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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 외딴 섬 (7/7)
    낙농콩단/Season 12 (2011) 2018.12.03 11:19

      팻 조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이름에서 (아니 별명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그는 심각한 과체중이었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운동부족 상태였다. 의사가 아니어도 그가 성인병 고위험군이라는 사실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을 터였다. 볼트 151의 식당에서 가져온 물건을 나눠주고는 철퍽 쓰러졌다. 허쉬 쿠키 앤 크림 자이언트 바를 가져다 주기로 약속하고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그 날 팻 조의 장바구니 안에는 허쉬 쿠키 앤 크림 자이언트 바가 없었다.


      팻 조의 장례를 마치고 나서 볼트 151에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탄산음료가 바닥났다. 커피와 홍차도 모자랐다. 술도 동이 났다. 비타민도 떨어졌다. 지난 십여 년간 팻 조가 해오던 역할을 누군가 대신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팻 조는 우리 볼트에만 물건을 팔지 않았다. 볼트 77과 볼트 99, 그리고 볼트 131 등 생존자들이 거주 중인 다른 지하 벙커들에도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사람들 또한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아니지! 심지어 그 사람들은 팻 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 그는 우리 볼트에서 죽었으니까!) 이제나 저제나 주문한 물건을 팻 조가 가져다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팻 조는 몇 가지 물건들을 남겼다.

      XL 방호복, M61 벌컨 기관포, 픽업 트럭 한 대, 프랭클린 플래너 한 권 그리고 메릴랜드 주의 지도.


      그 중 수첩과 지도에는 의외로 유용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팻 조가 물건을 어떻게 공급받아 어디에 가져다 파는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직 낙진 속에 묻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마트들의 위치와 이미 팻 조와 같은 사람들이 물건을 모아다 저장해 놓은 연안 부두의 창고 위치까지! 그런 귀한 정보를 갖고도 손 놓고 지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움직여야 했다. 우리 중 누군가 팻 조의 역할을 대신 해야만 했다. 거주민 회의에서 엄숙하게도 제비뽑기가 시행되었다. 치퍼 영감님이 뽑혔다. 

    - 최연장자인 영감님을 바깥에 내보내는 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반대했다. 두 번째 제비뽑기에서는 내가 뽑혔다. 최연소자인 날 바깥에 내보내는 건 상관 없는지 다들 말을 아꼈다. 심지어 난 아직 열다섯 살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다. 볼트 안에서의 삶이 지루하거나 지루하지 않아서였던 것도 같다. 


      혹은 허쉬 쿠키 앤 크림 때문이었는지도. 


    *


      팻 조가 남긴 모든 물건이 내게 주어졌다. M61 벌컨 기관포와 픽업 트럭을 포함하여.


      바깥 세상에서 막 들어온 팻 조의 모습을 우연히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육중한 덩치만큼이나 불편하게 보이는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어쩌면 심해 잠수복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꺼운 입자의 붉은 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댕으로 가득 덮인 상태였고 곳곳에는 흉측하게 피가 묻어 있었다. 검붉은 피가 아니라, 붉으면서도 초록 빛깔이 도는 그런 피였다. 섬뜩했다. 팻 조의 방호복을 입어보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치퍼 영감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 어이! 작은 친구, 절대 속지 말게. 여기는 외딴 섬이야.

    - 할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여기는 섬이라고. 그것도 외딴 섬. 그저 저 놈들이 말하는대로 믿고, 저 놈들이 바라는대로 살게되는, 섬이라고.

      상황이 상황이지만 어쩌겠는가. 게임의 룰은 맞춰드려야지. 

    - 할배요. 그러니까 여기가 섬이라면 도대체 어디가 육지라는 말씀이세요?


    *


      문이 열렸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쉬이이익. 방금 전에 빠져 나온 방의 공기를 제거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문이 열렸고 또 다른 방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쉬이이익. 같은 작업이 반복되었다. 세 개의 단절된 방을 통과하여 나는 마침 내 볼트의 입구에 다다랐다. 수십개의 밸브가 돌았고 바닥으로 하얀 연기가 깔렸다. 압력 밥솥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덜컥 문이 열렸다. 처음 내가 볼트에 들어왔을 때의 나이가 다섯 살. 지금 열 다섯 살이니 십 년만에 밖으로 나가는 셈이다. 그래도 아직은 땅 속이었다. 협소한 지하 동굴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다. 문제의 사다리가 나올 때까지. 


      사다리를 보는 순간, 나는 그 사다리가 바로 '그 사다리'임을 알았다. 이걸 타고 올라가면 뚜껑을 열고 나가면, 무려 십여 년만에 바깥 세상으로 나가보게 되는 것이다.


      힘을 주었다. 잘 열리지 않았다. 뻑뻑했다. 더 힘을 주어 밀었다.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마치 누가 위에서 찍어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깨를 받치고 힘껏 밀어 보았다. 뻐엉, 하수구 뚫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빛이 쏟아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고 몸을 서서히 지상으로 옮겼다. 눈이 부셨다. 정신이 멍했다. 어느 정도로 멍했는가 하면, 


    어디선가 "비켜요! 비켜!" 혹은 "저게 뭐야? 사람이야?" 혹은 "누가 경찰 좀 불러요!" 따위 말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고, 

    요란한 경적 소리가 귀를 찢어 놓는 듯 했으며, 

    수십 수백의 눈과 그보다 조금 더 작은 인공의 눈이 나를 향해 '찰칵 찰칵' 소리를 쏟아 내었는데, 

    그건 마치 오래 전에 폐허가 되어버렸노라 믿었던 곳의 복판에서 초고층 빌딩과 십 년 후의 인류에게 포위당한 그런 느낌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었다. 


      숨이 막혔다. 과거 팻 조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 조. 이 위의 야콘 밭은 어떻게 되었나요? 당신이라면 봤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 난장판이지. 꼬마야. 난장판이야. 그보다 나쁜 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우리는 2.3 톤의 철판과  25 센티미터 두께의 납판 세 개를 용케도 머리 위에 이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 위에 갈아 엎어진 황량한 야콘 밭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 위에 소복히 쌓인 것이 있다면 이슬도 아니고 서리고 아니고 세설도 아닌, 응당 낙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위에는 도로가 있다. 차가 달린다. 빌딩이 있다. 사람이 산다.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되어 변형된 인간이나 동물이나 그 밖의 무엇들이 아니라, 볼트 생존자들과 똑같은 (아니 오히려 더 건강할 것이 틀림없는)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다. 믿을 수 없다. 거짓말이다. 팻 조가 나를 속였을리 없다. 볼트 151의 유일한 어린 아이인 나까지 벗겨 먹었을리 만무하다. 그 초콜렛들이 그냥 세븐 일레븐에서 사들고 온 거라고? 그 코카콜라가 그냥 자판기에서 뽑아 온 거라고? 그 리스테린이 그냥 코스트코에서 대량 구매한 거라고? 말도 안돼. 이건 그냥 환각이다. 고약한 환각이다. 나는 지금 너무 충격을 받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 환각임이 틀림없는 군중의 무리들 사이에서 아주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였다. 낯선 아줌마와 대여섯 살 짜리로 보이는 여자 아이를 대동하고 길 건너 편의 월마트에서 막 밀고 나온 따끈따끈한 카트를 밀고 있는 저 남자는……, 아버지? 아빠? 믿을 수 없다. 거짓말이다. 눈이 마주쳤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눈동자 안의 당혹스러움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무릎을 꿇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우니, 오랄비, 존슨 앤 존슨, 니베아, 네슬레, 크래프트, 피앤지, 쓰리엠, 허쉬, 세노비스, 다농, 마즈, 하인즈, 켐벨, 질레트, 듀라셀, 코카콜라, 펩시, 에비앙, 네스카페, 켈로그, 하이네켄, 레드불, 맥비티…… 라고 암송하면서. (끝)


    시즌 12, 에피소드 147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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