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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농콩단/Season 14 (2013) 2018.11.07 11:27

      며칠 후 군목은 중위를 찾아왔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걷자고 말했다. 어느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후끈한 열기가 달궈진 땅에서부터 올라왔고 볕은 손을 베일만큼 날카로웠다.

    - 조금 알아보았더니 규정이란 게 있습디다. 상관과 면담을 하려면 지켜야 하는 절차 같은 겁니다.

    - 물론 규정이 뭔진 알고 있습니다.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중위는 대꾸했다.


    - 중위가 원하는 연대장 면담을 성사시키려면 면담 신청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 저도 작성했습니다. 그것도 수도 없이.

      군목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양식이 틀렸더군요. 여기 마지막에 도장을 받아야 하는 위치가 있습니다.

    - 도장이야 대령님을 만날 수 없으니 못 받았습니다. 연대 행정관들에게도 없는 도장을 어디에서 받겠습니까?

      군목은 헛기침을 했다.

    - 편람이라는 게 있더군요. 부대 운영을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던데…….

    - 예, 압니다.

    - 읽어보았나요?

    - 물론이죠. 읽어보았습니다.

    - 편람에 따르면 상관 면담을 희망할 경우 어떻게 하도록 있는지 기억 합니까?

    - 기억까지야 못합니다. 그걸 외울 필요까지가 있습니까?

    - 편람에 따르면 서명을 받지 않으면 면담 신청서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위는 걸음을 멈추었다. 찌는 듯한 더위 때문인지 이미 속옷은 축축히 젖은 상태였다.


    -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 그러니까 유효한 면담 신청서를 작성하지 못했기에 면담 신청이 불가했다는 뜻입니다.


    [44-6B] 상관 면담의 신청에 관한 공통규정

    가. 연대장 등의 면담 사유가 발생하는 경우 해당 장교는 유효한 면담 신청서를 작성하여 연대 행정실에 제출한다.

    나. 유효한 면담 신청서는 양식 작성 요령에 준하여 작성한 것이어야 하며 하단에 연대장의 서명을 받은 것이어야 한다.

    나. 단, 면담의 신청 성사에 대한 결정은 연대장이 그 중요도에 따라 판단한다.

    다. 면담의 중요도는 통상 다음과 같은 가중치로 산정되어

      1) 부대 운영 업무에 관한 안건: 가중치=1.5*(10/남은 기한 일수)

      2) 부대 교육 훈련에 관한 안건: 가중치=1.0*(10/남은 기한 일수)

      3) 부대 이벤트 행사에 관한 안건: 가중치=0.5*(10/남은 기한 일수)

      4) 개인 사유에 관한 안건: 가중치=0.1  


    - 하지만 연대장님이 계시지 않으니 도장을 받을 수 없지 않습니까?

      군목은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 물론 그렇습니다. 도장을 받아 유효한 면담 신청서를 작성하여야 연대장님을 만날 수 있고 그래야 서류든 뭐든간에 도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 도장을 받아야 연대장님을 만날 수 있죠. 연대장님을 안 만나고 어떻게 도장을 받습니까? 그러면 도장을 받으러 가서 면담을 하면 안되는 겁니까?

    - 안되죠. 왜냐하면 공식적으로 유효한 면담 신청서를 작성해서 접수하지 않았으니까.

    - 맙소사! 설마 영원히 못 만날 거란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중위가 목소리를 높이자 군목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아무리 논쟁해봐야 의미가 없단 말을 하는 겁니다.

      물론 중위도 그것이 군목의 탓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 편람. 그렇다면 그 멍청한 편람을 고치면 안되는 겁니까?  서명을 받지 않아도 면담이 가능하게 되면 이 논쟁을 거듭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 상자 밖으로 나가자는 이야기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 그런데…….

    - 편람의 수정에 대한 편람 규정 또한 따로 있습니다. 여기 편람집의 이 대목을 읽어보시죠.


    [44-9B]. 편람의 추가, 수정, 및 삭제에 관한 공통규정

    나. 편람의 수정 사유가 발생시에는 연대장 면담을 통해 연대장에게 보고하고 연대장 면담을 신청하여 연대장과 협의 후 연대장의 윤허 아래 수정하도록 한다.


      중위는 군목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연대장님에게 어떻게 보고를 합니까?

    - 연대장 면담 신청을 해야죠. 유효한 면담 신청서를 갖추어서.

    - 설마. 농담이시죠?

    - 농담 아닙니다.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모래 포대를 걷어찼다. 바닥에 주저 앉아 울고 싶은 기분이었고 실제 주저 앉기까지도 했다. 모든 게 절망스러웠다. 이만큼 답이 없을 수 있을까 싶었다. 군목 쉐퍼드가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가만히 얹었다. 그리고 품에서 삼단접지를 꺼내 중위에게 내밀었다. 접지를 펴면 교인과 하나님 사이의 길이 끊어지고 접으면 다시 길이 이어지는, 그런 아기자기한 만화가 인쇄된 종이였다. 나지막히 귀를 울리는 쉐퍼드의 목소리가 중위의 귓전을 맴돌았다.


    - 종교가 있습니까? 제 생각엔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오! 주여! 이제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계속)


    시즌 14, 에피소드 175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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