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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팬이 후크선장이 되기까지: 질투는 나의 힘 (2002)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Re:view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3.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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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피터팬이 후크선장이 되기까지.

1.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이면에 자리한 것은 뜻밖에도 '피터팬' 이야기다. 생뚱맞게도 피터팬이라니...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일단 한 번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다른 비유는 좀처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질투는 나의 힘'은 한국 사회로 시공간을 옮긴 '피터팬' 이야기가 되었고 캐릭터들은 교묘하고도 촘촘하게 엮어져 일대일 대응을 이루게 되었다. 더 이상은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2. 세상 물정에 어두운 영문과 대학원생 박원상(박해일)이 피터팬이라면 그 거울상이 되는 잡지사 편집장 한윤식(문성근)은 후크선장과 짝을 이룬다. 피터팬은 '착한 편'이고 후크 선장은 '나쁜 편'이니 모든 일은 착한 피터팬을 중심으로 좋은 결말을… 그러나 천만의 말씀. 어림 천만도 없는 소리다. 꿈 같은 얘기다. 여기는 동화의 세상이 아니어서 그런 말은 통하지도 않는다. 원상은 어느 날 갑자기 애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는다. 이유인즉슨 유부남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상은 과연 애인을 되찾고 그토록 소망하던 유학길에 오를 수 있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여기는 네버랜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는 어디인가? 태양계 세 번째 행성 지구, 그중에서도 아시아라는 거대한 대륙, 다시 그중에서도 동북쪽 끝에 붙어있는 대한민국이다. 우리가 아는 네버랜드와는 멀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3. 그녀와 헤어지게 된 원상은 우연히 그 문제의 유부남 한윤식이 편집장으로 일하는 잡지사를 알게 된다. 덜컥 그곳에 취직해버리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충동적인 일이었다. 분명 원상이 한윤식에게 느끼는 감정이란 '증오'여야 마땅할 것인데 되려 그 밑으로 들어가다니. 원상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윤식은 능글맞은 중년 남성의 표본이요 재수 없는 직장상사의 전형이다. 이미 한번 원상의 애인을 앗아간 경력마저 있다. 물론 윤식은 자기가 바람피운 상대가 원상의 애인이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원상과 윤식은 다시 한번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를 이룬다. 한윤식은 박원상의 적이다. 한윤식은 피터팬의 적이다. 피터팬의 적은 후크선장이다. 고로 한윤식은 후크선장이다.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 대신 달려있는 쇠 갈고리를 높이 쳐든다. 질투는 피터팬의 힘이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너무 소심하여 속마음을 드러내는데 능숙지 못하다. 

4. 윤식은 잡지사의 편집장이고 남부러울 것 없는 한 집안의 가장이며 따로 애인까지 가지고 있다.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아쉬울 것이 없다는 건 만족한다는 뜻이 아니다. 잘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합리적이지 않다. 직장 상사로 그는 자기 중심적이고 또 까탈스럽다. 동시에 굉장한 기분파로 자기 입맛에 맞을 땐 배알도 없이 헤헤거린다. 분명 사람 진을 홀랑 빼놓는 골치 아픈 유형의 상사임에도 뒤 끝이 없기 때문에 부하직원들은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도덕적이지도 않다. ‘자상한 남편’과 ‘자상한 애인’ 역할을 집과 집 밖에서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 별로 고뇌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이다. 

5. 원상과 윤식은 명확한 대비는 공간적 특수성을 드러내고야 만다. 한국사회라는 특별한 종류의 네버랜드에서 후크선장 윤식은 적응은 해내지만 피터팬 원상은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 - 사실 원상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상대적인 박탈감 속에서 세상에 대한 부적응을 경험하고 있다. 그는 근거리에서 후크선장 윤식을 비켜본다.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삶이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스스로도 별로 거리끼지 않는 눈치다. 사랑했던 여자(내경)도 윤식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여자(수연)도 윤식을 사랑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해를 해야만 한다. 윤식은 똑바로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은데 도무지 그걸 증명할 증거가 없다. 도대체 이게 뭔가. 그가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가치들이 실은 이 사회에서의 ‘문제없는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심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몰래 세상에 대한 부정을 토해내는 것 뿐이다. 

6. 이 사회에서는 피터팬이 후크선장에게 게임이 안되는 존재다. 사회적 능력은 물론 연애에 있어서조차 몇 수 아래인 것이다. 요컨대 후크선장은 이 사회의 '어른'이다. 적어도 원상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후크선장의 때가 묻은 삶은 이 사회가 바라는 삶과 다름이 아니다. 윤식에 대한 원상의 마음이 연적에 대한 '증오' 내지 '복수'라는 일방통행으로 흐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윤식에 대한 부정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어쩌면 윤식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부하직원들이 이상하게도 원식을 싫어하지 않는 것처럼 원상 또한 윤식을 싫어하지 못한다. 윤식은 원상과는 달리 이 사회를 살아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나름대로 찾아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윤식은 바람을 피우지만 "아내랑 애인 양쪽한테 다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연애를 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그의 부인에게 잘한다. 그의 '문학'에 대한 지극히 깐깐한 잣대는 단순한 입발림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냉정하게 적용시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치열함 또한 보여준다. 단면적인 모습이 아닌 입체적인 모습을 이해하게 되면서 원상은 연적 윤식에게 자기도 모르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모순을 마주한다. 

7.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윤식 또한 나름대로 원상의 피터팬스러운 순수함에 마음이 끌린다는 사실이다. 겉으로는 한없이 유약해 보이지만 자신이 해야될 일을 알아서 해내는 싹싹한 모습에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을 느낀다. 이러한 심리는 원상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로 나타난다. 노래방에서 분위기도 못 맞추고 기껏 부른다는 게 신나지도 않는 난데없이 '꽃잎'? 그런데 그런 원상의 모습도 윤식에게는 싫지가 않다. ("저 새끼 귀엽단 말이야…” / "나, 신청곡… 원상이 '꽃잎' 한 번 듣자") 윤식은 원상을 믿고 원상을 챙겨준다. 자기가 원상의 이전 애인과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원상에 대한 각별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원상이 왜 자기 밑으로 들어왔을까, 하는 당연한 생각보다는 되레 약간의 미안함마저 배어있는 눈치다. 둘의 공고한 유대관계는 사회적 통과의례들을 함께 치러나가며 한 단계 더 높은 관계로 나아간다. 원상과 하숙집 딸의 결혼, 그리고 윤식의 장인상. 그 결말은 다음과 같다. 후크 선장은 피터팬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이 한 마디 던진다. (“우리 집에 방이 많으니 들어와 살아도 돼.”) 

8. ‘질투는 나의 힘’은 철저하게 원상과 윤식의 관계를 축으로 한 작품이다. 세 명의 여성 - 원상의 옛 애인 내경(배종옥), 사진작가 수연(배종옥), 그리고 하숙집 딸 혜옥(서영희)은 두 사람의 주변 인물이다. 이 중 원상이 윤식에게 빼앗긴 두 여자를 모두 같은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게 보인다. 이는 내경이나 수연이 상당히 다른 인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같은 인물일 수도 있으며, 구체적인 특정 인물이라기 보다는 이 남성들에게 공통의 범주로 인식되는 여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피터팬 원상이 이 세계의 캐릭터들과 맺어가는 관계에 대한 스케치이며 갖지 못한 권력과 빼앗긴 사랑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 관찰기이다. 그렇기에 원상의 변화는 흥미롭다. 그는 잡지사에서 강자인 윤식에게 복종한다. 반면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세상 경험도 많고 자유분방한, 그래서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지 않은 수연과는 평등한 위치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자신을 헌신적으로 쫓아다니는 하숙집 딸 혜주한테는 기분 내키는 대로 대한다. 이는 네버랜드의 피터팬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현실세계에서 자신이 데려온, 자신보다 정신연령이 높고 감수성이 예민한 웬디와는 어떻게든 일 대 일의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신을 곁에서 늘 도와왔던 요정 팅커벨에게는 함부로 대한다. 

9. 유약했던 피터팬 원상은 윤식이라는 완전배지(完全培地)를 통해서 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남성상으로 진화한다. 즉, 윤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남성으로의 변화다. 원상은 자신을 좋아하는 하숙집 딸 혜옥을 함부로 대하면서도 동정하고, 또 그래서 함께 밤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결국에는 결혼하자는 그녀를 냉정하게 뿌리친다. 실제로 자신의 마음이 닿아있던 수연에게도 냉정하게 대한다. 결말에 이르러 그가 선택하는 결론은 우습게도 '후크선장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사는 것'이다. 문틈 사이로 비춰지던 마지막 씬에서 원상은 그때까지의 어떤 장면보다 밝은 분위기 속으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윤식에 동화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이후 둘의 모습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잡지사를 차렸을지도 모른다. 윤식의 나이가 되었을 때 원상은 지금의 윤식과 닮아있을 것이다. 소녀주의 문학을 격렬히 비판하고 부하직원들을 매섭게 닥달하며 결혼 생활과 연애를 동시에 즐기는 후크선장으로 말이다. 행여 그때쯤 되면 완벽히 후크선장이 되어버린 원상은 싸구려 양주를 좋아하고 약해빠져 보이는 순진한 대학원생의 여자를 빼앗을지도 모르고, 윤식이 과거의 자신에게 그랬듯 마치 피터팬처럼 사회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그 친구를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킬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바로 그 이즈러진 코믹함이 이 작품을 움직이는 힘이다.

 

(2003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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