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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농콩단/Season 14 (2013) 2018.11.06 14:24

      언제부턴가 채플린 중위가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끔찍하리만치 방치당하는 신세였고 거대한 무관심 속에서 홀로 썩어가는 중이었다.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었고 털어놓은들 누구도 그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위는 고소공포증 환자였지만 폐소공포증 역시 어떤 기분의 증세를 동반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대원들은 <공수 부대에 들어와 자신이 공수 부대원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공수 부대의 작전을 위한 교육 훈련을 받지 않겠다는 남자>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 공수 부대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럼 누군 원해서 왔나?

    - 까라면 무조건 까는 게 군인이지. 어딜 감히!


      군인다움으로 무장된 그들의 인지 체계는 명쾌한 이진법을 선호했다. 백번 양보해 설령 중위의 주장이 타당하더라도 그것이 변명의 여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된 일이든 일단 왔고, 임무가 주어졌으면 충실히 하는 게 군인 아닌가? 확실히 시스템이 실패할 확률보다는 개인이 부적응할 확률이 그들에게는 훨씬 그럴 듯한 설명이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시대 또한 그걸 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하기야 사연 없이 전선에 내밀려 온 사람이 어디 있겠어.


      중위의 억울한 사연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높은 사람들은 없으니만 못했다.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한 사람은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웠고 다른 한 사람은 금치산자나 다름없었다. 둘 중에 한 사람을 통해 나버지 한 사람에게도 비로소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에 접근하기란 가히 뫼비우스의 띠 위를 내달리는 일에 비견할만 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원점으로 되돌아아오게 되어 있었으니까. 출구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더 절망케했다. 


      가령 군의관은 중위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만한 사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연대장이나 그에 준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 중위의 문제를 보고해 줄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고, 설령 그것이 여의치 않는다면 군의관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진단서를 써줌으로써 우회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권한 또한 있었다. 그럼에도 군의관은 애써 개입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마도 단지 귀찮았거나 중위가 겪고 있는 상황이 그리 심각한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어진 시련이 견딜만한 것이든 견딜만하지 않은 것이든, 어차피 남의 일이면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시간은 정처없이 흘렀다. 전쟁은 내일 끝날 것도 같았고 어쩌면 영원이 끝나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다보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혹은 또 가까운 미래에 중위는 낙하산과 배낭 하나를 등에 매단 채로 허공에서 던져질 것이 분명했다.


    *

     

      그리고 그 해 7월 19일. 급기야 중위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드디어 치카디 부대에 공식적으로 군종 장교가 부임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군종 신부, 중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특히 고바야시 마루 군의관은,

    - 크리스찬 쉐퍼드 (Christian Shephard) 중위! 이름부터 더할 나위 없이 군목스럽군! 

    라며 크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채플린 중위로서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이제는 그가 군종 목사로 이 부대에 왔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설령 알게된다고 한들 어느 누구도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젠 '대체품'이 있으니까. 목사와 신부라는 차이가 있겠지만 전시의 군대에서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목 쉐퍼드는 중위의 딱한 사연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군의관이 채플린 중위를 '관심 사병'이 아닌 '관심 장교'로 지목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위의 연대장 면담 신청 건 수가 평균을 크게 웃돌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치카디 부대 전체의 나머지 장교들이 연대장 면담을 신청한 건 수를 모두 다 합쳐도 채플린 중위 한 사람의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른 장교들은 연대장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럭 저럭 상황에 맞춰 지냈다. 무사히 살아 남은 채로 전쟁이 끝나기만 바라는 것이 오직 그들의 관심사였다. 오직 유별나게도 채플린 중위만 히스테리를 일으켰고 무엄하게도 연대장의 실존 여부까지 의심해가며 이리 저리 소문을 캐고 다녔던 것이다. 이런 길 잃은 양들을 다독이는 것이 군종 장교로 부임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이라고 군목 쉐퍼드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 길 잃은 양이 하필 장교에다가 자신과 같은 계급씩이나 된단 사실이 조금 껄끄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 들어오세요. 한 번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채플린 중위는 군목의 눈치를 살폈다. 쉐퍼드는 아무리 봐도 썩 호감가는 외모는 아니었다.

    - 연대장 면담을 신청하셨더군요. 그것도 아주 많이. 지난 일 년 동안 마흔 여덟번이나 말입니다. 거의 매주 연대장을 만나보려고 애쓰셨단 뜻이로군요.

    - 글쎄요. 여기서 방점은 '마흔 여덟번이 많은 횟수다'라는 부분보다는 '그 마흔 여덟번 중 단 한 번도 면담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데 찍혀야 하는 게 아닙니까?

    - 그렇군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면담 신청 사유가 뭐였습니까?

    - 바로 잡아야 할 일이 있는데 아랫선에서는 해결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분을 만나려고 했던 겁니다.

    - 그 바로 잡아야 할 일이 뭐였습니까?

    - 사실…… 저는 군종 신부로 이 부대에 왔습니다. 쉐퍼드 중위님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상대가 새로 온 군종 장교다보니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과 안도가 교차하는.


    - 군종 신부라고요? 그런데 서류에 따르면 현 소속은 공수부대로군요. 그런데 계급상으로 보면 장교이고요. 말하자면 장교로 오신 분이 병이나 부사관들과 함께 비행 및 낙하 안전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아무도 저와 이야기를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분명 이상한 상황인데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그래서 가장 높은 권한을 가진 분을 만나려고 했던 거로군요?

    - 맞습니다. 긴 이야기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런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단 생각에 중위는 감정이 복받치기 시작했다.


    - 행정 착오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확인하고 정당하게 바로 잡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무작정 방치를 하냐는 겁니다. 그러는 사이에 당사자가 느낄 고통에는 요만큼도 관심 없다 이겁니까?

    - 비행 및 낙하 훈련을 받는 게 고통스럽습니까?

    - 교육은 받으면 되고 시험은 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고소공포증 환자인 사람을 굳이 매달 비행 및 낙하 훈련 대상자로 올려 놓는다는 부분을 저는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심함에도 정도가 있는데, 이쯤 되면 정말 잔인한 것 아닙니까?

    - 할렐루야! 그러니까, 귀관이 고소공포증이라는 겁니까?

    -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비행 및 낙하 훈련을 원하지 않아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 저런, 정말로 고생이 많았겠네요. 마음이 아픕니다.

      중위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지요. 제 당번병을 통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어윈 이등병을 보며 중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치카디 부대에 장교 한 명이 늘어날 때마다 어린 어윈 이등병이 수발 들어야 할 대상도 한 명씩 늘어나고 있었다. 저 친구도 불쌍하지. 여기엔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


      하지만 군목과의 뜻하지 않던 면담으로 중위는 다시 한 번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마침내 길고 어두운 터널 끝에 한 줄기 빛이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옭아매던 도돌임표를 지워낼 방법을 찾은 것처럼. (계속)


    시즌 14, 에피소드 175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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