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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The Duchess, 2008)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9.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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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레 이런 이야기를 시대를 넘어 끌어올 때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 자체로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이거나 오늘날에 영감을 주고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거나. 하지만 ‘공작부인’의 조지아나 공작부인(키이라 나이틀리)은 어느 쪽에도 해당 사항이 없어보인다. 그녀는 일생은 물론 기구하지만 그렇게까진 불쌍하다고 할 수 없으며, 시대와 운명의 가혹함에 맞서 싸운다고도 순순히 꼬리를 내려 순응한다고도 보기 어렵다. 솔직히 말해 요즘 상종가를 올리는 키이라 나이틀리에게 매력을 느낄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극 중 조지아나 공작부인의 매력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 같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마음속 연인인 젊은 정치가 찰스 그레이(도미닛 쿠퍼)는 영국 시대극들이 공유하는 훈남 코드를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냥 궁상 덩어리이다. 데본샤 가(家)의 공작 나으리(랄프 파인즈) 역시 당장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 출연해도 손색이 없을 인물이다. 지금 상태로라면 4주간의 조정 기간도 없이 시청자 배심원 92퍼센트 찬성으로 위자료를 물어주어야 할 판.

  조지아나 공작부인을 둘러싼 일련의 소동은 결국 원하지 않는 결혼을 감당해야 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사랑도 없이 ‘제 6대 데본샤 공작’의 생산을 강요하는 야만적 남자와 그것을 빌미로 집안의 신분 상승을 갈망하는 어머니의 틈바구니에서 한 사람의 여성으로 존중받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그녀의 비극을 가장 간명하게 요약한 것일테다. 허나 이를 강요된, 다시 말해 철저히 불가피했던 비극으로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 역시 (어머니의 욕망에 어느 정도 동조를 한 채) 남자가 원하는 아들 생산을 이뤄줄 생각에 순순히 혼약을 올린 것이고 그 결과 신분 상승과 사랑이 함께 따라오는 일거양득을 기대하고 있었다. 실상 트러블이 일어난 것은 순전히 이후 결혼지사의 문제다. 알고보니 데본샤 공작이 여색을 밝히는데 일가견이 있더라, (본디 조지아나의 가문이 남아 생산에 유전적으로 뛰어남에도) 이상하게도 운이 따르지 않더라, 그러다보니 피차 사랑이 급격하게 식고 남들 보기에도 적잖이 쪽이 팔리더라, 기타 등등. 딱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당연히 그녀의 잘못만도 아니다. 하지만 그냥 그 정도다. 그러니 이 작품이 영국 시대극 버전의 '부부클리닉'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씀. 오늘날 우리는 이런 조정 위원회 속 난장 스토리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지 다짜고짜 사회의 문제로 몰아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감독 사울 딥은 "그 시절에 여성의 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깊은 고민을 거쳤"다고 주장하는데, 18세기 영국에 있어 자유와 권리의 불평등이란 여성의 문제이기 이전에 계급의 문제이기도 했다. 감독의 의도는 알겠으나 평생에 걸쳐 상류층의 화려한 사교생활을 누린 그녀가 '뒤웅박 팔자'를 논하는 건 좀처럼 공감하기 어렵다.

 

(2009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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