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사는 세상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보니 한 드라마에서 드라마 PD역을 맡은 송혜교가 열변을 토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우리도 유아틱하게 순정이나 운운말고 미드처럼 쿨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드라마 만들어야 된단 얘기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멍멍이 초본식물 뜯어먹는 소리람. 누누이 얘기하지만 한국 드라마의 문제는 연애의 쿨하고 쿨하지 않음이 아니다. 니들 말마따나 ‘순정’ 배격하고자 ‘욕정’ 그리는 것이 '솔직한 드라마'의 정의라면, 우리에겐 이미 그런 드라마가 팔도강산을 빼곡히 메울만큼 쌔고 쌨다. "클리셰를 깨자"는 그 말 자체가 우리에겐 지독한 클리셰다. 흡사 나온지 20년도 넘은 '흥부 놀부 뒤집어보기' 따위의 구태한 신드롬이 재탕되는 듯, 아! 너무 지루하여 견딜 수 없는 말이야. 진작부터 나오던 포맷이고 진작부터 소비되던 패턴이다. 새삼스럽게 다시 주장할 필요가 없다. 가령 당신들이 예로 든 ‘그레이 아나토미’가 우리나라 드라마와 뭐가 다르냐는 말이다. 기술력, 구성력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월등하지만 겉내용만은 오십보 백보다. 메러디스 그레이와 닥터 쉐퍼드는 단연컨대 미드계를 통틀어 가장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캐릭터들이 아니던가? 우리도 반 년치 제작비를 한 편에 홀랑 쏟아붓고 젊고 재능있는 작가들 드림팀으로 만들어서 일년에 딱 사십분 분량 스물 네편 대본만 사전에 완성하게 하라면 ‘그레이 아나토미’까진 아니어도 ‘그래, 이 아놔 도가니’쯤은 아마 충분히 나오지 않겠나. 이 양반들아,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자빠진건가. 명색이 방송계 현실을 다루겠노라 공언하는 드라마에서, 명색이 PD고 작가라는 양반들이 모여서 한다는 얘기가 고작 칙릿 소설의 철부지 주인공들처럼 '순정에의 강요'만 갈아엎자면 모두 리얼리티가 된다는 궤변이라니. 방향을 잘못 잡아도 단단히 잘못 잡았다. 우리 드라마가 한계에 다다른 이유는 '순정에의 강요' 때문이 아니다. 순정과 욕정의 문제도 아니고 쿨하고 쿨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깊이고 철학이고 윤리고 관용이고 영혼의 문제다. 우리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깊이가 없다. 안쪽의 내밀함을 보여주는 법이 없다. 누구도 교양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나'를 넘어 우리의 영역을 고민하려는 시각이 전무하다. 우리가 되지 못한 '나'들은 대개 겉을 가장하고 부풀리는대만 급급하다. 심지어 철부지 메러디스 그레이보다도 인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 아무리 우리가 교양이 없어도 무방한 사회에 살고 있은들 드라마 속 인물들까지 교양없음을 떳떳히 자랑해서야 되겠는가. 우리 드라마 속 삶의 모습은 하나같이 파장과 영감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는 엷디 엷은 개인사다. 부러 투정하지 않아도 지금 충분히 욕망지향적인데 그걸 돌아볼 반성의 눈을 가지지 못했단 것이 문제란 얘기다. 그 세상에 사는 당신들이 소위 미드에서 배워야할 건 만인이 만인을 공유하는‘그레이 아나토미’의 러브 라인도 아니고 허영과 된장으로만 가득한 ‘섹스 앤 더 시티’도 아니다. 'ER(NBC)'의 뜨거운 인간미다. ‘식스 핏 언더(HBO)’의 날 선 통찰이다. ‘웨스트 윙(NBC)’의 양심과 관용이다. '더 프랙티스(ABC)'의 참된 용기다. ‘보스턴 리갈(ABC)’의 가슴 벅찬 자조다. 'CSI(CBS)'의 직업 철학과 윤리적 자문이다. "웃기지마라! 양키들이 정말 그렇게 사냐?" 뻔한 반박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요는 그들 중 누구는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다. 요는 그들은 적어도 <있음>을 추구해야 한단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헌데 근래 몇 년간 당신들은 미드의 외피만을 벗겨오는데 급급했다. '보스턴 리갈' 앨런 쇼어의 최후 변론에 가슴이 먹먹해져 채널을 돌렸을 때, 우리 드라마에선 재벌 2세와 여배우의 억대 위자료 소송을 놓고 법전 한 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할 것 같은 철딱서니들이 엇갈린 사랑 싸움을 벌였다.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것은 결국 창작자의 對 권력, 對 자본, 對 양심 전쟁임을 역설한 명작 '스튜디오 60 온 더 선셋 스트립(NBC)'의 감동이 무색하도록 방송계를 다루는 우리의 드라마들은 연예 권력간 알력 다툼을 비롯한 이해불가의 해괴한 이야기만 마냥 되풀이하여 소비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쿨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드라마? 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건가? 아니, 지금 니들은 도대체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 건가? (200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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