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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농콩단/Season 14 (2013) 2018.11.08 22:00

      에이 에이는 쾌활한 미소와 까무잡잡한 피부가 인상적인 덩치 좋은 남자였다. 부대를 말아 먹을 작전 성공률을 기록 중이면서도 매사에 긍정적인 이 파일럿은 어울리지 않게 로맨틱한 구석 마저 있어서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다.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 약혼자와 그리스의 코르푸 섬에 가서 살겠다고. 그 곳의 해변은 절경이라는 말 외엔 다른 표현이 허락되지 않을만큼 아름다워서 평생 살아도 지겹지 않을 정도라고.

    - 그럴 겁니다. 중위님. 아름다운 집을 짓고 평생 그 곳에 눌러 살 겁니다.

      아마 그때마다 버카충, 버카충 하며 폭죽 터지듯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로부터 바람에 실려온, 그들의 현실 도피를 막는 소리였다.


      중위가 자신의 사면초가 상황과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에이 에이 역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워낙에 긍정적인 성품 덕분인지 대강 이해가는 척 하고 중위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배짱 좋게 승낙했다. 절박했던 중위의 입장에선 그 덩치 큰 사내가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 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중위님,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아십니까?

    - 징집되거나 뭐 그래서라는 말을 하려는 건가? 사실 여기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전쟁 중인데.

    -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 경력이 없으면 취직이 어렵다더군요. 그런데 취직을 해야 경력이 쌓이죠. 그러니 취직을 하지 못하므로 경력을 쌓을 수 없고 그럼 결국 경력자가 아니므로 취직 자리를 구할 수가 없게 되는 개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죠.

    - 몰아붙일 의도는 아니네만…… 하려는 말이 지금 상황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가?

    - 아니요. 그냥 그렇다고요. 솔직히 중위님이 처한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진 않습니다만,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안 보이는 무한 루프에 대해서는 저도 경험한 바가 있단 말입니다.

      에이 에이는 배짱 좋게 웃었다.


    -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중위님. 전쟁을 끝내버리면 됩니다. 그럼 중위님도 어울리지 않는 군복을 벗고 시골 마을 성당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저도 약혼자와 그리스 코르푸 섬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거고요.

    - 기특한 생각이구만.

    - 농담 아닙니다. 중위님. 정말 저랑 같이 전쟁을 끝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자고요. 당장 오늘 밤에라도 날아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머리 위에 불벼락을 내립시다. 그럼 일본 놈들은 자동으로 항복할 겁니다.

      중위는 기운 없이 웃어보였다. 그 한 없는 낙천적 태도가 부러워서였다.


    *


      9월 7일. 은밀하고도 요란하게 작전은 시작되었다. <더 그랜드 파이널>은 20명의 공수 대원들을 태우고 적진 상공 위를 비행하였고 귀청 떨어질 듯한 고사포 소리가 버카충, 버카충, 하늘을 찢었다. 파일럿 에이 에이는 요령껏 위험을 피해나가며 낙하 위치로 접근하였고 공수 부대원들은 서전트 하사의 지휘 아래 한 명씩 한 명씩 공중으로 뛰어내렸다. 흡사 절벽 끝으로 돌진하는 레밍즈의 무리를 보는 것 같았다. 18명의 낙하에 이어 마지막으로 뛰어 내리려던 서전트 하사는 한 명이 덜 낙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꼴 보기 싫은 놈. 구석에서 병신처럼 하얗게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채플린 중위에게 다가가 하사는 악을 썼다.

    - 중위님, 같이 가셔야 합니다.

      하사는 다시 한 번 군대의 계급 체계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자기 낙하산도 제대로 못 매는 이런 무기력한 인간을 '중위님'이라고 불러야 하다니! 아마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는 그 소문은 진짜일 것이다.

    - 중위님이 고소 공포증이 있으시답니다! 하사님!


      에이 에이의 말이었다. 버카충, 버카충, 멀지 않은 곳에서 뭔가가 뭔가에 맞아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촉박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가는 고사포의 먹이감이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하사는 중위를 끌어 안았다. 그 정도 곡예는 격추 당하는 상황에 비하면 위험한 것도 아니리라. 하나, 둘, 셋! 하사는 몸을 날렸고 순간적인 충격과 함께 뭔가 얼얼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 혼자 낙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위는 낚시줄에 묶여 <그랜드 파이널>기의 몸체에 단단히 묶인 상태였다. 덕분에 하사와 한 몸이 되어 낙하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넋이 빠져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에이 에이는 대 자로 뻗어버린 중위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생각했다. '고소공포증이 있기는 한 듯한데? 연기라기에는 너무 리얼하잖아? 그렇다면 군종 신부라는 주장도 사실일까? 그런데 군종 장교가 왜 비행 및 낙하 훈련을 받아야 하지? 훈련을 받았다는 건 군종 장교가 아니었단 뜻인가? 버카충, 버카충, 날아오는 포탄을 날렵하게 피해가며 에이 에이는 정말이지 지금이야말로 신의 가호가 필요한 순간이라고 느꼈다. 젠장! 진작에 믿음을 좀 가질 걸.'


    - 중위님! 중위님은 종교가 있습니까? 

      그 말이 스스로 생각해도 적잖이 우스웠던지 매사에 낙천적인 파일럿은 상황의 심각성조차 잊은 채 배를 잡고 껄껄껄 웃고 말았다.


    시즌 14, 에피소드 175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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