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운 있어도 실패는 없다: 영화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에 관하여


0. 삶의 방식을 바꿀 준비가 되셨습니까?
잠시만요. 그 전에 이 잘생긴 남자에 대해 조금 알아보지요. 

1. 구십년대 중반. 미국의 경제를 활황이었고 빌 클린턴은 개인적 악재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전문가들이 조심스럽게 '민주당 장기집권' 가능성을 타진할만큼 당시 클린턴과 민주당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줬는데 여기엔 신선하고 정력적인 두 정치인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바로 힐러리 클린턴과 앨 고어다.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혹은 둘 중의 한 사람만 있었다면 미국의 정치 현실에서 '장기집권'이란 무모한 예측은 결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이 뺀질이 대통령의 좌우에서 영부인과 부통령의 포지션으로 활약함으로써 민주당은 준 대통령급의 대선주자를 일찌감치 확보하고 비로소 공화당과 차별화가 가능한 공격적인 개혁(성향의) 법안을 밀어붙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앨 고어는 사실상 클린턴 행정부 내내 국내 문제를 전담하고 있었고 '허수아비 부통령'이 아닌 정권의 실세로 모든 대소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금상첨화. 사실상 '앨 고어 대통령'이 탄생할 모든 분위기가 무르익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2000년 대선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에게 국민투표에서 54만표를 앞서고도 선거인단에서 271대 266으로 밀려 패한다. 미국 정치사상 단 네 번 밖에 없었던,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도 당선되지 못한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한다. 그리고는 일찍이 보여주던 전문성과 정책 책임자로의 풍부한 경험, 일반 (전직) 정치인 이상의 남다른 영향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환경운동에 나선다. 2007년에는 그 노력을 인정받아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한다. 이미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2. 앨 고어가 '일반 (전직) 정치인 이상의 남다른 영향력'을 지녔다는 진단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그가 어떤 인물로 인식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검증의 대상을 2000년 대선을 기점으로 이전의 앨 고어와 이후의 앨 고어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전 시점과 이후 시점에서의의 인기 기작이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전의 앨 고어는, 정치판 용어를 빌자면 '중도 우익의 젊은 기수'였다. '진보적이고 비전있는 보기 드문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준비된, 전문적, 진지한, 잘생긴, 진보적, 근엄한, 엘리트, 성실한 등의 단어들과 함께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부통령이었던 그의 별명은 두 가지였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미스터 오존>, 다른 하나는 <미스터 딱딱한>. 이 두 가지 별명은 그의 대중적 이미지가 어떻게 추상화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사실 그는 개인사적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는 사람이다. 3선 상원의원 출신의 아버지와 '최초의 벤더빌트 로스쿨 출신 여류 변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워싱턴의 명문 세인트 앨버스를 거쳐 하버드 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저널리스트 활동을 하며 자신 또한 어머니의 모교 밴더빌트 로스쿨에 들어갔다. '프린스'라고 불릴만큼 남다른 외모에, 소위 만능 스포츠맨에, 학업 성적까지 우수한 팔방미인이었다는 것이 후일담 - 혹시라도 주위에 이런 친구가 있다면 그저 우리와 다른 별에서 왔다고 믿는 게 가장 속 편하지요. 결혼생활만 봐도 그의 범상치않은 FM적인 면모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에서 만난 아내와 1남 3녀를 두고 단 한 번의 스캔들도 없이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꾸려왔다. 어디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평생을 태어나고 살아온 순박한 목장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워싱턴 복판에서 태어나 24년간 정계에 몸담고 이후 8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대안적 정치활동을 펼쳐온 명망있는 인사가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에서 만난 아내와 1남 3녀를 두고 단 한 번의 스캔들도 없이 가정생활을 꾸려왔다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그는 완벽했고 대중들은 그의 완벽함에 지지를 보냈으며 그 완벽함에서 '이상적인 미국인'의 표본을 보았다. 또한 더 나은 아메리카의 꿈과 희망을 보았다. 바로 이것이 그에게 쏟아졌던 뜨거운 환호의 이유는 아니었을까?

3. 반면에 2000년 11월 7일의 '드라마틱한 패배' 이후 앨 고어는 새로운 이미지를 얻게 된다. 앞서 가졌던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 - 준비된, 전문적, 진지한, 잘생긴, 진보적, 근엄한, 엘리트, 성실한 등에 하나의 단서가 추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운한>. 다시 말해서 모든 걸 다 갖추고도 운이 따르지 않은 - 국민투표에서 이겼다는 점, 마지막 플로리다 논란으로 재검표까지 갔다는 점, 하필 그 상대가 이후 4 플러스 4년간 삽질을 거듭할 '백치(白痴)' 조지 W. 부시라는 점에서 대중들은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이 대목에서 투표장에서는 조지 부시를 찍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사적으로는 그의 낙선을 안타깝게 여기는 시선이 적지 않더라는 흥미로운 조사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앨 고어가 '비극의 주인공'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을 동경하지만 성공한 사람에게 관대할 필요성까진 느끼지 못한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니 이미 충분한 능력으로 충분한 보상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공해야 할 사람이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에는 대단히 관대해진다. 가령 대중예술계에서 요절한 천재들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바로 대중이 그만큼의 보상을 행하려는 무의식적 의지를 갖기 때문이다. 설사 때로는 그것이 과잉일지라도. 마찬가지로 앨 고어가 유력한 후보였을 때 보수성향의 부동층 미국민들은 아직 미정일 그의 승패에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다. 공화당 후보쪽으로 팔이 굽는 것은 단지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가까운 투표 의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앨 고어가 (다소 의심스럽기까지한) 박빙의 접전 끝에 조지 W. 부시에게 패하자 묘하게도 심리적 저지선이 달라진다. "그래도 이렇게 패하고 정계를 떠나기엔 아까운 인물이 아닌가?" 당시 앨 고어의 정계 은퇴를 바라보던 다수의 사람들은 아주 극단적인 공화당 지지층을 제외하고는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통령이 되지 못한 불운한 대통령감 남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으로 나타난다. 그는 여전히 나보다 잘난 사람일런지 몰라도 더 이상은 나보다 운좋은 사람은 아니기에. 세상에 마상에, 잘나서 매력적인 남자가 실패를 겪으며 더욱 매력적이되다니!

4. 흥미로운 것은 이후 앨 고어가 이러한 이미지를 (의도적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십분 활용하여 왔다는 점이다. 가령 강연장에서 스스로를 '전직 미합중국 차기 대통령감(the former next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이란 타이틀로 소개하여 폭발적인 웃음을 이끌어내고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는 일화는 아픈 상처를 극복한 결과일까? 아니면 일종의 '자조 마케팅'으로 '제가 바로 그 때 그 남자입니다'라는 사실을 강도하려는 전략적 일환일까? 중요한 것은 '전직 미합중국 차기 대통령감'이란 재치있는 멘트가 '전직 미합중국 부통령'이라는 실제 이력을 대신하여 선택된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아시다시피 강연 외에도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대선 패배를 희화화시키는데 기꺼이 동참했다. 맷 그로닝의 '퓨처라마(FOX)'에서 보낸 러브 콜에 흔쾌히 달려가 연기했고 (그 중 지구 온난화와 관계된 에피소드는 이 작품에도 잠시 등장한다, 註1) 심지어 그 유명한 'SNL(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NBC)'에도 출연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그의 현재 이미지가 대중과 소통함에 있어 2000년 이전의 이미지보다 어떤 면에선 유리한 점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과거 부통령 시절 그의 유일한 약점으로 지적되던 것이 '근엄한 엘리트'라는 점에서 파생되었던 친근감의 문제였음을 기억해보자면 더더욱 그렇다. '훌륭한 사람이고 뛰어난 사람이란 건 알겠는데 어딘가 모르게 어려워.' 허나 보시다시피 악몽의 2000년 이후 그는 보다 친근한 사람이 되었다. 스스로도 그 넘치는 효과를 굳이 마다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 어떤 정치인, 혹은 전직 정치인, 혹은 그 밖의 셀러브리티들 중에서 이처럼 동경과 연민, 부러움과 안타까움을 짬짜면마냥 뒤섞어 불러일으키는 미묘한 인물이 또 있는가? 혹은 이런 가정은 또 어떨까? 2000년 당시 대선에서 앨 고어가 조지 W. 부시에게 승리했고 단임만 채운 채 성공적으로 다른 민주당 주자(존 캐리나 힐러리 클린턴이나 하다못해 존 에드워즈에게라도)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한 다음, 자기는 이제 정계에서 물러나 '평생의 과업'을 이루겠노라 지금처럼 환경 문제를 널리 알리고자 뛰어다녔다면?, 그래서 '전직 미합중국 대통령(the former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다녔다면?, 그랬다면 과연 그의 강연은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과 같은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가능했을까?

[신사 숙녀 여러분, 전직 미합중국 차기 대통령감이셨던 앨 고어 씨를 소개합니다!]
 
5. '불편한 진실'은 일천 회가 넘는 고어의 순회 강연에 자극을 받은 환경운동가 겸 제작자 데이비드 구겐하임이 나서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제41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 제7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제19회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 제32회 LA 비평가 협회상 등의 다큐멘터리 부문을 싹쓸히하며 명실공히 2006년 최고의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흥행에도 성공하여 그해 미국인이 가장 많이 관람한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내용은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 - 결국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바는 편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처럼 심각한 현실을 외면하다가는 결국 인류가 파국에 이르고야 말리라는 것.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이야 재론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다. 그의 주장은 대부분이 사실이고, 사실임에도 너무도 당연하게에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무디어진 감각을 다시 불러 일으키고 경종(警鐘)을 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다큐멘터리는 가치가 있다. 가령 똑같이 지구 온난화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극영화로 접근했던 '더 데이 애프터 투모로우(아하 투모로우, 롤랜드 에머리히, 2006)'와 비교해 보자. 이 영화는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갑작스럽게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한 상황을 다룬다. 상승한 수면은 멕시코 만으로 유입되어 북대서양 해수의 염분 함유도가 떨어진다. 밀도가 낮아진 해류가 순환하지 못하게 되면서 전 지구적인 열 순환의 체계가 깨진다. 그 결과 지구 중위도 이상의 지역에 대규모의 빙하기가 도래한다. 그러나 '투모로우'를 보고 관객들은 "정말로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거야?" 를 잠시간 궁금해하긴 했어도 그것을 피부에 와닿는 공포로 체감하지는 못했다. 물론 영화는 영화이니까. 감독이 롤랜드 에머리히라는 점에서 짐작 가능하듯 '투모로우'는 지구 온난화를 사태의 원인으로 치환한 기존 '재난 영화'의 일종일 뿐, 그 이상의 구체적 메세지를 다루려는 의지까진 없는 영화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의 경우는 다르다. 지구 온난화를 타겟으로 천명한 이 다큐멘터리 앞에서 관객들은 긴장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사인을 받는다. 관객들 또한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임을 알면서도 표를 끊고 들어갔다. 이 다큐멘터리의 근본적 가치는 그 부분에서 최대점을 지난다. 좋은 의도에 도덕적으로 올바른 내용에 전달력마저 우수하다. 게다가 정치인 특유의 쇼맨십이라기에 앨 고어는 환경 문제에 대한 열성과 전문성마저 지녔다. 비단 근자들어서 갑자기 뚝딱, 자기를 대표할 의제(議題)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이미 이십여년 간 꾸준히 천착해온 메세지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일관성 - 높은 자리에서나 거기서 내려와서나 - 대중은 물론 로저 에버트를 위시한 평단마저도 일제히 호의적 눈길을 보낼 수 밖에 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5.5.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된다." - 마크 트웨인 -

6. 따라서 '불편한 진실'을 수단의 옳고 그름 차원에서 독해하려는 시도는 그다지 유효한 것이라 볼 수 없게 된다. 전체 환경 문제 안에서 지구 온난화가 지닌 적절한 가중치를 판독하는 작업과는 별개로, 환경을 보호하자는 좋은 말 앞에서 굳이 토를 달아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엘 고어가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는 정치꾼이라 폄하하고 있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그가 없는 대선이 이미 한 번 지나갔고 또 한 번 다가오고 있다. 좋으나 싫으나 조지 W. 부시 또한 이제는 물러날 때가 되어버렸다. 이 대목에서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단순히 정치적 의도로 보기에 일천 회 이상의 환경 강연이란 너무 잦고 꾸준한 이력이다. 대신에 이 작품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부분은 엘 고어와 데이비드 구게나임의 케미스트리다. 즉 강연장에서 엘 고어의 넘치는 에너지를 손실없이 스크린에 이식하기 위한 구게나임의 기가 막힌 기술말이다. 그는 이 작품을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한다. 엘 고어의 열성적 강연 장면이 한 부분을 이루고 엘 고어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독백이 다른 한 부분을 이룬다. 전자와 후자는 여러 챕터로 분할되어 상호 전환되며 흐름을 이룬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는 그렇게 특별하거나 이상한 작법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겠으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다소 유별난 부분이 있다. 바로 그 주인공이 다름아닌 엘 고어라는 것 - 앞서 1문단에서부터 4문단에 이르기까지 누차 언급했듯 그는 ① 다수가 동경하던 완벽한 남자였고,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나빴던 남자였으며, ③ 이제는 돌아와 쓰디쓴 자조로 당신들 앞에 선 남자다. '불편한 진실'은 강연의 사이 사이 삽입된 엘 고어의 독백으로 이 사실을 쉬지 않고 주입시킨다. 정치인으로의 한계와 좌절, 학창시절의 에피소드, 딸과 함께 등반했던 빙하 국립공원, 뜻하지 않은 아들의 사고, 카트리나 현장에서 받은 충격, 대선에서의 고배, 폐암으로 죽은 누이의 이야기 등을 적절히 섞어넣는다. 만약 강연 장면을 잘라내고 나머지 부분만을 하나의 필름으로 모은다면 그건 되레 엘 고어 전기에 가까울테다. 이 고백 중 대부분은 지구 온난화에 대해 바로 알자, 라는 맥락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교묘하게 논지를 강화시키는 촉매로 작동한다. 그의 좌절, 그의 실패, 그의 충격, 그의 패배, 그의 상처 - 이 모든게 '불편한 진실'의 일부요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대중을 설득하는 영리한 방법인 것이다.

7. 이와 같은 접근법은 '불편한 진실'에 있어서 사실상 양날의 칼과도 같다. 엘 고어의 호감을 극대화하여 주제의 설득력마저 높이겠다는 전략적 측면에서는 효과적이지만 다큐멘터리 본연의 논리적인 면을 해친다는 점에서는 한계가 없지 않다. 예컨대 다섯번째 삽입 내용인 대선 패배 이야기와 부시 행정부와 석유 조합의 커넥션으로 혐의를 확장하는 부분은 맥락에서 다소 벗어난다. 또한 아들의 교통사고와 누이의 폐암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논하는 부분도 '환경 운동가'라는 스토리에 맞추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배치된 감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허나 이런 기계적 판단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불편한 진실'에는 존재한다. 예상을 능가하는 효과 - 적절한 호기심과 재미를 충족시키며 흔한 오해를 쉽고 간단한 것부터 하나 하나 반박해가는 앨 고어의 뛰어난 전달력의 결과다. ("지구와 화해하기 위해선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끓는 물에 뛰어든 개구리는 바로 뛰어나옵니다. 들어가자마자 위험을 감지하니까요. 하지만 같은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에 넣고 천천히 온도를 높이면 개구리는 꼼짝 않고 앉아있습니다.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해도 움직일 생각을 않죠. 중요한 요지는 우리 감각도 개구리와 같단 겁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는 경계 태세를 갖추지만 점진적인 변화에는 무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죠. 설사 그 속도가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처럼 간사한 것이 인간의 인지력이라는 사실은 이 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설득의 도구로 비합리적인 요소를 다량 포함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비합리를 감당한 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얘기이기에 망정이지. 안 그래요? (2008/10/19)
 


(註1) 실제로 '퓨처라마(맷 그로닝, FOX)'는 앨 고어가 가장 즐겨보는 쇼라고 한다. 여러 차례에 걸쳐 게스트로 나섰던 것은 물론이고 극장판 에도 출연했다. 서기 3000년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애니메이션에서 20세기와 21세기의 유명인들은 위 그림과 같이 모두 식염수 유리병 안에 머리만 보관된 채로 등장한다.
(註2) 문태훈, "미국의 환경문제와 앨 고어 부통령의 환경문제에 대한 시각", 환경과 생명, 1994년 봄호, 34-43페이지.
(註3) 앨 고어의 환경 인식에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소소한 실천 구호를 벗어나 거시 맥락에 이르면 그 입장은 아무래도 우리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비판적 읽기의 주된 방향은 한 때 초강대국의 환경의제를 앞장서 주도했었고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가지는 시각적 한계가 될 것이다. 단, 이 감상문은 앨 고어의 이력과 다큐멘터리의 설득 기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그 부분은 논외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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