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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La Ceremonie, 1995)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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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을 다시 보았다. “현 시대 마지막 공산주의 영화”라는 감독의 자화자찬격 셀프-코멘트가 적절한지는 차치하더라도 바로 이 작품이야말로 샤브롤의 집대성이고 샤브롤 테마의 정수임은, 다시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고 분명하다. 샤브롤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1950년대와 같은 시기에 파리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했다. 더구나 데뷔작 '미남 세르주(1958)'는 돈많은 처가가 제작비를 대어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에 이 양반이 저격하는 최우선 목표물이 '계급'이고 그 다음 목표물이 '가정'이라는 사실은 언뜻 납득하기가 어렵다. 아니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건 마치 열일곱 신인가수가 텔레비젼에 나와 긴 무명시절의 고난을 회고하는듯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아닌가. 물론 올해로 일흔아홉의 샤브롤 할아버지는 그 조악한 비유가 송구할 정도로 거장 중의 거장, 말인즉슨 킹왕짱 반열에 자리하신다. 아시다시피 발표작만 무려 오십편이 넘는데다가 백살 받고 백살 얹어 이백살까지라도 만수무강하실듯 여전히 정정하고 정력적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일관성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당대 최고 고집쟁이 - 그의 후기 작업 결과물 중 단연 정점에 있는 '의식'은 '여자들의 문제(1988)', '베티(1991)'등과 함께 그 스스로도 가장 만족해하는 결과물 중 하나로 꼽는 작품이다.

  '의식'의 도식은 놀랄만큼 노골적이다. 평온하고 윤택한 부르주아의 집안과 여기에 가정부로 들어가 살게된 소피(상드리느 보네르)의 명백한 콘트라스트는 구태여 그 혐의가 기술적으로 숨겨지지 않은 채 전방위에 표면화된다. 예컨데 소피의 유일한 취미가 TV보기라는 점을 - 그것도 돈 놓고 돈 먹기의 퀴즈 프로나 가벼운 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 상기해보라. 이는 그녀가 문맹이라는 이 작품의 뇌관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반면 같은 시각 주인집 릴리브르씨네 네 가족은 아래층의 거실에 앉아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감상하고 있다. 하류-피지배-문맹-TV오락, 상류-지배-고등교육-오페라의 연결고리는 분명 낯뜨거울 정도로 노골적이다. 그런데도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그게 샤브롤의 힘이다. 그에게는 아무리 뻔한 장면과 아무리 뻔한 도식이라도 절대 튀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마술적 보정 능력이 있다. 아무리 노골적이고 무리한 설정이라도 이 할아버지의 손이 닿으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된다. 자신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단 사실을 주인집 가족들에게 숨긴 가정부 소피와 그 진실 여부에 지대한 호기심을 보이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주인집 가족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우체국 직원 잔느(이자벨 위페르)의 팽팽한 삼각 기싸움은 결국 '있는 자'를 향한 '없는 자'의 열등 의식과 '없는 자'를 향한 '있는 자'의 경계적 태도의 충돌로 한바탕 난장을 이룬다. 이처럼 위험천만하고 민감뻑쩍한 주제를 병아리 하품하듯 태연히 무난하고 여유롭게 정리해낼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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