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퍼시픽 림 (Pacific Rim, 2013)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3. 8. 2.

본문

  '배틀 쉽 (피터 버그, 2012)' 시즌 2의 향기가 모락모락 느껴지는 텔레비젼용 광고부터 충격적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국복하게 해준 것은 길예르모 델 토로의 이름값. 적어도 검증된 장르물 커리어가 있으니 '배틀 쉽'의 피터 버그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피터 버그는 훌륭한 배우이지만 (TV 시리즈 '시카고 호프 (CBS, 1994-2000)'에서의 열연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할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길예르모 델 토로와 연출 경력으로 비교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사실 영화의 과학적 오류를 심각하게 따지는 태도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제발 좀 과학자들에게 물어보고 만들었으면 좋겠다‘ 따위의 식상한 일갈도 이제는 지겹다. 그런 말은 '색,계(이안, 2007)'를 만들때 구성애 아줌마에게 자문을 구했어야 한다는 소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에 필요한 것은 과학적 사실 증명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논리적 개연성만 망가뜨리지 않으면 엄밀하게 과학적이지 않은 정도는 괜찮다. 다만 '상식적이면서 물리학적으로도 말이 되는 쉬운 설정'과 '비상식적이고 물리학적으로 대단히 무리한 어려운 설정'이 있을 때, 부러 고집스럽고 변태스럽게 후자를 택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 - 이 때는 문제가 된다. 아무리 각자 사정이 있다지만 최소한 스스로 제시했던 표준과 프레이밍은 준수를 해주셔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로봇(예거)들의 스펙이 실제로 무리없이 구현 가능하느냐'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제시한 로봇들의 스펙에 맞아 들어가는 존재 이유를 보여주고 있느냐'는 것이다. 처음에 이 놈들이 설계된 목적이 뭐라고 주장했던가? 공룡과 악어를 합쳐놓은 것처럼 보이는 괴물(카이주)을 제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문제는 이 괴물들이 차라리 거대한 덩어리에 가깝다는 부분에서 출발한다.


  예거는 카이주와 같은 괴물을 전담하기에 적합치가 않은 로봇이다. 첫째, 괴물은 바다를 통해 이동하고 환태평양 전반에 걸쳐 어디에서도 불쑥 나타나는데, 로봇은 육중한 몸집으로 인해 헬기에 매달려 현장까지 이동해야 할 정도로 기동력이 아름답고 찬란하다 - 적시 현장 도착은 꿈 같은 얘기다. 둘째, 괴물은 그냥 덩어리에 불과하고 몸을 움직여 상대 신체의 점을 가격하거나 상대를 감아 조이는 공격을 하는 반면에 로봇은 정교하게 동작하는 사지 관절 뚜렷한 유리 몸으로 태권도 유단자처럼 아름답게 선을 그린다. 점과 선이 맞지 않기에 십중팔구 끝내는 개싸움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어느 쪽이 먼저 나자빠지게 될지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셋째, 괴물은 머리가 아니라 동물적 본능으로 움직이는데 로봇은 2인 1조 드리프트 뇌파 조종으로 두 파일럿의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고답적인 경지를 요구한다. 그럼으로써 능력이 극대화되어 집채만한 괴물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지 어쩐지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순간적 돌발 상황에 대처를 하기에는 불필요한 변수와 싱크로 오류가 많아 크게 실속이 없어 보인다.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가 엉겹결에 카이주 전쟁에 투입된 로봇이라면 뭐 그러려니 하겠지만 애초에 카이주 전담으로 만들어졌다는 친구들이 이러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이 로봇들은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보일 뿐, 정작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의 특성에 맞게 설계된 것이 아니다. 흡사 광고 풍선 (에어라이트) 앞에서 검은 띠 차고 결연히 품새 넣는 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만약 내가 파일럿이라면 이런 로봇을 타고 저런 괴물과 싸우는 따위의 일은 절대, 절대, 절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상황을 던져놓고 진지하고 심각한 척 포장해보아야 우스꽝스럽기만 할 뿐이다. 이미 이렇게 코미디 기운으로 충만한데 덜 떨어진 과학자 콤비를 연기하는 찰리 데이와 번 고먼은 어쩜 그리 무리하게 웃겨보려고 애를 썼던 것인지 모르겠다.


*


  잘 알려진대로 길예르모 델 토로는 비디오 게임 매니아이다. 게임 개발에도 참여했었고 게임의 영화화에도 손을 댔었다. 심지어 딸아이와 멀티 플레이를 즐긴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하여 가설. 아마도 이 양반은 딸내미 데리고 XBOX 키넥트 게임을 하다가 이 작품의 2인 1조 동작 인식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지 않았을까 싶다.  


(2013년 8월)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