탈스러운 러시아 감독이 만든 종교적, 철학적, 혹은 종교철학적 예술영화처럼 보일까봐 걱정스러웠던 걸까? 부러 어려운 영어 이름을 그대로 옮긴 '어톤먼트' (중고등학교 교양 필수 단어는 아니니 죄책감을 가지진 않아도 좋겠다) 에서 구조상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모든 절실한 사랑이야기가 결국은 숨은 화자 브라이오니 탈리스에 의해 재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별 의미를 두지 않겠다면 할 말 없지만, 여기에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 이제껏 무심히 넘긴 장면들을 되돌아볼 필요가 생긴다. 마지막 장면에서 브라이오니(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인터뷰 중에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와 로비(제임스 맥어보이)의 재회 장면이 소설을 위해 만들어 낸 부분이라 고백한다. 위증으로 그들을 갈라놓았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데비가 겪는 전쟁의 참상을 묘사해내는 부분 또한 마찬가지인데, 결론적으로 그녀는 실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데비의 행로를 상상하면서 따라감으로써 글로 적어내려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어디부터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윤색인가? 

  브라이오니의 본심을 곡해하자는 말이 아니다. 불완전한 기억과 불완전한 고백에 의존하여 이루어 질 수 밖에 없는 작업인만큼 무의식 중에 있었을 자기 합리화를 인정하자는 뜻이다. 브라이오니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어렸을 적부터 픽션(희곡)을 지어내는데 꽤 능숙했음을, 자신의 재주에 꽤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설이나 쓸 걸 그랬나봐. 소설에선 쓰기만 하면 다들 상상할 수 있잖아. 하지만 연극에선 그 모든게 배우한테 달렸어.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고로 젊은 브라이오니(로몰라 가레이)는 '엔젤 (프랑소와 오종, 2007)'의 엔젤 데브롤 (공교롭지만 그 역 또한 가레이가 연기했다), 노년의 브라이오니는 '스위밍 풀 (프랑소와 오종, 2004)'의 사라 (샬롯 램플링이 연기했다)의 모습에 각각 오버랩된다. 물론 배경에 깔려있는 기작은 다르다. 사라는 자기 만족을 위해, 엔젤은 자기 방어를 위해, 브라이오니는 자기 고백을 위해 각각 소설을 쓴다. 그럼에도 '소설은 있을법한 허구'라는 대전제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만난 세실리아와 로비는 브라이오니의 손 끝에서 재구성된 인물이다. 또한 이 모든 사건의 기승전결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취사 선택된 기억에 준하여 재배열된 것이다. 가령 어린 브라이오니는 연못에 빠진 도자기 조각을 꺼내기 위해 세실리아가 앞에서 옷을 벗는 광경을 목격하는데, 이는 이후 빚어질 오해가 어떤 경로로 발현된 것이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자기 변명적 장치일 가능성이 있다. 가능한 일이다. 그녀야말로 이 모든 서사의 전지적 작가이니까. 여기서 이언 매큐언의 원작과 조 라이트가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의 결정적 차이가 갈린다. 원작은 소설 속의 소설을 브라이오니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이중적 도구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초점을 맞추는 쪽은 소설 속 소설 내용의 풍부하고 경제적인 영상화다. 대신 극의 중심에서 서서히 관찰자로 변모시켜 온 브라이오니의 인터뷰씬으로 결말을 맺는다. 흥미롭게도 이 지점에서 원작의 매력은 묘하게 비틀어진 상태다. 솔직한 생각으로는 별로 조화로운 구성처럼 생각되지 않지만 그것이 아주 영리한 작업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보니 영화 '어톤먼트'의 내용이 그간 '워킹 타이틀'이 내놓았던 작품군과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뿔싸!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 작품이 매큐언의 영화화가 아닌 라이트의 소설화였음을.


(2008년 03월)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