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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 외딴 섬 (4/7)
    낙농콩단/Season 12 (2011) 2018.11.30 10:55

      그 날의 마트는 휴가철 해수욕장보다 붐볐다. 더욱이 사람들은 성나고 혼란스러워 하는 중이었다. 이 작고 푸른 행성에 되돌리기 어려운 비극이 닥쳤다는 걸 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때까지 나는 어떤 안내도 듣지 못했다. 어떤 방송이나 신문도 보지 못했다. 어떤 책임자나 전문가의 설명도 듣지 못했다. 졸지에 콘소메를 떠먹다가 떠밀려 가던 중이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뛰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떤 사람들은 서로 시비를 걸고 주먹을 교환했고 물건을 훔쳤으며 불을 질렀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를 내었다.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좌절과 절망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마치 어디로 가야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던지듯이 나를 차에 태웠고 마트 앞 공터를 질주하였다. 잔디밭을 정복하듯 가로질러 철조망을 들이 받았다. 덕분에 73년형 고물 시트로앵도 잠시 동안 영화처럼 부양하였다. 몇몇 차들이 우리가 낸 길을 따라 허공을 날았다. 흡사 선구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덕분에 흙먼지는 매캐했다. 목이 막혀왔다. 숨 쉬기가 어려워 코를 킁킁거렸다. 손에서 땀이 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는 영화처럼 핸들을 꺾어 차를 세웠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젖은 수건으로 내 코와 입을 감쌌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꼭 막고 있어라.") 물론 당신도 그렇게 하셨다. 역시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트렁크에서 삽도 하나 꺼내셨다. ("내려라.") 


      차에서 내려보니 허허벌판이었다. 드라이아이스가 깔린 것처럼 발 밑으로 안개가 자욱했다. 다시 보니 갈아 엎어진 밭이었고, 다시 보니 썩어 문드러진 야콘이 보였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화창하여 나는 도대체 이 세계에 무슨 몹쓸 문제가 생긴 것인지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코와 입을 막은 수건이 괜히 답답하고 축축했다. ("여기가 어디에요?") 아버지는 내 질문엔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밭 한 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셨다. 그러더니만 당혹스럽게도 삽으로 땅을 후려치셨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니 갑자기 왜? 바로 그 때, 벼락같은 욕설과 함께 땅 속에서 사람 머리가 쑥 올라왔다. 야콘 밭 한 가운데 맨홀 뚜껑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내가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땅에서 솟아난 남자는 아버지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잘 다듬지 않은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남의 집 대문을 삽으로 치면 응당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치로 언쟁이 시작되었다. 요약하자면 볼트 멤버쉽(지하 벙커에 들어갈 수 있는 회원)의 자격 유효 여부를 놓고 붙은 싸움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가 멤버쉽은 사 놓고 연회비를 내다 말았다는 데서 남자와 아버지의 해석이 엇갈렸다. 원칙을 강조하든, 감정에 호소하든, 문제의 근원은 지하 벙커의 멤버쉽을 사놓고 진작에 공원 묘지에 자리를 잡으신 무책임한 할아버지에게 있었다. 고성이 오가고 몇차례 가볍게 욕설을 나눠 먹은 다음에 아버지는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순간 맨홀 뚜껑을 열고 건장한 청년들이 올라와 아버지를 제지했다. '두들겨 맞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울었다.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을 나동그라지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다. 그래봐야 중과부적이었다. 아버지는 덜 젊고 혼자였으며 청년들은 젊고 여럿이었다. 깡패 영화의 비장한 클라이맥스처럼 무너져갔다. 마침내 아버지는 쓰러졌다. ("이제 좀 말귀를 알아듣겠나?") 남자는 청년들을 거느리고 퇴장을 준비했다. 야콘 밭의 복판에서 하나씩 천천히 땅 속으로 사라져갔다. 구멍 안으로 한 발을 넣은 상태에서 남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눈길을 주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나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추한 꼴이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애만 데려 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끌려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힘이 없었다. 거역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하늘이 보였다. 그 다음에는 땅이 보였다. 언뜻 야콘 밭 한 가운데 대자로 누워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남자는 나를 품에 안은 채로 맨홀 안으로 내려갔다. 사다리가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동그랗게 한 조각만 남은 하늘이다. 구름이 보였다. 섬뜩했다. 체리 빛깔의 구름이었다. 그리고, 뚜껑이 닫혔다. 


      그제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버지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냥 야콘 밭에 누워서 아버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손을 물었다. 심장이 경주하듯 내달렸다. 사다리를 손살같이 올라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 금속 덩어리에서 느껴지던 차가운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느낌이 손바닥 가득 장문처럼 새겨져 여지껏 남아있는 것 같다. 뚜껑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억센 손이 내 다리를 잡아 당겼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중력의 지배를 받았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내게 남은 바깥 세계와의 연결고리는 오직 한 장의 메모지 뿐이었다.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채로 구겨진 그것에는 아버지와 내가 장을 보려 했던 것들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다우니, 오랄비, 세타필, 니베아, 네슬레, 페브리즈, 쓰리엠, 허쉬, 세노비스, 다농, 하인즈, 질레트, 듀라셀, 에비앙……. (계속)


    시즌 12, 에피소드 147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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