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속의 물: 영화 '물 속의 칼'에 관하여


1. 남자가 소년을 배에 태운건 과시욕 때문이다. 그건 남자가 소년의 겁대가리 상실한 히치하이킹을 받아준 이유이기도 하다. 남자에게는 외교관쯤의 지위는 되어야 몰고 다닐 법한 좋은 차와 전용 요트가 있다. 소년도 그게 좋은거라는걸 안다. (소년 : “당신들은 외교관인가보군요. 아니면 외교관전용 운전수거나 하지만 운전수로 보이진 않네요.” / 남자 : “지금은 이런차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사람들도 많아.”) 소년의 희망 역시 나중에 그런 차와 그런 보트를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소년이 가진건 지루한 인생과 한 자루의 나이프 뿐이다. 그래서 무작정 걷는다.

2. 남자에게 소년의 나이프는 흉기다. (남자 : “그런 살인도구를 가지고 다니는 이유가 뭐지?”) 하지만 그다지 물리적 위협을 느끼지는 않는다. 소년에게 나이프는 편리한 도구다. (소년 : “나무를 자르거나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나갈 때 좋죠.”) 허나 나이프는 물에선 필요하지 않다. 물에서 필요한건 키를 잡는 법이다. 소년은 쉽게 배를 몰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키를 다루지 못한다. 남자는 만족스럽게 웃는다. 이제 남자는 소년에게 명령을 하기 시작한다. (남자 : “두 사람이 갑판에 있으면 한 사람은 선장인게야.”) 휘파람을 불지 못하게 하고 밧줄을 감게 하고 걸레로 갑판을 청소하게 한다. 남자가 부인과의 오붓한 보트여행에 소년을 끌어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수성가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남자의 눈에 대학 때 스포츠지 따위에 글 몇 편 실어본게 전부면서 인생을 다 아는 듯 떠버리는 소년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소년의 존재는 남자를 월등히 남자답고 돋보이게 한다. 이 보트 위의 유일한 진짜 남자. 수컷 과시욕의 관객은 암컷이다. 암컷에 대한 소유욕은 유치한 호기, 나아가 폭력의 형태로 발현된다. 브릿지 게임이 그러하였고 매트리스 불기 시합이 드러하였으며 칼 던지기 시합이 그러하였다.

3. 소년은 반발하나 보트를 떠나지 않는다. 남자의 자동차, 남자의 보트는 어차피 소년의 꿈꾸던것들이다. 남자의 여자 또한 소년의 꿈이다. 남자가 횡포를 부릴 적마다 소년은 배를 떠나겠다고 하지만 떠나지 않는다. 대신 그럴 적마다 소년의 시선은 여자에게로 향한다. 사실 보트는 남자의 소유물도 아니다. (남자 : “보트는 그녀거야. 하지만 내 것이나 다름없지.”) 먹이사슬은 진작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태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년은 키를 능숙하게 다룬다. 돛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물 위를 걷는다. 그가 바라는 모든게 사실은 이 배 위에 있다. 소년은 걷는 걸 좋아하지만 뭍에서는 바람을 타고 반짝이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다. 소년은 남자를 이길 수 없지만 순순히 밀려나지도 않는다.순순히 밀려날 생각도 없다.  남자의 도구 - 냄비집게를 비웃는다. 화가 난 남자가 집게 없이 뜨거운 냄비를 잡아보랬을 때 맨손으로 화상을 입으면서도 기어이 냄비를 잡고 버틴다. 이제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소년의 나이프는 문제가 된다. 먹이사슬에서 소년은 남자에게 먹히는 존재지만 나이프를 가지고 있다. 달리는 차 앞으로 뛰어들어 히치하이킹을 하는 소년의 무모함은 손바닥을 펴고 다섯 손가락 사이 사이로 칼을 찔러넣는 놀이에서도 똑같이 발휘된다. 그건 무료한 인생을 달래기 위한 겁없는 놀이다. 소년이 무모할 수 있는건 잃을게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소년이 보지 않는 사이에 그 짓을 따라해 본다. 손가락이 찔릴까봐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소년이 나타나자 황급히 그만둔다. 나이프는 남자가 소년에게 질 수도 있는 의외의 변수다. 남자가 소년에게 부린 폭력은 나이프로 인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밤이 지났을 때 남자는 나이프를 몰래 숨긴다. 나이프는 권위와 복종의 매개가 될 수 있다. 남자는 소년이 그런 나이프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관습적으로 나이프는 남성(남성 성기)의 상징이다. 역시 같은 이유로 남자는 소년의 나이프를 용납할 수가 없다. 소년은 나이프를 돌려달라고 하지만 남자는 던져버린다. 배 밖으로 떨어져나간 나이프는 물에 첨벙 빠져 가라 앉는다[각주:1]

5. 공교롭게도 우리는 나이프에 부여했던 원리에 의해 보트가 어떤 상징을 가지는지를 알고 있다. 관습적으로 보트는 여성(여성 성기)에 대한 대표적 비유다. 앞서 지적한 대로 그 보트의 진짜 주인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이러한 도식이 맞다면 여자는 남자와 소년의 치기어린 경쟁에 있어 결코 방관자가 아니다. 오히려 싸움의 목적이며 승자에게 주어질 왕관이며 상황을 자극하고 심화시키는 단 하나의 존재이다. 남자와 소년이 각각 등장하지 않는 씬은 있지만 여자는 모든 씬에 빠지지 않고 존재한다.그녀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본다. 소년은 어리다. (여자 : “아직 어린애군요.”) 여자는 소년에게 스프를 나누어주고 잠이 든 소년에게 모포를 덮어준다. 소년이 빠뜨린 노를 헤엄쳐 건져오는 것도 여자다. 여자가 소년을 챙겨주는 행위는 남자를 자극한다. 때문에 소년이 수영을 할 줄 아는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① 배를 떠나서도 살 수 있는가 ② 혹은 배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인가. 소년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수영을 못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소년과 남자의 싸움은 소유의 문제다. 소년은 남자와 똑같다. 단지 남자의 과거형일 뿐이다. 여자의 지적은 정확하다. (여자 : “당신도 그랑 똑같군요. 그 사람 나이에 절반에다가 말솜씨가 없을 뿐이지……. 당신은 그와 같아요. 같아지길 원하고 있어요.”) 남자는 수영을 할 줄 알고 마음만 먹으면 배를 떠날 수 있다. 물에 빠진 척 물 속에 숨어 있던 소년은 남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배로 올라와 여자를 소유하려고 한다. 일종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다. 소년은 옷을 갈아입는 여자를 슬그머니 훔쳐본다. 이성(어머니)를 성적 대상으로 한정하고 동성(아버지)을 혐오하는 태도의 결과는 나도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동일시다. 

6. 그런데 이건 개인 가족적 차원으로 한정할 문제만은 아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비판하며 인간은 ‘욕망하는 기계’요 좌절은 실상 사회로부터 생겨나는 것임을 지적했다[각주:2]. 이 작품 역시 이 오이디푸스적 폐쇄 역할극이 사회적 단면를 비추고 있을 가능성을 수시로 내비친다. (여자 “당신은 인생에 대해 뭘 아나요? 멋진 보트나 좋은 차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나요? 당신은 우리가 방이 네 개쯤 딸린 집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나요?” / 소년 : “난 적어도 당신의 집이 네 개의 방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 여자 : “실제로는 여섯 개죠.”/ 여자 : “당신은 매점에서 점심을 때우고 싸구려 담배로 시간을 보내겠죠. 애인과는 돈이 없어 골목에서 키스를 해야 할테죠. 그 꽁꽁 얼은 손으로는 사랑하는 그녀의 블라우스단추도 풀 수 없겠죠. 혹시 혼잔가요? 아버지는 죽었나요. 형제들은?” / 소년 “아뇨.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양쪽 모두 재혼했죠.”) 

7. 남자는 크고 우람한 물고기고 소년은 크고 우람해지고 싶어하는 작은 물고기다. 즉 소년과 남자는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와 다름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여자뿐이다. 소년은 배에서 내리고 여자는 혼자 배를 몰아 남자가 기다리는 선착장으로 돌아온다. 남자는 자기가 물에 빠뜨린 소년이 죽었을까봐 찜찜해하지만 굳이 경찰서로 가지는 않는다. 소년이 살아있다는 여자의 말을 믿지도 않는다. 차는 갈림길에서 그만 멈춘다. 어디에선가 소년은 또 히치하이킹을 할거다. (여자 : "또 그런 식으로 히치하이킹을 할까요?") 남자처럼 되는 그 순간까지 소년의 무모한 히치하이킹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물 밖으로 빠져나왔지만 뭍이라 믿었던 그 세상이 바로 물이기 때문이다.[각주:3] (2001/05/20)


  1. 물에 빠진 또 하나의 도구는 보트를 젓는 노다. 남자와 대립하던 소년은 노를 호수에 던져 버린다. 남자는 "빨리 가서 주워와" 라며 호통을 친다. 이때도 여자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잖아요" 라며 자기가 대신 호수로 뛰어들어 노를 건져내 온다. 나무로 만들어진 노는 물 위에 뜨지만 칼은 가라 앉는다. 아마도 소년의 칼은 호수 깊숙히 가라앉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2. (註2)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앙띠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현대사상의 모험, 민음사, 참조. [본문으로]
  3. 로만 폴란스키의 데뷔작. 1962년 베니스 비평가상 수상. 1964년 아카데미 외국어상부분 노미네이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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