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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농콩단/Season 14 (2013) 2018.11.03 11:38

      치카디 부대에서 고의 낙제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가 또 하나 있다면 페티 오핑턴 (Petty Orpington)중사였다. 중사는 17회 연속으로 안전 교육에서 고배를 마셔 17개월 째 임무에 투입되지 못하는 상태였다. 많은 상급 장교들이 뛰어난 군인인 중사의 개점 휴업을 아쉬워하며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정작 중사는 전혀 미련이 없는 눈치였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 임무 해제 혹은 제대할 뿐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제시 W. 서전트 하사와는 완전히 반대의 덫에 걸린 사내라고 할 수 있었다. 작전에 투입되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임무 해제 상태인 것이 서전트 하사의 케이스라면, 작전에 투입되고 싶지 않아하는데 모두가 임무를 맡기고 싶어하는 것이 오핑턴 중사의 케이스였다. 공통점이 있다면 서로 다른 이유로 둘은 각기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여기 치카디 부대에 꼼짝없이 묶여있다는 정도랄까. 채플린 중위는 도대체 이 부대 내에 얼마나 많은 ‘유휴 병력 자원’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핑턴 중사는 이름과는 달리 상당히 건장한 하드웨어의 소유자로 주위의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실제로 파일럿 에이 에이의 말에 따르면 중사는 처음 몇 번의 작전에서 영화 속 액션 스타와 같은 결단력으로 망설임 없이 적진 상공으로 뛰어 내렸으며, 거의 시속 200 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속도로 떨어지면서도 전혀 여유와 위엄을 잃지 않았다고도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정작 중사와 함께 나란히 낙하하며 그 대범함을 목격했을 법한 대원들 중에는 아직까지 부대로 살아 귀환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 번의 작전 수행 때마다 중사가 소속된 분대는 적의 거점에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데는 성공했고, 아군의 지원이 이루어질 시점까지 버텨내는 데는 실패했다. 세 번 모두 중사는 홀로 살아 돌아왔다. 


      그런 연유로 치카디 부대의 모든 사람들은 중사의 아귀와 같은 생존력에 감탄하는 한편, 중사에게 '전우 잡아먹는 귀신'이 붙지나 않았을까 염려했다. 물론 개중에는 그가 입었을 어마어마한 정신적 외상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홀아비 마음 과부가 안다고, 아군의 지원이 끊어진 적진 한 가운데서 살아 돌아오기 위해 어떤 경험을 감수해야 했을지 대충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무렵부터 오핑턴 중사는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 낙제 퍼레이드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 하지만 오핑턴 중사가 고의 낙제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

      어떤 의미에서 고바야시 마루 군의관은 치카디 부대의 정보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그게 뭡니까?

    - 두 번째 기적적 생환 후 부대에서는 그 놈을 중사로 진급시키고 3박 4일인가 4박 5일인가 휴가를 줬었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데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없으니까 나름 상처를 보듬어주겠다고 생각해냈던 아이디어지.

    - 어째서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까?


    - 내가, 그러니까 군의관은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난 신체적 외상 전문인 쪽이지 않은가. 이럴 때면 차라리 군목이라도 있었음 싶어. 혹시 아는가? 신앙의 힘이 도움이 될지.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바로 앞에 군종 신부를 두고 한단 소리가?


    - 아무튼 오핑턴 중사가 갑자기 낙제를 하는 이유는 말야. 그 문제의 휴가 때 로마에 가서 진탕 먹고 마시면서 사랑에 빠졌단 거지. 이름이 미카엘라라고 했나 비비안나라고 하나. 안봐도 뻔한데 아마 매춘부가 아니었을까 싶어. 뭐, 그런 걸 두고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 판단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 사랑에 빠져서 일부러 안전 교육을 낙제한다는 말입니까?

    - 목숨의 소중함을 알게 된 거지.

      군의관은 낄낄거렸다. 그의 웃음은 어딘가 모르게 음흉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었다.

    - 사실 제대 신청도 무지하게 했다네. 아픈 척도 하고 미친 척도 했지. 그런데 어땠겠나? 자기 머리로 판단을 내려 자기 손으로 신청을 해서 이 미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은 그 놈이 더없이 제 정신이라는 증거거든. 그러니 얄짤없이 퇴짜를 맞았지.


      하지만 18번 째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에서 페티 오핑턴 중사의 기록 행진은 마침표를 찍고야 말았는데, 윗선에 과잉 충성을 하려는 출제 장교들이 중사의 답안지를 조작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낙제하기 충분한 오답을 적었던 중사는 크게 충격을 받아 상관에게 면담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야반 도주도 시도했으나 십 킬로미터도 채 못가서 다시 잡혀왔다. 중사는 탈영을 하고도 영창은 커녕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는데 그건 답안지를 조작했던 보이지 않는 손들이 부린 마술의 결과였다. 울며 겨자먹기로 중사는 다시 군의관을 찾아갔다.

    - 군의관님,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 어떻게?

    - 저는 정신 이상자인데 어떻게 작전에 투입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 후방에 병원으로 후송해주십시오.

    - 그럴 수 없어. 귀관은 미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미쳤단 이유로 임무 해제를 받겠나?

    - 저는 미쳤습니다. 분명히 미쳤습니다.

    - 그걸 무슨 수로 증명할 건데? 귀관의 말은 근거가 되지 못해. 미친 놈이 자기 스스로 미쳤다고 하는 것 봤나?

    - 그럼 아프다고 해주십시오. 죽을 병만 아니면 됩니다.

      중사는 군의관의 바지를 붙잡고 매달렸다.

    - 난 못해. 적어도 이제는 못해.

    - 뭐라고요?

      군의관은 크게 한숨을 쉬더니만 설명을 시작했다.

    - 귀관이 나를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귀관에게 병이 있다는 진단을 내려줄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귀관이 나를 찾아왔기 때문에 나는 귀관에게 적어도 심각한 병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러니 내가 그런 걸 바랐다면 애초에 찾아오지를 말았어야 했네.  

    - 군의관님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진단을 받는단 말입니까?

    - 귀관은 그게 역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틀렸어. 내가 보기엔 귀관이 정신적으로는 물론 신체적으로도 온전하다는 게 이 상황의 핵심이라네.

      중사는 두꺼비만한 눈을 굴리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분을 이기지 못해 테이블 위의 꽃병을 던져버리고는 군의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막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씩씩거리는 중사의 뒷모습을 보며 군의관은 혀를 끌끌 찼다.

    - 이래서 부대에 군종 장교가 하나쯤은 필요한 법인데……. (계속)


    시즌 14, 에피소드 175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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