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로지 (2014) B평

러브, 로지 (Love, Rosie, 2014)

감독: 크리스티안 디터

출연: 릴리 콜린스, 샘 클라플린, 탬신 애거튼, 크리스찬 쿠크

 

 

  80년대를 주름잡았던 팝의 슈퍼 스타 필 콜린스. 그가 슈퍼 멋진 이유를 생각해보자

 

다섯. 슈퍼 밴드 <제네시스>의 드러머와 리드 보컬이었다.

넷. 역사상 단 세 사람의 가수만 가능했다는, 밴드와 솔로 커리어 양쪽에서 1억장 이상의 레코드 세일즈를 올린 장본인이다.

셋. "Against All Odds" (무슨 말이 필요한가?)

둘. "Another Day in Paradise" (무슨 말이 필요한가!)

하나. 슬하 다섯 자녀 중 릴리 콜린스라는 이름의 딸이 하나 있다.

 

*

 

  한낱 엇갈린 연애 감정에 '꼬인 인생'씩이나 운운하는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얄팍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러브, 로지>는 충분히 참아낼 만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 놀라운 기적을 가능하게한 원인을 분석하자면 8할쯤의 기여도는 릴리 콜린스에게 있을 거라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10대 여고생에서부터 10대 딸을 둔 애엄마까지 한결같은 톤으로 일관하는 대범한 연기력조차 이 작품과 그녀의 견고한 궁합을 어그러뜨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한때 예쁜 버전의 제나 루이스 콜맨[각주:1]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게 미안할 정도. 

 

  다만 파스텔 톤 로맨틱 코미디 치고는 꽤 쎈 설정들에 움찔하게 되는 부분은 있다. 주인공 로지(릴리 콜린스)와 알렉스(샘 클라플린)는 물론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동화 수준의 정신연령을 지니고 있는데 반하여, 로지와 알렉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임신, 출산, 약혼, 파혼, 결혼, 이혼, 재혼의 파란만장한 파노라마기 때문이다. 로지와 알렉스가 첫사랑의 순수한 설레임을 끝가지 간직한다는 참도 무리한 설정과 12년이 지나도 내내 뽀송뽀송한 외모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뿐, 사실 '사랑과 전쟁' 수준 스토리라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기도 하다. 필 콜린스는 사랑스러운 따님이 이런 내용의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알까? 물론 당연히 알겠지. 하지만 그 슈퍼 스타 아빠의 입장에서는 입이 열 개여도 뭐라 하실 말씀이 없을 수도 있을 터이다. 그 분이야말로 결혼, 임신, 출산, 이혼, 재혼, 임신, 출산, 이혼, 재혼, 임신, 출산의 화려한 드러밍을 진작에 보여주신 장본인이므로[각주:2](2015/09/29)

 

 

  1. BBC의 TV Show '닥터 후(Doctor Who)'의 클라라 오스왈드 역으로 알려진 영국의 여배우. [본문으로]
  2. 릴리 콜린스는 필 콜린스가 두번째 부인 질 테이블먼과의 사이에서 가진 딸이다. 릴리가 일곱살 때 이혼하였고 3년 후 세번째 부인과 재혼하여 다시 두 아들을 낳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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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를 사랑한 남자 (2014) B평

쇼를 사랑한 남자 (Behind the Candelabra, 2013)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출연: 마이클 더글라스, 맷 데이먼, 로브 로우, 댄 애크로이드, 데비 레이놀즈, 스콧 바큘라



  크리스마스 이브. 빈 방에서 홀로 저녁을 먹으며 함께하기에 적절치 못한 영화들이 많겠지만 스티븐 소더버그의 '비하인드 더 캔들라브라(한국 개봉명: 쇼를 사랑한 남자)'만한 것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고든 게코[각주:1]와 제이슨 본이 사랑을 속삭이는 것보다 크리스마스에 더 보고 싶지 않은 정도라면 아마 '님그강' 정도 밖에 없지 않을까?


  이쯤해서 리버라치의 화려한 쇼맨쉽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공기를 달궈주길 소망했던 것이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음을 고백해야 하겠다. 아마도 나는 무슨 NBC에서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방송하는 '마이클 부블레의 크리스마스 인 뉴욕' 같은 분위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대 위의 리버라치가 아니라 무대 뒤의 리버라치를 조명한다. 널리 알려졌던 그의 모습 대신에 숨겨진 감춰진 연인의 회고를 따라간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리버라치의 젊은 연인 - 스콧 토슨이라는 남자가 바로 이 작품의 원작이 된 <Behind the Candelabra>의 작자.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무게 중심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던 시대적 제약으로 인해 이중 생활을 영위했어야 했다는 부분에 실린다. 극적 흥미를 돋우는 소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리버라치와 스콧의 러브씬[각주:2]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고든 게코와 제이슨 본의 컴비네이션이다!) 암시만으로도 충격이 상당하다. 사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적당한 단어를 찾기도 힘들다.


  전반적으로 스티븐 소더버그의 영화답게 정교하고 단단하다. 그리고 역시 가장 놀라운 것은 두 배우의 연기다. 강인한 이미지가 강했던 70세 노배우가 화려한 쇼 엔터테이먼트의 황제로 분한 것은 놀랍고 또 놀랍다. 마이클 더글라스가 션 헤이즈[각주:3]처럼 웃고 떠들고 노래할 수 있을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맴도는 맷 데이먼의 연기도 훌륭하다. 이 작품에서 맷 데이먼은 소년에서 청년을 거쳐 중년까지 연기하며 얼굴이나 몸매가 크게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방부 상태라고 해도 좋을만큼 내내 그 모습인 슈퍼스타 리버라치의 모습과 극적인 대비가 된다. 흡사 젊은 스콧에게만 자연의 섭리가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연출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하지만 극적인 변화가 결코 시각적이고 피지컬한 요소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관계의 변천과 그 과정에 수반되는 감정의 기복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발산하거나 서서히 감쇠한다. 셀러브리티의 가쉽과 이중생활이라는 밝고 소란스럽고 화려한 요소에 작품이 함몰되어 버리기 쉬운 순간마다 그들의 연기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결국은 이 또한 시간이 사랑을 좀먹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2014/12/24)

 

 

  1. 올리버 스톤의 1987년작 '월스트리트'서 마이클 더글라스가 연기했던 주인공. 이 작품으로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본문으로]
  2. 마이클 더글라스와 맷 데이먼은 스물 여섯살 차이지만 실제 리버라치와 스콧 토슨은 마흔 살차이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NBC의 히트작 'Will & Grace'의 캐릭터 중 하나인 잭 맥파랜드를 연기한 배우. 동성애자의 스트레오타입과 같은 잭 역할로 큰 인기를 끌었고 에미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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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컴퍼니 맨 (2010) B평

더 컴퍼니 맨 (The Company Men, 2010)

감독: 존 웰즈

출연: 벤 에플렉, 크리스 쿠퍼, 토미 리 존스, 케빈 코스트너, 마리아 벨로, 로즈마리 드윗, 크레이그 T. 넬슨



  언뜻 '더 컴패니 맨'은 주주자본주의에 어두운 이면에 대한 설득력있는 우화를 완성한 것처럼 보인다. 주주들을 더 큰 부자로 만들기 위해 회사 구성원을 제물로 바치는 거대 기업의 이야기 - 금세기 들어 이보다 더 무서운 괴담이 또 있을까? 해직당한 후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남자는 그 잘난 MBA 출신이다. 그럼에도 재취업의 길은 요원하다. 심지어 그의 가계가 흔들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퇴직 연금이 짤리는 시간보다 짧다. 그러고 보면 90년대 백인 중산 가정의 신화는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위기감은 세대를 소급하여 올라간다. 30대 중반의 세일즈 맨(로버트 워커, 벤 에플렉), 50대 6두품 시니어 매니져(필 우드워드, 크리스 쿠퍼), 50대 진골 임원(진 맥클러리, 토미 리 존스)로 나누어 교차 접근하는 방식은 좋은 선택이었다. 절망의 근원을 입체적으로 탐색할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만 선을 정해놓은 듯한 밋밋함이나 대책없는 낙관주의는 조금 아쉽다. 치열해져야 하는 순간 머뭇거리는 태도가 작품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느낌이다. 휴먼 드라마도 아니고 블랙 코미디도 아니고 블록 버스터도 아닌 '새마을 금고'적 영역에 머물며 장르 또한 모호해졌다. 연출 및 각본을 맡은 이가 다름 아닌 존 웰즈임을 상기하자면 아쉬움은 더 커진다. 그 다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답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브레이크스루가 없는 결말은 해피 엔딩이라기보단 아마겟돈을 간신히 며칠 뒤로 미룬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준다. 관대한 부자 몇 명의 사적인 자비 실현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고, 지식 정보 중심으로 재편된 세상에서 다시 무조건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건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그 지점에서 멈춰버린 것이 이 작품의 한계다. 논픽션처럼 철저한 분석과 고발을 행할 수도 없음은 이해하지만 픽션 답게 변칙적 반격 또한 시도해보지 못했다는 부분이 아쉽다. (201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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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긴 어게인 (2014) B평

비긴 어게인 (Begin Again, Can A Song Save Your Life?, 2013)

감독: 존 카니

출연: 마크 러팔로, 키이라 나이틀리, 애덤 리바인, 헤일리 스테인펠드, 제임스 코든, 캐서린 키너, 씨 로 그린


 

  가장 먼저 들었던 의문은 존 카니라는 작자의 나이다. 음악과 비즈니스를 막연한 대립항으로 몰고가는 설익은 치기와 지뢰처럼 배열된 오글거리는 대사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중학교 2학년 아니면 3학년이 분명한데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헌데 다시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다. 이 아일랜드 남자가 8년 전에 '원스(Once, 2006)' 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이 아니었냐는 말이다. 그럼 그때는 일곱 살 아니면 여덟 살이었다는 얘긴데, 사실이라면 조금 무서운 일이다.


  썩 잘 만든 작품은 아니다. 보통 뻔하면 이상하지는 않기 마련이나 이 작품은 뻔한데 이상하기까지 하다. 생각보다 좋은 부분을 찾아내기가 훨씬 힘들다. 처음 30여분 동안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와 댄(마크 러팔로)의 만남을 관점을 바꿔가며 반복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식상한 것보다는 그때마다 그레타의 지하철 노래를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 괴로웠다. 그 칙칙폭폭 노래가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댄의 프로듀서로의 감각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그가 뒷골목 소극장 주인이 아니라 음반 업계의 네임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한 번 의구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어보인다. 드물게 산뜻하고 활기 넘치는 중반 이후 도심 속 쌩 라이브 녹음 장면의 연출은 괜찮은 편이지만, 이내 그레타의 전 남친 데이브(애덤 리바인) 이야기와 뒤섞이면서 다시금 눅눅하고 피로해지고야 만다. 물론 그 파국에는 애덤 리바인의 요한묵시록급 연기도 한 몫을 한다. 노래하는 그는 섹시하지만 연기하는 그는 조금도 섹시하지 않다.


  새롭지 않음이 치명적인 결함은 아니다. 나이브한 세계 인식도 때로는 필요한 위로일 수 있다. 아름다운 영상과 감성적인 노래의 결합이 즐거움을 준다면 그 또한 훌륭한 상품의 요건이요 영화로의 가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의 속성이 등장 인물들의 태도와 혼선을 빚는다면 그건 문제의 여지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가령 댄과 그레타는 꼭 무슨 거대한 불의에 맞서 통쾌한 한판 역전승을 일궈낸 하이스트 무비의 주인공들 같은 태도를 보이는데, 그것은 그들이 레코딩 비용 및 마케팅 방안을 마련한 방법과 상당히 모순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이러한 개운치 않은 면모는 이 작품을 둘러싼 상황과 관련되어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뉴욕으로 온 원스'라는 과감한 선언이 예고하는 바와는 달리, 이 작품은 존 카니가 미국으로 건너와 헐리우드 스텝들의 지원아래 A급 개런티 배우들 플러스 인기 팝스타를 내세워 만든 신작이기 때문이다. 항상 강조하지만 상업적인 건 죄가 아니다. 다만 그 전술에 제 발 저려 구질구질하게 구는 건 잘못이 맞다. (201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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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스톱 (2014) B평

논스톱(Non-Stop, 2014)

감독: 자움 콜렛 세라

출연: 니암 리슨, 줄리안 무어, 미셀 도커리, 스쿳 맥네이리, 네이트 파커, 코리 스톨, 라이너스 로체



  논스톱은 특이한 작품이다. 설정만 놓고 보면 버스에서 비행기로 무대를 옮긴 버전의 '스피드(쟝 드봉, 1994)'를 기대하게 하지만 긴박감이나 몰입도에서 저 대단했던 폭주 버스의 전설에 견줄 결과물은 아니다. 멈출 수 없는 버스와 비행기 중에 어느 쪽이 더 위험하느냐를 단순 비교하자는 건 아니나, 비행기 쪽이 더 루즈하다는 사실에 당혹하지 않을 재간은 없다. 뭐랄까. 큰 맘 먹고 해외직배송 상품을 주문했더니 다음 날 배송추적에 '우체국택배'가 뜨는 느낌이랄까.


  논스톱의 실패는 캐릭터의 실패에서 출발한다. 리암 니슨이 연기한 주인공 (전직 경찰이자 현직 항공 보안 요원) 빌 막스는 '테이큰(피에르 모렐, 2008)'의 전직 요원 브라이언 밀스의 노골적으로 재탕처럼 보이지만 깊이나 입체적인 면모에 있어 훨씬 얄팍하고 부실하다. 주인공을 복잡한 사연의 소유자로 꾸며내려는 최근의 유행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나, 이렇듯 중심 사건의 전개와 큰 연관성이 없는 경우에는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킬 뿐이다. 첫째, 빌이 과거에 뉴욕 경찰이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현재 덫에 걸린 상황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거니와 전직 경찰이었단 사실이 어떤 계기로 작용하거나 상황을 완화 혹은 악화시키지도 않는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현직 항공 보안 요원의 5할 이상은 전직 경찰일테니 특별한 배경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둘째, 과거 백혈병으로 어린 딸을 잃은 기억을 안고 살아간단 사실도 마찬가지다. 마침 승객 중에 (부모 없이 혼자 여행길에 오른) 어린 여자아이가 있어 억지로 빌의 상처에 대입시키려고 애쓰지만, 이 상황을 해결해야한다는 의무감과 아이를 살려야겠단 의무감의 방향성이 정교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사실 '폭탄 실은 비행기'라는 설정이 지나치게 '모 아니면 도'격이라 그런 부분을 살려내기도 어렵다. 물론 그의 나이로 볼 때 다소 어색해보이는 부분도 없지 않다 (리암 니슨이 올해 한국 나이로 63세니 빌 막스가 어림잡아 60세의 인물이라고 보더라도 5~7세 사이의 딸을 잃은 것은 가까운 과거의 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보조 캐릭터들의 난맥도 한 몫을 한다. 명색이 무대가 국제선 비행기임에도 기장과 부기장, 승무원 두 명을 포함한 승객 50명 남짓이 등장 인물의 전부인 이유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택과 집중으로 그 중 몇몇 인물을 눈에 띄게 만들고 역할을 부여할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당혹스럽게도 정작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도록 예정된 인물들에서도 개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무색무취 승무원 낸시(미셀 도커리)를 비롯하여 (그녀의 약간 귀찮은 듯한 표정은 한가로운 귀족집 따님을 연기할 때는 장점이었지만 이렇게 서비스직 종사자로 출연하는 경우 문제가 없다고 못하겠다) 우왕좌왕하다가 변죽만 울리고 마는 현직 뉴욕 경찰이자 오늘은 그냥 승객 오스틴(코리 스톨),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 이유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맹한 아줌마 승객 젠(줄리안 무어)까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총체적 문제다. 그 외 나머지 단역들이야 언급할 가치조차 없고 엑스트라들은 정말 구경 나온 사람들처럼 보인다. 상황이 이러하니 '탑승객 전원이 용의자'라는 강렬한 카피에 부합하지 않는 밀실 트릭의 부실함도 당연한 귀결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느낌의 작품은 80년대 액션 영화를 연상하게 한다. 아무리 화려한 영상으로 치장해도, 스마트폰과 유투브의 시대임을 거듭 천명해도, 그 본질의 여전한 묵은 내만큼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201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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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자의 아내 (2009) B평

시간여행자의 아내 (The Time Traveler's Wife, 2009)

감독: 로베르토 슈벤트케

출연: 에릭 바나, 레이첼 맥아담스, 알렉스 페리스, 론 리빙스턴, 미셀 놀든



  이 작품의 원작자를 비롯해 영화화에 관여한 사람 중 누구도 공포물을 만들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그렇다 - 공포물이다. 상식에 비추어 납득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분명 존재하고 그 중의 일부는 소름돋는다는 말로 밖엔 표현이 되지 않는다. 뭐 이런 로맨스 영화가 다 있나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덕분에 무더운 여름밤을 서늘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이를 기념하고자 '<시간여행자의 아내> 끔찍한 순간 10선'이라는 리스트를 정리하여 남기고자 한다. [스포일러 얼랏: 이 작품을 굳이 감상할 계획이 있는 분들은 '뒤로' 버튼을 누르시길 권한다]


10위. 배드타임 스토리

  도서관에서의 첫 만남 장면은 괴팍한 타임라인 장난질의 결과다. '성인이 되고 난 다음의 클레어(레이첼 맥아담스)가 헨리(에릭 바나)를 처음으로 다시 만나는 시점에서 헨리는 아직 어린 시절의 클레어를 만나기 전의 헨리'라는 천인공노할 설정은 좌우 동시 편두통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어렸을 적의 클레어에게 탬퍼링(사전 접촉)을 해두었던 덕에 밥 얻어 먹고 차 얻어 마시고 집까지 따라가 첫날 밤을 보낸다는 하이-패스적 진행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다. 


9위. 데드 스페이스

  저토록 사랑스러운 레이첼 맥아담스에게 저리도 무시무시한 몸매라니. 하나 하나 뚜렷하게 보이는 갈비뼈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마디 마디 도드라지게 드러나 '데드 스페이스'의 수트를 연상케하는 척추뼈는 정말……. 


8위. 웨딩 크레셔

  이유야 어쨌든, 결혼식 날 신부가 겪어야 할 일이라기엔 농이 과하다. 전설의 그 영화 '랩탑(The Notebook, 닉 카사베츠, 2004)' 이후로 이렇게 보는 이를 진을 완전히 뽑아가는 작품 오랜만이다.


7위. 앨바 천국

  헨리와 클레어의 딸 앨바, 바로 그 10살 버전의 딸이 5살 버전의 딸에게 결말을 스포일링한다는 놀라운 설정이 7위다. 딸 앨바는 헨리와 달리 자유자재로 시간여행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장.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9살 버전의 앨바와 8살 버전의 앨바와 7살 버전의 앨바와 6살 버전의 앨바, 그리고 11살 이후의 수많은 앨바들이 시공을 넘어 간섭해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은가? 왜 하필 10살의 앨바와 5살의 앨바만 같이 만나 논다는 말인가!


6위. 터미-네이키드

  시간여행 이후 나체로 나타난다? 옷은 두고 몸만 가기 때문에? 뭐,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이 남자가 수시로 어린 클레어 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공원에서 나체로 아이들 앞에 나다니는 사람들이 '시간 여행자'를 자처한다고 생각해보라. 끔찍한 일이다. 이런 영화가 PG-13(한국에선 12세 관람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5위. 어바웃 타임

  이유야 어쨌든, 유산을 다루는 방식이 좀 지나치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야 충분히 알겠으나, 초자연적 유산에 고집스럽게 자연적 임신으로 맞서는 대책없음이 좀 딱하다. 마음이 아프다가도 계속해서 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 시도하니 끝내는 오싹한 느낌 마저 든다. 구글 검색을 해보면 임신부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포험, 블로그에서 이 관람을 삼가해야 할 목록마다 이 작품이 빠지지 않고 올라가더라. 함께 등재된 영화로는  '칠드런 오브 맨(알폰소 쿠아론, 2006)''포가튼(조셉 루벤, 2004)', '엑소시스트(윌리엄 프레드킨, 1973)'등이 있다.


4위. 메디칼 미라클

  어찌되었던 이 부부의 생식력은 말 그대로 의학적 기적에 가깝다. 시간 여행이 각종 우주 입자 및 방사선에 노출이 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지나치게 건강한 이 남자까진 그렇다고 치자. 사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때마다 매번 임신하는 클레어다. 헨리의 담당의 켄드릭 박사가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쪽도 남편 헨리가 아니라 부인 클레어가 아니었나 싶다. 그것이 '시간 여행 유전자'를 연구하는 것보다 진짜 의사가 해야 마땅한 일이기도 하고.


3위. 그레이스 바섹토미 (부제: 에릭 바나나)

  거듭된 유산에 힘들어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정관수술을 받았다고? 그 배려심이 뭉클하기는 커녕 소름이 쫙 돋는다.


2위. 그레이스 바섹토미 II (부제: 핫 칙? 망 칙!)

  이 작품이 유난히 집착하는 '그 수술' 직후 헨리가 시간 여행으로 도착하는 곳이 이제 막 18살이 된 클레어 앞이라고? 어기적거리며 다가가 기어이 반 강제로 키스한다고? 그 타이밍에? 로맨틱하기는 커녕 소름이 쫙 돋는다. 


1위. 그레이스 바섹토미 III (부제: F*** 투 더 퓨쳐)

  그래놓고 다시금 정관수술 무효화를 시전하는 트위스트는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다. 불안한 예감에 설마 설마 하다가 정말 설마가 사람 잡아 정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일라이(앨버트 휴즈&알렌 휴즈, 2010)', '하이 텐션(알렉상드르 아자, 2003)',' 핸콕(피터 버그, 2008)', '퍼펙트 스트레인져(제임스 폴리, 2007)', '아이덴티티(제임스 맨골드, 2003)', 그리고 '넘버 23(조엘 슈마허, 2007)'의 반전을 다 합쳐도 이 반전은 못 이긴다. (201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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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의 신 (2011) B평

대학살의 신(Carnage, 2011)

감독: 로만 폴린스키

출연: 조디 포스터, 케이트 윈슬렛, 크리스토퍼 왈츠, 존 C.라일리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어른들 스스로 더 복잡하고 정교하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의 싸움은 불과 몇 분만에 끝났다. 허나 어른들의 싸움은 오후 한나절을 모두 잡아먹는다. '싸움'을 묘사하는 수천가지 표현과 '폭력'을 정의하는 수만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어떤 잣대로도 이 어른들의 싸움이 보다 성숙하고 원만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부모들이니까.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 문제 앞에 이성적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들 부부들은 심지어 자기 새끼를 끔찍히 사랑하기에 이 난장을 이어가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네 사람 중의 세 사람은 제 자식 역시 망나니라는데 동의한다. 나중에는 부부끼리 같은 편이 되어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결국 싸움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과 이후 싸움을 지속케한 동력은 별개의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합의는 품위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각각 경멸, 냉소, 위선, 위악으로 받아들였다. 상대를 주시한 채 빙글빙글 돌며 호시탐탐 상대를 파고들 기회를 노리는 이 어른들의 모습은, 감정에 휘둘렸던 아이들보다 어떤 면에서 더 동물적이기도 했다. 상황이 일단락 될 법한 대목의 꼬투리를 다시 물고 늘어짐으로써 액트와 액트를 연결하는 이 작품의 다소 작위적인 전개(물론 원작이 연극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것이겠으나) 역시 이런 성격과 맥을 함께 하는 부분이 있다.


  따지고 보면 전형적인 로만 폴란스키 소재이기도 하다. 데뷔작 '물 속의 칼(1962)'를 비롯하여 초창기 그의 장기는 한정된 공간 안의 한정된 인물들 간의 힘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연극은 노장에게 더 없이 잘 어울리는 컨텐츠였고, 반대로 그 역시 이 작품을 은막 위로 가장 잘 옮길 수 있는 현역 감독이기도 했다. (201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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갬빗 (2012) B평

갬빗 (Gambit, 2012)

감독: 마이클 호프만

출연: 콜린 퍼스, 카메론 디아즈, 알란 릭맨, 스탠리 투치, 톰 코트니



  애매하다. 기존의 하이스트 무비들과 비교할 때 어떤 차별성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하긴 그래. 어떻게 세상 모든 영화가 참신하고 독창적일 수 있겠어? 그냥 매년 쏟아져 나오는 평범한 코미디 중의 하나라고 치면 흥분할 일도 아니지.


  허나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 작품의 셀링 포인트가 '감독: 마이클 호프만'보단 '각본: 코엔 브라더스'에 가깝다는 점이 문제다. 그냥 '콜린 퍼스, 카메론 디아즈의 사기극이다'라고 할 때의 기대치와 '콜린 퍼스, 카메론 디아즈의 사기극인데 각본을 코엔 브라더스가 맡았다'라고 할 때의 기대치는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다. 물론 코엔 형제라고 항상 범상치 않은 결과물을 내놓으리란 법은 없다. 당연하다. 과거에도 몇 번은 평작에 가깝다 말할 수 밖에 없는 작품들이 있었다. 범생 이미지 배우의 망가지는 코미디에서 썩 좋지 않았던 경험이 있고  ('더 레이디킬러스',2004), 대개는 작품의 평가가 여배우 연수입 규모와 반비례했던 기억이 있다 ('참을 수 없는 사랑', 2003). 유감스럽게도 '갬빗'은 위 두 가지 불안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콜린 퍼-어스는 톰 행크스보다 더 범생스럽고 카메론 디아즈는 아직까지도 편당 출연료에서 매년 1위를 다투는 특 A급 여배우다. 그리고 예감대로 징크스는 깨지지 않는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모든 계량화된 평가 지표를 종합해보면 코엔 형제가 Writer Credit에 이름을 올린 역대 작품들의 목록(조엘이 감독하든, 같이 감독하든, 남이 감독하든 다 합쳐서)의 가장 아래 자리를 당분간 이 작품이 차지하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언뜻 혼란스럽다. 근래에 우리는 형제 중 하나가 성 정체성을 확립하고 공력의 궁합이 어그러진 슬픈 선례를 목도했던 바 있지만 이들 형제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이다. 이 명석한 콤비가 감각을 잃어버렸다기에는 이 다음 작품이 꽤, 상당히, 너무, 매우 훌륭하다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 2013). 그렇다면 감독을 맡은 마이클 호프만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기엔 아무리 뜯어 봐도 각본이 애시당초 폐급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남는 가능성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첫째, 코엔 형제가 마이클 호프만에게 개인적 원한이 있었던 경우. 둘째, 마이클 호프만이 코엔 형제의 약점을 잡은 경우. 셋째, 마이클 호프만이 ‘코엔 브라더스’라는 휘황찬란한 간판을 말 그대로 '갬빗'으로 삼아 우리 관객들의 등을 치는 경우.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세 번째가 가장 마음에 든다.


  사실 이 작품에는 딱한 프로덕션 이력이 숨어있다. 거장 로날드 님의 1966년 작품을 리메이크하려는 계획이 15년 가까이 치이고 치여서 폭탄 돌리기를 하듯 넘기고 넘기다 마이클 호프만과 코엔 형제에게 돌아온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인정하다시피, 이런 이력을 갖고 만들어지는 경우 좋은 결과가 나오기가 대단히 어렵다. 수많은 아류를 낳은 클래식을 리메이크하며 그 아류의 아류같은 느낌 밖에 내지 못했다는 부분은 상당히 안타깝지만, 산만하고 허술한 전개와 게으르고 조악한 유머 그 어디에도 변명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이 작품에서 드물게 일말의 정교함이라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는 마흔이 넘은 카메론 디아즈의 여전히 어메이징한 청바지 핏 밖에 없어 보인다. (201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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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 B평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 2014)

감독: 웨스 앤더슨

출연: 랄프 라인즈, 틸다 스윈튼, 토니 레볼로리, 시얼샤 로넌, 애드리안 브로디, 윌렘 데포, 웨드워드 노튼, 빌 머레이, F. 머레이 아브라함, 주드 로, 레아 세아두



  질문: 3D 텔레비젼과 웨스 앤더슨의 공통점은? 

  정답: 2차원 평면에 3차원 공간을 입힌다. 다만 진정한 3차원 입체상의 구현했다기 보단 그렇게 보이게끔 몇 개의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층을 낸 것에 가깝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3중 액자에 담겨진 4단 스펀지 케이크다. 우스꽝스러운 사탕 인형 장식은 순방향과 역방향을 오가는 시간축 롤러코스터에 맞물려 나란히 배열된 입체 액자 안에 공존한다. 위에서 내려다 보아도, 정면에서 보아도, 90도 측면에서 보아도, 또 그 반대쪽에서 보아도 독특하고 기괴하되 아름다우며 따뜻하다. 불규칙하기에 규칙적이고 논리적이기에 비논리적이다. 유머는 비틀렸으나 그렇다고 밉진 않고 냉소는 날카로우나 온기를 잃지 않는다. 선한 인물은 사랑스럽고, 악한 인물마저 사랑스러우며, 아가사는 완전 사랑스럽고, 시얼샤는 끝판 사랑스럽다.


  이야기의 힘으로 보나 구성의 기술로 보나 이 작품은 이 시대의 영화들을 구속하는 평균적인 중력으로부터 놀라울만큼 자유롭다. 웨스 앤더스 특유의 집요하고 강박적이며 변태적인 세공법도 여전하다. 다만 그간의 작품들이 지극히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만화경으로 수렴하기에 가능했던 마법이었다면, 20세기 유럽 역사의 알레고리로 확장하고 발산하는 이 장엄하고 가장 덜 개인적인 작품의 완성은 앤더슨 자신에게도 상당한 모험이자 도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는 제법 질릴만큼 반복되었음에도 그의 인장이 아직 유효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20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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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2014) B평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Dallas Buyers Club, 2013)

감독: 장 마크 발레

출연: 매튜 맥커니히, 제니퍼 가너, 자레드 지토, 스티브 잔, 데니스 오헤어, 그리핀 던



  좋은 영화에서 좋은 점을 찍어 내는 건 쉬운 일이다. 어려운 건 좋은 영화에서 나쁜 점을 (굳이) 찾아내는 일이다. 훌륭한 작품에서일수록 이 작업이 만만치 않아진다. 물론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오스카의 선택이 아니어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다. 다만 도드라지게 눈부신 열연 속에 껄끄러운 부분들이 묻혀 지나가고 있음 역시 간과하기가 어렵다.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의 경우, '흥미로운 과거 사건의 단순 재현'과 '현재로의 의미로운 소환' 가운데서 어정쩡한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은밀한 틈새 중의 하나는, 진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 인물들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과거를 재현하는 복원된 주인공에 맞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대한 부분이다. 


  첫째, 레이언. 당시의 에이즈가 동성애와 별개로 다룰 수 없는 주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가상 캐릭터의 삽입은 조금 미묘한 부분이 있다. 그가 동성애자인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자레드 지토의 소름돋는 연기와는 별개로 레이언이 어떤 왜곡된 스트레오 타입(등장에서부터 퇴장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이라는 사실이 문제다. 이는 주인공 론의 태도를 해석하는 데 있어 오해의 소지를 낳는다. 극단적 동성애 혐오자였던 남부 출신 사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을 열어간단 식의 해석은 쉽고 간편하다. 그러나 론의 시선은 동성애와 이성애를 동등한 사랑의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섹슈얼 오리엔테이션을 넘어서는 개인적 친분(마치 '내가 아는 꽤 괜찮은 호모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으로 설명될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다. 그게 전부다. 아무리 배경이 80년대라지만, 이 변주는 우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오늘날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이런 방식의 인물 묘사가 정말로 필수적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둘째, 닥터 이브. 한때는 첩보 여신이었지만 어느새 아줌마가 되어 버린 제니퍼 가너의 모습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가상의 여의사가 지닌 한없는 나이브함이다. 물론 닥터 이브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이 이야기가 '단신으로 FDA에 대적했던 한 사내의 봉이 김선달식 기행' 수준을 넘어서는 타당한 문제 의식을 갖출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섹시한 마초 카우보이의 단순 무식한 삶의 추동에 쉽게 감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묘사 방식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젊고 착하고 헌신적인 그녀가 늙고 권위적이고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스 닥터 세바드(데니스 오헤어)와 대립각을 세우며 문제를 이분법의 영역으로 몰아버리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안전한 설정인가? 물론 그렇다. 그럼 좋은 설정인가? 그렇게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201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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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캅 (2014) B평

로보캅 (Robocop, 2014)

감독: 호세 파딜라

출연: 조엘 킨나만, 게리 올드만, 마이클 키튼, 사무엘 L. 잭슨, 애비 코니쉬, 마이클 K. 윌리엄즈



  리메이크 프로젝트가 해피엔딩이었던 적이 있었나? 대개 그랬지만 특히 2000년대 들어서 말이다. 전량 리콜된 콜린 파렐 주연의 그 영화를 비롯하여 포세이돈을 진노하게 만든 그 영화, 정말 지구를 멈추게 만든 그 영화 등등. 물론 순전히 아름답게만 남아있는 추억이 괘씸죄를 묻게 되는 원인이 되는 면도 없진 않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실패는 기술적 진보만큼의 비기술적인 부분의 완성도의 퇴보를 이루어내 작품의 정확한 질량을 보존해내는 제작자들의 탁월한 감각에서 기인한다. 초정밀 저울을 가져다 놓고 달아도 이처럼 칼 같이 맞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2014년 버전의 로보캅은 썩 무난하게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다. 전반적으로는 불만족스럽다. 하지만 로보캅을 마치 기술과 감성이 결합된 하이엔드 모바일 디바이스처럼 바라보는 영화의 시각만큼은 독특하다. 원작의 시대에는 결코 생각하지도 못했던 흥미로운 방식으로 그만큼 시대가 변화했음을 방증한다. 사고 후 알렉스 머피가 인간으로의 행복한 시절의 꿈 속에서부터 깨어나 거치대에 도킹되어 있는 반 로봇 상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Fly Me to the Moon' 장면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장면을 위시하여 컴퓨터 그래픽스의 눈부신 성과에 있어서는 전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올모스트 휴먼(Almost Human)'과 '올모스트 머신(Almost Machine)' 사이에서의 방황을 묘사한 부분도 그 정도면 괜찮다. 올드 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소녀캅이 오리지날의 박력캅보다 그래도 섬세한 맛은 있다.


  반면 액션씬은 전반적으로 함량 미달이다. 충격적이고 강렬한 폭력 묘사로 물의를 빚었던 과거에 비하면 PG-13 혹은 12세 관람가정도로 타협한 것은 직무 유기에 가까운 수준이다. 중국 공장에서의 퀄리티 컨트롤 장면과 복수의 마약 갱단 소탕 장면 모두 캐쥬얼한 비디오 게임의 느낌 밖엔 나지 않아 아쉽다. 이것은 그만큼 작품의 근본 방향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원작의 로보캅이 하드-보일드한 영상 속에서 기술 문명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로 기능하는 면이 있었다면, 2014년의 로보캅은 차라리 (여성가족부의 표현 그대로 빌자면) '일과 가정의 양립'을 추구하려는 한 사람의 가장에 가깝게 그려진다. 어쩌면 연관 영화는 '웨더 맨(고어 버빈스키, 2005)''패밀리 맨(브렛 래트너, 2000)'라고 봐야 옳을런지도 모른다. 저 찬란하게 빛나는 신상 블랙 로보-수트만 아니라며 말이다. (201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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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 B평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

감독: 벤 스틸러

출연: 벤 스틸러, 크리스틴 위그, 숀 펜, 아담 스콧, 셜리 맥클레인, 캐서린 한, 패튼 오스왈트 



  흥미로운 것은 기복이다. 정말 좋은 장면들과 정말 후진 장면들이 번갈아 등장한다. 뭐랄까, 한 사람이 연출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한 '클라우드 아틀라스'적 순간들이 종종 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배합의 비다. 감탄스러운 부분들이 대개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데 반하여 호흡을 끊어먹는 부분들은 총체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1점 따고 2점 거저 바치는 플레이의 연속이다. 2점을 따면 3점을 거저 내준다. 밑지는 장사다. 그 태풍의 눈에 자리한 것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지우는 전략이다. 한두 번은 매력적이지만 과도한 반복이 오히려 지루함과 혼란스러움만을 남긴다. 


  이토록 거창한 모험의 동기가 실상 분명치 않다는 점은 당황스럽다. 특히 월터가 필름 원본을 찾으러 직접 가야한단 설정을 너무도 당연한 듯이 밀어붙이는 부분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확히 말해,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이 작품은 네거티브 필름 담당자에게 사진이 (특히나 그 잡지가 장렬하게 폐간되는 경우 마지막 표지 사진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누차 강조할 뿐, 담당자라는 이유로 그 사진을 노가다로 찾으러 떠나는 과정의 설득력 부족에 대해서는 철저히 시치미를 떼고 있다. 사진 작가가 아무리 괴짜라한들 소재 파악조차 안되는 작자를 다짜고짜 찾아가서 만날 생각부터 하는 게 상식적인지 의문이다. 필름 원본을 전달받지 못했다고 (전달받은 소포 안에서는 못 찾겠다고) 잡지사에 털어놓을 수 없는 이유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건 본인의 과실이 아니다. 그리고 본인 책임이건 아니건 한 달 후에 그는 해고될 처지가 아닌가! 그럼에도 월터는 비장하게 원정길에 나선다. 도대체, 왜, 그걸, 댁이?


  물론 때로는 그런 것들을 코미디 영화 특유의 과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마치 전 남편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제니퍼 애니스톤이 하고 많은 자동차를 두고 기어이 자전거를 택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처럼. 하지만 어떤 분명한 상징과 목적과 의도가 있다고 해서 결코 그에 이르는 과정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는 것이 마냥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쩌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마치 하이 패스라도 달아놓은 듯 그런 어색한 순간들을 정면 돌파하기에 더더욱. 벤 스틸러가 아무리 좋아도, 코미디 액트리스 중에서 크리스틴 위그가 넘버 원이라고 생각해도, 이 작품이 종래 드러내고자 하는 정서에는 십분 공감함에도, 마냥 후한 점수를 줄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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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 위드 어 챈스 오브 미트볼스 2 (2013) B평

클라우디 위드 어 챈스 오브 미트볼스 2 (2013)

감독: 코디 캐머런

출연: 빌 헤이더, 안나 패리스, 닐 패트릭 해리스, 앤디 샘버그, 윌 포테, 테리 크루즈, 제임스 칸



  한때는 한국의 빌 헤이더가 되고 싶었다. 한국의 맷 그로닝이 되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고 한국의 아론 소킨이 되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음을 이해하여 너무 매섭게 따지지는 마시길. 꾸라고 있는 것이 꿈이고 돈 드는 것도 아니니.


  국내 극장에서 빌 헤이더를 만날 기회라는 게 많지가 않다. '나이트 앳 더 뮤지엄 2 (숀 레비, 2009)'에서 잠깐, 혹은 '맨 인 블랙 3 (베리 소낸필드, 2012)'에서 조금, 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자면 남은 건 애니메이션에서의 보이스 액팅이 대부분이다. 그 중 소니 픽쳐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히트작 '클라우디 위드 어 챈스 오브 미트볼스'는 그의 기상천외하고 능청스러운 목소리 쇼를 한 편 온전히 누릴 실로 드문 기회다. 괴짜 과학도 플린트 락우드! 더 알맞은 캐스팅은 상상할 수도 없겠다. 게다가 '베이비 브랜트'역의 앤디 샘버그와 '체스터 V'역의 월 포테까지 함께 한다. 한때의 즐거웠던 토요일 새벽을 추억하게 만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라인업이다([각주:1]).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을 오리지널 그대로의 목소리로 만나는 것조차 한국에서는 쉽지가 않은데, 상영관의 대부분이 더빙판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안되는 자막 상영하는 곳과 시간을 맞추느라고 개봉 후 보름 동안 눈물을 머금고 발만 동동 굴러야만 했다.


  우리말 더빙으로 상영관의 대부분을 도배하는 것이 어떤 사업적 근거에 기인한 결정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체 개봉관의 9할 이상이 더빙 상영을 하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 싶다. 다음 타자는 디즈니/픽사의 '플레인즈(클레이 홀, 2013)'인데 죄다 더빙이고 자막 상영을 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괴담마저 돈다. 아시다시피 우리말 더빙을 둘러싼 잡음은 진작에 위험 수위를 넘어선지 오래다. 협소한 성우 시장에 그나마 보이스 액팅이 전혀 안되는 소위 아이돌 스타들을 마구 때려 넣어 개판 5분 후가 되어버린 탓에 더 이상은 지적하기도 피곤할 정도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우리말 더빙의 질적 문제 이전에 이처럼 애초에 선택권을 앗아가버리는 일이 잦다. 오리지날 캐스팅이 묵지빠로 갈라 먹은 것이 아니라 캐릭터와 배우의 상성을 고려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할 때, 원작 그대로 감상할 권리 또한 엄연히 보장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방학 맞은 어린이들을 위해서라고? 어린이 영어 시장이 2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는 나라에서 그런 주장을 하기에는 너무 궁색하지 않은가!

 

*

 

  '속편의 법칙'이라는 관점에서 이 작품은 아주 정석적이다. 그러면서도 꽤 영리하게 잘 기획되었다. 전작에서 완전하게 해결된 줄 알았던 일이 미묘하게 틀어지면서 새로운 모험으로 연결되는 과정이 전형적이지만 매끄럽게 잘 다듬어져 있다. 새로운 악역을 등장시키는 등 판을 키우는 전략 또한 본연의 주제와 정서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말끔하게 설정되었다. 디즈니/픽사와 드림웍스의 양강 구도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골적으로 캐릭터 코미디에 정조준을 한 작품이지만 기술적 진일보도 이제는 놀라운 수준에 이르렀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리는 코믹한 풍경을 그려낸 전작의 연출은 단순히 원작 동화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의존하는 면이 컸지만, 이번에는 플린트네 섬마을 전체를 하나의 새로운 총천연색 음식 정글로 재창조해내는 장관을 보여준다. 작고 재치있는 아이디어와 크고 화려한 기술 자랑질이 알맞게 잘 어우러졌다. 이쯤되면 순전히 전작의 상업적 성공으로 잉태된 속편이라고 할지라도 그리 나쁘지 않다. (2013/12/31)

  1. 빌 헤이더와 월 포테, 그리고 앤디 샌버그는 'Saturday Night Live(NBC, 1975~ )'의 캐스트 멤버로 2000년대 중후반을 이끌었다. 세 사람 모두 비교적 최근에 쇼를 떠나 영화와 다른 TV 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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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2013) B평

카운슬러 (The Counselor, 2013)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마이클 패스밴더, 페넬로페 크루즈, 카메론 디아즈, 하비에르 바르뎀, 브래드 피트



  카운슬러는 더 많은 돈을 원한다. 사업가는 더 많은 사업을 원한다. 중개인은 더 많은 여자를 원한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업이 없어서도 아니다. 여자가 없어서도 아니다. 있음에도 더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른이다. 어른의 요건을 갖추었다. 전문적 능력이 있고 비즈니스의 세계를 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과감히 패를 던질 줄도 안다. 하지만 문명의 껍질을 벗겨낸 날 것 그대로의 세계에서 그들은 그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철부지일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빠르고 강한 치타라고 여겼다. 어느 순간 토끼로 전락하여 사냥당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소재는 아니다. 새로운 구성도 아니다. 다만 같은 이야기가 코맥 매카시 아닌 다른 이의 손에서 씌여졌다면 많이 다른 형태로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이런 내용을 다루는 어지간한 작품이라면 일단 욕망의 상세를 반복하며 강조하였을 것이다. 영화의 목표가 무엇이든 (짜릿한 일확천금의 재미가 되었든 탐욕을 경계하는 교훈이 되었든)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구체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부분들을 과감하다시피 생략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그렇다. 빛과 어둠이, 선과 악이, 희망과 절망이 항상 추상화되어 등장해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몇몇 인물은 종이 인형만큼 얄팍하게만 느껴진다. 왜 악한지 설명하지 않는다. 왜 더 많이 원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이니까 악하고 인간이니까 더 많이 원하는 것'이 노작가의 염세적이고 환멸적인 시선이다.   


  물론 그러다보니 불친절한 감이 있다. 미리 소설을 읽은 사람이 아니라면 길을 잃을만한 구석이 좀 있다. 가령 사업의 구성이나 조직도가 확실하지 않다. 사업에서 누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이들의 책임 범위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어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지 등등에 대한 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세 남자가 한 씬에 등장하는 장면조차 없으니 조금 둔감한 관객이라면 나중에서야 "어머, 쟤들이 같이 일하는 거였어?"라며 탄식할 법도 하다. 따라서 배달 사고를 기점으로 이 친구들이 연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책임이라는 것이 무작정 생명과 맞바꿀 수준이라는 것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거니와,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기에 재주껏 도망치는 수 밖에 없다는 설명 또한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누가 누구의 뒷통수를 친 것인지도 논란이 분분할 수 있겠다. 리들리 스콧 같은 빅 가이가 그걸 몰랐을 리 없다. 매카시 월드의 상징과 관념을 최대한 존중해여 영화로 옮겨내었다고 이해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20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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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 더 다크 월드 (2013) B평

토르: 더 다크 월드 (Thor: The Dark World , 2013)

감독: 앨런 테일러

출연: 크리스 햄스워스, 나탈리 포트만, 톰 히들스턴, 앤소니 홉킨스, 크리스토퍼 애클리스턴, 이드리스 엘바




  무난하게 만들어졌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놀랍고 새로운 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개는 어디서 백 번은 보았을만큼 전형적이고 인물들도 빵틀로 찍어낸듯 단순하다. 게다가 토르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엔싱크로 치면 크리스 커크패트릭이요, 백스트리트 보이즈로 치면 A.J. 맥린이 아닌가. 뭉쳐서 나오지 않으면 크게 위압적이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흥행 성적이다. 재미도 없었고 재미도 못봤던 전편을 능가할 것은 이미 예측되었으나, 묠니르로 박스 오피스를 때려 흔들 정도일 줄이야 몰랐다. 어떤 면에서는 이 정도로 화제가 되는 것이 의아할 정도다. 팬심으로야 순전히 나탈리 포트만♥ 효과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녀도 전작에 나왔었으니 그럴 수야 없고. 아무래도 역시 세간의 지적처럼 역시 '어벤저스(조스 웨던, 2012)'의 푸쉬 덕분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이언 맨(존 파브로, 2008)'으로 시작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따로 또 같이' 전략을 반복하면서 무섭게 그 파괴력을 끌어 올리고 있다. 올해 초 아이언 맨이 돌아왔고 내년에는 다시 캡틴 아메리카가 돌아올 것이며, 그 이듬해인 2015년에는 두 번째 어벤져스 작품이 개봉할 예정이다. 코믹스 매니아들은 설레일 것이고 마블과 디즈니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순간 착잡한 기분인 것은 TV 시리즈 '에이젼츠 오브 쉴드'를 호기롭게 올 가을 라인 업에 포함시킨 ABC 뿐일 것이다. 어벤져스 효과로 떡고물 깨나 튈 줄 알았는데 파일럿 이후 7주 연속 시청률 하락이라니!


  사실 이 정도 규모의 필름 프랜차이즈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프랜차이즈 사이의 세계관을 공유하여 더 큰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내는 경우는 이제까지 있지도 않았거니와 있을 수도 없었다 (뭐? 프레디 대 제이슨? 에어리언 대 프레데터?). 그만큼 코믹스에서부터 원체 멀티버스가 잘 짜여져 있는 컨텐츠였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만큼 전략적으로 돈을 몰아서 뿌리는 면도 없지 않다. 지금부터 5년 동안 일 년 평균 두 편의 마블 히어로물이 개봉하는 동시다발적 전략은 상당히 공격적이다. 이쯤되면 단순히 대중의 요구가 시장에 반영된 결과인지 시장의 의지가 대중을 좌지우지한 결과인지 아리송하기까지 하다. 코믹스 팬이 아닌 입장에서는 이런 현상이 다소 지치는 면도 있다. 우선 언급한대로 양적으로 방대해 압도당하는 부분이 있고 내용적으로 선명한 선악 갈등과 단선적인 구조가 그리 큰 반향을 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근래 사랑받는 영웅/반영웅들을 보면 다분히 병적이고 회색적이고 시규어로스적인데, 그에 비하면 애어른 아이언 맨을 비롯하여 어벤져스의 멤버들은 꽤 순수하고 천진한 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토르는 건전하고 건강하며 순박하기까지 하다. 물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트라우마 워크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비쥬얼로는 보는 이를 압도할지언정, 이야기로 보는 이를 매료시킬 정도는 아니라는 점은 다소 아쉽다. 그런 생각이 마블과 코믹스 세계에 대한 나의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201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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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커넥트 (2013) B평

디스커넥트 (2013)

감독: 헨리 알렉스 루빈

출연: 제이슨 베이트먼,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폴라 패튼,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프랭크 그릴로, 맥스 티에리옷



  단막극 세 편을 합치면 영화 한 편의 분량이 나온다. 계산상으로는 맞다. 하지만 단순히 단막극 세 편을 합친다고 한 편의 영화가 되지는 않는다. 인터넷 시대의 그림자를 담아낸 에피소드를 뒤섞어 놓은 것만으로 작품에 고발적인 성격이 부여될 거란 생각은 너무 안이하다. 그건 마치 MTV에서 가장 질이 낮은 리얼리티 프로그램 세 편만 짜깁기하면 텔레비젼의 해악성을 고발하는 작품이 될 거란 소리처럼 들린다. 더구나 엮어내는 솜씨나 연쇄 반응의 에너지도 생각만큼 좋지 않다. 포스터와 티져만 으로는 '컨테이젼(스티븐 소더버그, 2011)'급의 글로벌 재앙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공회전의 연속이다. 거창한 담론에 집착하는 대신 소소한 개인사, 가정사의 범위에서 의도를 구현하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SNS 혹은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매일 사용하는 관객들에게 최소한의 경각심도 일으키지 못할 정도라면 전략적인 면에서 실패했음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사고의 SNS에게만 책임을 돌리기도 망설여진다. 결국 도구는 도구일 뿐, 유저들이 충분한 의식을 갖추지 못한다면 언제나 악용의 가능성은 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다음은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이다.


1. 낮은 곳으로 임하지 않는 제이슨 베이트먼은 무효다. 바보들과 함께 나와야만 이 남자의 매력을 배가된다. 

2. 혈색이 창백하지 않은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역시 무효다. 아마 숙희씨도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3. 스마트 지능형 버전의 프랭크 그릴로는 무효다. 이 남자가 이렇게 똑똑한 인물은 연기하는 건 처음 보는 듯 하다.

4. 십대 엑스트라들의 무더기 나체씬이 토네이도처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야 등장하는 33세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가슴은 무효다. 한쪽 가슴을 과카몰리 휘젓개로 사용했던 할리 베리 이후로 가장 품위 없는 노출이다.

5. 과학적 오류 1: 십대 자녀를 둔 중년 남자가 난생 처음 들어가 본 페이스북 사용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6. 과학적 오류 2: 은퇴 연령의 할아버지가 순수한 인간적 교감을 갈망하여 채팅 사이트에 접속을 시도한다.

7. 한글 자막: Chick, MILF, Cougar, Pumar 등 생명력 넘치는 전달이 요구되었던 표현이 안이하고 안전한 번역에 빛을 잃어버렸다. 연하집착남? 제발 좀! 할머니가 번역하셨나? 

8. 한국어 카피: '전 세계 24억명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지금 당장 SNS를 탈퇴하라' 무슨 탈퇴씩이나. 완전 알렉스 퍼거슨 다리 긁는 카피가 아닌가! 실제 영문 카피는 'Look Up' 한 마디가 전부다.

0. 제목: '디스커넥트'라는 제목은 어떻게 보면 적절하다. 반면 어떻게 보면 적절하지 않다.

9. 기타: 패션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출연했다고 한다. 영화를 다 보고도 어디에 나왔었는지 잘 모르겠다. 마크 제이콥스도 자기 SNS를 탈퇴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2013/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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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즈 유니버시티 (2013) B평

몬스터즈 유니버시티 (Monsters University, 2013)

감독: 댄 스캔론

출연: 빌리 크리스탈, 존 굿맨, 스티브 부세미, 롭 리글, 헬렌 미렌, 조엘 머레이, 켈시 그래머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있어 디즈니와 픽사 콤비가 이뤄낸 업적이야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앞으로의 상황이다. 돌이켜 보면 1995년의 '토이 스토리(존 라세터)'는 독보적인 작품이었다. 디즈니를 제외한 어떤 회사도 애니메이션에 3천만불을 쓸 수가 없었고 픽사가 아닌 어느 스튜디오도 그런 작품을 만들 기술과 역량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후 십 년이 지난 2005년까지도 디즈니의 유일한 대항마로 자리매김했던 드림웍스를 제외하면 1억불대 예산을 쏟아부어 비슷한 레벨의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물론 폭스가 있기는 했지만 전통적으로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한 폭스의 애정이 뜨뜨미지근한 편이라, 당시만해도 전속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보유하고 지속적으로 제작을 계획할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어쩌다 로또로 생각하고 긁었던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의 '아이스 에이지(크리스 웻지, 2002)'에서 잭팟이 터지면서 단맛을 보게 되어 발을 못 빼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메이저 배급사를 끼고 있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다섯 곳이 경쟁 중인 모양새다. 여전히 기술 역량이나 예산 규모에 있어서 디즈니/픽사나 드림웍스에 견주기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있는 것으로 보여, 앞으로 시간과 총알 지원이 충분히 갖춰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판국이다. 실제로 최근 매이져 배급사 다섯 곳의 장편 애니메이션 예산 대비 총 수입을 비교하면 생각보다 차이가 크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후발주자 폭스와 소니와 유니버셜의 편당 제작비가 아주 후한 편은 아니다보니 오히려 실속에 있어서는 디즈니/픽사와 드림웍스가 떨어지는 감도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유럽, 남미, 아시아 등 비영어권의 컴퓨터 애니메이션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를 통해 컴퓨터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의 진입 장벽 자체가 점점 낮아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반대로 관객 입장에서 보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최근 드림웍스의 물량 공세는 좋은 전략처럼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이럴수록 브랜드의 고유한 이미지, 고유한 아우라를 강조해야 하는데, 요즘의 드림웍스는 다양한 상품을 짧은 주기(2004년 이후 일 년에 두 편 이상 개봉)로 양산하는데다가 작품색이 필요 이상으로 다양해서 삼성 카메라 제품 라인업만큼 난잡하고 너저분한 느낌이 들게한다. 아직까지는 남는 장사이지만 머지 않아 제 살 깎아먹기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고로 다시 컨텐츠 싸움이고 스토리 싸움이다. 기술과 재미에서 대등해지면 이제 남은 카드는 철학 뿐이다. 물론 그런 면에서 디즈니/픽사는 관리를 잘 해왔던 편이고 분명 일관된 정서라는 것을 잘 유지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일부는 디즈니의 역사에 녹아있는 것이고 일부는 픽사 시대의 기술적 진보와 함께 싱싱하게 보완된 것이다. 하지만 '카즈 2(존 라세티, 2011)' 이후 흥행과 평가에 있어 뭔가 꼬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 기본적인 철학을 구현하는 방향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 '몬스터즈 유니버시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12년 전에 비해 기술적인 면에서 충격이 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산만하고 느슨한 스토리 전개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소란스럽고 전형적인 대학 생활의 묘사를 고집한 것도 식상하다. 속편으로 전작 '몬스터즈 아이앤씨(피트 닥터, 데이비드 실버맨&리 언크리치)' 이후가 아닌 이전의 이야기를 선택한 것도 기발하고 참신한 전개 가능성을 묶어버리는 한계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끄럽고 정신은 없는데 동시에 지루하고 긴장감이 풀린다. 정말이지 이런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전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마이크와 설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굉장히 궁금하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계를 돌려보는 것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작업인지는 의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방향을 모르겠다. 감탄이 나올만한 깨달음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전작 '몬스터즈 아이앤씨'나 근래 최고의 작품이었던 '업(피트 닥터&밥 피터슨, 2009)'과 비교해보면 메세지의 깊이 차이가 아주 극명하다. 그렇다고 코미디의 지분을 늘렸다고 보기에는 웃을만한 장면이 많은 편도 아니다. 두어 번 피식거릴만한 장면이 있었을 뿐이다. 냉정히 말해 그렇다. 재미만 놓고 보면 같은 시기 개봉한 유니버셜/일루미네이션의 '디스피커블 미 2(피에르 코팽&크리스 리노드)'에 크게, 완전히, 압도적으로 밀린다. 심지어 평생에 걸쳐 디즈니/픽사에 편파적이고 맹렬한 애정을 쏟아왔던 내가 보기에도 미니언들의 판정승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제작비가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디즈니/픽사에서는 아마 이번 사건으로 충격을 좀 받았을지 싶다. (201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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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피커블 미 2 (2013) B평

디스피커블 미 2 (Despicable Me 2, 2013)

감독: 피에르 코팽, 크리스 리노드

출연: 스티브 카렐, 크리스튼 위그, 러셀 브랜드, 스티브 쿠건, 벤자민 브랫, 미란다 코스그로브, 데이너 게이어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대권을 둘러싼 지형도가 심상치 않다.  


  돌이켜보면 90년대까지는 단연 디즈니가 대권을 쥐고 있었고 폭스가 견제하면서 간간이 간을 보는 양상이었다. 00년대 컴퓨터 애니메이션 시대로 넘어오면서 디즈니/픽사와 드림웍스간의 양자대결이 이어졌고 여전히 폭스 역시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를 제작한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 덕분에 넘버 3의 위치에서 2~3년 주기로 계속 간을 볼 수 있었다. 상황은 2010년을 기점으로 다시 복잡해졌다. 00년대 후반부터 새로 시장에 뛰어 들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으나 간신히 체면차리기도 어려웠던 회사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먼저 소니 픽쳐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클라우디 위드 어 챈스 오브 미트볼스(필 로드&크리스 밀러, 2009)’‘더 스머프(라자 고스넬, 2011)’ 성공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유니버셜과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가 뛰어 들어 대박을 터뜨렸다. 바로 그 작품이 ‘디스피커블 미(피에르 코팽&크리스 리노드, 2010)’였다. 제작비는 근 5년간 타사 애니메이션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수익은 성공작들의 평균을 상회했다. 기술적인 면에서 크게 떨어진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이제 10년대는 기존 디즈니/픽사나 드림웍스가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 해에 메이져 배급사의 작품만 다섯 편 이상 개봉하고, 5개사의 어느 스튜디오에서라도 그 해의 넘버 원 애니메이션이 나올 수 있는 등 확연한 다자대결의 모양새다.


  그렇기에 올해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의 '대형 사고'는 더욱 심상치 않은 느낌이다. 미니언들의 귀환 - ‘디스피커블 미 2’로 디즈니/픽사의 ‘몬스터즈 유니버시티(댄 스캔론, 2013)’와 드림웍스의 ‘더 크루즈(커크 드 미코, 2013)’를 따돌리는 이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특히 2주 간격 개봉으로 맞짱을 떴음에도 '몬스터즈 유니버시티'를 압도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9월 30일까지의 집계만으로도 이 작품은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성적 7위에 해당하는 성적을 올렸다. 불과 3년전 첫 편이 기대 이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개봉한 디즈니/픽사의 ‘토이 스토리 3(리 언크리치, 2010)’와 드림웍스의 ‘슈렉 포에버 애프터(마이크 미첼, 2010)’의 벽을 넘지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괄목할만한 성과다.


  한계가 뚜렷한 스토리에도 불과하고 이 작품의 파괴력이 상당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스티브 카렐의 코미디는 여전히 유효하고 작업장으로 돌아온 천방지축 미니언들의 대공세는 놀라울 정도다. 이 아이들. 3년 전에는 그냥 저냥 넘겼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귀엽고 사랑스러워 미쳐버릴 지경이다. 요즘 똘똘한 미니언 몇 놈 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하고 있다. 캐릭터 상품도 모으고 있다. 아마존에서 해외 배송 검색도 해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맥도날드에서 장난감 때문에 해피밀을 주문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애써 용기를 냈는데 품절이라 하기에 얼굴이 귀 밑까지 붉어졌다. 난처한 표정의 맥도날드 직원이 "미니언이 품절이라 재고 장난감으로 '라이즈 오브 가디언즈(피터 램지, 2012)'의 주인공들을 대신 준다"고 하기에 내 나이가 얼마인지도 잊고 "품절이면 해피밀 주문하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가디언즈 됐고 미니언이나 가져와! 드림웍스에게는 이보다 더 굴욕적일 수 없을 것이다. (201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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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재스민 (2013) B평

블루 재스민 (Blue Jasmine, 2013)

감독: 우디 알렌

출연: 케이트 블란쳇, 알렉 볼드윈, 샐리 호킨스, 바비 카나베일, 루이스 C.K.




  뼈대를 몸 밖으로 발달시킨 생물은 외부 위험으로부터 잘 버텨내지만 정작 살은 연약해져 있기 때문에 일단 껍데기가 뚫리면 치명적이라고 한다. 반면에 뼈대를 몸 안으로 간직하는 생물은 외부 위험에 쉽게 상처를 입지만 그럼으로써 근육이 단단해지고 섬유에 저항력이 생긴다고 한다. 말하자면,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재스민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로 인해 벌어지는 난리와 법석은 결코 악의에 바탕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녀는 괴상망측하고, 이기적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한다. 허영과 집착은 꼴사나울 정도다. 그럼에도 미워하기보다는 동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녀가 케이트 블란쳇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그 모든 몸부림이 순전히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정상의 궤도를 이탈해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인정할재 수 없는 것은 저항을 포기하는 순간 정말로 자신을 잃어버리게될 것을 알아서다.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숨겨보고자 강한 척 단단한 뼈대를 내보이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인생의 지침을 돌려버릴 치명적인 실수를 누구나 한 번쯤은 한다. 다만 충격을 완충해내는 용량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억을 떨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그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재스민처럼 말이다. 뻔뻔한 사람들에게 실수를 바로 잡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냥 가볍게 번복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 자리로 돌아가면 된다. 남편인 할(알렉 볼드윈)이 그렇고, 여동생 진저(샐리 호킨스)가 그렇고, 진저의 형편없는 남자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신경줄의 굵기는 계급과는 무관하고 본성에는 이유와 조건이 없다. 재스민은 적어도 뻔뻔한 사람은 아니다. 그거 하나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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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2013) B평

설국열차(Snowpiercer, 2013)

감독: 봉준호

출연: 크리스 에반스, 에드 해리스, 존 허트, 틸다 스윈튼, 앨리슨 필, 송강호, 고아성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 SF)이 안 맞는 사람이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컨텐츠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조지 오웰이 아무리 위대해도 누군가는 디스토피아 텍스트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런 관객들에게는 '설국열차'가 맞지 않을 것이다. 일단 그런 그룹의 사람들은 접어두기로 하자. 정말 흥미로운 것은 나머지 그룹 사람들의 반응이다. SF 매니아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면 매혹되는 사람들이, 오웰리즘에 맞서길 꿈꾸는 혁명가들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이 작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 이게 좀 이상한 대목이다. 이 작품은 분명 그들이 좋아할만한 '소재'를 그들이 좋아할만한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가를 유보하게 만드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원작이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애초에 매혹적인 설정이고 영화로 만들기에 나쁘지 않았다. 다양한 가능성이 있었는데, 봉준호의 영화는 딱 한 가지 - 그것도 가장 빙퉁그러진 방향으로 가능성을 한정지어 버린다. 원작의 기본 설정만을 가져와서 쳐내고 손질하여 연출자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을 취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 작품과 비교하기에 적절한 예는 '브이 포 벤데타(제임스 맥티그, 2006)'나 '이퀄리브리엄(커트 위머, 2002)'이 아니라 오히려 '레지던트 이블(폴 W.S. 앤더슨, 2002)' 시리즈나 '월드 워 Z(마크 포스터, 2013)'에 가깝다고 봐야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그 과정에서 각색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일 정도로 드러난다는 것이 두 번째 원인이 되겠다. 물론 그와 같은 노골성은 어떤 면에서 봉준호의 매력이었다. 이제까지의 봉준호 영화들은 상당히 현실적이었다. 시공과 상관없이 항상 시제가 현재나 현재 완료, 혹은 현재 완료 진행이였고 시위는 어김없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상처를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근미래의 다인종 사회로 무대를 옮겼고, 이미 현실의 거울임을 전제하는 SF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에 기존 방식의 노골성이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화자가 달라졌고 시제가 달라졌으며 장르의 속성도 완전히 달라졌음에도 이런 부분들을 감안하여 과녁을 재조정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원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냥 못 만들었기 때문이다. 외국 배우들이 등장할 뿐, '외화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방화'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각을 바싹 잡아놓고 그 각에 이야기를 끼워 맞추느라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숨겨진 의도를 다시 설명하느라 큐레이터 모드로 들어가야 했다는 사실이다. 대단히 낭비적이고 촌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과연 이 작품이 취하고 있는 전략이 효율적인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끝으로 완전 다른 페이지 위에서 노는 듯한 [성은 냄궁이요 이름은 MS 부녀]의 존재는, 그냥 치명적이다. 마치 은밀한 지령을 받아 영화를 전복시킬 의도로 잠입한 존재들처럼 느껴질 정도다. 고로 의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영화 속 어떤 것이 (혹은 어떤 것들이) 등장 순간부터 그 상징적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 퇴장 시점까지 비현실적일 정도로 명확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혹은 그것들을) 인물로 봐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품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201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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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림 (Pacific Rim , 2013)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

출연: 찰리 헌냄, 이드리스 앨바, 찰리 데이, 맥스 마티니, 키쿠치 린코, 론 필먼, 번 고먼



  '배틀 쉽(피터 버그, 2012)' 시즌 2의 향기가 모락모락 느껴지는 텔레비젼용 광고부터 충격적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국복하게 해준 것은 길예르모 델 토로의 이름값. 적어도 검증된 장르물 커리어가 있으니 '배틀 쉽'의 피터 버그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피터 버그는 훌륭한 배우이지만 (TV 시리즈 '시카고 호프(CBS, 1994-2000)'에서의 열연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할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길예르모 델 토로와 연출 경력으로 비교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결과물을 확인하고 난 지금의 심정은 음…… 억울해 할 것도 없네요. 순전히 본인이 자초한 일인데요, 뭘.


  사실 영화의 과학적 오류를 심각하게 따지는 태도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제발 좀 과학자들에게 물어보고 만들었으면 좋겠다‘ 따위의 식상한 일갈도 이제는 지겹다. 그런 말은 '색,계(이안, 2007)'를 만들때 제발 좀 구성애 아줌마에게 자문을 구했어야 한다는 소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에 필요한 것은 과학적 사실 증명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논리적 개연성만 망가뜨리지 않으면 과학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상식적이면서 물리학적으로도 말이 되는 쉬운 설정'과 '비상식적이고 물리학적으로 대단히 무리한 어려운 설정'이 있을 때, 부러 고집스럽고 변태스럽게 후자를 택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 이 때는 문제가 된다. 아무리 그렇다라도 스스로 제시했던 표준과 프레이밍은 준수를 해주셔야 하는 것이다. 가령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로봇(예거)들의 스펙이 실제로 무리없이 구현 가능하느냐'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제시한 로봇들의 스펙에 맞아 들어가는 존재 이유를 보여주고 있느냐'는 것이다. 처음에 이 놈들이 설계된 목적이 뭐라고 주장했던가? 공룡과 악어를 합쳐놓은 것처럼 보이는 괴물(카이주)을 제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문제는 이 괴물들이 차라리 거대한 덩어리에 가깝다는 부분에서 출발한다.


  예거는 카이주와 같은 괴물을 전담하기에 적합치가 않은 로봇이다. 첫째, 괴물은 바다를 통해 이동하고 환태평양 전반에 걸쳐 어디에서도 불쑥 나타나는데, 로봇은 육중한 몸집으로 인해 헬기에 매달려 현장까지 이동해야 할 정도로 기동력이 찬란하다. 적시 현장 도착은 꿈 같은 얘기다. 둘째, 괴물은 그냥 덩어리에 불과하고 몸을 움직여 상대 신체의 점을 가격하거나 상대를 감아 조이는 공격을 하는 반면에 로봇은 정교하게 동작하는 사지 관절 뚜렷한 유리 몸으로 태권도 유단자처럼 아름답게 선을 그린다. 점과 선이 맞지 않기에 십중팔구 끝내는 개싸움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어느 쪽이 광탈하게 될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셋째, 괴물은 머리가 아니라 동물적 본능으로 움직이는데 로봇은 2인 1조 드리프트 뇌파 조종으로 두 개의 머리가 혼연일체를 이루는 고답적인 경지를 요구한다. 그럼으로써 퍼텐셜이 극대화되어 집채만한 괴물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불필요한 변수와 동작 오류가 많아 근본적으로 순발력을 희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한 마디로 품만 많이 들어가고 실속은 없는 시스템이다.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가 엉겹결에 카이주 전쟁에 투입된 로봇이라면 뭐 그러려니 하겠지만 애초에 카이주 전담으로 만들어졌다는 친구들이 이러니 당혹스러울 수 밖에. 결국 이 로봇들은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보일 뿐, 정작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의 특성에 맞게 설계된 것이 아니다. 흡사 광고 풍선(에어라이트) 앞에서 검은 띠 차고 결연히 품새 넣는 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내가 파일럿이라면 이런 로봇을 타고 저런 괴물과 싸우는 따위의 일은 절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가당착은 작품을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만든다. 이미 이렇게 코미디 기운으로 충만한데 뉴튼 가이즐러 박사(찰리 데이)와 허먼 가틀립 박사(번 고먼)은 어쩜 그리 무리하게 웃겨보려고 애를 썼던 것인지 모르겠다.


*


  잘 알려진대로 길예르모 델 토로는 비디오 게임 매니아이다. 게임 개발에도 참여했었고 게임의 영화화에도 손을 댔었다. 심지어 딸아이와 멀티 플레이를 즐긴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하여 가설. 내 생각에 이 양반은 딸내미 데리고 XBOX 키넥트 게임을 하다가 이 작품의 2인 1조 동작 인식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 같다.   (201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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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 2013)

감독: 바즈 루어만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캐리 멀리건, 토비 맥과이어, 조엘 에저튼, 아일라 피셔



  고전의 재해석이야 늘상 있어왔던 일이고 그 자체로 뭐라 할 바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고전을 건드리는 모든 작업이 그런 과정을 거친 셈인데 뭐 어떤가! 심지어 김영하가 번역했다고 '젊은 개츠비'가 되기도 한다 마당에. 


  다만 바즈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는 조금 과하다. 전체적으로 고르게 과하면, '그냥 그런 컨셉인가보다' 라고 생각할텐데 특정한 부분만 도드라지게 과하다. 파티 장면 말이다. 이 작품의 파티는 1920년대 방탕과 환락의 묘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절을 흉내내는 21세기의 퓨전 복고 축제에 가까운 느낌이다. 젋은 시절의 로버트 레드포드가 개츠비로, 젊은 시절의 샘 워터스톤이 닉 캐러웨이로 분했던 70년대작 '위대한 개츠비(잭 클레이튼, 1974)'에서 파티 장면의 최고 막장씬이래봐야 분수대 막춤 정도였다. 그런데 이 개츠비는 HBO의 TV 시리즈 '앙투라지(더그 엘린, 2004~2011)' 레벨의 진탕 파티를 매주 벌인다. 그래서 놀랍고 혼란스럽다. 그리고 비현실적이다. 파티를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시대의 정서를 제어하며 어떤 장면에서도 과잉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낯설게 느껴진다. 


  이런 수준의 무리한 접붙이기가 용서되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가령 뮤지컬 포맷의 애니메이션이라면 이런 식의 구성이 충분히 매혹적인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3D 버젼에 공을 들인 것 역시 장점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결국 질문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왜 '물랑 루즈(2001)'의 바즈 루어만인가? 바즈 루어만이어서 안 될 이유는 없지만 하필 바즈 루어만일 필요도 없다. 거꾸로 바즈 루어만 정도의 능력자가 굳이 어울리지 않는 피츠 제럴드에 집착할 필요도 없기도 하다. 물론 이해는 간다. 20세기 초의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품과 환락을 허망한 꿈과 홀로 싸워야 하는 오늘날의 길 잃은 현실에 빗대고자 하는 의도도 십분 이해하겠다.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번지 수를 잘못 찾았고 엉뚱한 초록등을 동경했다. 이 작품의 좋은 점은 모두 피츠제럴드의 원작에서 나온 반면에 이 작품의 나쁜 점은 모두 피츠제럴드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데서 나왔다. 확실히 과욕은 금물이고,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 


*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 데이지 뷰캐넌! 그토록 신비롭고 매혹적인 여성 인물의 묘사란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어떤 영화도 원작의 문장이 그려낸 깃털같은 그녀를 재현해내지는 못했다. 닿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오롯이 빛나고 있을 것만 같은 묘함 - 초록은 천진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그녀는 단 한 번의 유혹 없이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호명하며, 단 한 줌의 악의 없이 애뜻함과 분노를 함께 선물한다. 이문열이 옮기든 황석영이 옮기든 삼국지는 삼국지이고 정당화된 살인의 만찬인 것처럼, 그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심지어 2D 버젼으로든 3D 버젼으로든) 만나더라도 아프고 쓰린 상처의 원형과 다름이 아닐 것이다. (201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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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리처 (Jack Reacher, 2012)

감독: 크리스토퍼 맥쿼리

출연: 톰 크루즈, 로자먼드 파이크, 로버트 듀발, 베르너 헤어조크, 리차드 젠킨스



  세상은 불공평하다. 혁명 놀이하던 도련님 혼자 살아 남아 부자 할아버지와 화해하고 코제트와 결혼하는 것처럼.  


  이미 톰 크루즈에게는 충분한 아바타가 있다. 이단 헌트 말이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즈음에 '마이너리티 리포트(스티븐 스필버그, 2001)'의 존 앤더튼 역할도 맡았다. 그는 이미 좋은 역할을 충분히 많이 차지했고, 아주 잘하지는 않았어도 대개는 꽤 알맞게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사이언톨로지 신자라는 놀림거리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스마트해보이는 효과도 얻었다. 그런 마당에 굳이 잭 리처까지 욕심낼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가 싫지는 않으나 (싫다니! 그 호쾌한 미소를 어찌 싫어할 수 있으랴!) 다만 또 다른 액션 영웅 아바타의 구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톰 크루즈에만 해당 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레밍턴 스틸과 6대 제임스 본드를 겸했던 피어스 브로스넌,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와 7대 제임스 본드를 겸하는 다니엘 크레이그도 마찬가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 다음으로는 커크 선장과 4대 잭 라이언 역할을 거머쥔 크리스 파인이 입방아에 오를 것이 유력하다. 비슷한 이미지의 역할을 너무 많이 하는 배우들로 인해 매력있는 캐릭터가 그 매력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면 너무 아까운 일임에 분명하다.


  리 차일드의 '잭 리처'는 애당초 영화같은 작품이었다. 영화가 될 수 밖에 없도록 쓰여진 작품이었다. 다만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소설을 읽었을 때 내 마음 속 캐스팅 1순위는 사실 조쉬 할로웨이였다. 마초적이면서도 냉소적이고 불처럼 타오르면서도 얼음처럼 냉철한 하드 코어 전직 군 수사관. 머리를 짧게 자른 '소이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싶었다. 물론 할로웨이는 1969년생이라, 1960년생으로 창조된 잭 리처로 분하기에는 약간 어리게 느껴지긴 했다. 다음으로 내 마음 속 캐스팅 2 순위는 레이 스티븐슨이었는데 하드 코어의 완벽한 요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역의 이미지가 너무 많이 남아 있어 껄끄러웠다. 다음 3 순위는 맥스 마티니였는데 워낙 돌부처같은 이미지의 남자라 '대쪽같은 현직'은 몰라도 '냉소적인 전직'이 되기에는 조금 어려워 보였다. 다음 4 순위는 빈스 본이었는데 거구 장신으로 잭 리처에 적합한 스펙은 갖추었지만 (정말 죄송하지만) 그닥 똑똑해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5 순위는 마크 밸리였는데 결정적으로 키가 안된다는 면에서 이루어지긴 어려웠을 것이다. 공동 6 순위는 휴 잭맨과 러셀 크로우였는데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오씨(Aussie) 남자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아무 이유없이 식상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리 차일드의 묘사에 따르면 잭 리처는 키가 195 센티미터에 체중이 100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의 사내다. 아이스 블루 눈동자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츰 빛이 바랠 어두운 금발머리를 가진 남자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마초적이면서도 냉소적이고 하드 코어이면서도 올곧은 판단력을 지녀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누구를 캐스팅해도 쉽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굳이 잔인하게) 체격 조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톰 크루즈가 잭 리처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배우 중의 하나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논란이 적지 않은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첫머리에서 언급한 것처럼 톰 크루즈가 비슷 비슷한 유형의 스마트 액션 영웅 역할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잭 리처 고유의 색깔을 묻어버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물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 어차피 누가해도 원작을 만족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라면 톰 크루즈여서 안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만큼 괜찮다. 일단 한 번 보면 '톰 크루즈=잭 리처'라는 등식도 그리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나쁘지 않게 만들었다. (201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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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앤디 워쇼스키, 라나 워쇼스키, 톰 티크베어

출연: 톰 행크스, 할리 베리, 휴 그랜트, 벤 위쇼, 휴고 위빙, 수잔 서랜든, 짐 스터게스, 두나 배



  걸작이다. 감히 단언하자면 우리는 이미 미래의 영화를 경험한 것이다. 앞으로 영화는 가용한 시간 내에 보다 많은 내용을 관객에게 주입하는 보다 '효율적인'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 영화는 분철된 이미지와 모호한 개념의 나열로 설명을 대신하거나 모호한 몽환 속에서 설명을 포기하게 만드는 보다 '철학적인' 형식을 취할 것이다. 더구나 그럼으로써 앞으로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적인' 형식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앞으로 영화는 다수가 창조한 것을 다수가 수용하는 평등한 '혁명적인'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완벽한 미래의 영화를 구현해내고 있다. 세 시간 남짓의 러닝 타임에 최소 여섯 개의 단막극을 압축하여 우겨 넣은 솜씨는 거의 '신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예전 같으면 최소 두세 편에 나누어 주연을 맡을 배우들이 단 한 편의 영화에 공동 출연하고 있다. 장르의 경계는 무너졌거나 놀랍도록 대범하게 무시되었다. 시대극, 멜로, 스릴러, SF에 액션, 심지어 환타지까지 뒤섞여있다. 우리 관객들에게는 물론이고 제작자와 배우들에게도 상당한 시간 절약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선언한다. 천재 한 사람의 머리 안에서 영화가 완성되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수재 여럿이 한 방에 모여 서로 머리 맞대고 고민하며 영화를 완성하는 시대도 이미 끝났다고. 그렇기에 '명민했던 워쇼스키 형제'가 '평범한 워쇼스키 남매'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이런 걸출한 결과물이 가능할 수 있었으리라. 이 작품은 마치 여러 사람이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공유한 상태에서 작업한 것처럼 파트마다 서로 다른 뚜렷한 개성이 살아 숨쉰다. 부분적으로는 진지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장난스럽다. 부분적으로는 아름다운가 하면 부분적으로는 기괴하다. 부분적으로는 생각을 하고 만든 것 같으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만든 느낌이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산되었거나 전혀 계산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들 중 일부가 맨 정신 아닌 '클라우드 나인([각주:1])' 상태에서 작업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한 개성이 하나의 메세지, 즉 'Everything is connected - 결국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운명 공동체다'라는 팀 크링([각주:2])의 '중 2병'을 연상케하는 거창한 메세지 아래 강렬하게 수렴하고 있다.


  물론 어쩌면 당신은 당장 이 작품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다. 머지 않은 미래에 결국 당신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설령 이 '미래의 영화'라는 것들이 흡사 강제로 비위장 영양 공급을 받는 듯한 끔찍한 무력감을 주더라도 말이다. (2013/01/12)    

  1. 1. 클라우드 나인(Cloud Nine): 상상할 수도 없이 좋은 기분. 은어로 마약을 가리키는 말이며 엑스터시의 한 종류의 이름이기도 함. [본문으로]
  2. 2. 팀 크링(Tim Kring): TV 시리즈 Heroes(2006~2010, NBC)와 Touch(2012~ , FOX)의 크리에이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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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스카이폴 (2012) B평

007 스카이폴(007 Skyfall, 2012)

감독: 샘 멘데스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하비에르 바르뎀, 주디 덴치, 랠프 파인즈, 나오미 해리스, 벤 위쇼



  시리즈물과 평행 주차의 공통점은 앞뒤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시리즈물이 전편을 염두하고 속편의 여지를 남겨놓는다고 해서 굳이 탓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요즘에는 그 정도가 과히 심해지고 있으니 문제다. 두 시간이 넘는 영화 한 편이 단지 속편을 위한 에피타이저처럼 느껴진다면 아무래도 정상적인 범주로 이해해주기는 어렵다. 요즘엔 너도 나도 트릴로지다. 첫 편을 당연한 듯이 방대한 티져 영상물로 만드는 것이 유행이다. 기존의 프랜차이즈 시리즈들도 리부트 때마다 보너스 피쳐 혹은 코멘터리에 혹은 팬북 혹은 설정집에 가까운 작품 한 편씩은 깔아놓는다. 그럭저럭 봐줄만 해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허무감이 밀려온다. 어쩐지 속 빈 강정 같은 느낌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 어째 '카지노 로얄(마팀 캠벨, 2006)'에서 의외로 무심하고 덤덤하게 바통을 넘겨 받았다 싶더니만 6대 본드 크레이그도 요란하게 이러한 유행에 발맞추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본드의 입을 빌어 "레저렉션(부활)"을 원한다고 선언하고, 싸이코 숙적과의 대결을 통해 유년의 기억을 더듬는다. 이를 통해 이전 두 편의 크레이그 본드가 표방했던 몸짱-눈빛짱-액션짱 '진화한 007' 이상의 경지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정확하게 시대가 요구하고 시장이 갈망하는 모범 답안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배트맨'이다. 근 몇 년간의 배트맨의 부활 공식을 교묘하게 다듬어 놓은 '스카이폴'의 전략은 상당히 영리하고 날렵하다. 오래된 매력과 새로운 매력이 알맞게 공존한다. 그리고 적절한 아드레날린으로 범벅이 되어있다. 전작 '카지노 로얄(2006)'과 '퀀텀 오브 솔라스(마크 포스터, 2008)'보다 분명히 낫다. 제임스 본드의 팬이라면 (그리고 티모시 달튼이 역대 최고의 제임스 본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아할 이유가 없게끔 만들어졌다. 

 

  다만 문제는 강박에서 시작된다. '스카이폴'에는 두 가지 상충된 목표가 있다. 첫째는 본연의 익숙한 제임스 본드 놀이다. 클래식 007의 전형을 복기해보자 ("미션 중 사고를 당했던 본드가 살아 돌아와서 미처 끝내지 못했던 영업을 마무리짓는다"). 상당히 익숙한 패턴이다. 둘째는 본드, 본드의 주변 인물, 본드의 장르, 본드의 시리즈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르의 재정의가 더해진다 ("과연 오늘날에 있어 첩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 비밀 요원이란 어떤 존재인가?"). 허나 그것만으로는 본드를 상처입은 고독한 영웅으로 만들 수 없다. 그래서 기어코 승부수를 띄운다 ("미션 중 사고를 당했던 본드가 존재론적 상처를 입었다. 오늘날의 세계는 그와 같은 비밀 요원들의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다. 이를 치유하고 미처 끝내지 못했던 영업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춰진 내면과 마주해야 한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본드가 유년기를 보냈던 스코틀랜드의 스카이폴 저택으로 돌아가 부활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다 다루기 위해 이 작품은 흡사 고전 비극이라도 소환하려는 듯 장대한 5부 구성을 취하지만, 어째 좀처럼 매끄럽게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은 없다. 접점도 부족하다.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도 M(주디 덴치)도 두 가지 목표를 하나로 묶어줄만한 적절하고 단단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보니 두 편의 영화를 억지로 뒤섞어 놓은 듯한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특히 실바를 본드의 거울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전직 MI6 요원이고 본드 엄마 M과 히스토리가 있을 뿐, 본드의 유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자다. 당연히 실바와의 대결을 굳이 고향집 스카이폴로 끌고 들어가는 설정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수에 가깝다. 결국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는 욕심이 화근이다. 하나를 쥐었으면 하나는 버려야 했다. 그게 바로 선택의 순간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지 않는다. 일단 우겨넣은 다음에 불도저처럼 밀고 나간다. 아니 도대체 뭘 믿고? 숨 막히게 멋있는 저 남자만 믿고? (201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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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쉽 (2012) B평

배틀쉽 (Battleship, 2012)

감독: 피터 버그

출연: 테일러 키취, 리암 니슨, 리아나, 브룩클린 데커, 알렉산더 스카스카드



  멸절의 위기에 처한 것은 인류만이 아니다. 이 작품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의도로 보드게임을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걸까? 사실 궁금증은 그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만약 누군가 <모노폴리>나 <젱가>를 영화로 만들겠다며 투자를 권한다면 나는 응당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뜻 받아들이면 안될 것 같은 야릇한 예감이 드는 것은 아마도 보드게임의 매력이나 중독성을 믿지 못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는 그런 짓을 했다. 그 결정을 두고 지금 만족하고 있는지 후회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보드게임을 새로운 영화로 만들기 위해 (좋은 영화라고는 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다른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야기다. 보드게임 고유의 규칙을 적절히 활용하여 추억을 간지럽히는 것은 일단 이야기가 갖춰진 다음의 문제다. 반대로 영화를 새로운 보드게임으로 만드는 것은 (역시 좋은 보드 게임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훨씬 쉬운 일이다. 소거의 묘만 살린다면 얼마든지! 그 다음은 좋은 아이디어와 적절한 레벨 디자인만 받쳐주면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소설과 영화들이 보드게임으로 한두 번씩 만들어졌던 것도 그래서 가능할 수 있었다. 보드 게임을 가지고 박범신의 <은교>를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은교>를 가지고 보드 게임을 만들 수는 있다.

 

  결론은 간단하다. '보드게임'은 아무 것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스브로 원작'이라는 괴상한 광고 문구만큼이나 부질없다. 보드게임 '배틀쉽'과 상관없이 이 작품의 이야기는 글러 먹은 상태다. 그리고 누구나 짐작 가능하듯이 결정타는 외계인이다. 이 무리천만한 설정은 이 작품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외계인으로 수렴시키는 패착을 낳았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성공에서 기인한 외계인(혹은 외계 유래 기계체)의 집착은 상식적인 이야기들을 (유치한 것이든 유치하지 않은 것이든)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그 결과 이 작품에는 독창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다. 테일러 키취에게 축구를 시킨 것이 나름 가장 신선한 아이디어다[각주:1]. 정작 보드게임 본연의 고전적 매력에 대한 탐구는 곱게 접어 날려 보낸 채, 크고 날카로운 스프레드 나이프를 들어 CG를 바르는 데만 매진한 꼴이다. 일각에서는 "그래도 볼거리는 확실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유행성 이하선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가리켜 볼거리라고 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엉망진창 촌극 위에 싸구려 디저트처럼 얹혀진 리아나의 코스프레 놀이는 가히 재앙급이다. 항해사와 수색대, 그리고 오퍼레이터를 오가며 직무와는 무관한 (아니 유관한?) 성적 암시로 화면을 점철한다. 그녀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마치 그녀 뮤직비디오 속 가장 저렴하고 저속한 순간들처럼 느껴질 정도다. (2012/04/14)

  1. 1. TV 시리즈 'Firday Night Lights(NBC, 2006-2010)'에서 고등학교 풋볼 선수 역할을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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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하이스트 (2011) B평

타워 하이스트 (Tower Heist, 2011)
감독: 브렛 래트너
출연: 벤 스틸러, 에디 머피, 매튜 브로데릭, 케이시 에플렉, 테이어 레오니, 앨런 알다

  기묘한 앙상블이다. 앨런 알다와 벤 스틸러, 그리고 에디 머피를 한 작품에서 만나는 건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좋게 말하면 '8명의 여인들(프랑소와 오종, 2002)'처럼 좋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익스펜더블(실베스터 스탤론, 2010)'처럼 나쁘기도 하다. 2011년도 LG 트윈스 외야처럼 교통정리가 되지 않아서다. 서로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과포화다. 다만 앨런 알다(아서 쇼어)만큼은 열외로 하기로 한다. 전설적 대배우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그 양반의 아우라 아니었으면 이 작품은 별 한 개쯤 압류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으로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감초 역할의 매튜 브로데릭(피츠휴)과 케이시 에플렉(찰리)은 오히려 이 과포화 현상의 피해자이니 역시 열외로 쳐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코미디 스타 벤 스틸러(조쉬)와 에디 머피(슬라이드)의 포지션 중복이다. 물론 작품의 내용과 성격을 감안하자면 벤 스틸러보다는 에디 머피쪽이 문제로 보인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 작품의 에디 머피는 꼭 BBC TV 쇼의 특수 효과 같다. 마치 다른 레이어에 그려져 겹쳐 보여진 이미지라도 되는 것처럼 엉성하다는 뜻이다. 전반적으로 따로 논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도둑 슬라이드는 에디 머피를 위해서 나중에 따로 특별히 만들어진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슬라이드가 등장하는 순간 코미디의 코드가 싹 바뀌어 버리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애써 거금을 들여 특급 코미디언 둘을 캐스팅 해 놓고 양쪽의 개성과 장기와 자존심을 비등하게 살려주려다보니 종국에는 이 꼴이 난거다. '리썰 웨폰(리처드 도너, 1987)'이나 '러쉬 아워(브랫 래트너, 1998)'처럼 다이나믹 듀오로 끝을 보는 코미디라면 상관 없을지 모르겠으나, 이는 근본적으로 팀으로 움직이게 짜여져있는 코미디다. 애초부터,
① 에디 머피가 나오지 않아도 상관 없는 이야기였고,
② 굳이 나온다면 용병 좀도둑이 아니라 타워 직원으로 팀에 들어갔어야 보다 좋아질 수 있는 이야기였고,
③ 굳이 직원이 아니더라도 (메튜 브로데릭이 연기했던 화이트칼라 증권맨 역할처럼) 가급적 팀의 일원으로 녹여지는 캐릭터여야 산만해지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에디 머피가 분한 슬라이드의 등장 이유를 이 작품은 '팀에 프로페셔널 범죄자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평범하고 순박한 아파트 직원들끼리 어떻게 꼭대기층 팬트하우스를 털 수 있겠냐는 것이다. 허나 가만히 중반 이후의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자면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결국에는 평범하고 순박한 아파트 직원들이 배짱 하나는 '오션스 일레븐(스티븐 소더버그, 2001)'을 방불케하는 과감함으로 프로페셔널 범죄자 못지 않은 활약을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엄밀히 따자보자면 좀도둑 슬라이드가 거사에 딱히 도움된 부분도 없다. 도움될 부분도 없었다. 어차피 첨단 경비 시설을 자랑하는 초호화 아파트는 좀도둑이 감당할 수 있는 건 수가 아니었고, 팬트하우스를 감시하는 FBI를 따돌리는 것도 좀도둑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억만장자가 숨겨놓은 돈을 찾는 것 역시 한낱 동네 양아치의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타워 매니져 조쉬와 거의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 한심천만한 용병 좀도둑은 타워의 존속을 위해 밑바닥에서 종사해왔던 그들이기에 타워를 무너뜨리는 반란이 가능하다는 근본적 도식을 망가뜨린다. 오합지졸 절도단의 목적(억만장자에게 떼인 연금 되찾아오기)에서 사실상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부터 사실 이 작품의 색깔은 상당히 희석되어 버린 상태다.

  일부 언론에서는 최근 반월가 시위의 분위기를 반영한 시의성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정말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문제 의식의 부재가 너무 크다. 각성의 순간이 없다. 떼인 우리 돈 찾아오겠다는 혈기는 각성이 아니다. 왜 떼였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없이 그저 각자의 몫만 돌려받으면 복수 혈전이고 정의 실현이고 해피 엔딩이라는 선언은 게으르고 안이한 면이 있다. 하기야 누가 알았겠는가. 타워가 정말로 일말의 은유도 없는 초호화 타워 아파트일 뿐임을. (201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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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2011) B평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X-men: First Class, 2011)
감독: 매튜 본
출연: 제임스 맥어보이, 마이클 패스벤더, 케빈 베이컨, 로즈 번, 제니퍼 로렌스, 재뉴어리 존스

  한 마디로 정리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이 작품에는 있다. 좋게 말하면 다양한 '꺼리'들이 풍부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고 어수선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에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짚어 점수를 산정하는 것으로 (쿨하게) 총평을 대체하고자 한다.

1. 브라이언 싱어가 아니다 (-30점)
팀 버튼이 감독하지 않은 '배트맨'은 가능해도 브라이언 싱어가 감독하지 않은 '엑스맨'은…….

2. 케빈 베이컨의 등장 (+30점)
여섯 다리만 건너면 지구상 모든 돌연변이와 친분 과시할 기세.

3. 로즈 번♥의 쇼걸 언더커버 (+50점)
맙소사. 표 값이 전혀 아깝지 않잖아.

4. '프로페서 X'가 제임스 맥어보이다 (-50점)
이거 웃을 수도 없고.

5. 수줍은 청년 '행크 맥코이'라니! (+10점)
어머 귀여워라.

6. '벤셔'의 음파 비행(-10점)
너님들 장난함?

7. 울버린의 깜짝 찬조 출연 (+5점)
익숙한 놈이 너 밖에 없구나. 

8. 버크셔 소재 영국식 대저택이 프로페서-X의 엑스-맨션 (-5점)
'액스맨'인가 '뮤턴트 애비'인가.

9. 마이클 패스벤더의 무게감이랄까 존재감이랄까 (-10점)
누가 매그니토였는지 자꾸 까먹는다니까.

10. 버저 울리기 직전, 기적처럼 터져나온 로즈 번♥의 멍때리는 연기 (+10점)
"순간 정신을 잃었어요. 그 이후로 몇 가지가 기억나기는 하는데 나무, 햇살, 키스…… ."

결론: 플러스-마이너스 지우고 보니 결론은 빵점. (201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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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레이커스 (2009) B평

데이브레이커스 (Daybreakers, 2009)
감독: 마이클 스피어리그, 피터 스피어리그
출연: 에단 호크, 윌리엄 데포, 이사벨 루카스, 샘 닐

 

  단 5%의 인간만 살아남은 뱀파이어 사회. 고로 종족 보전에 위협을 받는 건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 쪽이다. 식량 수급이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데이브레이커스>는 인간과 뱀파이어 인구비율의 역전이라는 절묘한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는데, 사실 이 설정 하나만 창작이라도 충분히 칭찬받을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상당히 흥미로운 동시에 풍부한 은유와 우의를 포괄할 수 있을 주제라 더욱 좋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당연히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만 한다. 아니, 도대체 왜 어째서 이제까지 아무도 이런 설정으로 뱀파이어 영화를 만들 생각을 못했지? 혹시 이 설정에 숨겨진 레퍼런스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꽃미남 뱀파이어와 꽃미남 늑대인간이 야성미 물씬 풍기며 현피뜨는 영화보다는 분명 먼저 나왔어야 할 법한 아이디어 아니었을까?

  아이디어 과잉 시대는 이래서 불행하다. 도통 뭐 하나 맘 편히 즐길 수가 없다. 일단 순수성의 의심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참 씁쓸하다. 어쩌다 똘똘한 아이디어를 발견해도 문제다. 그게 창의적인 것인지, 뭔가로부터 영감을 받아 순수한 경의를 담아 고안된 것인지, 대강 스리슬쩍 다른 곳에서 적당히 눈팅해 붙여넣은 것인지를 일일이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다양한 아이디어와 컨텐츠가 하루에도 수도 없이 쏟아지는 현상은 긍정적이나 그 체계적 정리와 접근은 사실상 불가한 현실은 어쩐지 암울하다. 특히 언어적 지리적 장벽에 막혀 원활한 정보 입출력이 되지 않는 우리로서는 더욱 고달플 수 밖에 없고, '설령 베껴왔더라도 한국 안에서 선수치면 무조건 갑이 되는' 해괴한 현실 때문에 이래저래 거슬리는 면도 많다. 마지막으로 믿을 건 미국의 소송 (스포츠) 문화다. 아직까지 너저분한 배상 문제가 걸려 달그락거린단 소식이 없으니 별 문제가 없거나 정식으로 해결봐서 탄생한 설정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도 좋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커피 아이디어 역시 참 마음에 든다. 뱀파이어들이 커피에 피를 타서 마신다? 이 얼마나 우아한 개그란 말인가. 만약 이것이 스피어리그 형제의 독창적 아이디어라면 난 장차 그들의 팬이 될 의향이 있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표현을 빌자면 앞으로 그들 형제의 작품 한 세 편쯤에 '까임방지권'을 주고 싶을 정도다. 만약 그것이 배경과 출처가 있는 유머라면 누가 좀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뱀파이어쪽으로는 과문한 탓에  도통 아는 게 없다. '드라큘라(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92)',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닐 조던, 1994)', '노스페라투(베르너 헤어조크, 1979)', 심지어 '못말리는 드라큘라(멜 브룩스, 1996)' 까지도 숙지했지만 이후 뱀파이어 컨텐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십대 취향 물신 풍기는 '트와일라잇(캐서린 하드웍, 2008)'도 그 난립버석에도 불구하고 보지 않았다. TV쪽에선 '더 뱀파이어 다이어리스(CW, L.J. 스미스 원작, 케빈 윌리암스, 2009~ )'는 물론, 알란 벨의 컴백작인 '트루 블러드(HBO, 샬레인 해리스 원작, 알렌 벨, 2008~ )'마저 두세 편 보다 말았으니 TV쪽에선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WB, 조스 위던, 1997~2003)'가 마지막이었다. 환상 문학이나 코믹스 계열 쪽을 접할 기회가 풍부한 것도 아니고 자료 접하기가 용이한 편도 아니니 더더욱 판세에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태양빛에 의한 급 연소 및 급 소화가 뱀파이어 정화(혹은 회복, 또는 치유, 아님 부활)의 원리라는 주장 역시 그 전거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스피어리그 형제가 이제 막 자연 과목에 눈 뜬 초등학교 6학년 2학기생이 아니고서야 이런 급 낮은 코미디를 구사할리가 만무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다. (20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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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2008) B평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Il Y A Longtemps Que Je T'aime, 2008)
감독: 필립 끌로델
출연: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엘자 질버스테인, 세르주 하자나비시우스, 로랑 그레빌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영화 속 인물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감자형과 양파형이다. 그렇다. 내 맘대로다. 감자형은 몸으로 말한다.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조금 깊숙히 들여다 볼라치면 패이거나 멍이든다. 겉이 아니면 모두 속이니 바깥쪽과 안쪽의 층위 가 없고 농도 구배가 없거나 적다. 그냥 보이는 것만큼의 인물이다. 반면에 양파형은 속으로 말한다. 깊이가 서서히 드러난다. 바스라지게 얇으나 명확하고 질긴 층위가 존재한다. 한 겹 벗겨내면 또 다른 한 겹, 다시 한 겹 벗겨내면 또 다시 한 겹. 그렇게 원심으로, 구심으로 접근한다. 나이테를 따라 속속들이 시간과 기억이 기록되어 있다. 속 겹 깊숙히 배인 향기가 드러나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인물. 그래서 양파형이다. 대표적인 감자형이라면 글쎄, 과거 설경구의 인물들을 선호할 수 없었던 이유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최근이라면 김명민이 분한 인물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배우는 매력적인데, 그가 맡는 역할은 하나같이 납득하기가 쉽지 않은 이상한 사람들이다. IQ도 모자르고 EQ도 결여되어 있고, 아무튼 영혼 없는 기계같아 조금 무섭다.

  소설가 필립 끌로델의 감독 데뷔작인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의 주인공 줄리엣(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은 전형적인 양파형 인물이다. 드라마 속에 미스테리의 틀을 감춘 작품의 구조 또한 그녀의 양파성을 드러내는데 최적화되어 있는 상태다. 15년만에 교도소에서 나와 여동생에게 얹혀살게 되는 이 중년 여인에게 모든 극의 전개 가능성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생 레아(엘자 질버스테인)는, 그리고 또 영화는, 줄리엣이 마음의 빗장을 끌러낼 때까지 그저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한다. 이렇듯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문제에 참을성 있게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다. 과거에 갇혀있는 줄리엣의 상처 치유와 당장 현재를 살아야하는 줄리엣의 사회화, 이 두 가지를 하나의 과정으로 엮어낼 수 있는 것 역시 서두르지도 윽박지르도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 한 겹을 벗겨내 그녀의 비밀 가까이 접근하는 만큼, 가정과 사회에서 '지워진 존재'였던 그녀의 현실 복귀가 진행된다. 이따금 정형화된 템포에 흐름을 예상 가능한 순간이 있지만, 긴장감을 어그러뜨릴 정도는 아니다.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는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캐서린 역으로 잘 알려진 배우다. 프랑스 국적을 얻은 영국인인 그녀는 실제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기도 하다. 나머지 배우 대부분이 프랑스인임을 감안하면, 가족과 공동체에 스며 들어가는 과정에서 어쩐지 겉도는 듯한 묘한 인상을 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과연 그녀가 다른 셀에 그려져 겹쳐진 존재처럼 보이는 순간이 적지 않다. 어울려 웃고 떠들어도 결코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을 숙명. 이것이 그녀의 세심한 연기만으로 가능했던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국적과 외모와 억양을 모두 고려하여 (실제로 영화 초반부 식사 장면에서 조카가 그녀의 억양을 다른 식구들과 비교하는 대목이 있다) 철저하게 계획되어 가능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감탄스럽기만 하다. (201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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