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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 외딴 섬 (1/7)
    낙농콩단/Season 12 (2011) 2018.11.26 11:06

     팻 조. 어떻게 그가 볼트와 볼트 사이를 오가는지는 모르겠다.


    *


      그 날의 콘소메는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거의 동시에, 혀와 입천장을 모두 델 정도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목구멍 안쪽 깊숙히까지 남김없이 타들어 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하게 욱신거렸다.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에게 말이다 (사실 그 날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아버지'보다 '아빠'가 익숙할만큼 충분히 어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쑥쓰러움을 많이 타기도 했다). 


      다음으로 기억 나는 것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오던 묘한 느낌이었다. 차갑지만 따뜻했고, 거칠지만 부드러웠다. 이상한 일이지만 막연히 그런 감촉이며 그런 온도가. 아직 기억이 난다. 그럴리가! 그 난장판의 한 가운데서 그 느낌을 인지하고, 분석하여, 반응하고 어딘가에 기억하였을리가!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당황한 군중은 묵직한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아빠는, 아니 아버지는 팔이 빠질만큼 날 세게 잡아 당겼다. 아팠다. '따라갔다'기 보다 '끌려갔다'는 편이 더 어울릴 상황이었다. 스프 그릇을 엎었다. 콘소메인데도 유난히 질었다. 아버지 손을 잡은 반대쪽으로는 여전히 질퍽히 콘소메 묻은 스푼을 쥐고 있었다. 발이 땅에 닫지 않았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 따금씩 허공을 찼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차기도 했다. 그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그 날, 그 자리의 누구도 그럴 정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형 마트란 모름지기 '나쁜 친구'와도 같아서 힘든 시절을 함께 보내기엔 그닥 적절하지 않다.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 순간 대형 마트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그렇다. (자신있다면 반박해보시라!) 자연 재해든, 좀비의 습격이든, 핵전쟁이든, 테러든 간에…… 하여간 그런 때에 마트에 있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성을 잃은 쇼핑객들 사이에서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그 날, 그 자리가 말 그대로 혼란의 도가니탕이었음을 감안하면…… 꽤 오래 버티기는 했다. 신의 도우심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꽤 오래 버티기는 했다.


    *


     팻 조의 방문은 언제나 우리 볼트를 들뜨게 했다.


      그가 오는 날 아침의 볼트는 공기부터 달랐다. 언제 고장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화기가, 언제 청소했는지 모를 낡은 필터로 뱉어내는 공기조차도 이상하리만치 신선하고 상쾌하고 설레었다. 팻 조가 온다! 간만에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시간이다! 소비로 비로소 행복해져야 할 때다! 


      팻 조는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처럼 뚱뚱했다. 그리고 흑인이었다. 하지만 징그러울 정도로 살이 찌지는 않았다. 그냥 어쩐지 리듬 앤 블루스를 잘 부를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체형일 뿐이다. 팻 조는 장사꾼이다. 장사꾼이라는 점에서 놀라울 건 없다. 장사꾼 없는 인류의 존속이 가능하기나 할까?


      놀라운 건 그가 일종의 지하 벙커라고 할 수 있는 볼트와 볼트 사이를 오가는 장사꾼이라는 점이다. 우리 볼트 안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용하고, 또 버리는 대부분의 물건은 모두 그를 거쳐서 들어온 것이다. 그를 거치지 않고 들어온 것은 없다고도 표현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바깥 세계와 우리 볼트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다. (계속)


    시즌 12, 에피소드 147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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