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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 외딴 섬 (5/7)
    낙농콩단/Season 12 (2011) 2018.12.01 11:59

      볼트 151의 거의 모든 거주민들은 팻 조를 좋아했다. 당연하다. 위대한 조! 그가 없다면 우리는 물 한 병조차 쉽게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명쾌한 논리다. 나는 초콜렛을 퍽이나 좋아하는데, 오직 팻 조만이 초콜렛을 구해다 줄 수 있었으므로, 나는 팻 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다. 나에겐 초콜렛이 소중하듯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술이고 구두이고 커피이고 책이 간절할 것이었다. 치명적인 방사능과 낙진을 뚫고, 혹은 이미 그런 환경에 노출되어 변형된 인간이나 동물이나 그 밖의 무엇들의 위협을 뚫고 배송의 본연을 다하는 팻 조는 분명 성인까진 아니어도 성인과 비스무리한 사람이었다. 물론 팻 조는 진짜 성인이 아니므로 배송한 물건의 삯을 마다하는 일은 없었다.


      볼트 안 세계에서는 담배가 돈을 대신했다. 팻 조도 물건값을 담배로 받았다. 나를 제외하면 볼트 151에는 미성년자가 없었으므로 담배가 화폐이면 안될 도덕적 이유 따윈 없었다. 오히려 나에겐 잘된 일이었다. 이 볼트의 유일한 어린 아이로서 나는 유일하게 성공적인 '담배값 제태크'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른들과는 달리 공연히 태워없애는 일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수입을 올리기도 상대적으로 손쉬웠다. 볼트 안도 바깥 세계와 똑같다. 어른들이 충분히 직접 할 수는 있는데 선심하듯 아이들의 손에 맡기면서 뿌듯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있다. 잔 심부름이나 구두 닦이, 케이블 공사, 보안 시스템 프로그래밍처럼 말이다. 그리고서는 담배 몇 개를 건네 주며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기들이 무슨 어른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나는 쉽게 담배를 벌 수가 있었다. 평균 하루에 다섯 개비 정도, 운이 좋은 날엔 열다섯 개비까지 벌어보았다. 허쉬 자이언트 밀크 초콜렛은 담배 세 갑 두 개비였고 허쉬 자이언트 아몬드 초콜렛도 담배 세 갑 두 개비였다. 40 그램이 아닌 192 그램의 '자이언트 바'이므로 그런대로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보통 2 주쯤 일하면 자이언트 바 하나를 사 먹을 수 있었다. 단지 밀크냐 아몬드냐의 문제일 뿐이었다. 


      한 번은 팻 조가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 꼬마야, 허쉬 쿠키 앤 크림 바라고 들어봤니?

    - 몰라요. 그런 게 있어요?

    - 있었지. 과거에는. 

      그는 어디 낡은 잡지에서 오려낸 것처럼 보이는 빛 바랜 컬러 광고를 보여주었다. 

    - 지금은요? 구할 수 있나요?

    - 구할 수 없지.

    - 팻 조, 당신이라고 해도요?

    - 그래, 심지어 나라고 해도.

      침이 꿀떡 넘어갔다. 원래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일 수록 간절한 법이다. 허쉬 자이언트 쿠키 앤 크림 초콜렛을 향한 열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팻 조가 놓고 떠난 컬러 광고 쪼가리를 머리맡에 붙여놓았다. 그 하얗고 부드럽고 달달할 것이 틀림없는 속살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낮이나 밤이나, 부득이 생각할 수 없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열과 성을 다하여 그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맛을 짐작해보며 잠이 들었고 꿈에서 경험한 맛을 그리며 아침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났을 때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볼트 거주민들과의 거래를 끝낸 팻 조가 나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귓가에 속삭였던 것이다.

    - 꼬마야. 놀라지마라. 구할 수 있을 것 같단다. 쿠키 앤 크림 말이야.

    - 정말이요?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 그래, 정말로. 동부쪽에 아직 털지 못한 슈퍼마켓이 많단다. 그 쪽으로는 슈퍼 뮤턴트들이 드글거리기 때문에 아무래도 접근이 쉽지 않지. 그런데 내 친구 하나가 여행 중에 운 좋게도 '자이언트 바' 몇 개를 구했다고 하는구나.

    - 믿어지지가 않아요!

    - 그런데 가격이 좀 세단다. 밀크나 아몬드보다도. 훨씬!

    - 얼마나요? 얼마나 비싼데요?

      침이 꿀떡 넘어갔다.

    - 희귀한 물건이라 하나에 네 갑씩은 쳐줘야 할텐데. 우리 사이에 그럴 수야 없지 않겠니? 그냥 세 갑 열 다섯 개비만 다오. 다섯 개비는 깎아주마.

    - 좋아요. 다섯 개 갖다주세요. 그럼 얼마까지 빼주실 수 있으세요?

      아마 그조차 나의 승부사 기질에 놀랐을 것이다. 한 방에 다섯 개의 '자이언트 바'를 주문했으니 말이다. 팻 조가 감격하여 몇 개비를 더 빼주어 총액 담배 열일곱 갑에 거래를 진행하기로 했다. 

      허나 당시 내 수중에는 담배가 열두 갑 밖에 없었다. 다섯 갑이 더 필요했다. 더욱 더 악착같이 모아야만 했다. 대대적인 긴축 재정이 필요해 나는 탄산 음료를 끊었다. 코카콜라는 1.5 리터 한 병에 담배 세 갑씩이었다. 루트비어도 1.5 리터 한 병에 두 갑 여덟 개비는 내야 마실 수 있었다. 간혹 이름 없는 콜라, 이름 모를 루트비어가 나오면 한 갑에도 바꿀 수 있었지만, 그딴 쓰레기들에서는 머큐로크롬 냄새가 났다. 그래서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랜드가 중요한 것이다. 좋은 콜라 마시고 살면서 허쉬 쿠키 앤 크림 자이언트 바까지 맛볼 기회를 얻을 수는 없었다. 둘 다를 가질 수는 없다. 하나를 고르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이게 바로 어른의 선택이고 어른다운 소비이며 내가 여기 볼트 151에 들어와서 배운 것이다.


    *


      볼트 151의 거의 모든 거주민들은 팻 조를 좋아했지만 물론 예외도 있었다. 단 한 사람. 127호 치퍼 영감님이다. 영감님은 단 한 번도 팻 조에게서 물건을 사지 않았다. 팻 조는 술도 판다. 좋은 술도 구할 수 있고, 아주 좋은 술도 구할 수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주당인 영감님이 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조금 의아하다. 물론 영감님은 매일 술을 마신다. 사실 절어서 산다. '캡틴 큐'나 '나폴레온' 같은 들어본 적도 없는 술을 늘 끼고 다니는데 어디서 구해오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그런 병을 하나 구해다가 싸구려 술을 채워 들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가하면 오버시어가 뒤로 몰래 영감님에게만 술을 선물해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어쨌거나 영감님이 이 볼트 거주민 중 최연장자이기 때문이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영감님은 이 볼트 거주민 중 최연소자인 내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어떤 이들은 치퍼 영감님을 치매 노인 취급한다. 영감님이 누구도 믿지 않을 주장을 반복하기 때문인데, 그 주된 레퍼토리가 바로 '여기는 외딴 섬이다'라는 주장이다. 영감님은 종종 내게도 다가와 귀에 대고 그 은밀한 말을 속삭이시기 일쑤다.

    - 어이! 작은 친구, 절대 속지 마라. 여기는 외딴 섬이야. 

    - 예?

    - 여기는 섬이라고. 그것도 외딴 섬.

    - 할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여기는 섬이라고. 저 놈들이 말하는대로 믿고, 저 놈들이 바라는대로 살게되는, 섬이라고.

    - 저 놈들이 누구에요?

    - 누구긴 누구야. 서로 배 맞추고 사는 오버 놈과 뚱보 검둥이 놈이지. 


      오버 놈은 오버시어고 뚱보 검둥이 놈은 팻 조다. 영감님은 '오버시어'라는 발음을 상당히 어려워하시는 편이어서, 그냥 줄여서 '오버'라고만 불렀고 대개는 '오버 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작 오버시어 본인은 연장자인 치퍼 영감님에게 상당히 깍듯한 편이었다. 영감님을 모셔다가 종종 자신의 방에서 독대를 하기도 했다 (사실 볼트 거주민 중 누구도 그런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영감님이 공술을 받아 마신다는 소문이 처음 흘러 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치퍼 영감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나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되물었다.

    - 할배요. 그러니까 여기가 섬이라면 도대체 어디가 육지라는 말씀이세요?

      신기한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영감님은 돌연 넋이 나간 것처럼 눈동자가 흐리멍텅해졌고 아무 이유없이 침을 질질 흘렸다. 헤헤헤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딴청만 피우다 사라지기 일쑤였다. 마치 그런 기행을 통해 유일무이한 볼트 151 대표 치매 노인의 지위를 획득하려고 작정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영감님은 단 한 번도 나의 반문에 명확히 반응해주지 않았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사건으로 상황이 급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계속)


    시즌 12, 에피소드 147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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