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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 외딴 섬 (2/7)
    낙농콩단/Season 12 (2011) 2018.11.28 11:13

      총 면적 3,176평의 지하 벙커 볼트 151 - 냉장고와 오븐, 샤워실과 수세식 화장실, 심지어 헬스장까지 갖추어진 1,200만 달러짜리 시설. 이토록 훌륭하지만 볼트는 순전히 생존을 위한 시설일 뿐이다. 그렇기에 팻 조의 재림은 예정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히 단언하건데, 팻 조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등장하여 팻 조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응당 그랬어야만 하고, 아마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 볼트의 위, 그러니까 지상에는 야콘 밭이 있다. 지금은 어떤 꼴이 나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과거에는 그랬다. 원래 땅 주인이 퇴직금 털어 귀농하며 야심차게 심었다가 시원하게 말아드셨다는 바로 그 야콘이다. 그 날이 오기 전에도 야콘 밭은 황량했다. 이미 진작에 핵참사를 맞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그 날이 오고 난 다음에 직접 보지는 못했다. 볼트 안에 있는 누구도 그 날 이후의 야콘 밭을 보지는 못했다 (당연하다. 이젠 볼트 밖으로는 나갈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팻 조라면 오고 가며 봤을 것이다. 언젠가 한두어번 그에게 넌지시 물었던 적이 있다.

    - 조. 이 위의 야콘 밭은 어떻게 되었나요? 당신이라면 봤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 난장판이지. 꼬마야. 난장판이야. 그보다 나쁜 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팻 조는 씨익 웃었다.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우리는 2.3 톤의 철판과  25 센티미터 두께의 납판 세 개를 용케도 머리 위에 이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위에 갈아 엎어진 황량한 야콘 밭이 있다. 그 위에 소복히 쌓인 건 이슬도 아니고 서리고 아니고 세설도 아닌, 낙진이다. 과연 이 보다 나쁜 걸 상상할 수나 있을까. 물론 이렇게라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 신의 도우심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 날의 사건은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말해 입 아픈 사실이다).


    A. 새로운 거처에서 낯선 사람들과 뒤엉켜 살아하는 처지가 되었다.

    B. 그런데 이 새로운 거처는 조금의 자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회색 콘크리트의 인공 공간이다. 즉, 지하 벙커다.

    C. 우리는 이전과 다름없이 숨쉬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삶을 영위했지만 아무래도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A와 B 그리고 C. 주어진 상황이 비슷했지만 사람들은 제각기 다르게 받아들였다. 새로운 생활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그 날 이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 날을 잊을 수 없는 건 핵전쟁의 공포 혹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날이 바로 고아가 된 날이었다. 물론 수많은 아이들이 나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잊을 수가 없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패밀리 로망스’가 또아리를 틀기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려는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집착도 당연했다. 기억을 반복하며 변형되고 윤색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고, 맡을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다. 푸드 코트의 핫도그가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젊은 부부의 아기가 울었다. 어린 아이들이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저마다 쇼핑 카트를 쓸떼 있는 물건들 혹은 쓸떼 없는 물건들로 가득 채우고 남의 엉치뼈를 들이 박는 일이 속출했다. 나는 우리 쇼핑 카트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도 기억한다. 애로우헤드 생수 (1갤런, 6개 묶음), 고농축 다우니 섬유유연제 (129 온즈, 에이프릴 후레쉬 향), 세타필 모이스취 라이징 로션(16 온즈, 3개 묶음), 메디슨 화이트 치아미백제 (2 주 분), 페브리즈 액스트라 스트렝스 (27 온즈, 2개 묶음), 오랄비 치간칫솔 (6개입, 리필용), 존슨 앤 존슨 리스테린 구강청정제 (1.5 리터, 후레쉬버스트 향), RC 콜라 (20 온즈, 6개 묶음), 레이즈 감자칩 (패밀리 사이즈, 저염 클래식), 크리넥스 울트라 소프트 페이셜 티슈 (8상자 묶음), 허쉬 초콜렛 미니어쳐 번들 (18.5 온즈), 네이쳐 밸리 (BOGO, 스위트 앤 솔티 너트), 네슬레 마일로 밀크 코코아 (18.7 온즈), 네이키드 주스 (46 온즈, 그린 머신 푸르트 스무디), 파인애플맛 비타 코코 (11.1 온즈, 24개 묶음)……. 그리고 내 앞에는 콘소메 한 그릇이 있었다. 가지런히 놓여진 스푼과 함께. (계속)


    시즌 12, 에피소드 147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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