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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농콩단/Season 14 (2013) 2018.11.03 20:00

      오핑턴 중사 사건은 채플린 중위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제 더 이상은 안전 교육 낙제가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도 알게 된 것이다. 이번은 우연히 넘어가더라도 다음 번에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또 그 다음 번에는 어쩔 것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합격의 영예와 함께할지 누가 알겠는가? 


      마음이 급해진 중위는 보다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면담을 신청한 상관의 수가 치카디 부대에 존재하는 전체 장교 숫자보다 많다는 사실을 채플린 중위가 깨달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떻게 이런 난센스가 있을 수 있을까?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선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폭탄을 돌리는 느낌으로 매 달 꼬박 꼬박 안전 교육에 두 번씩 낙제했고 제시 W. 서전트 하사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쳤다. 급기야 중위는 신경 쇠약에 걸릴 판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처럼 행정 오류로 엉뚱한 자리에 앉아 있는 군인이 치카디 부대 안에 아주 많지 않을까 하는. 이를테면 포목집 아들이 군의관으로 와서 붕대를 감아주고 있다든가, 마부여야 할 사람이 폭격수가 되어 상공을 휘젓고 다닌다든가, 평생 제식훈련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사내가 번쩍거리는 계급장을 달고 장교 목에 힘 주는 자리에 앉아 있다든가. 하긴 그건 역사상 모든 전쟁에서 으레 벌어졌던 거짓말 같은 일이기는 하지만.


    *


      치카디 부대의 부연대장인 메이어 메이어 (Major Mayor) 소령은 마지막으로 중위의 발령 서류에 서명을 했던 상관이었다. 군종 장교와 공수 부대원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중위가 가장 먼저 찾아가 면담을 시도했던 상대이기도 했다. 


      소령을 만나기는 정말 힘들었다. 열 번에 아홉 번은 부재 중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가까스로 만남이 성사된 것은 중위가 에이레네 섬에 도착한지 거의 아홉 달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그 날의 충격을 중위는 잊을 수가 없었다. 소령의 방은 어둡고 퀘퀘한 냄새가 났다. 어린 당번병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중위는 호랑이처럼 매섭게 눈을 부릅뜬 위엄있는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압도당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경례를 올렸는데, 그러자 소령은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당번병!


      이렇듯 첫 만남부터 소령의 태도는 무뚝뚝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 뜨악한 기분으로 소령의 방에서 쫓겨났던 중위는 한동안 다시 찾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오핑턴 중사 사태만 이니었어도 가급적 찾아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도 소령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당번병!


      쩌렁쩌렁한 목청에 건물이 진동하는 듯 했다. 중위의 발령 과정에 포함된 결정적 서명 중의 하나가 소령의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지만 소령은 중위가 누구인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치카디 부대에 중위 계급을 가진 남자가 자그마치 넷이나 된다고 하니 그 정도는 이해해줄 만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 저는 칼 A. 채플린 중위입니다. 아홉 달 전 치카디 부대로 파견된 군종 신부로…….

    - 응, 그렇구만. 무슨 일인가?

      잠시나마 중위는 얽힌 매듭의 실마리를 드디어 찾은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군종 장교입니다. 그런데 저는 현재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 우리는 군종 장교가 없는데?

    - 제가 군종 신부로 여기에 왔습니다. 거의 일 년 전의 일입니다.

    - 나는 자네의 면담을 받아들일 수 없네. 우리 부대 안에는 군종 장교가 없는데 군종 장교와의 면담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나? 귀관은 지금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요청을 하고 있네.


      절망적인 기분으로 쫓겨나는 중위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는데, 바로 그 때 벼락같은 메이어 소령의 일갈이 그의 뒷통수를 때렸다.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당번병!


      중위는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아아, 설마……. 희망과 절망이, 이유도 모르는 채 교차했다.

    - 저는 칼 A. 채플린 중위입니다. 아홉 달 전 치카디 부대로 파견된 군종 신부로…….

    - 응, 그렇구만. 무슨 일인가?

    -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군종 장교입니다. 그런데 저는 현재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 받아놓으면 좋지. 받으면 안되는 이유는 또 뭔가?


      조금 전과 다른 대답이 나온 걸 기뻐해야 할지.

    -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러 이 곳에 왔습니다. 기초 군사 교육만 받은 제가 낙하산 훈련이라니요. 게다가 저는 고소공포증 환자입니다. 육군에서 저를 내보낸 사유가…….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당번병!


      갑자기 눈을 까 뒤집고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소령이 조금 무섭기도 했다. 소령의 어린 당번병은 따뜻한 물수건을 들고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와 달아오른 소령의 이마를 물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주었다. 가끔씩 중위를 힐끔거리는 어린 병사의 눈동자 속에는 연민과 동정과 체념이 3분의 1씩 섞여 있었다. 그건 마치 <그래요. 그렇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중위는 그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덕분에 잠시 후 소령이 또 벌떡 일어나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이렇게 고함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무슨 일인가? 그 전에 자넨 누군가? 그 전에 여긴 어딘가? 당번병!


      어린 당번병은 할아버지 뻘 되는 소령의 잠자리를 봐주었고 기저귀를 갈아 주었으며 소령이 잠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나서야 막사 밖으로 나왔고, 그때까지 안절부절 못하던 중위는 초조하게 문 앞를 서성서리다가 재빨리 당번병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노’로 시작해서 ‘망’으로 끝나는 그 단어를 자칫 입 밖에 낼 뻔했지만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넣어 다행이었다.

    - 소령님께서는 5분에 한 번씩 기억이 지워지십니다. 다시 말해 5분 전 일은 기억 못하십니다.

    - 지워진다고 했나? 주기적으로?

    - 그렇습니다. 날아갑니다. 휘발됩니다. 일종의 리셋입니다.


      이런 휘발같은 일이. 오, 주여! 중위는 어이가 없던 나머지 반사적으로 성호를 그었다.

    - 몇 년 전부터 그러셨던 건가?

    - 제가 알기로는 5~6년 되었습니다. 그 이전 일을 기억하시는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 그런데 연대를 지휘하시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나?

    - 그래서 부연대장 아니십니까? 연대장이 계시니까.


      중위는 탄식했다. 아아, 그럼 내 발령 서류를 확인하고 승인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 그럼 소령님 서명이 적혀 나오는 모든 서류는 연대장님을 통해서 처리된 것인가?

    - 그럴리가요. 내용은 리터넌트 대위님이 보시고 서명은 대충 제가 합니다. 

      어린 당번병은 씨익 웃어보였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부적절해 보였을 수도 있는 미소였지만 중위에게는 적절함을 따지고 자실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자칫 하다가 오늘, 내일 아니면 또 가까운 미래에 그는 적진 상공에서 내던져질 몸이 되었으니 말이다.

    - 그렇다면 소령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자초지종을 5분 내에 압축 요약해서 소령님에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잊어버리기 전에 재빨리 이해시켜버리는 방법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에 지우개가 없는 다른 상관님을 통해 해결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대꾸할 힘도 없었다. 비틀거리며 중위는 돌아서 몇 걸음을 걸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잠깐 사이 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그는 돌아서 소령의 방 앞에 여전히 서있는 어린 당번병에게 물었다.

    - 자네 이름이 뭔가?

    - 어윈입니다. (계속) 


    시즌 14, 에피소드 175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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