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104. 두고보자, 마산댁 (3/3)
    낙농콩단/Season 9 (2008) 2018.10.30 22:00

      가족들이 모르는 마산댁의 실체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이 구역 친목대장 놀이.

    - 호호호호호, 이것 좀 먹어봐요. 이게 진짜 홍삼을 갈아 넣은 거라서 피곤할 때 마시면 몸 안의 피로가 싹 풀린다니까.

      남자의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며 들고 온 음료수를 다른 환자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며 하는 소리다. 마치 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는 생색에 남자는 지쳐버렸다. 그걸 받으면서 고마워하는 사람들까지 괜히 밉고 짜증스러웠다.

    - 고맙습니다. 잘 마실께요.

    - 나한테 고마워할 것 없어요. 저 남자 거니까. 암튼 지루한 병원생활에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못 버텨요.

    - 저 분은 어떤가요? 많이 안 좋으신가요?

    - 그냥 뭐 식물이죠. 배만 볼록하게 튀어나온.

    - 지금…… 안 주무시는 거 아니에요?

    - 괜찮아요. 지가 뭘 어쩌겠어요.


      남자는 처음엔 귀를 의심했고 다음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 쥐었다고 생각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요컨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의 의문이다. ① 마산댁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보다 높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② 보통 사람들보다 인간 존재를 더 경외할 줄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③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자의 고통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도대체 이건 뭐 초딩도 이런 초딩이 없다. 철 없어 하는 짓이 아니라 시간 때우며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마음이라는 점에선 초딩보다도 못하다. 사업하던 사람이 속물성을 논하는 것이 정당하다고야 못하겠으나 그래도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남자는 믿었다. 세상에는 그렇게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따뜻하고 인간적인 분들이 훨씬 더 많으리라고 말이다. 다만 그런 경우 저런 여자가 걸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점에서, 남자는 신을 진심을 다해 저주했다. 그것도 모르는 가족들은 마산댁에게 늘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아니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다 돈 받아가면서 하는 일인데.)

    - 아줌마, 미안해요. 힘들지 않으세요?

    - 뭘요. 사장님께서 아주 얌전히 계시는 걸요. 

      오케이. 거기까지. 방금 그 말이 선을 넘은 것임은 너무도 자명했다.


    *


    가족들 앞에서는, 사장님

    단 둘이 있을 때는, 조지 클루니

    남들하고 수다떨 땐, 그냥 뭐 식물

    어떤 게 진짜인지 몰라 몰라 몰라


    *


      남자는 <예>와 <아니오>를 넘어 더 많은 표현이 가능하길 원했다. 그래야 비로소 저 악마같은 여자를 눈 앞에서 치워버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가령 영화 ‘잠수종과 나비’에 나오는 남자는 한쪽 눈만 깜빡여가며 책까지 썼는데 자신에게는 아직 양쪽 눈이 모두 남아있지 않은가. 대충 생각해봐도 영화 속 남자보다 곱절은 확률이 높았다. 일단 숙련이 되면 눈깜빡임만으로도 자음과 모음을 나누어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왼쪽 눈을 한 번 깜빡이면 '기역', 왼쪽 눈을 두 번 깜빡이면 '니은', 오른쪽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아', 오른쪽 눈을 두 번 깜빡이면 '야', 그런 식으로 말이다. 재활 전문의가 다녀간 후 그는 희망에 부풀었다. 반면 마산댁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 조지, 그냥 편히 쉬지 왜 귀찮게 일을 벌이고 그래요.

      오냐, 두고보자. 남자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제까지 날로 먹은 값을 톡톡히 치루게 해줄 참이었다. 


      재활의는 매일 한 시간씩 남자를 찾아왔다. 남자를 가르쳤고 남자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마산댁을 가르쳤다. 또한 의사는 일단 궤도에 오르면 가족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다분히 희망적인 얘기였다. 남자의 관건은 동시에 양쪽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는 일이었다. 예상보다 쉽지 않은 일이어서 어렵게 만든 문장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짧은 말 몇 마디조차 이렇게 쉽지 않다니. 그는 과거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했었던 성대를 울리고 혀를 놀려 의사를 전달하는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한 한쪽 눈을 깜빡여가며 한 권의 책을 완성한 영화 속 남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잘 나가는 사업가로 남을 밟고 일어서는 인생,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인생,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인생을 살았던 자기 자신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반성은 반성이고 복수는 복수인 법. 지금 당장 그에게는 해치워야 할 상대가 있었다. 정말로 일주일이 지나자 간단한 의사 표현이 가능해졌다. 일주일간 마산댁에게 수도 없는 굴욕을 당하면서도 남자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곧 찬란한 복수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재활의가 처음으로 마산댁에게 노트를 건넸다.

    - 사장님, 받아적을께요. 말씀해보세요.


      의사 앞이라고 감쪽같이 '좋은 간병인 모드'로 돌아간 마산댁을 보니 다시 한 번 울화가 치밀었다. 남자는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열심히 깜빡거렸다. 그가 처음 떠올렸던 것은 "쌍"으로 시작하는 욕이 상당수 포함된 거친 문장이었으나 눈깜빡임만으로 된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깨닫게 되어, 표현을 조금 완곡하게 바꾸었다. 마산댁을 열심히 받아적었고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 음, 음, 음, 다 적었어요.

    - 한 번 읽어보세요.

    - "저…… 주옥같은, 여자 좀 내 앞에서 재워" 라고 하신 것 같네요. 


      아니지, 아니지, 그게 아니지. 남자는 좌절했다. 세종대왕이 원망스러웠다. 어쩌자고 이리도 쓸떼없이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어서 후손들을 피곤하게 만드냐는 말이다. 첫째, 남자는 '주옥'이라는 단어를 의도하지 않았다. 쓰지도 않은 '이응'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은 둘째 치더라도, 자기가 깜빡인 횟수만으로는 '주옥'을 만들 수가 없었으니 조합형이냐 완성형이냐 문제를 넘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둘째, 눈 깜빡이기도 귀찮고 힘든 마당에 잔뜩 골이 난 남자가 친절하게 '여자'라고 두 음절로 지칭해주었을리도 만무했다. 셋째, 남자는 당연히 '재워'라고 말하지 않았다 (‘치워'라고 했을 뿐이지). 남자는 비로소 이 시스템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 받아적어야 하는 사람이 제대로 알아들을 의도가 없는 경우 굉장히 피곤해질 수가 있다는 것. 그 마음도 모르고 마산댁은 즐거워했다.

    - 어머나, 사장님 고마워요. 정말 친절한 분이시군요. '주옥같은 여자'라는 칭찬은 또 처음 들어봐요. 하긴 제가 나이 들기에 아까운 여자긴 하죠. 내일 모레 육십인데 아직도 밖에 나가면 다들 아가씨로 본답니다. 게다가 제가 피곤할까봐 걱정까지 해주시니 정말 완전 감동이네요. 사장님, 땡큐. 그럼 전 잠깐 휴게실 가서 눈 좀 붙이고 올께요.


      이마에 뽀뽀까지 했다. 우웩. 물론 남자는 피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남은 인내심의 절반을 모두 사용해야만 했다. 두 눈으로라도 말할 수 있는 처지를 감사해야 함에도 남자는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세 번째 눈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 눈에 '엔터'나 '스페이스 바'나 '왼쪽 화살표'의 기능을 부여할 수 있었으면. 혹은 그 눈에서 레이져가 나갔으면.' 한편 그 옆에서 종이에 뭘 열심히 적고 계산하던 의사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뭔가 이상하게 느낀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 환자분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이 ‘저 주옥같은 여자 좀 내 앞에서 재워’가 맞습니까? 

      남자는 눈을 두 번 깜빡거렸다. 물론 <아니요>라는 뜻이었다. (끝)


    시즌 9, 에피소드 104 (2008년 06월)

    댓글 0

Designed by Tistor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