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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 외딴 섬 (3/7)
    낙농콩단/Season 12 (2011) 2018.11.29 10:52

      볼트 151의 구조는, 말하자면 원기둥 모양이다. 중앙에 통제실과 관리실이 있고 입주자들의 방이 그 주위에 원형으로 배치되어 여러 층을 이루고 있는 형태다. 2인 1실이 기본으로 하나의 방은 통상 5.6평짜리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누구도 감히 정확히 재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졸지에 지하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이 중차대한 판국이라). 단순 계산으로는 1인당 불과 2.8평만의 공간을 할당받은 셈이지만 실제 지내보면 그렇게 협소하다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는다. 상당히 넓게 계획되어 있는 공유 공간 덕분이다. 공동 주방이나 와인 바, 오락실 혹은 헬스장 같은 것들이 워낙에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좋은 호텔이라면 아무리 가장 형편 없는 방에 묵어도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그리고 통제실 위쪽으로 길고 어두운 복도가 있다. 그 끝이 바로 오버시어의 방이다.


      오버시어란 이 볼트를 관장하는 직책을 말한다. 이 곳이 학교라면 교장이 오버시어일 것이고, 이 곳이 감옥이라면 교도소장이 오버시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학교도 감옥도 아니므로 오버시어는 교장이나 교도소장 같은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손으로 선출한 우리의 대표인 것은 또 아니다. 뭐랄까, 오버시어는 그냥 오버시어다. 이 볼트의 일부 같은 존재다. 오버시어는 볼트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관리하고 결정한다. 그렇다고 독재자 같은 존재는 또 아니다. 누군가 규칙을 어기거나 선을 넘는지만 않는다면 어지간해선 남들 인생에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하여간 복잡한 남자다.


      팻 조가 우리 볼트를 방문할 때 가장 먼저 들리는 곳도 오버시어의 방이다. 소문에 따르면 뭔가 희귀하고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오버시어의 방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크게 상관 없는 일이기는 하다.


      일단 오버시어의 방에서 볼 일을 보고 나오면 팻 조는 중앙 식당에다 짐을 풀어놓고 버번 위스키를 온 더 락으로 한 잔 마신다 (그러고보면 오버시어가 그에게 술을 권하지는 않았거니 싶다). 한 잔만 마셔도 그의 코는 빨개진다. 그리하여 거나하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그는 우리가 한두 달 전에 주문했던 물건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인기 품목은 대개 정해져 있다. 알토이즈, 맨토스 등의 사탕도 인기이고 M&M's, 허쉬 등의 초콜렛도 없어서 못 판다 (기라델리나 린트, 고디바도 아니고 앰엔앰즈에 허쉬?). 남자들은 술과 면도날을 자주 사고 여자들은 화장품과 구두를 산다. '대항해시대'는 이미 몇 백년이나 지난 과거의 이야기지만 여전히 커피나 향신료는 가치있는 상품이다. 생수가 비싸고 과일주스가 비싸며 탄산음료는 더욱 비싸다. 지상의 거의 모든 물이 오염되어 방사능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드물지만 책을 구해다 읽는 현명한 사람들도 있다. 그에 반하여 독서가 더 이상은 유의미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더욱 현명한 사람들도 있다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라 믿는다).


      팻 조에게 주문한 물건이 도착하기까지는 한 달에서 두 달 가까이 걸렸다. 긴 시간이다. 그 날이 오기 전, 지상에서의 일상을 살던 우리에게 한 달씩 기다려야 할 물건은 거의 없었다. 직접 상점에서 삯을 치루어 들고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화나 인터넷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배달되어 오는 것들조차 이틀 내지 삼일이면 손에 들어왔다. ‘익일특급’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머지 않아 ‘당일배송’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내 그게 너무 당연한 시대가 열렸다. 뭘 주문했는데 산간 및 도서지역이 아님에도 일주일 가까이 걸린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운송장을 조회했다. 그래도 속 시원하지 않으면 판매자에게 전화를 했고 택배사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택도 없는 일이다. 여기  2.3 톤의 철판과  25 cm 두께의 납판 세 개 아래에서는 말이다. 여기에서 소비자의 위엄 같은 건 썩은 야콘만도 못하다. 이 곳의 주문 및 배송 규칙이란 너무나도 간단하다. 그저 팻 조가 해주기 나름에 달린 것이다.


    *


      그 날.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변해버린 그 날, 우리는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와 작별했고 상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지하 벙커 '볼트 151'에서 살게 되었다. '볼트 151'은 최고급 시설의 지하 벙커다. 회원비가 비싸서 아무나 들어오지 못했다고 들었다. 


      사실 내가 이 곳에서 가장 어리다. 이 곳에 어린아이라고는 나 밖에 없다. 만약 이대로 30년이 지난다면 이 벙커 안에는 나 혼자 살아남게 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30년씩이나 지나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외롭다. 대개는 혼자다. 심지어 혼자가 아닌 순간에도 혼자다. 매일 꿈을 꾼다. 위로받기 위해서 꿈을 꾼다. 이 곳에 들어오기 전 몇 시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내용의 꿈이다. 꿈은 반복되고, 변형되고, 윤색되었다. 이제는 나조차도 꿈의 내용이 실제 있었던 일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계속)


    시즌 12, 에피소드 147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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