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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들 (The Dreamers, 2003)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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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이사벨(에바 그린)과 테오(루이 가렐) 남매는 시간을 완벽하게 거슬러 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인즉슨 다음과 같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이사벨과 테오는 사실상 완벽한 ‘어른’처럼 보였다. 거리에서 거리낌없이 정치적 의사를 표출했고 그런 무리들과 어울려 행동을 함께 했다 (어느 나라의 정부 여당과 경찰 관계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상적인 우리는 통상 그러한 능동적 저항을 성인들의 몫이라고 여기지 않던가 - 농담이다). 헌데 잠시 뒤, 매튜(마이클 피트)를 집으로 초대한 장면에서 그들 남매는 가급적 분위기에 섞여들지 않으려는 새침하고 투정 많은 딸과 불만 넘치고 반항적인 아들로 변모한다. 이러한 모습을 간명하게 요약하는 단어가 있다면 다름아닌 사춘기 - 흡사 성인답게 보였던 그들의 사회 의식이 주체 못할 호르몬과 이유없는 반항의 결과물일 수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모가 여행을 떠난 뒤 의외로 남매는 더 역동적인 시기로 돌아간다. 남매는 매튜를 집으로 데려와 묵게 하면서 좀처럼 밖을 나가지 않는 고립된 생활을 시작하는데, 돈이 떨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이념과 문화를 논하고 영화 제목 맞추기 게임을 하는 이들의 놀이법은 어른들의 것이라기 보다는 어른을 흉내내는 유폐된 아이들의 것에 가까워 보인다. 마오쩌둥을 논하고,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 중 누가 더 뛰어난지를 두고 설전을 벌이고, '네 멋대로 해라(1960)'에서 '충격의 복도(1963)', '무세트(1967)'에 이르기까지 명작 섭렵의 경험을 겨루고, 상상과 관념의 영역에서 그들은 어른들과 대등히 코드와 문화를 향유하지만 현실의 영역에서 그것들은 모두 차라리 어른을 꿈꾸는 아이들의 환상이다. 또한 남매는 자기애적 성향을 보인다. 누나 이사벨이 남동생 테오에게 엿보이는 감정이나 반대로 남동생 테오가 누나 이사벨에게 가지는 애정이나, 따지고 보면 자기애다. 말해 입 아프지만 이사벨과 테오는 둘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인 존재가 아니던가. 심지어 이 문제적 남매는 서로의 성기에 성적이고 공격적인 감정을 부여한다. 게임에서 이긴 (이때의 승패 또한 천진한 유아적 게임에 의해 결정된다) 이사벨은 매튜에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위행위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또 다른 게임에서 이긴 테오는 이사벨에게 자기가 보는 앞에서 테오와 성교할 것을 강제한다. 만약에 이 비상식적 방종이 역겹지 않게 보인다면, 그건 베르톨루치 하루방이 연출을 잘해서가 아니라 이 아이들이 진짜 ‘유아’로 퇴행해버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남매는 습관적으로 알몸으로 뒤엉켜 끌어 안고 잠이 든다 - 이 역시 유아들에겐 하나 이상하게 보일 것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행위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들은 러닝 타임 내내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단계를 거꾸로 밟아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의존적인 테오가 구강기 고착 상태라면, 결벽적인 이사벨은 항문기 고착 상태였던 셈이다.

  '몽상가들'은 물론 '68운동'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작품일 것이다. 1968년 2월, 앙리 랑글루아 해임 상태로 시작하여 5월 '바리게이트의 밤'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말 그대로 <68운동> 시절을 향한 스케치다.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로", "자유로이 즐겨라", "나는 나의 욕망이 지닌 현실성을 믿기 때문에 나의 욕망이 현실이라 믿는다" 등 당대를 지배했던 구호는 '몽상가들'이라는 제목, 그리고 세 청춘이 뿜어내는 자유로운 에너지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러나 기존의 '68운동'을 다룬 작품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혁명의 열기가 아닌 인큐베이터 안의 유폐적 몽상을 다루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응시하는 미국 청년 매튜의 외부적 시선 때문이다. 비록 마지막에 이사벨과 테오는 알을 깨고 말을 끊고 도피를 접고 '혁명 속으로' 뛰어 나간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자칫 깜빡 잊고 넘어갈 뻔 했던 아주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일깨워주는 부분이다. 다름아닌 베르톨루치 하루방도 이젠 늙었다는 사실 - 그는 당대의 뜨거운 열기를 오늘로 끌고와 발화점으로 삼고픈 욕심이 없다. 그 때의 자유, 그 때의 몽상, 그 때의 치기, 그 때의 방종, 그 때의 탐닉, 그저 그때만을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다. 엔딩 씬에 장엄하게 삽입된 에디뜨 피아프 노래의 그 유명한 대목 '아니에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는 노장이 스스로에게 바치는 위안이 아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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