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규칙 바운드/짧은 낙서'에 해당되는 글 32건

  1. 블로그 이전에 관한 공지 2016.10.30
  2. 두들 패드를 소개합니다 (2) 2013.12.12
  3. 배반의 계절 2013.11.01
  4. 창작 블로그와 게임의 법칙 2009.10.29
  5. 낙농콩단의 아홉해를 맞이하여 2009.08.13
  6. 쌍둥이여! 가을에 야구 좀 하자! 2009.06.06
  7. 유입 검색어 요지경 2009.05.19
  8. 모욕 만연의 사회와 사이버 모욕죄 2009.03.15
  9. 무려 김명민, 장준혁 혹은 강마에 2009.02.28
  10. 이사의 어렵고 고단함이란 2009.01.04
  11. 니들이 사는 세상 2008.11.14
  12. 일등주의와 금메달 우선집계 (2) 2008.08.20
  13. 그대가 텔레비젼에게 무엇을 바라든지 2008.06.28
  14.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인 것이다 2008.06.09
  15. 시크릿 : 0교시의 비밀 2008.04.22
  16. 숭례문 블루스 2008.04.15
  17. 불펌 논란을 통해 돌아본 베낌의 문화 2008.04.05
  18. 그럴 바에야 왜 힘들게 물어보셨나요? 2008.04.03
  19. 입 안에 고인 침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있다 2008.02.13
  20. 자아도취: 하지만 난 착하고 겸손한데 2008.01.20
  21. 실용시대의 신유형 영어 학습, 공구리 회화 2008.01.13
  22. 마지막 과외수업: 과외계를 떠나며 2008.01.03
  23. 래미안 광고는 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나? 2007.12.27
  24. 맛소금처럼 흩뿌려지는 첫 눈 아래서 2007.12.15
  25. 혼자 영화 보러 가는게 뭐 어때서? 2007.10.19
  26. 그 집 돌솥비빔밥 (2) 2007.08.10
  27. 쉽게 읽히는 문장이란 무엇인가? 2007.07.03
  28. 악어새 칫솔 2007.06.27
  29. 우리 비 그치면 산책할까? 2007.05.10
  30. 오스카상의 비밀에 관하여 2006.11.14

블로그 이전에 관한 공지

  블로그 이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방랑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쯤되니 그것이 인터넷을 매개로 한 글쓰기의 숙명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2000년 7월 27일 이후로 네 번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 세 번은 서비스 일방 종료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결국 블로깅을 포기 하지 않는 한 이런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은 변합니다. 이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이사오던 순간의 그 블로그가 아닌 것처럼 그때의 티스토리와 지금의 티스토리도 다릅니다. 이번에는 당장 내몰리는 비참한 상황은 아니지만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해놓지 않으면 결국 다시 비슷한 경험을 하게될 것 같단 강력한 예감에 지금부터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번 이사가 끝이 아닐 거라는 사실도 압니다. 결국 몇 년 안에 또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나마 현존하는 선택지들 중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이 설치형 워드프레스라는 걸 압니다만 여전히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어렵게 결정한 여섯번째 정착지는 위블리입니다. 무려 7년만에 홈페이지 스타일로 복귀하는 셈입니다. 꽤나 방대한 양의 Pros/Cons 리스트를 작성하고 현재의 성장세 및 서비스의 지속 가능성을 비교한 결과 내린 결정입니다. 상당히 치명적인 결점 (백업 미지원)이 있고 홈페이지를 통해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일단 드래그 앤 드롭 빌더가 예쁘고 매력적이기는 합니다.

  뚝딱 한 방에 이사를 끝내고 이 블로그를 닫을 생각은 아닙니다. 일일이 포스트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라 지리한 장기전을 피할 수도 없거니와 거기에만 매달릴 여유도 없다보니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블로그 나름의 역할도 있어 앞으로 적어도 1~2년 동안은 이 블로그도 유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기존 포스트들을 다듬고 살을 붙여서 새로운 홈페이지로 옮길 계획입니다.

바뀐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cliche0303.weebly.com


이루기 어려운 꿈인 것은 알지만 더 이상의 이사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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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 패드를 소개합니다

  애플의 아이패드를 갖는 건 오랜 꿈이자 목표었다. 그 사이에 '아이패드'가 '아이패드 2'가 되었고 '아이패드 2'가 '뉴 아이패드'가 되었으며 다시 '뉴 아이패드'가 '아이패드 4세대'가 되었으며 급기야 '아이패드 미니'와 '아이패드 에어'가 등장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아직도 아이패드가 감당가능한 수준의 생활력을 지니지 못했다. 때문에 직접 나만의 태블릿 패드를 개발하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것, <두들 패드 Doodle Pad>이다.



  <두들[각주:1] 패드 Doodle Pad>의 특장점은 다음과 같다.


  • 종이처럼 얇다 (두께가 0.15 mm에 불과).

  • 종이처럼 가볍다 (무게가 겨우 3.8 g).

  • A4 한 장만큼이나 넓다 (8.3 × 11.7 inches).

  • 가격도 종이 한 장만큼 저렴하다 (한 장당 30원 꼴).

  • 안전하고 친환경적이다 (100% 펄프).

  • 광원 소스가 없이도 충분히 밝고 하얗다. 종이만큼 말이다 (94 Bright White).

  • 대단히 플렉서블하다. (휘어지는 것은 물론 심지어 학, 개구리, 장미, 배 등의 모양으로 접을 수도 있다).

  • 쓰기 쉽다 (오직 필요한 것은 펜과 잉크 뿐이다. 종이처럼 말이다).


  <두들 패드 Doodle Pad>를 처음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거 종이 아니야?" 라고 묻는다. (2013/12/12)

  1. 'Doodle'은 끄적거리다하는 뜻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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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Doodle Pad, joke

배반의 계절


  스타벅스에 자주 간다. 한 달에 적어도 다섯 번은 가는 것 같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매장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행여라도 집 근처에 매장이 있었다면 진작에 재정 위기에 봉착하는 상황을 면치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즐겨 마시는 음료는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기본 음료들이다. 예전에는 라떼도 종종 마셨는데 몇 년 전부터 우유가 들어간 음료는 피하고 있다. 프라푸치노 등 이름 어렵고 비싸고 달기까지 한 음료들도 피하고 있다. 그래서 열 번에 아홉 번은 아이스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오늘의 커피 쿠폰이 있는 날에는 오늘의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평소 어느 커피 전문점을 가던지 빨대를 한두 개씩 슬쩍하여 가방에 넣어두는 습관이 있다. 매장이 아닌 곳에서 커피를 즐기기 위해 빨대가 간절한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사무실에서 VIA와 같은 스틱 커피를 타서 얼음을 가득 넣고 마실 때도 빨대가 필요하다. 마트에 가면 싸고 저렴한 빨대를 묶음으로 팔지만, 부러 사기에는 번거롭고 품질도 썩 만족스럽지가 않은 면이 있다. 게다가 VIA만큼은 다른 빨대 아닌 초록 빨대로 마시고 싶은 마음도 있다.



  조금 웃긴 일이지만, 가끔은 매장에 방문해서 직접 음료를 주문하여 마시면서도 가방에 넣어두었던 빨대를 꺼내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빨대통이 있는 선반까지 다시 다녀오기가 너무 귀찮아서다. 그렇게 꺼낸 빨대를 뜯어보면 당연히 신뢰의 초록 빨대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아주 드물게 출처를 알 수 없는 다른 색깔 빨대가 튀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보라색 빨대[각주:1]라던가. 실수로 한 번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보라색 빨대를 사용한 적이 있는데, 스타벅스 매장 안에서 버젓이 그런 이적 행위를 저지르다 보면 뒷통수가 여간 따가운 것이 아니다. 창피해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나는 스타벅스의 골드 회원이다. 그런 엉뚱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충성도만큼은 여전히 변함없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별을 내가 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콩보다는 별을 많이 모았다. 정말이다. (2013/11/01)

  1. 보라색 빨대는 커피빈(The Coffee Bean & Tea Leaf)의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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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joke

창작 블로그와 게임의 법칙

  <창작 블로그>란 지난 여름,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의해 제안된 메타-블로그의 이름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창작물 연재 공간'이란 것이 그들이 말하는 메타의 성격인데, 개인 블로그에서 작성한 창작물 중 일부를 선택하여 송고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 자유도가 높은 방식의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이는 아주 새로운 아이템은 아니다. 이미 여러 차례 비슷한 컨셉트의 시도가 있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방 언어를 넘어 모니터로 이야기를 읽는 문화는 일찍이 이우혁, 유일한, 이영도의 PC통신 연재물 시대부터 가능성을 보였던 것이고, 까페, 클럽, 커뮤니티 등에서의 의욕 충만한 유저들의 이합집산으로 명맥을 이어왔던 것이며, 싸이월드의 <페이퍼>라는 아마츄어 창작 공간으로 소기의 성과를 올려왔던 것이다. <창작 블로그>의 가장 큰 의미는 인터넷 서점이라는 기반을 통해 사진, 그림, 음악, 동영상 등에 밀려 점차 설 곳이 없어진 텍스트 중심의 창작물에 창작자-수요자 네트워크를 이룰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는 부분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 <창작블로그>의 상태는 그다지 매끄러워 보이지 않는다. 두 달만에 연예물과 연애물이 대부분을 집어 삼켜버리더니만, 창작과 무관한 블로거들까지 너도 나도 몰려 진입하여 이미 작은 <올블로그> 혹은 <블로그코리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창작물의 정의를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봐야하느냐는 논란의 여비가 다분한 부분이겠으나, 또 반대로 창작의 범위를 충분히 넓게 잡으면 세상에 창작하지 않는 블로그가 없을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에 이는 굉장히 애매한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창작의 정의에서 중요한 요건은 두 가지다. ①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 ② ‘독창적인 것’. 드라마, 영화, 예능프로, 연예인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기술하는 연예물은 어느 쪽에도 사실 해당사항이 없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다음 View>에 한시간에도 수십건씩 같은 주제의 비슷한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는 마당에 누가 처음이고 누가 나중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격려, 호응, 주문, 푸념, 자기 만족에 가까운 방청객스런 내용을 두고 독창성을 논하는 것은 사실 좀 어폐가 있는 일이다. 적어도 <올 봄엔 나도 한 번? 간지 작살 스타 레깅스 화보>, <내 손으로 그려봤어, 우유빛깔 알천랑>은 창작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1박 2일’이 어쩌고 저쩌고다>나 <’무릎팍 도사’의 어쩌고 저쩌고를 배워라> 역시 창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현재 <창작블로그>에서 초청 연재작을 제외하고는 시, 소설, 에세이, 인문 칼럼에 속하는 글이 주목받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가장 인기 있다는 열 편의 연재물을 살펴보자면, 연예 이야기가 세 편, 연애 이야기(경험담/컨설팅)가 두 편, 군대 이야기(경험담)가 두 편이다. 이 중에 알라딘이 천명한 '문학적 감수성'에 부합하는 연재물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그러한 포스트들은 이미 기존에도 <올블로그>, <블로그코리아>, <다음 View>를 통해 높은 인기를 모으고 있던 (혹은 그와 다를 바 없는) 것들이다. 고로 나의 의문은 이렇다. 왜 굳이 그들은 <창작 블로그>라는 범주에까지 진입을 하였던 것일까. 이미 생산집단과 소비집단의 네트워킹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곳이 많은데 기대할 수 있는 트래픽의 정도도 많지 않은 신생 메타-시장까지 점령을 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자신의 포스트를 <다음 View>의 ‘창작’ 카테고리로 송고하는 것일까? 유감스럽지만 많은 경우에 그렇지 않다. ‘문화/연예’나 '시사', 혹은 '라이프' 카테고리를 선택한다. 분명 이상한 일이다. 굳이 <창작블로그>라는 메타 블로그에 가입하여 송고한다면 스스로의 포스트를 창작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인데 왜 <다음 View>에선 ‘창작’ 카테고리에 넣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창작’ 카테고리가 가장 인기가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바로 이런 것이 문제다. 시장을 특성화하는 것이 서비스 기획자의 몫이라면 자신에게 알맞은 시장을 찾아가는 것이 서비스 이용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미 블로그라는 매체의 성격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블로그로 명망을 쌓는 이들이 생겼고 블로그로 수익을 올리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미 하나의 층화된 사회이자 엄연한 시장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경쟁과 점유의 문제가 발생한다. 때문에 기존 시장에서의 성공으로 방대한 구독자를 보유한 소위 파워 블로거들이 특성화 미세 시장을 공략해도 좋은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그 메타 시장의 특성화 방향과 해당 블로그의 컨텐츠가 맞으면 할 말은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데 무작정 진입하여 누적 이익을 통한 우위를 점한다면? 분명 조금은 고민해 볼 문제다. 굳이 이런 지적을 하는 이유는 자신과 맞지 않는 시장에 진입한 블로거들만을 탓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걸 조율하지 못한 알라딘을 탓하기 위함도 아니다. 오히려 절망적인 것은 그 소비집단인 알라딘 유저들의 클릭과 추천이다. 설사 적절하지 않게 송고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걸 소비하는 집단이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만큼의 성숙이 이루어져 있다면 저절로 교통 정리는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TV 이야기 재밌다. 연예 이야기 좋다. 하지만 굳이 <창작 블로그>라는 범주 안에서 추천할 필요까진 없다. 만약 정말 그렇게 좋은 내용이라면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난 당신 연재가 마음에 든다. 하지만 <창작블로그>에서는 적절하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차라리 <다음 View>에 가서 읽고 추천하겠다.” 그 적절성의 기준이 우리 사이에서 어느 정도 암묵적으로 합의가 되어야 비로소 시장 세분이 가능하다. 현실에서는 황석영 선생의 단편 1회분 조회수보다 <올 봄엔 나도 한 번? 간지 작살 스타 레깅스 화보>, <내 손으로 그려봤어, 우유빛깔 알천랑> 따위 포스트의 조회수가 압도적으로 높다. 구효서 선생의 단편 1회분 추천수는 <’1박 2일’이 어쩌고 저쩌고다>나 <’무릎팍 도사’의 어쩌고 저쩌고를 배워라> 따위 포스트의 추천수를 절대 넘지 못한다. 특급 작가의 초청작도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인데 아마추어 무명씨들이 정말 정직하고 성실하게 '창작'의 취지에 걸맞는 포스트를 작성하고 발행하여 경쟁이 가능할까?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종종 이런 푸념을 듣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 하나 잘 된다고 하면 전부 다 우르르 몰려가는 경향이 있어 문제다.” 반은 맞는 말이고 반은 틀린 말이다. 유독 우리에게 심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경향>이야 사실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순히 <경향>이 아니라 방법이고 원칙이다. 대개 잘 되는 바닥으로 몰리긴 몰리되, 그 안에 최소한의 일관된 매커니즘은 내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저 개개인이 나름의 원칙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시장 구성원간에도 어느 정도는 합의된 원칙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이러한 원칙들은 마땅히 생산자와 소비자 양측 모두에게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하며, 이에 준하지 않는 참여자에게 정당한 균형과 견제를 강제할 수 있을만큼의 적절함을 가져야 한다. 고로 우리의 '문제'는 이렇게 다시 정정될 수 있겠다.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원칙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몰려가도 되는 바닥과 몰려가선 안되는 바닥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혹은 큰 문제의식 없이 그런 행위를 용인한다는 것이다. 게임의 법칙’이 작동하는 범위 안에서 대등한 구성원간의 견제와 균형이 전제되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무한 경쟁’은 전혀 다른 의미다. 그렇기에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똑같은 쏠림 현상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결과의 질과 체계와 균형이 다른 것이다. 이는 물론 알라딘 <창작블로그>를 두고 시작한 이야기지만 그 외의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적용이 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09/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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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농콩단의 아홉해를 맞이하여

  온라인 세상도 오프라인 세상과 똑같다. 활달한 사람의 아이디가 있고 소극적인 사람의 아이디가 있다. 지난 9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그게 백퍼센트 자신의 모습은 아니다. 실제로는 진지하고 과묵한 성격인데 온라인에선 수다쟁이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덜렁덜렁한 성격인데, 온라인에서는 꽤 조리있고 사려깊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성격이 완전 똑같은 사람도 있으니, 바로 여기 기면중(嗜眠中)씨가 바로 그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현실에서도 기면중씨는 인간관계의 극단적 축소를 통해 무(無)를 넘어 해탈(解脫)에 경지에 이른 양반인데, 온라인에서 역시 상호 활발히 친분을 쌓고 소통 교류하는 다른 블로거들과는 달리 ‘나홀로 독고다이 인생’을 자랑하고 있다. 여기엔 그가 먼저 남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우선 이름, 아이디, 사진, 블로그명, 포스트명 등 모든 면에서 그다지 ‘클릭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가설(假說)도 있다.

  그 증거로 제시할만한 것이 있다. 기면중씨는 지난 2007년 3월 사람 많고 사이 좋기로 유명한 C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삼일동안 인터뷰가 소개되었다. 보통 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사람들은 일주일간 급격한 방문자 수 증가 및 댓글 증가를 경험하게 된다. 과연 기면중씨의 경우에는 어땠을까? 그의 동의를 얻어 일차적 인터뷰 조회수 결과를 확인하였다. 이는 C사이트의 메인페이지에서 기면중씨가 소개된 인터뷰 페이지를 조회해 본 이용자들의 수를 의미한다. 참고로 이용자가 인터뷰를 클릭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미쳤을 판단 근거는 이름과 블로그명, 단 두 가지 뿐이다. 최근 소개되었던 27명의 조회수 목록은 표 1과 같다. 계산 결과에 의하면 C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인터뷰가 소개되는 것은 평균 7365명의 조회를 유발한다. 물론 우리는 여성 상위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남성 블로거의 평균은 그보다 약간 낮은 수준고 여성 블로거의 평균은 그보다 약간 높은 수준. 허나 기면중씨의 조회수는 남성 평균의 반에도 못 미치는 3034회로, 인터뷰의 영광을 누린 27명 중 26등이다. 같은 조건에서 같은 정보만큼을 공개하여 소개되었음에도 그 정도에 그쳤다는 것은 기면중이라는 이름, 아니면 낙농콩단이라는 블로그명이, 혹은 그 모든 요소들이 융합되어 '어쩐지 클릭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표 1. C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게재된 블로거 인터뷰 조회수, 최근 27명 ]


[표 2. C사이트 인터뷰로 말미암아 실제 블로그로 유입된 방문자의 순 증가율, 최근 27명 ]

  다음 표 2는 인터뷰 조회 이후 실제 블로그로 찾아 들어온 방문자의 순 증가율이다. 이 결과에서 역시 기면중씨는 14%를 기록, 가장 방문자를 유도하지 못한 블로거 중의 하나로 꼽혔다. 이는 이름과 블로그 명이 매력적이지 않았을 가능성 외에도 인터뷰 내용이 형편없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조회자들에게, ‘굳이 시간을 들여가며 클릭하여 내용을 읽어볼만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뜻일 게다. 또한 이상의 결과는 기면중씨가 오프라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온라인 세상에서도 사람들과 담을 쌓고 <날 건드리지 마쇼> 라는 분위기를 내뿜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데 아주 적합한 자료인 것으로 사료된다.

*

  2009년 07월 27일은 온라인에서 내가 이 쓸데없는 짓을 시작한지 9주년이 되는 날이다. 몇 번 뒤엎기도 하고 몇 번 포기하려고도 해보았던 것이 어느새 9년이다. 첫 삼년을 비록하여 많은 기록을 날렸지만 그만큼 쌓이기도 많이 쌓였다. 아홉해나 포기하지 않고 이 미친 짓을 해왔음을 높이 산 래리 킹은 나를 자신의 토크쇼에 불렀다. "대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持論)은, 내가 아홉 해동안 글을 구상하고 써가며 쌓아낸 개똥철학과도 나름 통하는 면이 있다. 래리는 나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고, 나는 앞으로 아홉 해 동안 더 글을 쓰는 것이라고 답했다. 내 꿈은 일년을 주기로 계속해서 바뀔 것이다. 대망의 1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 7월 27일에는 앞으로 십 년동안 더 이렇게 블로그를 운영하며 글을 쓰고 싶다고 대꾸할 생각이다. 다음엔 열한 해, 그 다음엔 열두 해, 쓰는만큼 더 쓰고 싶어지고, 쓰는만큼 욕심도 늘어나는 것이 글인가 한다. 지금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그렇게 차근차근 나가다보면 언젠간 지금보다 나아지는 날도 오겠거니 한다. (200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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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여! 가을에 야구 좀 하자!

"(전략) 창단 첫 꼴지라는 수모를 당한 트윈스가 대대적인 리빌딩에 들어간 모양이다. 우선 김재박이 친정팀인 LG 트윈스에 감독으로 돌아왔다. 감독급으로 평가받는 특급 코치 김용달과 양상문도 각각 타격코치와 투수코치로 친정팀에 돌아왔다. 영원한 LG의 특급 소방수 김용수도 투수 코치로 나섰다. 시댁(媤宅)에서 소박을 맞은 것도 아닌데 너도 나도 모두들 친정으로 돌아오고 있다. 여기에 꾀돌이 유지현-검객 노찬엽-로보캅 송구홍의 코치진 구성은 꼭 1994년의 영광을 기억하게 만든다. 어디 그 뿐인가. 뉴 페이스들도 있다. 지난 봄에 영입한 해외파 봉중근이 내년에는 경기에 뛸 수 있다. FA 대어 박명환을 잡아서 40억 주고 계약해 버렸다. 나름 검증되었다는 외국인 투수인 삼성의 팀 하라칼라도 데려왔다. 말이야 많았지만 어쨌든 거포(巨砲) 마해영도 남았다. 비록 프랜차이즈 스타 이병규가 비록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고 옆집에게 지명권이 있는 김선우까지는 트윈스로 데려올 길이 없어보인다 할지라도, 그 다음엔 또 무슨 깜짝 발표를 할런지는 모를지라도, 분명 전력 손실보다는 전력 보강이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잖아도 내년에 뭔가 일을 내지 않겠냐는게 요즘 세간에서 회자(膾炙)되는 말이다. 다만 매년 납량특집 시리즈물로 거듭되는 FA 징크스를 이번만큼은 깰 수 있느냐, 매년 들어오는 그 수많은 유망주들은 언제쯤에나 쑥쑥 자랄 예정에 있느냐, 손지환이나 이용규같은 걸출한 재목을 남의 팀에 거저 던져준 그 형편없는 안목(眼目)은 분리수거하여 잘 가져다 버렸느냐, 닉네임 여우 - 김재박의 입담은 과연 김성근과 이상훈과 김재현의 저주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강할 것이냐, 등등의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한번 지켜볼 일이다. (2006년 12월 21일 일기 중에서……)"

  그때 이후로 두 시즌이 지났다. 그 사이 페타신님과 옥춘이형이 합류하여 <성공한 용병들>이 되었다. 또한 이진영과 정성훈이 합류하여 <성공한 FA들>가 되었다. 비록 박명환이 베이스 시절 같진 않다더라도 봉중근의 애칭이 '봉타나'가 되었다. 게다가 레전드 박종호 형님도 돌아오셨다. 물론 이용규, 추승우, 김상현, 이성열, 최승환을 남의 팀에 거의 거저로 던져주는 삽질도 여전히 이어졌지만, 어느 정도 이제는 팀의 구조가 안정화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 4월과 5월초의 매서운 기세로 올해만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따금 가슴이 콩닥거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결국은 또 같은 상황이다. 일단 불운이 시작되고 악재가 덮쳐오니 예전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누가 <2009 마구마구 프로야구>아니랄까봐 마구마구 터져나온다. 에휴. 이제 남은 건 한숨뿐이다. 2년이 지났는데 왜 같은 문제가 그대로 똑같이 반복되는 것일까. 마냥 안타깝고 안타까운게 이 어린 팬의 마음. (2009/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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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Sports

유입 검색어 요지경

  누구나 자신의 블로그로 유입되는 검색어를 확인할 수 있다. 꼭 확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몰라도 사는데 지장없는데 목록을 열어보지 않고 견딜 재간이 없다. 흡사 나탈리 포트만과 키이라 나이틀리와 루디빈 새그니어와 버지니 레도엔과 에이제이 쿡의 장점만을 취사 조합하여 탄생시킨 시몬적 존재의 유혹을 덤덤하게 견뎌낼 확률과 엇비슷하게 희박하다. 그렇게 굳이 확인하고 나서야 끄덕끄덕, 어느 포스트가 주로 어떻게 검색이 되는구나를 보며 나름 흥미로워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셀레브리티의 이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개 인터넷 검색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대강 짐작이 가는 부분. 하지만 이 포스트를 작성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는 해괴한 검색어의 목록을 소개하고 싶어서다. 솔직히 하기와 같은 문제적 단어들을 검색창에 집어넣은 사람들이 어이하여 나의 고상한 블로그로 방문하게 되신 것인지 거국적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고로 가장 황당했던 사례를 열다섯가지 고심 끝에 엄선하여 15위부터 1위까지 차례로 소개하는 바이다.

15위. LA 라디오코리아 DJ 김영준
: 김영준이라는 이름은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편. 교수, 의사, 가수, 배우, 영화감독, 레슬링 해설가, 학원 교사 등이 있는데 다들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양반들이라 (이름에 이미 스며있는 숙명이다) 딱히 동명 이인의 존재로부터 찐한 인상을 받아본 적은 없다. 심지어 구글에서 김영준을 검색하면 내가 세번째로 나올 정도(1위 학원 교사, 2위 가수). 라디오 DJ 김영준씨가 있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14위. 아이샤도우 하는 법
: 아이샤도우 하는 법을 내게 물어서 뭘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13위. 9살여자아이가 오줌을 지려요
: 소금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드릴 의향이 있다.

12위. 우황청심환먹고사이다먹고
: 어쨌든 띄어쓰기 요망.

11위. 사타구니사마귀
: 과문한 탓인지 이런 종의 사마귀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10위. 사십대 여성과 데이트
: 어떻게 검색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반댈세.

9위. 실제외계인사진
: 진실은 저 너머에 있겠지만 실제 외계인 사진은 이 블로그에 없다.

8위. 나쁜남자 알집
: 압축 프로그램 알집이 나쁜 남자라는 건지,
나쁜 남자들을 몽땅 모아 압축해버린 ZIP파일이 있단건지.

7위. 천안단란주점
: 찐하게 놀아보려던 아저씨들, 실망이 크셨겠다.

6위. 항문에 밀어넣어
: 당신은 누구시길래 검색창에 이런 걸 밀어넣는 것인가.

5위. 서울에서강원도거진빠른길
: 하이튼 뭔 노무 질문이 이래 구체적이래요.

4위. 여체의 미
: 만에 하나 관련 자료가 있었다면 혼자 고이 간직했겠지 굳이 업로드를 했겠습니까?

3위. 누나의 자위행위
: 이게 다 베르톨루치 할아버지(몽상가들, 2007) 때문이다.

2위. 태연 목욕하는 모습
: 이런 불완전 변태 나쁜 브로콜리같은 인간들! 어쩜 갓 스무살 먹을 애를 두고!

1위. 불법 할머니의 썩은 물을 같이 마신 제자
: 동서남북으로 읽어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종의 애너그램인가? (200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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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 만연의 사회와 사이버 모욕죄

  사이버 모욕죄는 백분씩이나 토론할 ‘꺼리’도 못된다. 딱 두가지만 염두에 두면 되는 문제다. 첫째는 과연 가상공간에서의 모욕이 법으로 해결할 문제냐는 것이다. 더욱이 비친고죄와 같은 극단적인 형식으로. 둘째는 과연 도를 넘어선 작금의 모욕 문화라는 것이 비단 사이버 공간에만 한정된 문제냐는 것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요즘 중고생들이 무슨 얘기를 어떻게들 하는지 들어보라. 대개는 남의 흉이요 남의 욕이다. 더구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민망한 욕설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단 한 마디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점잖은 어른들이라면 요즘 애들 문제라며 혀를 끌끌차겠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애들이 아직 어리기에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다 자란' 어른들의 사회가 정녕 그렇지 않다고는 감히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들이 그런 말을, 그런 태도를 과연 어디에서 배웠겠는가. 가식으로 치장했을 뿐 하나 다를 것이 없는 어른들의 말과 행동에서 배웠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경험하면서도 '사회생활의 일부'라고 애써 삼켜넘기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쏟아내면서도 '사회생활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바로 그것이다. 오래 산 자는 나이 어린 자를 모욕하고,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모욕하며, 배운 자는 덜 배운자를 모욕한다. 혹은 그래도 된다고 믿어진다. 이처럼 모욕은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넘어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 깊숙히 물들어 있는 병폐다. 현실에 없는 모욕이 가상에서만 활개를 칠리가 만무한 것이다. 고로 의문이 생긴다. 모욕이라는 것이 그 정도며 성격과는 상관없이 음성으로 배출되어 공기중에 흩어지는 경우엔 용납가능한 것이고, 활자화된 기록으로 남는 경우엔 용납 불가한 것인가.

  물론 파급력의 차이는 인정한다. 버스에서 중고생들이 내뱉는 말의 칼침이란, 인터넷 악플과는 달리 많아야 그들 또래집단 몇몇 안에서만 부유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엄연히 현실에 넘쳐나는 모욕을 사이버 공간만 틀어막음으로 해결하려는 근시안적 자세다. 당신들이 염려하는 것은 모욕에 관대한 이 사회의 병든 문화인가, 아니면 그 모욕이 당사자들에게 전달되어 보여지는 시각적 매개인가. 후자를 통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은 흡사 썩은 사과를 솎아내고 싱싱한 사과만 골라 담은 바구니를 견본삼아 그 과수원에서 나오는 사과 모두의 품질을 가늠하자는 얘기처럼 들린다. 사이버 공간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 곳의 의견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의견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 그 해괴한 죄를 만들려는 무리들이 이전까지 견지해온 주장 아니었던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그 과수원에서 열리는 사과 모두의 품질이 좋아야 이뤄지는 것이지, 썩은 사과를 부러 담지 않은 견본 바구니를 두고 만족하는 정도로 달성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인터넷 악플이 사라진다는데 누가 반대하겠나. 눈살 찌푸리지 않아도 될 건전한 정보의 바다, 누가 싫다고 하겠나. 허나 모욕문화가 이미 넘쳐나는 현실을 두고 사이버 공간만 틀어막아 뭔가 해결해보겠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200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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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joke, Social Issue

무려 김명민, 장준혁 혹은 강마에

  또 김명민이 화제다. '하얀거탑'의 장준혁 신드롬으로 의료, 보건 및 보험 관련 CF를 석권한지 일년하고도 반만이다. 이번의 까칠한 지휘자 강마에 또한 백윤식을 모사한 듯 보이는 독특한 목소리와 더불어 가히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있다. 광고 속 모습이 증명하듯 대중들은 이미 배우 김명민과 장준혁, 강마에를 교차 혼동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가 연기하는 이러한 역할들이 기존의 한국 드라마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위치에 있는 것이라 여기는 듯 하다. 고로 신드롬이다. 무려 '장준혁 신드롬'이었고 무려 '강마에 신드롬'이었으며, 결론은 무려 김명민 신드롬이다. 물론 있을 법한 현상이다. 허나 그 이면에는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의문이 자리한다. 과연 이 뜨거운 열광이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다. 가령 끊임없이 성공만을 좇다가 파멸하는 장준혁에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꼈노라고 고백했던 것이 과연 정상적인 반응인 것인가. 한편 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만족적 위선으로 희망을 주지 않겠다는 강마에의 자기만족적 프로페셔널 원칙론, 그리고 그렇게 촉발된 폭력적 막장 개차반 리더쉽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음은 또 어떤가. 과장된 허구의 인물들임을 아무리 감안하더라도 이런 기현상이 은연중에 우리들의 이중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지우기가 어렵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 '하얀거탑' 속 먹고 먹히는 정글 사회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모두 동의한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라고도 인정한다. 그 치열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순진함에, 넌 아직 사회를 몰라, 비웃어보이기도 한다. 부정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취미가 일이 되면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법이란, 강마에의 별 대단할 것도 없는 '뻔한 통찰'에 대응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좋아하는 일을 하길 원하고 취미처럼 일하길 원한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그런 행복을 누리고 있음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 자신의 취미와 일을 합치시키려 애쓸때면, 넌 아직 사회를 몰라, 어른된 척을 한다. 마찬가지로 부정하는 한편으로는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연 미친듯이 성공만을 향해 폭주하는 것이 옳은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이 사회의 성공한 큰 어른들이 하나같이 이주완 과장(이정길)을 닮았고 그 아래서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작은 어른들이 하나같이 장준혁을 닮았음이 과연 우연인지, 역시 누구도 묻지 않는다. 과연 너와 나의 재능 유무를 가늠하고 평가할 절대적 권능이 정녕 강마에와 같은 몇몇 난 놈들에게 주어진건지, 이 또한 누구도 묻지 않는다. 그저 어떤 계기로 잠시 살짝 관대해진 그들, 천재들의 베품에 기대어 황송하게도 꿈을 꿀 권리를 빌어먹는데 만족할 뿐이다. 때문에 '베토벤 바이러스'속 아마츄어들의 반란은 '코러스(크리스토퍼 파라티에, 2004)'나 '포 미니츠(크리스 크라우스, 2006)', '시스터 액트(에밀 아돌리노, 1992)'등 숱한 음악 영화의 전례에서 경험했던 가슴 뜨거운 기적들과는 완연하게 다르다. 감동은 커녕 그 어떤 도식적인 영화들보다도 훨씬 작위적이다. 어쩌다 관대해진 천재가 영도력을 발휘, 장삼이사들을 단단하게 무장시켜 이뤄낸, 차라리 이적신화(異跡神話)에 가까운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천재가 십만명의 범재들을 먹여살리고, 어디에서 많이들 들어본 스물일곱 이거니씨스런 이야기가 아니냐는 말씀. 그러고보면 강마에의 '지휘자'란 역할은 더없이 적절한 설정이 아닐 수 없는기라.

  공교롭게도 장준혁과 강마에는 똑같이 독학과 자수성가의 결과 탄생한 성공한 천재들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양반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해봤어>식의 경험주의 화신이고 십만명에 한 명 꼴로 있을까 말까한 <실패는 없다>식의 전근대적 리더쉽의 소유자다. 그럼에도 이들은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유능하다는 (혹은 유능해보인다는) 이유로 너무 간단히 합리화가 된다. 빵점짜리 리더쉽은 누가 뭐래도 빵점짜리다. 사회적 성공이 도덕적 허물까지 덮어주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은은 분명하다. 간헐적으로 드러난 미량의 인간미 또한 갖은 비인간적 행태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극적 효과로 위해 만들어진 해피엔딩이 그들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어서야 곤란한 것이다. 분명 이상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배우 김명민에게 느낀 호감을 장준혁, 강마에에게 투영하고 그로부터 이 사회의 장준혁, 강마에를 긍정하는 것은 엄연한 오류다. 혹은 백번 양보해 장준혁, 강마에가 보여준 눈꼽만큼의 인간미에 동의한다고 치더라도 그런 괴물들을 탄생케한 사회 시스템이나 사회 분위기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유효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장준혁 신드롬'이나 '강마에 신드롬'은 애당초 우리 사회의 문제적 단면을 반영하기에 촉발된 것인데, 어째서 누구도 그 현상으로부터 원인을 되짚어 반성하거나 성찰하자고 말하지 않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래도 피해자쪽에 가까울 사람들이 가해자에 가까울 사람을 도리어 영웅시 한다는 사실 - 정말 영원불멸의 미스테리지 않습니까? 당신은 장준혁만큼 잘난 사람인가? 강마에만큼 잘난 사람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치여 괴로워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인가? 혹시 바로 지금 그들처럼 '성공한 괴물'로 자라나길 강요받으며 괴로워하는 중은 아닌가? 이 뜨거운 신드롬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다시 고민되어야 하는 것일테다. (200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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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의 어렵고 고단함이란

  이사의 어렵고 고단함이야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홈페이지를 이사한다는 것 또한 보통의 일은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몇 년에 걸쳐 박아 두었던 것들이 먼지를 풀풀내며 쏟아져 나오는데 그걸 다 어떻게 짊어지고 와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데다가, 가져온다고 그대로 다 올려두기에는 부끄러운 것이 많아 적잖이 갈등마저 생긴다. 무엇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지원해줄 도구가 하나도 없다는 것 - 그러니까 직접 마우스로 드래그를 하여 메모장으로 복사, 다시금 새 둥지에 붙여넣기를 하는 방식으로 하나 하나 글을 옮겨야 한다는 것인데 이 또한 한두개일 때 가능한 이야기이지 게시물 수가 칠팔백개에 이르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뛰고, 다시 미칠 노릇이다. 지금의 내 홈페이지는 2년 전, 꼬박 한달이 걸려 노가다로 하나 하나 게시물을 옮겨낸 곳이다. 당시 나는 '제발 다시는 이딴 이사를 하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는데 야속하게도 또 같은 상황의 반복되어 버렸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셈이지, 뭐. 스리슬쩍 바뀐 이용 약관, 첨부파일 용량 제한, 트래픽 제한, 검색 제한, 손발이 꽁꽁 묶였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말하자면 2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다. 여전히 내게는 스스로 도메인을 사다가 홈페이지를 만들 재주가 없다. 여전히 내게는 누구처럼 웹 디자이너 여자친구가 없다. 여자친구도 없는데 웹 디자이너 여자친구씩이나 있을리가 만무하다. 요즘은 '블로그 포장이사' 서비스도 생겼다지만 역시 이런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없다. 결국 선택은 다시 노가다로 복사하여 다시 붙여넣기. 그리고 게시판형 홈페이지를 포기하고 다시 블로그로 돌아오는 것. 억울하고 슬픈 일이지만 누구를 탓하랴. 진작에 옥석(玉石)을 가려보지 못한 내 탓인 것을. (200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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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사는 세상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보니 한 드라마에서 드라마 PD역을 맡은 송혜교가 열변을 토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우리도 유아틱하게 순정이나 운운말고 미드처럼 쿨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드라마 만들어야 된단 얘기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멍멍이 초본식물 뜯어먹는 소리람. 누누이 얘기하지만 한국 드라마의 문제는 연애의 쿨하고 쿨하지 않음이 아니다. 니들 말마따나 ‘순정’ 배격하고자 ‘욕정’ 그리는 것이 '솔직한 드라마'의 정의라면, 우리에겐 이미 그런 드라마가 팔도강산을 빼곡히 메울만큼 쌔고 쌨다. "클리셰를 깨자"는 그 말 자체가 우리에겐 지독한 클리셰다. 흡사 나온지 20년도 넘은 '흥부 놀부 뒤집어보기' 따위의 구태한 신드롬이 재탕되는 듯, 아! 너무 지루하여 견딜 수 없는 말이야. 진작부터 나오던 포맷이고 진작부터 소비되던 패턴이다. 새삼스럽게 다시 주장할 필요가 없다. 가령 당신들이 예로 든 ‘그레이 아나토미’가 우리나라 드라마와 뭐가 다르냐는 말이다. 기술력, 구성력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월등하지만 겉내용만은 오십보 백보다. 메러디스 그레이와 닥터 쉐퍼드는 단연컨대 미드계를 통틀어 가장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캐릭터들이 아니던가? 우리도 반 년치 제작비를 한 편에 홀랑 쏟아붓고 젊고 재능있는 작가들 드림팀으로 만들어서 일년에 딱 사십분 분량 스물 네편 대본만 사전에 완성하게 하라면 ‘그레이 아나토미’까진 아니어도 ‘그래, 이 아놔 도가니’쯤은 아마 충분히 나오지 않겠나. 이 양반들아,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자빠진건가. 명색이 방송계 현실을 다루겠노라 공언하는 드라마에서, 명색이 PD고 작가라는 양반들이 모여서 한다는 얘기가 고작 칙릿 소설의 철부지 주인공들처럼 '순정에의 강요'만 갈아엎자면 모두 리얼리티가 된다는 궤변이라니. 방향을 잘못 잡아도 단단히 잘못 잡았다. 우리 드라마가 한계에 다다른 이유는 '순정에의 강요' 때문이 아니다. 순정과 욕정의 문제도 아니고 쿨하고 쿨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깊이고 철학이고 윤리고 관용이고 영혼의 문제다. 우리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깊이가 없다. 안쪽의 내밀함을 보여주는 법이 없다. 누구도 교양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나'를 넘어 우리의 영역을 고민하려는 시각이 전무하다. 우리가 되지 못한 '나'들은 대개 겉을 가장하고 부풀리는대만 급급하다. 심지어 철부지 메러디스 그레이보다도 인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 아무리 우리가 교양이 없어도 무방한 사회에 살고 있은들 드라마 속 인물들까지 교양없음을 떳떳히 자랑해서야 되겠는가. 우리 드라마 속 삶의 모습은 하나같이 파장과 영감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는 엷디 엷은 개인사다. 부러 투정하지 않아도 지금 충분히 욕망지향적인데 그걸 돌아볼 반성의 눈을 가지지 못했단 것이 문제란 얘기다. 그 세상에 사는 당신들이 소위 미드에서 배워야할 건 만인이 만인을 공유하는‘그레이 아나토미’의 러브 라인도 아니고 허영과 된장으로만 가득한 ‘섹스 앤 더 시티’도 아니다. 'ER(NBC)'의 뜨거운 인간미다. ‘식스 핏 언더(HBO)’의 날 선 통찰이다. ‘웨스트 윙(NBC)’의 양심과 관용이다. '더 프랙티스(ABC)'의 참된 용기다. ‘보스턴 리갈(ABC)’의 가슴 벅찬 자조다. 'CSI(CBS)'의 직업 철학과 윤리적 자문이다. "웃기지마라! 양키들이 정말 그렇게 사냐?" 뻔한 반박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요는 그들 중 누구는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다. 요는 그들은 적어도 <있음>을 추구해야 한단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헌데 근래 몇 년간 당신들은 미드의 외피만을 벗겨오는데 급급했다. '보스턴 리갈' 앨런 쇼어의 최후 변론에 가슴이 먹먹해져 채널을 돌렸을 때, 우리 드라마에선 재벌 2세와 여배우의 억대 위자료 소송을 놓고 법전 한 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할 것 같은 철딱서니들이 엇갈린 사랑 싸움을 벌였다.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것은 결국 창작자의 對 권력, 對 자본, 對 양심 전쟁임을 역설한 명작 '스튜디오 60 온 더 선셋 스트립(NBC)'의 감동이 무색하도록 방송계를 다루는 우리의 드라마들은 연예 권력간 알력 다툼을 비롯한 이해불가의 해괴한 이야기만 마냥 되풀이하여 소비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쿨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드라마? 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건가? 아니, 지금 니들은 도대체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 건가? (200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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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주의와 금메달 우선집계

  올림픽에서 국가별 메달집계를 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선 원칙적으로 공식적인 '국가별 종합메달순위'란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어떤 나라들은 우리처럼 금-은-동 순으로 정렬을 시키고, 다른 어떤 나라들은 미국 언론들처럼 메달의 총합계 순으로 정렬을 시키는 차이가 발생한다. 전자는 속칭 <금메달 우선집계>고 후자는 속칭 <메달 총합계>다. 엄연히 각각 장단점이 있으니 둘 중에 어느 쪽이 옳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한번쯤은 현재의 <금메달 우선집계>에서 <메달 총합계>로 시선을 바꿔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반대론자들은 총합계의 방법이 금-은-동 사이의 엄연한 질량 차이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한 끝 차이로 반영되지 않는 4등의 피와 땀은 마찬가지니 딱히 공평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맞는 얘기다. 그렇지만 그것이 총합계를 반대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4등의 피와 땀이 보답받지 못하는 이치가 자명하듯이 금-은-동의 위대한 질량 또한 불변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막말로 <메달 총합계>를 취한다고 금메달리스트의 영광과 이력과 향후의 혜택이 동메달리스트와 결코 같아지지는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자칫 오해하기 쉬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금-은-동의 질량 차이는 어차피 선수들 개개인에게 개별적으로 반영될 것이다. 국가별 메달집계를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마치 <메달 총합계>가 순위권에 든 개별 선수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공평치 못한 수단처럼 여겨지는 이유가 뭘까? 정작 선수들 본인으로서는 가시적 손해가 없는데 말이다. 손해가 있다면 어떤 손해일까?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흡사 "조국에 더 기여해놓고 덜 기여한 선수들과 나란히 취급받는 손해"라는 것처럼 들린다. 헌데 그 말이 타당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선수들이 개인의 영광이나 이력이나 이후의 혜택 보다도 ‘조국 위상에의 기여도’라는 추상적 요소를 훨씬 더 중시한다는 전제 말이다. 과연 그럴까? 그건 조국(서울대 교수 아님)의 입장이지 선수 개개인의 입장이 아니다. 집단의 문제고, 그 집단인 선수단을 그들이 대표하는 하나의 국가와 치환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시각일 뿐이다. 둘째, ‘조국 기여도’라는 아리송한 개념을 백번 양보하여 인정하였을 때, 과연 선수들에게 금메달로의 기여와 은메달/동메달로의 기여의 차이가 얼마만큼 크게 다가오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 차이는 허수가 아니냐는 것이다.

  국가별 메달집계는 올림픽 폐막때까지는 사실상 임시적 중간 기록에 불과하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선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철저한 비공식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메달집계방송이라는 것을 내보내고 그 차이를 강조한다. 금메달과 은메달의 차이, 그리고 은메달과 동메달의 차이.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데 과연 금메달 하나는 은메달 하나보다 압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일까? 요컨대 압도라는 표현은 은메달이 무려 열개여도 금메달 하나와는 못 바꾼다는 교환 관념을 말한다. 동메달이 무려 백개여도 금메달 하나와는 못바꾼다는 교환 관념을 말한다. 가령 우리는 흔히 아틀란타 이후로 한국 올림픽 대표팀이 고전하고있다는 표현을 많이들 한다. 베이징 올림픽 중계방송 내내 텔레비전에 의해 반복 주입된 정보도 종합 10위를 차지한 아틀란타 이후로 하락세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흥미로운 것은 우리 선수들은 내내 꾸준히 많은 메달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서울 올림픽이 안방에서 벌였던 잔치였던 것을 감안하자면, 그 이전의 1984년 로스엔젤레스에서 모두 합쳐서 19개의 메달(금 6개)을, 1976년 몬트리올에서 모두 합쳐서 6개의 메달(금 1개)을 거두었음을 감안하자면 역시 그렇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한국의 선수단은 놀라운 성장으로 서른개에 가까운 메달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아틀란타에서는 바르셀로나보다 고작 메달을 두 개 덜 얻었을 뿐이고 시드니에서는 오히려 아틀란타에서보다 메달은 한 개 더 얻었다. 이런 셈법에 따르면 아테네 선수단의 성적이 서울 올림픽 이후 가장 좋은 것이 된다. 그럼에도 ‘아틀란타 이후 부진했다’는 말이 나온다. 그럼에도 선수단은 부진을 떨치겠다는 듯 이번만큼은 올림픽 종합 순위 10위를 차지하고 돌아오겠단 의지를 결연하게 발표한다. 그 종합 순위는 어떻게 산정하나. <금메달 우선집계>다. 그래서 슬프게도 이 모든 것은 금메달의 문제가 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열다섯개의 은메달을 얻고도 한개의 금메달을 더 그리워했던 아틀란타를 기억해보라. 어김없이 금메달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셈법 하에서 이런 목표가 있는 한 우리의 '금메달 환대'은 어쩔 수가 없는 문제다. 선수들의 '금메달 집착'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못말리는 ‘금메달 증후군’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집착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하자면 이해를 못할 일은 아니다. 올림픽과 같은 국제대회의 성적은 총체적 개념의 순위로 간명하게 전달되야할 필요가 있는데, <메달 총집계>는 당연히 많은 선수를 파견하여 많은 종목에 출전하는 나라에게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가령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중국선수단이 639명, 미국선수단이 596명인데 반해 한국선수단은 오분의 일 정도인 134명. 지금도 이 정도인데 당연히 예전에는 그 격차가 훨씬 심했을 것이다. 이처럼 적은 선수들이 출전하는 다윗의 나라가 많은 선수들이 출전하는 골리앗의 나라와 맞짱을 뜨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그 정답을 굳이 인재론의 대가 이거니씨에게 여쭤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바로 몇몇 난 놈들의 든든한 어깨를 믿는 것이다. 우리처럼,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으니 믿을 건 인재밖에 없다는 둥, 잘 키운 인재 하나가 사천만을 먹여살린 둥, 둥둥의 강박이 심한 나라에서 늘상 존재했던 희망이다. 그래서 <금메달 우선집계>의 선호가 시작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게 참 코미디다. 가령 마이크 펠프스같은 범지구적으로 난 놈이 인터넷 가상국가 라도니아 국적으로 올림픽에 나간다고 해보자. 선수단의 규모는 마이클 펠프스와 개인 트레이너, 그리고 라도니아국 임원을 합쳐서 달랑 세명. 그렇다고 허더라도 이 놈 혼자가 수영 8개 종목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8개쯤 쓸어담으면 금메달 우선집계시 라도니아는 종합 10~12위 부근이 된다. 반면에 메달수 총집계로 따지는 경우엔 당연히 종합 30위권 밖으로 밀려난다. 약간의 과장이 포함된 이야기지만 사실 과거의 우리나라가 바랐던 것이 그런 효과다. 금메달 하나에 종합 30위권 안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그런 효과다. 여섯개의 금메달을 얻은 LA 올림픽에서 <세계 10대 스포츠 강국>을 자부했던 것처럼, 열두개의 금메달을 얻은 서울 올림픽에서 <세계 4위>라는 찬란한 수사에 환호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는 나라다. 선수단의 규모가 백명이 넘고 한번의 올림픽에 평균 삼십여개의 메달을 따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정도 규모에 이르면 금메달 우선집계를 따르던, 메달 총집계를 따르던 종합순위 자체에는 별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테네 올림픽의 결과를 기억해봐도 그렇다. 집계방식에 따라 영향을 받을만한 나라는 네덜란드, 스웨덴, 스페인, 헝가리, 브라질처럼 십위권 중후반대의 국가들이다. 한국은 어느 쪽을 택하든 변함없이 종합 9위이다. 그러니 <메달 총집계>가 더 손해라는 편견도 사실상 더는 설득력이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 오히려 <메달 총집계>를 따르는 경우 대한민국은 아틀란타에선 종합 8위, 시드니에선 종합 10위로 각각 두 칸씩 높은 순위를 받게 된다. 서울 올림픽과 같은 예외적 경우를 베외하면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왜 <금메달 우선집계>를 고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특히 우리처럼 매번 '금메달 병'이 논란이 되는 나라에서 말이다. 최민호와 왕기춘의 비극이 금메달>은메달>동메달이 곧 1등>2등>3등이라는 강박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은메달에 그쳤습니다"와 같은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타파하려면, 동메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타파하려면, 이제는 ‘메달 색깔에 따라서’가 아니라 ‘메달 자체’를 존중하는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냉전시대가 종결되고 난 이후에 지구상에 종합메달순위에 집착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누누이 말했듯이 공신력도 없을 뿐더러, 참가 선수단 사이의 조건 격차가 너무 현저하게 달라서 결코 정당한 비교가 될 수 없을을 지구촌 사람들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질구질하게 그런데 집착하는 나라라면 중국과 북한정도? 많이 잡아야 일본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종합순위에 집착하는지는 너무도 자명하지가 않은가. 우리도 그들과 똑같다면 정말로 슬픈 일인데, 하긴 올림픽에 국민들 관심이 온통 집중된 틈을 타서 속전속결로 개판을 치고있는 지금 이 정권을 보자면 약간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200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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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텔레비젼에게 무엇을 바라든지

  예술이 인생을 모방하는 것 이상으로 인생은 예술을 모방한다는 명언이 있다. 여기서 감히 '예술'이란 단어를 'TV'로 바꾼다면, 물론 발칙한 일이지만, 또 하나의 명언이 탄생한다.

'TV가 인생을 모방하는 것 이상으로 인생은 TV를 모방한다.'

  TV의 역기능을 말하잔 뜻은 아니다. 너무 새삼스러워 얼굴이 다 붉어질 법한 그런 종류의 일은 ‘어쩌고 연대’나 ‘저쩌고 언론’에게나 맡겨두자 - 그들은 마치 구관조처럼 수십년째 같은 얘기만을 반복하는 중이지만, 뾰로롱, 그러거나 말거나. 정말 궁금한 것은 진짜 인생이 TV 속의 가짜 인생을 모방함으로써 모두가 똑같은 형태의 인생을 머릿 속에 그리고 그것에 준하여 살게되는 이 참담한 사태다. 가령 '10대는 이러이러하게 살아야한다' 와 같은 관념적 기준은 실제 그렇다기보단 TV에 의해 학습된 것일 가능성이 큰데, 이내 그것은 '십대는 이러이러하다'로 고착화된다. 문제는 그것을 주입한 주체가 TV임으로 인해 모두가 드라마 속 '뻔한 장면'과 같은 똑같은 관점을 간직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학교를 어떻게 다녀야 하는지,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 반항은 어떤 것인지, 왕따는 어떻게 당하는지, 고로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해야 하는지, 입시 스트레스란 어떤 경로로 작동하고 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인지, 심지어 사춘기의 성징은 어떻게 나타나고 어떻게 그들을 당황하게 하는지까지, 이 모든 방법과 순서가 TV에 의해 만들어져 무작위적으로 배포되고 있으며 모두의 의식 속에 아무런 경계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십대만이 TV에 대한 감수성이 유난히 남다른 걸까? 결코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은 않는다. 자아 실현이란 어떤 것인지, 연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장 생활이란 무엇인지, 결혼은 어떤 것인지, 부부간, 나아가 고부간의 의 갈등이란 어떤 것인지, 이 모든 것이 오로지 TV에 의해 결정되고 기억된다. 이건 아주 광범위하고 강렬하며 거부하기 어려운 작용이다. 백이면 백, 모두가 유사한 의식 구조를 갖도록 조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TV가 인생을 모방하여 보여주고 있다고 믿을 뿐, 거꾸로 우리가 TV를 모방하며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건 선후관계의 문제다. 가령 대학생이 소비문화의 첨병으로 등장한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TV에 의해 대학생이 ‘먹놀’ 혹은 '식충이'로 그려진 것이 먼저인가. 혹은 그 유희적 분석의 대상이 작금에 이르러 고등학생까지 슬금슬금 다운된 것은 결코 우연에 불과한가, 아니면 등교길에 오토바이 모는 남고생이나 어른보다 진하게 화장하고 다니는 여고생이란 실제 다수가 존재하기에 TV에 반영된 것인가.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노쳐녀가 자아를 찾아야 마땅할 사회 환경적인 기제가 먼저 작동을 했던 것인가, 아니면 <브리짓 존스>, <내 이름은 김삼순> 따위의 칙릿물이 노처녀의 억눌린(혹은 사회에 의해 억눌려졌다고 부추겨지는) 의식을 일깨운 것이 먼저인가. 피차(彼此)가 차피(此彼)를 모방하고 차피가 피차를 본뜨는 쌍방과실로만 축소시키기에, TV의 역할은 너무도 강력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이미, TV로부터 인생을 배우고, TV로부터 옳고 그름을 배우고, TV로부터 에토스를 배우고 있다. 뿐만 아니다. '에듀테인먼트' 혹은 '인포테인먼트'라는 기치 아래 TV는 지식 전달자의 역할을 자청한다. 사회, 문화, 역사, 철학, 과학의 상식선을 결정하는 기준이 "너 어제 그거 봤어?"의 복음 아래로 싸그리 집합한다. 역시 그 중의 정점은 노골적으로 가르치는 '돈 버는 법'이다. '아는만큼 당신의 재산을 지킬 수 있다'는 표현은 상당히 공격적이다. 그것은 이내 슬그머니, '아는만큼 당신의 재산을 증식할 수 있다'와 오버랩된다. 뉴스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경제 위기론을 말하는 동안에도 여윳돈의 '효율적 활용'에 대한 가르침이 쏟아지고, 주택보급율과 자가보유율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는 동안에도 재건축 대박 투자의 비전(祕典)과 절기(絶技)가 은밀한 척 전혀 은밀하지 않게 (당신만 그 프로를 보고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전수된다. '경험'의 문제는 보다 자극적이다. TV는 많은 간접적 경험들을 우리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헌데 그것은 직접적 경험과 상당한 간격을 두고 박제된 피와 땀이다. 예컨대 ‘<우리 결혼했어요>와 같은 프로그램은 몇 가지 전형적인 신혼생활을 진지함과 우스움, 로맨스와 천박함, 옳음과 그름으로 분류하여 남김없이 오락화한다. 시뮬레이션을 전제하는 이 가벼운 놀음은 결코 진실이 아니지만 반복하여 주입되며 진실에 다가서는듯한 그윽한 환상을 풍긴다. <미녀들의 수다>도 마찬가지다. 언뜻 제3의 눈으로 우리 모습을 돌아볼 좋은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 프로그램의 속내에 깃든 것은 상대주의적 똘레랑스의 정신이 아니다. 그저 육체적 부분이 은밀히 생략된 일종의 야동일 뿐이다. 이런 류의 경험이란 전적으로 모두 가짜다. 그럼에도 진짜라고 믿어진다. 피부에 와닿은 것처럼 보이지만 수천킬로는 족히 떨어진 세상의 이야기이고, 흡사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이 보이지만 형체없이 흩어지는 가짜다. 그것이 뇌주름이나 손마디에 각인되었노라 믿는 순간 <무한도전>이나 <무릎팍 도사>로부터 인생의 산산한 굴곡과 역정을 배운 것 같은 허황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아가 삶을 모사하는 허구, 드라마로 넘어가면 그 모든 문제가 총체화되어 드러난다. '프로페셔널한 삶'을 보여주는 척 위장하면서 실제로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무차별 살포하는데만 급급한 우리 드라마들의 천박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제 도를 넘어 역함이 느껴질 지경에 이르렀다.

  당연히, TV가 제공하는 지식과 경험이 부박한 것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이 생각만큼 풍성한 것은 아니라는데 일차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 역시 우리처럼 TV를 보고 그런 인생의 장면들을 학습해왔기 때문에, 특별히 더 나은 통찰이나 해석을 기다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일 가능성이 있다. 가령 <온 에어>와 같은 류를 보라. 인생을 모방하는 TV를 모방하는 인생을 모방하는 TV 피플들의 다반사를 TV를 통해 보여주는 이 천박한 드라마야말로 'TV가 인생을 모방하고 인생은 TV를 모방하는' 이 아이러니의 결정체다. 그 안에 대단한 깨달음이나 삶의 진리는 없다. 그럼에도 혹자들은 이런 저급한 드라마가 연예계의 부조리를 낱낱이 파헤침으로써 제 '책무(責務)'를 다해주길 기대한다. 그게 바로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고 믿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들이 뒤틀린 변태적 심리 속에 - 한편으로는 쇼 비즈니스에 대한 키치적 욕망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쇼 비지니스계의 도덕성이 우리보다 저급함을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는 - 허우적거리며 접시 안테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TV가 보여주는 삶은 우리가 그토록 체득하길 원하는 지식과 경험처럼 보이면서도 진짜 지식과 진짜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이득도 실효도 없다. 대단히 많은 걸 알고 얻은 것처럼 느껴지는 어쩐지 포만한 기분이란 단지 위약효과에 불과함을 직시해야 한다. 모름지기 TV를 너무 믿진 말지어다. 자기가 사일론인지도 모르는 사일론처럼, TV의 손에 놀아나진 말지어다. 배가 꺼지고 나면, 그래서 그 뜨거움이 진짜 뜨거움이 아니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면 이미 때는 너무 늦은 것이다. (2008/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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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인 것이다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는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인 것이다>라는 거국적 표현이 나온다. 국내 소설계의 물꼬를 안드로메다로 돌려버린 이 현란한 작품의 꼭대기에 냅다 깃발을 꽃는 냅다 결정적이고 냅다 정복적인 문장이지만, 현실에서는 방탄유리 너머의 8등신 꽃미녀처럼 몹시도 아련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다. 이유인즉슨 현실 세계란 모든 날이 휴일은 커녕, 고작 일주일의 경력이 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흠이 잡힐 수 있는 빌어먹을 곳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찾기위해 직장을 때려치웠어요. 타지마할에 가서 코끼리를 타고 놀다가 뉴델리풍의 진한 인도카레를 실컷 맛보고 왔어요.” 라고 말하면, “계속 코끼리나 타고 놀지 그러세요?” 라고 대꾸하고 돌려보내는게 고도의 산업사회에 걸맞는 위대한 섭리다. 코끼리의 상아와는 상관없는 상아탑의 장기휴학생이 어째서 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늘어나는지, 그 비밀은 모두 하루도 적을 두고 일하지 않고서는 불안해해야만하는, 이력서의 공란은 무조건 놀고먹었다는 뜻으로만 이해되는, 우리의 이상뻑적한 문화 안에 숨어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그러니까 더더욱 “노!”를 외치라고 부추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누구나 “노!”를 외칠수가 있다면 애시당초 이 작품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코 따를 수 없는 지령이기에 더욱 매력적이고 결코 이룰 수 없기에 더욱 애뜻한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유감스럽게도 그만한 배짱이 내게는 없다. 약간의 여가가 보장되는 것이 몇 푼 더 버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다,라고 조그맣게 외쳐보는 정도가 내가 가능한 최대한의 타협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입을 모아 “20대에는 그조차 사치”라고 말하고 있다. 이유인즉슨 조금이라도 일찍 '미래'를 위해서 일분 일초를 아껴 스스로를 리노베이팅하고 돈과 명예를 좇아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택'이라기 보단 '필수'처럼 다가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슬퍼진다. 그건 우리 앞에 닥쳐진 경쟁의 강도가 이미 상식적 감수성을 상실한 상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200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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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 0교시의 비밀

  수세기 동안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비밀 - 0교시를 되살린다고 하는데, 할 말은 이것 뿐이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우리의 교육 체제에는 진짜 웃지 못할 코믹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중에 정규수업 이전 보충수업 0교시만한 백미(白眉)가 또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엔 그게 궁금했다. 왜 하필 카운트를 0에서부터 하는걸까? 0의 물리적 의미가 비존재나 무(無), 혹은 공(空)임을 떠올리자면 0교시라는 뜻은 수업이 아니 이루어진다는 얘기여야 옳다. 애당초 성립할 수가 없는 단어다. 그런데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게 아니라면 또다른 0의 상징으로 뭔가 질적 및 양적으로 초월의 개념이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0교시 수업이란게 특별히 알차거나 특별히 보람차지는 않다. 일반 교시로 분류되는 수업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 별 의욕없는 선생이 들어와서 별 의욕없는 고딩들을 마구 타작해대는 비경제적 수업이 똑같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밖으로 선회하는 호와 안으로 선회하는 호가 만나 이루는 아름다운 숫자 0이 환기하는 0교시의 신비로움이란 도대체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 것인가. 

  우리 땐 한 학기 분량의 0교시와 9교시 수업 일정이 별개의 표로 만들어져 유인물로 배포되곤 했다. 그걸로 우린 환절기에 코를 닦거나 자다 일어나 침을 닦았다. 더러는 코도 닦고 침도 닦는 놈도 있었다. 더러운 일이지만 제도 자체가 더 더러운 걸 어떻게 해. 하필 왜 0교시라고 부르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제도의 시비나 효과의 여부는 뒤로 미루어두더라도 정녕 고딩들을 빡세게 돌리고 싶으면 차라리 1교시를 앞으로 한 시간 당기면 되는 일이 아닌가? 어차피 점심 먹기 전에 수업을 다섯 시간 때려야 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는데 말이다. 둘러치나 메어치나 같을 바엔 피차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0교시를 1교시라고 불러라. 1교시는 그럼 자동적으로 2교시가 된다. 이게 바로 0교시가 폐지되었을 당시, 몇몇 양심에 털난 학교들이 잔대가리를 굴렸더라는 희대의 사기수법이다. 아울러 0교시라는 제도는 또한 교육 심리학적으로도 옳지 않다. 졸린 눈을 부벼가며 한 시간 씨름하고 난 다음에야 1교시가 찾아온다. 분명 두 시간을 들었는데 그 다음이 2교시란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선생도 알고 애들도 뻔히 아는데 왜 그런 괴상한 합의를 암묵적으로 유지해야하는 걸까. 일요일 호출 근무만큼 사람 미치게 만드는 셈법이다 (분명 어제도 일했는데 월요일 아침이라는 이상한 사실을 곱씹으며 걷는 출근길 기분이란, 젠장할!). 삼복더위에 괜한 삽질마냥 힘이 줄줄줄 빠지게 하지말고 정말 새벽 수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1교시를 앞으로 당기자. 교육이란 모름지기 솔직하고 담백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 애들이 뭘 보고 배우기라도 하지 않겠나. 물론 왜 새벽수업이 '나가리'인지를 정책 담당자들이 늦기 전에 깨달으면 더 좋을 것이겠지만. (2008/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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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블루스

  문제가 생겼다. 숭례문이 불타면서부터다. 구정 연휴 마지막 날 꾸벅꾸벅 졸다 일어나 수련회 마지막 밤 캠프파이어처럼 불타오르는 숭례문을 목도한 그 순간부터 머릿 속의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언어중추에 랙이 걸렸고 아뿔싸, 혀도 꼬였다. 괜히 엄한 숭례문을 탓하긴! 하지만 사실이다. 그때 받은 충격은 이 빠진 자리처럼 생경한 느낌으로 내 안에 남았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의식이 된다. 보지 않아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빈 자리요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결핍감이다. 물론 이제와 뒤늦게 유난을 떨려는 것은 아니다. 그 날의 숭례문이 우리에게 끓어오르는 호들갑으로만 소비되었던 것은 분명 문제였다. 그럴 바에야 그 행렬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무심하고 무지했던 지난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있는 반성이라고 여겼다. 생각해보라. 생전 관심 한 번 두지 않다가 일이 터진 다음에야 사실 난 숭례문을 열렬히 사랑했었노라 목놓아 외치는 건 넌센스다. 가령 여섯살 먹은 아이를 현장에 데려가 보여주며 "네 마음 속에 잘 새겨둬. 저 자리에 우리나라 국보 1호 숭례문이 있었어" 라고 했다는 한 아주머니의 인터뷰는 분명 좀 오싹한 면이 있다. 나란히 비교하긴 어렵지만 천길 낭떠러지에서 연인의 손을 놓아버린 주제에 "미안해. 독립선언문 때문에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었어" 라던 '내셔널 트레져(존 터틀타웁, 2004)'의 벤 게이츠(니콜라스 케이지)에 견줄만한 인상을 준다. 그 날 무참히 불타오르는 숭례문을 생방송 중계로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몇몇 사람들의 고백 또한 날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울다니! 우리가 그만큼 평소에 그런 유산들을 사랑하면서 살았던가? 그 사람들이 다 미치진 않았을테니 내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틀림없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격한 감정에 백퍼센트 동의는 못하겠다. 오히려 진짜 곱씹어봐야 할 것은 왜 숭례문이 멀쩡히 그 자리에 있을 때 아이에게 숭례문을 보여줄 기회를 만들지 않았느냐 하는 부분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숭례문 뿐만이 아니다. 멀쩡히 있을 땐 그 소중함을 모르는 우리 주위의 다른 모든 유무형의 존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스템의 관리 한계, 그리고 마음 먹고 벌인 참사는 우리 손으로 해결하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닐런지 몰라도 그런 관심과 배려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새 숭례문은 거대한 장막 속에 둘러싸여 잊혀져가고 있다. 맥반석보다 뜨거웠던 감정도 같이 식어가고 있다. 내일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의 사건을 잊을 것이고 그 다음 날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충격과 분노로부터 무감해질 것이다. 어쩌면 복원이 끝날 무렵쯤에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할런지 모른다. 오히려 새로 만들어져 더 멋지고 더 좋다며 입방정을 떨 놈들도 분명히 나올 것이다. 지난 한 달, 숭례문을 둘러싼 그 많고 많았던 말과 사건들을 돌아보자면 호들갑으로 허탈감으로 분노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정도에 비해 솔직한 반성과 냉정한 응시는 너무도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금방 차가워졌다. 검거된 방화자가 남긴 껄끄러운 말의 파편과 일부 언론의 부추김 아래 노숙인들을 향한 엉뚱한 분노만 끓어오르다가 말았다. '만약 A할 수 있다면 B해도 괜찮아'라는 식의 소름돋는 무감함을 보이는 방화자가 만약 괴물이라면 그 괴물을 만들어 낸 건 누굴까? 그에게, 또는 그와 비슷한 부류일 거라고 짐작되는 노숙인들에게 산탄총을 갈겨대기에 앞서, 우리 또한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진 않은지 돌아봐야만 할 것이다. 만약 내 재산권을 보호받을 수 있다면 공공의 재산권은 보장받지 못해도 괜찮아. 복원할 수 있다면 문화재쯤은 태워도 괜찮아. 만약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법과 절차쯤은 무시해도 괜찮아. 만약 남들보다 빨리 갈 수 있다면 신호쯤은 무시하고 밟아도 괜찮아. 만약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다면 남의 아이쯤이야 아무래도 괜찮아. 만약 나만 행복할 수 있다면 도덕과 윤리쯤이야 아무래도 괜찮아. 만약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아. 만약 임수정이라면 사이보그라도 괜찮아 - 아, 이건 아닌가? (200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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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joke, Social Issue

불펌 논란을 통해 돌아본 베낌의 문화

  속칭 불펌('불법 + 펌'의 준말이란다, 현대 교양 언어의 집대성 뇌이버 오픈 사전 참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함부로 남의 작성물을 긁어다가 버젓이 자기 블로그에 올려놓는 작자들이 늘어나면서 너와 나의 갈등의 골이 마리아나 해구만큼이나 깊어졌다. 유독 네이버가 빈번이 입방아에 오르는 건 네이버에 뒷통수를 맞아본 피해자들의 서글픈 호소와 뼈에 사무친 한탄이 전국 방방곡곡을 진동해서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만한 분노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의 본질이 '포탈 유저 대 비포탈 유저', 혹은 '네이버 유저 대 非네이버 유저'의 대결인 것처럼 과장되어선 곤란하다. 원래 바퀴벌레가 많은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과 바퀴벌레가 상대적으로 적은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을 나란히 두고 바퀴벌레 아닌 멀쩡한 '인간' 거주자의 인격적 질을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니네 아파트에 바퀴벌레가 많으니까 너도 바퀴벌레나 다름없어" 하는 차별적 발언은 직립 보행을 할 줄 아는 나름 만물의 영장으로서 - 물론 그로 인하여 치질 및 치루의 고통이 따르기도 하지만 - 감히 입에 담을 내용은 아니다. 정말로 실제 피해를 논하고 싶다면 바퀴벌레의 번식으로 침탈당한 모두의 삶의 질을 말해야 하는 것이지, 정당한 댓가를 치루며 세를 사는 인간 피해자끼리 쓸떼없이 머리 터지게 다툴 문제는 아니다. 아무리 청소를 깨끗히 해도 신의 섭리와 인간의 실존적 한계에 따라 생길 수 밖에 없는 - 오! 그 이름도 찬란한 바퀴벌레는 네이버를 위시한 포탈 블로그 뿐만이 아니라 이글루스나 티스토리에도 상당수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포탈 블로거 중에도 바퀴벌레 때문에 골머리 썩고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다.

  네이버를 비롯한 주요 포탈들이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것은 바퀴벌레가 다른 건전한 세입자들의 건강을 위협할 지경이 되었음에도, 세입자 개개인이 으깬 감자에 붕산 칼슘을 섞어 구석구석 뿌리는 것만으로는 애증의 불청객들을 쫓아 보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고집스럽게 '세스코'에 연락을 취하길 거부하기 때문이다. 노란 빨대가 달린 살충제 - '컴배트 스프레이'를 뿌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하실에 안식처를 만들어 최적의 번식 온도 이십오도씨를 적당히 맞춰주고, 축축하게 습도마저 높여주며, 적당히 군것질거리까지 풀었던 것이 이제까지의 암묵적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니 교통정리는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일부 포탈의 원칙없는 불펌 게시물 처리는 바로 그런 연유로 촉발되는 것이다. 블로그라는 도구를 대중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그 역할에 걸맞는 문화를 만드는데는 야박했던, 당장의 양적 성장만을 우선시했던 근시안적 태도가 만들어 낸 기형적인 현상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펌질을 부추기는 네이버 등의 포탈기업들을 향한 비판과 그 안에 속한 유저들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분리되어야만 한다. 가령 포탈에 블로그를 가지고 있는 자체를 무지의 소산쯤으로 몰아대는 태도는 곤란하다. 특히 이를 문화적 우열의 논리로 확장해서는 안된다. 현재 메타-블로그를 주도하는 (트래픽 유치를 위해) ① 빠르게, ② 자극적으로, ③ 이슈에 반응하여 포스트를 생산하는 블로그 문화가 소위 신변잡기형 블로그 문화보다 월등한 것이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고, 원칙적으로도 그것은 여기에 같이 비벼져선 아니될 전혀 다른 차원의 논제다. 불펌은 작성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권리를 앗는 행위가 '공유의 낭만'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란 어렵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는 상식을 먼저 얘기해야지, 그게 비전문적인 블로깅 문화의 극단적 발현이기에 혹은 '바람직한 블로깅의 ABC' 따위의 닳아빠진 이론에 부합하지 않기에 나쁘다는 식으로 설명해선 안될 문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사회는 적당히 베껴다 자기 것을 만드는 행위에 대단히 관대한 편에 속한다. 자랑스러운 우리 기업들만 하더라도 과거 '역공학'이라는 기치 아래 사정없는 커닝을 반복 장려해왔던 바 있지 않은가. 불펌이 없이는 지금의 우리 경제도 없었다. 따라서 불펌을 웹 문화나 블로그 문화라는 한정된 범주 안의 문제만으로 보는 것은 포탈의 기술적 도의적 책임론을 묻기엔 충분할지 몰라도, 무슨 까닭으로 그런 무감함이 이렇게까지나 범람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불펌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현상이 아니다. 자칭 양식있는 블로거 몇몇이 모여 자경단(自警團)이라도 꾸려 가차없이 펌로거를 때려잡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이미 오프라인에서 찌든 베낌의 문화가 똑같이 그 단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말해 입 아픈 이야기지만 그 영향력을 막론하고 웹의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현실 세계에 발을 디디고 살아간다. 현실은 어떤가. 가령 적당한 베낌에 익숙해지는 것부터 배우기 쉬운 상아탑의 공기는 어떠한가. 베낌으로 흥해 베낌으로 망해가는 안타까운 우리 대중문화계는 어떠한가. 황우석, 신정아, 이필상, 김병준, 박재윤, 김성이, 박미석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잇따른 표절 및 위조 논란은 단지 그들의 도덕적 하자만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인가. 어쩌면 이 모든 정황이 이미 위험 수위에 도달한 베낌 불감증을 반증하는 징후는 아닐까? 베낌 불감증은 베낌 '블'감증으로 이어지고 베낌 '블'감증의 배후에서 도사리는 것은 베낌 불감증이다. 나아가 그러한 맥락에서, 솔직히 꼭 전문(全文)을 카피해야만 불펌이냐 하는 의문 또한 지울 수가 없다. 메타-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보면 출처를 남기지 않은 채 인기 블로거의 저작물을 재구성해 만든 포스트가 종종 눈에 띄는 경우가 있는데, 순진한 초짜들처럼 서투르게 전문을 긁어 온 것은 아니나 논리 전개는 물론 일부 문장까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반대로 더 많은 발언권(인기와 방문자)을 가진 블로거가 상대적으로 힘이 덜한 블로거의 컨텐츠를 유사한 방법으로 무단 침탈하는 경우도 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 그대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에 그들은 불펌이나 펌로거의 범주로까진 분류되지 않는다. 이렇듯 불펌의 도덕적 시비란 그 기계적 정의가 너무나 쉽고 명확함에 반해 실제적 범위는 종종 혼란스러워 보인다.

  블로그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서 가장 놀랍게 다가왔던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블로그를 새로운 대안적 언론이나 굉장한 창작 행위의 결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한창 구글 광고가 논란이 되었을 때 '작가와 인세'의 관계를 들먹이는 사람들마저 있었음을 상기해보자면 (뭐지? 이 영문 모를 대단한 자신감은) 확실히 그렇다. 프로페셔널 작가와 인세, 블로거와 구글 수표가 결코 나란히 비교될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랬다면 그것도 참 절망적인 일이겠지만, 백번 양보하여 정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만큼 책임감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정말 블로그란 매체를 그만큼 신뢰하고 자신의 블로그를 전문가의 저작물 혹은 전문기자의 기사물에 비견할만큼 자신이 있다면, 우리 스스로가 그 자부심만큼의 까탈스러운 자세는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뭐 대단한거라고?" 2002년 불펌 사건 당시 무단 펌질의 증거를 인멸하고 나와 무한 댓글 대전을 벌였던 놈은 이렇게 되물었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난 내 웹페이지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치킨에 족발집 전단이나 그 옛날 하늘에서 둥실둥실 떠내려오던 삐라보다 가치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쉬운 남자" - 아니 표현이 좀 이상하니 고치자 - "쉬운 사람이니 당신들 뜻대로 대해주세요" 라는 뜻은 아니다. 우린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버릇처럼 사용하고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습관처럼 노래를 하지만 정작 내가 아닌 사람에게 그런 배려와 이해를 베푸는 경우는 대단히 드문 듯 하다. 블로그가 뭐 별건가? 초등학생도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는게 블로그다. 블로그가 별 건 아니지만, 베낌 불감증의 문화를 걷어내는 작은 실천은 블로그에서부터도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거대 포탈의 각성은 당연한 저작자의 권리로 요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개인의 유저들의 몫도 크다. '공유의 낭만'을 말하기 이전에 링크, 트랙백, 주석 등의 도구로 촘촘하고 섬세한 그물망을 만들어,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그의 저작물을 존중하고 그가 창출한 가치를 존중하는 모습을 실천해야 한다. 만약 펌로거들이 바퀴벌레라면, 돌부터 던질 것이 아니라 좀 더 많은 블로그와 웹페이지가 인간의 얼굴을 찾음으로써 그들이 발 붙일 틈이 없도록 하면 되는 일이다. 만약 중고생들이 연예 오락 위주, 소모적인, 싸이월드식의, 블라블라 퍼가염 포스트를 서로 퍼담기에 바쁘다는 사실이 불만이라면, 그들에게 본이 될만한 블로그와 웹페이지가 더 많아져서 <완소 동안 스타 간지 작살 레깅스 화보>나 <알고 보니 대타로 떴네, 과연 누가 있을까?>를 몇천회씩 스크랩하는 것만이 유일한 웹 생활의 의미와 즐거움이 아님을 보여주면 되는 일이다. 먼저 그런 부분에서 대안적 요구가 충족이 되어야 이 만성적인 불펌 문화도 뿌리부터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헌데 과연, 불펌의 개념 없음을 그렇게나 강하게 성토하고 있는 지금 메타-블로그의 공기가 과연 그 대안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200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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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Internet

그럴 바에야 왜 힘들게 물어보셨나요?

  너의 인생 목표와 견해 혹은 정의를 말해보라는, 뭐 그 따위 질문에 대처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그냥 얼버무리는 것이 아닐까. 자연스럽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물 탄 듯 뭉뚱그릴 재주가 없다면 아예 그냥 아무 생각없는 바보천치인 척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 영악함이 굳이 필요한 까닭을 말해보라면 나는 "남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성숙한 사람들이 대단히 드물어서"라고 답하겠다. 가치관이나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못하기에 화가 나는 게 아니다. 그들과 다른 목표와 그들과 다른 견해와 그들과 다른 정의를 말하려는 내 조심스러움에, ① 니가 아직 어려서, ② 고생을 덜 해봐서, ③ 세상을 몰라서, 따위의 놀랍도고 불쾌하고 불쾌하도록 놀라운 원천봉쇄가 이루어지기에 그런 것이다. 웃기는 일이다. 그럴 바에야 왜 힘들게 물어보셨나요? 그냥 앉혀두고 설교를 하시지. 퉤, 하고 침을 뱉고 때려치울 용기. 그게 항상 부럽다. 누군가 뒷통수에 권총을 대고 똑바로 선을 따라 걸어가길 강요하는 이 찝찝한 기분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들의 팔을 꺾어 허리를 숙이게 하고 멋지게 총을 빼앗은 다음에 두 팔을 묶어버리는 것일텐데, 난 그만한 용기가 없으므로, 그저 그려려니 하고 만다. 언제 어디에 가서나 예사로 벌어지는 일이다. 지겹다, 라는 지겨운 표현을 쓰기엔 너무 지겨워 어떻게 할 수 없을 지경이다. 똑같은 틀에 팬닝하여 똑같은 사람을 구워내고도 모자라, 그 이후까지 똑같이 규정짓고 강요하려는 무심한 사회와 사람들에게 느끼는 건 참을 수 없는 역함이다. You Gotta Do What You Gotta Do? 오! 제발. 저러저러한 세상에서 저러저러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난 이러이러하게 살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게, 어떻게 마냥 일하기 싫은 철부지의 투정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럴 바에야 창의력, 창조력이니 혁신적 아이디어니…… 자기들도 그게 뭔지 모르는 것을 회의 때마다 요구하지나 말 것이지. 피식, 그냥 웃고 말지요. 정신의 박제와 남다른 창의(創意)가 공존할 수 있는 확률은 다듬잇방망이 한 짝만 들고 3할을 칠 확률보다도 훨씬 낮답니다. (2008/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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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안에 고인 침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있다

  입 안에 고인 침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 또한 자기 몸에서 나온 것인데 그조차 삼키는게 더럽고 역해서일까. 그들 중 더러는 버릇처럼 입 밖으로 침을 뱉어낸다. 뱉어도 될 곳을 따로 가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아무데나 침을 뱉는다. 자기네 집에서도 그럴까. 거실 바닥에도 뱉고 주방에도 뱉고 침대 위에도 뱉고 책상에도 뱉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길이니까 그런 거겠지. 길은 내 것이 아니니 더러워지던 말던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겠지. 반면에 입 안에 고인 침을 못 견디더라도 절대 뱉어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정말 뱉어야겠다고 여기면 화장실을 찾거나 휴지에 뱉어 쓰레기 통에 버린다. 그것이 정말 남다른 윤리의식의 결과든 아니면 스스로를 위한 이기심에 발로이든 그들은 함부로 길에 침을 뱉어선 안된다는 최소한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허나 그렇다고 그들이 깨끗한 거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뱉지 않더라도 입 안에 고인 침을 못 견뎌하는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침을 뱉어내며 공동의 거리와 공동의 세상을 하나의 타구(唾具)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그건 자유의 범위를 심각히 벗어난 행동이다. 아울러 상식적으로도 스스로를 위해, 또 그리고 남을 위해서 마땅히 삼가야 할 행동이다. 함께 사는 세상, 이라는 공허한 구호을 무조건 강요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그걸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도 문제다.

  인터넷 세상에도 입 안에 고인 침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더러는 버릇처럼 입 밖으로 침을 뱉어낸다. 실제 길에 침을 뱉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습관성이다. 뱉어도 될 곳을 따로 가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아무데나 침을 뱉는다. 가족 간의, 혹은 연인 간의 대화 중에도 그럴까. 부모 자식간에도 그럴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공간이니까 그런 거겠지. 실체가 없는 공간이니까 그런 거겠지. 내 것이 아니니 더러워지던 말던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겠지. 역시 여기에도 입 안에 고인 침을 못 견디는 한이 있어도 절대 뱉어내지 않는 사람들이 (혹은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허나 그렇다고 그들 또한 깨끗한 인터넷 환경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뱉지 않더라도 입 안에 고인 침을 못 견뎌하는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침을 뱉어내며 공동의 인터넷 세상을 하나의 타구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상황이다. 사실 악플은 진작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젠 단순한 문제를 넘어 꼬르륵, 깊숙히 가라앉은 느낌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십여년,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는 동안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세련된 의견 나눔을 보기가 어려웠다. 추악하고 역겨운 비난과 모욕이 훨씬 많았다. 발길이 많이 닿는 공간일수록 더하다. 포탈은 진작에 가래침으로 덕지덕지 도배되며 역한 냄새를 피워올렸다. "전 인터넷을 오래해서 그런지 어지간한 글엔 상처받지 않지만요." 따위의 고백은 이제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름이 좀 알려져 이유없이 욕을 먹는 일도 겪는 유명인들이나 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주위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푸념이고 한숨이다. 왜 인터넷이 정신 단련의 차원으로 이용되고 있는가, 스스로 아이티 강국이라 칭하는 우리의 인터넷 문화가 어째서 그런 수준 밖에 되지 않는가, 진실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200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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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Internet

자아도취: 하지만 난 착하고 겸손한데

  세계 7대 불가사의란 - 의견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 일반적으로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에페수스의 아르테미 신전, 마우솔루스 왕 능묘, 로도스의 거상, 알렉산드리아의 피로스의 등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면 이른바 '세계 8대 불가사의'가 완성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물론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쑥스럽지만 - '내가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없는 이유'다. 이건 나머지 일곱가지 불가사의를 합친 것보다 더 불가사의한 '슈퍼 울트라 캡숑 불가사의'라 칭해 마땅할 것이다. 왜? 왜 난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없지? 물론 시각적 스펙타클이 덜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푸른하늘'적으로 말하자면 - 난 착하고 겸손한데. 어디 그 뿐인가. 재치있지. 똑똑하지. 신분 확실하지. 유머감각 넘치지. 가치관 올바르지 어른들한텐 공손하지. 오죽하면 별명이 도덕 교과서 - 그 흔한 범칙금 한 번 떼어 본 적도 없지. 시간 약속은 칸트도 꺼이꺼이 울고 갈 만큼 확실하게 지키지. 매일 똑같은 시각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운동할만큼 끈기도 있지. 남들처럼 배도 안 나왔으니까 몸매도 되지. 용감무쌍하기로는 제다이 일개 중대가 와도 못 당하지. 헌혈마저 자주하지. 남의 이야기 들어주는데 너무 뛰어나 국가 공인 자격증까지 받았지. 남의 기분도 잘 읽을 줄 알고 순발력 뛰어나지. 암기력은 떨어져도 중요한 날은 잘 외우지. 소심해서 시도를 못하고 있을 뿐이지 한 번 규제만 풀어주면 '이벤트 황제'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도 있지. 돈은 잘 안 쓰지만 구두쇠가 아니라 검소해서 그런거지. 취미는 진짜로 독서 - 술값은 십원도 안 쓰지만 버는 돈은 형편 닿는대로 다 책값에 쓰지. 여가시간엔 돈 안들어가는 취미로 글을 쓰지. 게다가 매너하면 김매너, 배려하면 김배려. 한 눈을 팔기를 하나 바람을 피기나 하나. 술을 마시나 담배를 피우길 하나. 당구를 치길 하나 오락에 빠져 살길 하나. 이거, 이력(履歷)이 너무 깨끗해서 걸릴래야 걸릴 것이 하나도 없다. 확 총선에라도 출마할까 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인기가 없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모든 경비 아저씨들과 청소 아줌마들은 날 좋아한다. 휘트니스 센터에 가도 아줌마들이 날 가만 아니 둔다. 이렇듯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편인데 어째서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에겐 무관심의 영역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나만큼 착하고 겸손한 내공(內攻) 만땅인 남자가 어디 있다고! 같은 남자가 보기에 정말 형편없는 바람둥이들이 오히려 사랑받는 까닭 또한 이해하기가 어렵다. 자아도취(自我陶醉)라고? 하지만 난 진짜 착하고 겸손한데? (2008/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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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시대의 신유형 영어 학습, 공구리 회화

  영어 때문에 고민이십니까? 영어 때문에 답답하십니까? 아무리 학원을 다녀도 실력이 늘지 않으신다고요? 아무리 미드를 봐도 안 들리신다고요? 미치고 팔짝 뛰겠다고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공부 방법이 비실용적이니까 효과를 못 보시는 겁니다. 바야흐로 작금(昨今)의 세계는 실용적이지 않으면 모두 가라, 실용의 시대입니다. 일찍이 '시대와의 불화'에서  예술이 반드시 실용과 무관한 것으로 이루어진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하셨던 이문열 선생조차 이거 장난이 아닌데? - 멋쩍어하는 실용의 시대가 왔습니다. 따라서 영어공부 또한 쓸모가 없는 방법은 갈아치워야 합니다. 학원에서 가르치는 영어야 조건반사적 문제풀이용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학원비는 또 얼마나 비쌉니까? 당연히 비실용적입니다. '그레이 아나토미'를 백 번 돌려본들 그 안에서 쓰인 회화를 우리가 쓸 일이 있겠습니까 - 만약 있으시다면 당신의 연애 생활에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있는 겁니다. 시간은 또 얼마나 잡아 먹습니까? 역시 비실용적입니다. 그럼 영어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영어야 말로 이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실용의 다른 이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럼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리산에서 5년, 속리산에서 5년, 계룡산에서 5년, 합이 15년동안 한국인에 걸맞는 영어학습법을 연구해오신 김영어(잉글리쉬 킴) 선생께서 피를 한 말이나 토해가며 연구에 매진한 끝에 개발하신 '공구리 회화' 시리즈가 있습니다.

  '공구리 회화' 시리즈는 회화중심주의를 천명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 실용적 삶의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대화만을 엄선하여 실었습니다. 여기 제시된 칠백사십칠개의 실용적 문장만 달달 암기하여도 당신은 모든 건설현장에서 촉망받는 실용적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본 교재는 다음과 같이 당신의 영어실력을 양생시킬 매우 실용적인 여섯 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Chapter 1. 이 구덩이 말고 저 구덩이를 파라. / 철수야, 어서 구루마를 가져와.
Chapter 2. 넌 기소 공구리의 중요성을 몰라. / 아따 그 놈, 노가다 곤조하고는.
Chapter 3. 함바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 올해는 하꼬방을 벗어나야죠.
Chapter 4. 오늘 또 대마치네. / 이 빌어먹을 놈의 도끼다시 인생.
Chapter 5. 이 사람은 우리 십장입니다. / 어떤 놈이 공구리 양생을 야매로 해놨는지 바래가 난다.
Chapter 6. 오늘 일은 거기까지 해서 야리끼리 합시다. / 오야가 오늘은 시마이하잡니다.

  본 교재는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권 만이천원입니다. 구매자 전원에게 네이티브 육체 노동자들의 생동감 넘치는 대화가 담긴 카세트 테이프를 드립니다. 이 듣기 테이프는 칠백사십칠가지 대화를 우리말로 한 번, 영어로 한 번 반복하여 들려 드립니다. 이를테면 '이 사람은 우리 십장입니다'라고 한국인이 말하면 '히 이즈 아워 포어맨'이라고 외국인이 따라 말하는 식으로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재미지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테이프를 반복 청취할 경우 당신의 실용회화 능력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김영어(잉글리쉬 킴) 저/ 용용(用用)문화사/ 신국판/ 전 2권/ 358면 / 12000원. (200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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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joke

마지막 과외수업: 과외계를 떠나며

  이제 이 어설픈 과외선생 노릇을 그만 둘 때가 되었다. 학교와의 연이 끊어지면서 나의 과외선생 자격이 불충분해졌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요, 녀석이 고3이 되는만큼 더 이상 나같은 얼치기한테 배워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무엇보다 근자(近者)에 이르러 입시정국이 회오리 안쪽으로 휘말려 들어감에 따라서 "구공년생이야말로 저주받은 세대" 라는 푸념을 매주 들어주어야 하는 것도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아는 한 '저주받은 세대'라는 말을 쓰지 않은 고3은 근래에 없었지 싶다. 우리땐 그런 표현은 없었지만 '샌드위치'나 '모르모트' 따위의 표현으로 불운함을 에둘러 표현했었으며, 팔삼년생들은 '이해찬 일세대', 팔사년생들은 '이해찬 이세대'라는 섬뜩한 표현으로 지들만의 고난을 토해내곤 했다. 이후로도 그랬다. 팔오년생을 괴외하러 갔을 때도, 팔칠년생을 과외하러 갔을 때도, 다 지들이 "진짜 저주받은 세대" 라고 말하더라. 여기가 뭐 '저주받은 도시(존 카펜터, 1995)'도 아니고 말이야! 내년이 되면 구일년생들이 "우리야말로 저주받은 세대" 라며 울분을 토할 것이고 후년이 되면 구이년생들이 "우리가 진짜 저주받은 세대" 라고 주장할 차례다. 결국은 다 자기들이 최고 고생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봐야 이들이 할 줄 아는건 몇몇년생 공감집 같은 게시물을 만들어 서로 펌질하거나 연예인 특례입학에 분노하며 '수능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로 시작하는 우스꽝스러운 항의글이나 인터넷에 끄적이는 것일게다. 그리고 뭐 어차피, 대학 들어가면 그 분노 홀랑 까먹는다.

  과외계를 떠도는 동안 합이 일곱명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러니까 지금이 일곱번째다. 새삼 돌이켜보니 남자 선생은 안된다는 이유로 몇몇 여학생 과외자리를 놓친 뒤, 어렵게 잡은 녀석의 과외는 지루하고 칙칙했다. 낭만적 과외생활로 도랑도 치고 가재도 잡으려던 나의 꿈은 골방에서 - 골방이라기엔 너무 컸지만 - 칙칙한 사내 놈과 '수학 2'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으로 산산히 부서지고야 말았다. 녀석은 이제 열아홉임을 믿을 수 없을만치 체격이 좋았고 머리가 굵었으며 놀라울만큼 속물(俗物)이었다. 속물? 물론 한창 자라나는 꿈나무에게 그런 표현을 써서는 안되겠지만. 녀석은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처럼 같은 학급의 여학생들을 노골적으로 점수화시켜 품평했고 그 결과를, 어찌된 일인지, 내게도 들려주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녀석은 별 이유도 없이 세상을 향한 적의로 펄펄 끓어올랐고 - 그 적의가 어떻게 작동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열혈 한나라당 지지자임을 피력하곤 했다. 그래봐야 선거권도 없는 놈이! 덕분에 몇 번인가 한바탕 논쟁이 벌어질 뻔도 했지만 구공년생이랑 싸워봐야 나만 우스워질테고, 또 녀석의 부모들 귀에 들어가는 경우 괜히 나만 난처해질 것 같아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과외비의 액수가 후하단 이유로 녀석과 녀석의 집안을 택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으니 남 탓을 할 것도 없겠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좋은 과외선생이 되었어야 했고 우리의 과외는 조금 더 유익한 시간이 되었어야 했다. 나에게도 그리고 녀석에게도 보다 의미로운 시간이 되어야 했다. 녀석의 개념없음에 통탄하는 사이 의욕을 잃어가 이냥저냥 시간만 때운 걸 이제와서 후회해본들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좀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단 아쉬움은 남는다. (200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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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미안 광고는 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나?

  고운 때깔 아파트에 살면 인생의 때깔도 고와진다. 아파트 광고의 제 1법칙이다. 대개는 30대 초중반으로 접어든 우아하고 안정감있는 여배우를 내세워서 그들은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화려하고 안락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고급 아파트의 광고로 갈수록 그 화려함과 안락함은 강도를 더해간다.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리고 인테리어는 어설피 몇천만원 들여서는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다. 그 안을 거닐고 그 안에서 영위하는 삶이란 분명 매력적이다. 역사를 말하자면 초창기의 아파트 광고는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실용성과 편리성, 즉 그것이 도시적 현대적 생활방식임을 홍보하는 측면이 강했고 수도권 절반 이상의 인구가 아파트에 살게 될 정도로 대중화된 이후에는 다른 아파트 보다 크고 넓은, 즉 평수의 문제로 가져가는 측면이 강했다. 이제 거기에 더해서 '플러스 알파'의 삶을 말한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일상의 영위가 가능하며 모든 문화 스포츠 여가 생활을 모두 즐길 수 있다. 우리는 그 광고를 보면서 그런 삶을 꿈꾼다. 꿈을 꾸게 한다는 것 - 그 자체로 브랜드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경남 아너스빌, 금호 베스트빌, 대우 푸르지오, 대림 e-편한세상, 동부 센트레빌, 두산 위브, 롯데 캐슬, 벽산 블루밍, 성원 상떼빌, 신동아 파밀리에, 쌍용 스윗닷홈, 에스케이 뷰, 엘지 자이, 코오롱 하늘채, 태영 데시앙, 포스코 더 샵, 풍림 아이원, 한라 비발디, 한신 휴, 한화 꿈에 그린, 현대 아이파크 등. 물론 여기에도 더 대중적인 브랜드가 있고 덜 대중적인 브랜드가 있고 그나마 양심은 간직한 광고와 그렇지 않은 광고가 있는데다가 이제는 뭐 너무 익숙한 이름들이기까지 하여 특별한 호사라고 하기까지도 어렵다. 이들의 광고 전략이 나쁜가? 분명 나쁘다. 근본적으로는 아파트 광고라는 이 기괴한 것이 일단 없는 상품을 팔아놓고 돈을 먼저 받은 다음에 상품을 만들 것임을 광고하는 반 사기술임에 있겠지만 지금 당장 왜 나쁘냐는 물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파트의 이미지와 삶의 이미지의 문제다. 저렇게 예쁜 이름들이 붙어지기 전의 구형 아파트 부녀회들까지 이를 악물고 나서 개명 아닌 개명 작업을 벌이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 광고들이 심어준 이미지가 우리 사회의 인지체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십팔년에 지어진 '두산 아파트'의 이름을 '위브'로 바꾸면 똑같은 기반 시설의 똑같은 세월을 묵은 아파트임에도 값이 올라갈 것이라는 믿음은 무섭다. 부녀회와 그 뒤에 은밀히 숨어있을 각종 집단의 주도 하에 진행되는 주민투표의 결과는 독재국가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소름 돋기에는 충분하다. 새로 지어진 '위브'와 '위브'로 이름을 바꾸어 달은 두산아파트, 물론 다르다. 하지만 같기를 희망한다. 그 실질적 차이 보다는 당장 보이는 '위브'와 '두산아파트'라는 이름에서 오는 표피적 차이를 더 크게 느낀다. '두산 아파트에서의 삶'보다는 '위브에서의 삶'에 더 우월한 가치를 두는 것이다.

  삼성물산 '래미안'의 이번 광고가 이들과 특별히 다른 광고 전략을 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딴 세상, 딴 나라, 딴 인류를 비추는 양 화려하게 포장해 놓은 몇몇 광고에 비하면 많이 검소한 편이라고 까지 할 수도 있겠다. 주거 공간의 내부구조도 등장하지 않는다. 첨단의 부대 시설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탑 모델을 기용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올 한 해 가장 기분 나쁜 광고 중 하나였다는 꼬리표를 붙인다면 억울해 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불쾌하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제까지의 아파트 광고들은, 물론 나빴지만, 거짓된 환상을 심어줄지언정 적어도 저울질은 하지 않았다. 가볍거나 몽환적이었다. 때때로 우린 그들의 화려한 삶에 버럭 울분을 토하며 애꿎은 모델들에게 분풀이를 하지만, 거기서 끝났다. 그 이상은 반응해야 할 필요도 반응해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칠렐레 팔렐레 래미안의 정원과 유리돔을 거닐며 철 지난 사랑타령을 하던 장서희 김성수 주연의 예전 래미안 광고다. 옛 연인이 래미안에서 재회(再會)하게 된다는 아파트 공화국에 더없이 걸맞는 설정은 '아주 놀고들 자빠졌다'라는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대부분은 별 무감하게 받아들였다. 그건 사람들이 드라마를 워낙 많이 봐서일 수도 있고 그 환상의 주인공 김성수조차 래미안에 살고 싶냐는 질문에 "돈만 있으면", 이라고 답할만큼 래미안이 비싸서 일 수도 있지만, 환상의 무게감이 제대로 와 닿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정말로 나와는 상관없는 그림들이라 믿어버리는 것이다. "클라이맥스를 산다. 래미안!" - 그래, 니들은 클라이맥스를 살아라. 뭐 이 정도의 의연함이랄까.

  헌데 이번 래미안 광고는 안개처럼 뿌옇던 '래미안에서 생활'의 실체를 당당하고 말끔하게 드러낸다. 거짓된 환상이 아니라며 지구 공통의 단위로 그 질량을 측정하여 들이 민다. 당신의 친구와 당신의 연인이 래미안에 살고 있다는 순간 우리는 이걸 무심하게 던져 버릴 수 없게 된다. 광고는 양팔 저울을 가져다 놓고 '래미안에 사는 사람'과 '래미안에 살지 않는 사람'을 뻔뻔하게 비교한다. 우리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인 걸까? 광고가 본디 소비자들을 자극적으로 소구하기 마련임을 모르지는 않으나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연인'편에서 수정씨가 처음으로 집에 데려가는 남자친구는,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에 동굴 저 너머에 래미안의 이름이 반짝이자 수정씨를 지그시 내려다본다. 과연 우리는 그 눈빛에서 무얼 읽어 내어야 하는가. 부러움이라면 배알도 없는 놈이고 기쁨이라면 천박한 놈이고 사랑스러움이라면 변태일테니, 뭘로 보나 다 문제다. 무엇보다 친구 - 특히 창준이와 소윤이와 같은 초등학생들이라면 더더욱 - 그리고 연인이라는 관계에 그런 물질 가치가 개입해서는 안된다. 현실은 비록 그렇지 않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상식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만약 상업광고가 그걸 조장한다면 그건 장사꾼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조차 저버렸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버블경제와 외환위기를 거치며 아파트 광고 전쟁이 불을 뿜으면서부터 지금까지가 '이미지 전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이미지에 더해 보다 구체적으로 와닿는 현실적 질량을 지닌 것들이 담길 것이고, 삼성물산이 성공적이었다 자평(自評)한다는 소문이 있는 이 광고는 (맞다. 만약 당신이 이 광고에서 거부감을 느꼈다면 그들이 설정한 타겟층이 아니었다는 뜻일런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신호탄이다. 이영애가 '자이'에서 런닝머신을 뛰고 여가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밤이 내리면 드레스 입고 돌아다닌다고 생기는 게 위화감의 원천이라 믿고, 유명 여배우들이 일제히 각성해서 건설재벌들의 광고를 거부하기만 하면 이 미쳐 돌아가는 아파트 문제의 절반쯤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바보탱탱구리들에게 이 광고는 꽤나 좋은 사례로 남을 것 같다. (200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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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소금처럼 흩뿌려지는 첫 눈 아래서

  가난은 상대적 경험이다. 고난도 상대적 경험이다. 누구도 그 경험이 절대적 기준 축의 어느 영역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타인이 남의 가난과 남의 고난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나름의 기준 축에 대입하여 대략적으로 그 크기와 질량을 추측하는 것 뿐이다. 때문에 내가 가난했다하면 누군간 비웃을 것이다. 내가 고난스러웠다해도 누군간 코웃음 칠 것이다. 정말 가난했고 고난했던 사람들에게 스물 몇 해를 아무 걱정없이 배부르게 살아놓고 더 이상 그 생활을 유지할 수 없노라 발을 동동 구르는 내 그런 한탄은 유약(幼弱)하기 짝이 없는 투정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나보다 가난했고 나보다 고난스러웠을 사람들을 알고 있어 함부로 내 나름의 가난이나 고난을 말하지는 못하겠다. 혹은 내가 말한다손 치더라도 저마다의 기준 축이 같을 수가 없는 이상 일백퍼센트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밥이 싫어서 오백원짜리 빵을 먹던 때와 통장 잔고가 없어서 석 달 열흘 오백원짜리 빵만 먹던 때는 엄연히 다른 것 같다. 치기 어린 추억담을 만들려고 헌혈하여 영화표를 받던 때와 지갑이 얇아 헌혈로 받은 영화표로 데이트하던 때는 분명히 다른 것 같다. 오직 나를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던 참 영리했던 때와 구걸과 동정으로 시간을 벌기 위해 점점 더 영악해져야만 했던 때도 다른 것 같다. 그리워서 아니 만나던 때와 그리워서 못 만나는 때도 다르다. 누구에게든 털어놓는 것이 귀찮고 싫었던 고민만이 존재하던 때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괴로운 고민만 가득한 때는 무척이나 다르다. 핏줄로 가족으로 친구로 당신들을 만나던 때와 거래대상, 협상대상으로 당신들을 만나던 때는, 그래 물론 슬프지만 그 또한 다른 것 같다. 그럼에도 가끔 거세게 치솟아 오르는 의문을 가눌 수가 없는 것은 오늘처럼 드물게 인파로 북적이는 곳을 다녀올 때다. 모두들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것이 혹여 나는 내 또래의 인류(人類)들보다 덜 행복하고 덜 즐거운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의 발로(發露)다. 맛소금처럼 흩뿌려지는 첫 눈 아래 모두가 탄성을 지른다. 그 사이 서 있으려니 적잖이 슬프다. 이대로 점점 간이 맞춰져 가는 느낌이랄까. (200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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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영화 보러 가는게 뭐 어때서?

  혼자 영화 보러 가는게 뭐 어때서? 사람들은 자꾸만 이상한 눈초리를 건넨다. “여자친구도 없는 불쌍한 놈”이라는 위로 같지 않은 위로에서부터 “혼자서 가느니 차라리 안간다”라는 비야냥까지 반응은 퍽이나 다양하다. “몇 분이세요?”라는 매표소 직원의 물음에 “혼잔데요.” 혹은 “한명이에요.” 라고 답해야 하는 때, 그 사무적이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대하는 것이 가장 괴롭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내게 마음만 먹으면 시간을 낼 수 있는 대단히 여유로운 시절이어서 3년간 무려 서른 두 번이나 영화관에 가는 호사(豪奢)를 누렸다. 그 중 무려 스물 한번을 동행없이 혼자 갔으니 확률을 따지자면, 음…… 65.6퍼센트쯤 되는 셈이다.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경우에 가장 속 편한 점은 역시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 믿는다. 2인 커플이든, 3인 삼각관계든, 11인 축구팀이든, 1개 분대든 사람의 속마음과 기호는 제각기 다르기 마련인데 둥지 안의 아기 새처럼 짹짹거리는 이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여 하나의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복잡하고도 고약한 민주 절차다. 물론 가끔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주파수(周波數) 맞지 않는 영화를 보는 일도 있지만, 심지어 그런 명분이라도 없어 같은 비용을 지불하고 최대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선택을 하지 못한다면 그건 결코 합리적인 일이 아니다. 혼자 가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의견을 수렴할 필요도 기호를 공유할 필요도 없다. 모두 내 맘이다. 나는 이런 식의 독재(獨裁)를 대단히 사랑한다.

  혼자 영화를 보러 가도 상관이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옆 자리에 누가 앉았느냐에 따라서 영화의 내용이나 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나탈리 포트만과 팝콘을 나누어 먹는다고 별 한 개 짜리 영화가 별 다섯 개짜리 영화로(물론 별점으로 영화의 급수를 매기는 방식을 좋아하진 않지만) 탈바꿈 한다거나 키이라 나이틀리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본다고 하여 죽을 운명의 주인공이 극적으로 살아나는 해피엔딩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럴 바에야 혼자 보나 여럿이 보나 그게 그거다. 괜히 우글우글 몰려가서 보면 집중력은 흩어지고 잡담만 많아진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엉뚱한 이야기를 속닥대느라고 주변 사람들의 감상마저 방해하는 ‘불량 커플’들은 DVD방으로 반드시 퇴출시켜야 한다. 아울러 값싼 입놀림으로 영화를 논평(論評)하거나 결정적 전개를 폭로함으로써 김을 새게 만드는 헤살꾼들 또한 응분의 대가를 치루게 하여야 한다. 내 이제까지 혼자 영화 보러 간 사람이 그런 마구발방을 부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우리 혼자족들은 조용히 들어가서 영화를 감상하고 들어갈때만큼 조용히 나올 뿐이다. 이 얼마나 젠틀하느냐는 말이다. 모든 영화관에서 커플석의 철거, 혹은 격리와 입구와 출구의 완벽 방음 차단을 다시 한번 촉구하는 바이다. 또한 상기의 이유를 바탕으로 혼자서 영화를 보러가는 혼자족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역시 달라져야 할 것을 주장 하는 바이다.

덧. 나는야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명랑 씩씩한 캔디 소년! (200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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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돌솥비빔밥

  그 집 돌솥비빔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껏 내가 서울의 맛집이라는 맛집을 돌아다니며 검열한 어떤 돌솥비빔밥보다도 맛이 좋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탓에 그 집의 상호는 잊어버렸지만 위치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제주공항에서 빠져나와 쭉 도로를 타고 내려오다가 용두암쪽으로 빠져서 제주은행과 피자에땅을 지나, 왼편으로 바다를 두고 달리면 라마다 호텔과 이마트가 보인다. 그 앞에 편의점 지에스 25가 있는데 바로 그 뒷편 골목으로 들어간다. 좌우로 음식점이 빽빽하고 즐비한 골목이지만 여기서의 즐비하다는 개념은 서울과는 좀 다르다. 말하자면, 그냥 거기 있다는 정도다. 그 후미진 골목 안으로 한 오 분쯤 걸어 들어가면 크게 간판을 내건 식당이 하나 보인다. 그 집이 아니다. 그 다음 집이다. 앞 집보다 훨씬 작고 메뉴도 적고 심지어 깨끗하지도 않지만 맛은 다음 집이 예술이다. 지금 말하는 돌솥비빔밥의 '그 집'이란 바로 그 '다음 집'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집 돌솥 비빔밥은 타기 직전에 나온다. 그게 일품이다. 받는 순간에 홀랑 뒤집지 않으면 바닥이 먹지 못할만큼 까맣게 타서 눌어 바닥에 붙는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려면 돌솥이 나오기가 무섭게 법석을 떨어야 한다. 아래 깔려있던 밥을 위로 잽싸게 피신시키고 위에 있던 밥을 아래로 내려 열기의 진격(進擊)을 막는다. 채로 썰린 당근, 오이, 양파, 버섯, 알맞게 잘려진 시금치, 콩나물, 숙주나물, 고르게 다져진 쇠고기, 군침 돌만큼 뽀얀 계란 후라이 등의 비빔 연합군이 합세한다. 그리하여 눌어붙느냐 (비빔밥군) 식어버리느냐 (돌솥군)의 천하를 건 대결이 기어이 펼쳐지고야 마는 것이다. 너무 식상한 표현이지만, 기가 막힌 꿀맛이다. 필경 돌솥의 온도 T, 돌솥의 열전도율 kp, 쌀밥의 평균 열전도율 kr, 돌솥으로부터 일차적으로 열을 전달받는 쌀밥의 부피 V1, 이차적으로 열을 전달받는 쌀밥의 부피 V2 등을 고려하여 공학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 틀림 없건만 아주머니의 무심히 권태로운 미소와 진작에 위험수위에 이른 위생관념은 그럴 가능성이 단 일퍼센트도 없음이 확실하다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게 한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나는 5일 내내 아침으로 돌솥비빔밥만을 먹었다. 이상하게도 전혀 물리지가 않았다. 그만큼 그 집 돌솥비빔밥의 맛은 각별했다. 서울로 돌아오고서도 종종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돌솥비빔밥 때문에 다시 제주도까지 날아갈 수야 없지 않은가. (200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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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는 문장이란 무엇인가?

  루돌프 플레슈의 '쉬운 읽기의 조사방법'(How to Test Readability, 1951)과 '쉽게 읽히는 문장 작법'(The Art of Readable Writing)에 의하면 쉽게 읽히는 문장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1) 문장이 예사로울 것. (2) 문장이 재미로울 것. 그는 예사로움을 점수로 환산한다.  E=206.835-(1.015x+0.846y) x는 단어의 수로 잰 문장의 평균치이고 y는 100단어에 해당하는 음절의 수다. 자기 글이건 남의 글이건 문장의 길이와 음절의 수를 조사하여 이 공식에 대입하면 '예사로움'의 점수가 나온다. 100에서 0사이로 나오게 되어 있다. '마타이전' 일부가 예사로움의 득점 91, 마크트웨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이 81점,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80점,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은 60점, 헨리 제임스의 한 작품은 47점으로 각각 환산되었다. 그는 또 '재미로움'을 '인간적인 관심 여하에 과녁을 맞추어, '인간적인 관심'의 득점을 다음처럼 공식화했다. I=3.365x+0.314y x는 100단어에 포함된 인격어의 수이고 y는 100문장 정도에 포함된 인격문의 수이다. '마타이전'의 일부가 79점으로 '드라마틱'에 들고 '걸리버여행기'는 55점,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은 26점으로 나온다. (문장표현사전, 장재성, 박문각, p.220) (200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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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새 칫솔

  악어새 칫솔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아마 잘 모르시는 분들이 태반일 것이라 짐작한다. 나 역시 오늘에서야 비로소 말로만 듣던 그 악어새 칫솔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는 아실 것이다. 말하자면, 공생관계말이다. 악어새는 양분을 취하고 악어는 치아 건강을 보장받는다. 상표의 이름을 '악어새 칫솔'이라고 붙이며 설마 칫솔을 악어에 빗대고 싶었을리가 만무하니, 아마도 악어새쪽이 칫솔의 기능에 상응한다는 말을 하고픈 것일테다. 그럼 왜 하필이면 '악어와 악어새'라고 칫솔의 이름을 붙였느냐? 칫솔이 치아 사이 음식 찌꺼기를 빼 먹지도 않는데. 이유인즉슨 칫솔이 주사기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칫솔이 왜 주사기로 만들어져 있느냐? 치약을 넣기 위해서다. 중앙의 원통을 빼내고 치약을 채워 넣은 다음에 피스톤을 서서히 밀면 칫솔의 머리 쪽으로 치약이 밀려 올라가는데, 이때 칫솔모 사이의 구멍으로 치약이 흘러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주지했다시피 이 칫솔의 장점이란 치약을 정량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칠칠맞게 치약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 다만 단점이 있다면 한 번 쓰고 나서 주사기의 안쪽까지 빡빡 닦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치약 거품이 잘 빠지지 않아 여간 닦아내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실용신안 제 18863호. 의장등록 제 0242280호 상표등록 0454022호. (2007/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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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비 그치면 산책할까?

  비, 비처럼 음악처럼, 비소리, 비에 젖은 비, 이 가슴에 내리는 비, 거리에 내리는 비, 비가 오면 더 좋겠네, 내 맘속에 내리는 비, 비와 당신의 이야기, 별이 되어 내리는 비,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여름 비 그리고 나, 내일은 비, 비 마저 내리는 날에, 비의 약속, 비를 맞은 천사처럼, 도시에 비가 내리면, 비오는 날, 비가 오는 거리에서, 꿈속에 내리는 비, 내 마음엔 비가, 이 비 그치고 나면, 비오는 날의 해후, 비 내리는 경부선, 비 내리는 호남선, 비 내리는 영동교, 비 내리는 터미널, 비 내리는 명동, 비 내리는 동성로, 비 내리는 고모령, 오후동안 내린 비, 비 내리는 밤, 어느 비 내리던 날, 다시 비가 내리네,  비가 내리는 밤은, 그토록 많은 비가, 비 그리고 이별, 비 그리고 까페, 찬 비가 오던 날, 비에 스친 날들, 이 거리엔 비가, 비에 젖은 정원, 이 비가 그치면, 비에 스친 날들, 유리창엔 비, 비 바람 그녀, 비의 랩소디, 어제 내린 비, 비가 좋아요, 비가 오는데,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비의 나그네, 비의 블루스, 비가 와요, 비가 내려, 비의 이별, 비의 마음, 비의 초상, 비의 눈물, 다시 비가, 빛 속의 비, 바다의 비, 비가 와, 아침에 오는 비, 비 개인 아침에 부는 바람의 향기,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추억처럼 비가 내린 날, 오늘같이 비 내리는 날이면, 그대 뒤로 내리는 비, 꽃 비 슬픔, 단비, 비의 연인들, 서울의 밤은 비에 젖어, 서울도 비가 오면 괜찮은 도시, 내 가슴엔 아직도 비가 오는데, 하루종일 동네에 비가 내리면,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우리 비 그치면 산책할까? (2007/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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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music, Rain

오스카상의 비밀에 관하여

  얼마 전 신문에 재미난 기사가 났다. 오스카상을 받은 배우가 그렇지 않은 배우보다 상대적으로 더 오래 산다는 것이다. 이는 캐나다의 한 대학교수가 발표한 결과라는데, 정말 세상은 넓고 세상에는 정말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왜 오스카상을 받은 배우가 그렇지 않은 배우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느냐. 나의 오랜 벗인 명경지(明鏡止) 양은 그 원인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한다. ① 아무래도론 : 오스카상을 타면 '아무래도' 영화가 24%쯤은 더 성공하게 된다. 또한 오스카상을 타면 배우의 지명도가 '아무래도' 올라간다. 지명도가 높은 배우는 '아무래도' 하고 싶은 작품을 골라 맡기 수월해진다. 하고 싶은 작품을 골라 출연할 수 있는 배우는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 사람은 스트레스를 더 받는 사람보다 '아무래도' 오래 살기 마련이다. ② 숫자의 함정론 : 세상에는 개미떼만큼 많은 수의 배우들이 산다. 그 중 오스카상을 타는 배우는 극소수이고 평생 오스카상 근처에도 못가보는 배우는 절대다수이다. 소수집단과 다수집단의 평균수명을 1대1의 비중으로 억지 치환하여 일반화시키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③ 오스카 아저씨론 : 청동제의 금도금 높이 34㎝ - 무게 3.85㎏ - 원가 350불의 오스카상 트로피에는 원래 생명연장의 꿈이 담겨 있다. (200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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