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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 외딴 섬 (6/7)
    낙농콩단/Season 12 (2011) 2018.12.02 11:39

      팻 조. 어떻게 그가 볼트와 볼트 사이를 오갔는지 모르겠다.


      바꿔 말하면 다른 볼트가 있고 다른 생존자들이 있다는 얘기다. 누구나 간단히 그 정도는 추론할 수 있다. 단지 굳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이렇듯 평소에는 원리를 깨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생각 하지 않거나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볼트 안에서의 삶 대부분이 그런 식이다. 어떻게 공기정화시설이 돌아가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어떻게 상수 및 하수 시설이 작동하는가? 우리가 버린 쓰레기는 어디로 가는가?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제공되는 음식들은 어디에서 난 무슨 식재료로 만들어지는가? 물론 궁금해하지 않아도 살 수는 있다. 그저 아주 생각 없이 먹고 쓰고 버리면 되는 것이다. 애써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살고 있다.


    *


      팻 조가 죽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 볼트 안에 아직도 내가 모르는 비밀이 많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를테면 거주 구역 아래에는 연구 구역이 있었다. 또한 연구 구역 아래에는 거대한 설비 구역이 있었다. 발전기도 소각로도 정수 시설도, 모두 그 곳에 있었다.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관계자 외 출입엄금'이라고 새겨진 철문 안으로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처음이었다. 땅 속은 우리가 경험한 땅 속보다 추웠고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소각로 근처에 이르러서야 겨우 몸이 원하는 온도와 비슷해져 몸의 떨림이 멈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소각로 안에 쓰레기가 아닌 우리 친구, 팻 조를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복잡 미묘한 감정 안에는 이런 성분도 있었다. 언젠가 우리도 이 볼트 안에서의 삶이 끝나게 되면 저 안으로 들어가게 되리라는.


      팻 조를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났다. 볼트 안에 들어온지 한 달쯤 되었을 때다. 당시 나는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그리웠다.  내 방은 추웠다. 남의 방도 추웠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버지는 땅 위에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 남은 내가 땅 속에 있었다. 아무리 시설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땅 속은 땅 속이다. 2인 1실이지만 룸 메이트는 친절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화난 얼굴로 다니는 중년 남자였다. 나같은 어린 애에게 관심이 없었다. 싸구려 술을 많이 마셨고 술병을 바닥에 깔아 놓았다. 나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관심이 없었다. 3주 후 침대보에 목을 매기 전까지 (그렇다. 그 끔직한 꼴을 가장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나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는 했다. 팻 조와 달리 그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알아가기에 3주는 짧은 시간이었다. 남자의 장례도 이번의 팻 조와 비슷하게 치뤄졌겠지만 오버시어와 직원 몇몇을 제외하고는 볼트 안의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의 빈 침대를 보면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저럴 생각이었다면 왜 기를 쓰고 여길 들어온 거지? 우리 아버지처럼 회원권인지 뭔지를 정말 간절히 필요로 했던 사람에게 선물하거나 기부하거나 양도하거나 증여하면 안되었던 걸까?


      다음 날 저녁 식사 무렵에 팻 조가 나타났다. 오버시어가 그를 데려와 거주민들에게 소개시켰다. 팻 조는 뉴스 앵커라도 된 것처럼 바깥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끝났다. 땅 위는 쑥대밭이 되었다. 어디가 덜하고 어디가 더하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 차이 따윈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지상에서는 치명적인 방사선을 피할 길이 없다. 물은 모두 오염되었다. 대부분의 음식들도 오염되었다. 살아 남은 인간들은 일종의 뮤턴트 괴물이 되었다. 살아 남은 대부분의 동물 식물 역시 변형되어 괴물이 되었다. 정부란 개념이 없다. 사라졌다. 지역별로 군벌이 난립하여 정부를 대신하고 있다. 이들의 보호 아래 뮤턴트가 되지 않은 아주 극소수의 인간들이 생존하고 있다. 이들에 거역하거나 반항하는 다른 이들은 강도단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강한 괴물이 약한 괴물을, 약한 괴물이 살아 남은 사람들을, 살아 남은 사람들은 또 자기들끼리 이합집산하여 강자가 약자를,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뭐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한 달만에 듣는 바깥 세상의 소식은 (온통 부정적인 이야기 일색임에도) 묘하게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화롯가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는 심정으로 우리는 팻 조를 기다렸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아마 그때쯤부터 팻 조가 서서히 뭔가를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귀한 것들이었다. 그 날이 오기 전에는 슈퍼마켓이나 편의점, 혹은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들이지만 그 날 이후 볼트에 갇혀 살면서부턴 구경도 하기 힘들었던 것들이다. 처음에는 그냥 선물로 주다가 수량이 많아지니 가격을 정해 팔기 시작했다. 하인즈 케첩과 A1 스테이크 소스, 그리고 타바스코가 등장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식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있으면 좋지 않은가. 이를테면 '멀티 비타민'처럼 말이다. 이 작고 푸른 행성이 절단나서 지하 벙커에 숨어살게 되었다고 금욕을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잠들어 있던 욕망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냥 정수물을 마셔도 좋지만 기왕이면 생수가 좋을 것이다. 또 생수보다는 심플리 주스나 트로피카나가 낫고 한 발 더 나아가 건강을 생각하면 오드왈라나 네이키드쯤은 마셔야 좋지 않겠는가. 뒤이어 코카콜라와 스프라이트가 등장했다. 입 안이 텁텁해. 리스테린이 필요했다. 이런 척박한 시대에 비타민이라도 챙겨 먹어야 하지 않을까? 미네랄은? 오메가 쓰리는? 너도 나도 세노비스를 주문했다. 다우니, 오랄비, 필립스, 테팔, 에비앙, 페브리즈, 크리넥스, 니베아, 네슬레, 쓰리엠, 질레트, 듀라셀…… 우리에게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팻 조는 그 모든 것을 구해다 주었다. 위대한 팻 조는 뭐든 구할 수 있었다. 그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 아라비카와 로부스타와 리베리카를 모두 구해다 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그러고도 한동안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팻 조가 먼저 내게 다가왔다. 허쉬 초콜렛을 권했다. 

    - 꼬마야, 이거라도 좀 먹어봐라. 아주 맛있단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뭘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팻 조는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꽤나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 나는 이 볼트 안의 유일한 어린 아이인데. 급기야 팻 조는 숨겨두었던 개인기까지 동원했다. 그의 큼직한 천연 가죽 피리로 '내셔널 앤섬'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했다. 물론 지저분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못 이기는 척 하고 허쉬 초콜렛을 입에 넣어보았다. 몇 달만에 먹어보는 단 음식이었다.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는 나를 향해 미소지었고 나도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계속)


    시즌 12, 에피소드 147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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