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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농콩단/Season 17 (2016) 2018.11.15 11:20

      쟝 마리 시립 도서관에 자가 대출 반납기 2.0이 도입되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가 대출 반납기 2.0은 반납 도서를 소독액으로 세척하는 놀라운 기능을 갖춘, 위생과 청결에 특화된 다음 세대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사용설명서에 따르면 거의 98.9%의 세균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브라보! 마치 누군가 나의 속마음을, 저의 바람을, 저의 필요를 속속들이 읽어내어 마법이라도 부려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누가 그렇게 해줄 수 있었을까? 페어리 갓마더?) 


      하지만 나는 나름 이성적인 사람이어서 마법보다는 기술을 믿었다. 2.0 모델의 상세 동작 원리를 이해하고 싶었다. 거의 98.9%라는 구체적 성능 지표의 근거에 대해서도 궁금함이 일었다. 유감스럽게도 사용자 매뉴얼은 너무 직관적이고 너무 단순했다. 나의 의문에 충분한 답을 줄 수 없었어요. 도서관의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잘난 사서들도 몰랐다. 심지어 라이브러리 디렉터 뒤상씨도 잘 모르는 듯 했다.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서 가장 가방 끈이 긴 뒤상씨도 모르는 걸 도서관의 다른 누가 알 리가 없을 것이다.

    - 뒤상씨, 자가 대출 반납기 2.0에 대해서 좀 아세요?

    - 모르겠는데요, 캐시. 왜요?

    - 소독액을 쓰면 종이가 젖지 않을까 해서요.

    - 그렇군요. 일리 있는 말이네요.

      뒤상씨는 언제나 그렇듯, 시선을 모니터 위의 스프레드 시트에서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 종이가 젖지 않는 소독액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

    - 그렇겠죠. 아마도.

    - 맞아요. 아마도 그런 식이겠죠? 그럼 앞표지랑 뒷표지는 깨끗하게 될텐데 책 안쪽은 어떡하죠? 

    - 그러게요, 캐시. 정말 궁금하네요.

    - 뒤상씨, 손에 침을 묻혀가며 페이질 넘기는 사람들이 있단 사실을 아세요?

    - 몰랐네요, 캐시. 놀랍군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니.

    - 책 안쪽은 어떡하죠?  어떻게 한 장씩 넘길 수 있을까요? 맞아요. 로봇 손 같은 게 있는 거에요. 그렇죠?

    - 그렇네요, 캐시. 그러면 되겠군요.

      뒤상씨의 맞장구는 무미건조했지만 나는 덩달아 신이 났다.

    - 그렇군요! 로봇 손들이 책장을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적외선인지 자외선인지를 조사하여 세균 등 기타 이물질을 척살하는 거에요! 

    - 거 참 시간이 꽤 걸리겠군요.

    - 아마 그렇겠죠. 수천페이지짜리 러시아 소설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상관없어요.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빌려가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직업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선 반납일 이전에 반도 읽지 못할 걸요? 

    - 그렇게 소독이 끝나면 하단의 보관함에 차곡차곡 보내는 거죠. 다음 날 아침 페이지들이 열쇠로 보관함을 열면, 짠! 깨끗한 반납 고서들이 쌓여 있겠죠.

    - 축하해요, 소피. 새 기계의 원리를 밝혀냈군요.  


     *


      라이브러리 디렉터 뒤상씨는 쟝 마리 시립 도서관의 최고 책임자였다. 또 인정받는 문헌정보학자이기도 했다. 나이는 40대 중반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열 살쯤 어려보였다. 갸름한 턱선에 두꺼운 뿔테 안경이 지적인 인상을 풍겼다. 외모를 굳이 셀러브리티와 비교하자면 배우 젊었을 적의 알랭 들롱을 닮았다. 뒤상씨는 도서관의 풀-타임과 파트-타임을 통틀어 직원 중 유일한 남성이었고 또 (돌아온) 싱글이었다. 그는 어렸을적 사고로 시신경이 손상되어 거의 시각 장애인과 다름없는 시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그 덕에 나머지 감각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 이상인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지팡이를 두들기며 다녔기 때문에 도서관 직원들은 딱딱딱 소리와 함께 그의 등장을 예측할 수 있었다. 또한 항상 깨끗하게 세탁한 잘 마른 면직물 냄새가 났기 때문에 후각이 예민한 직원들의 경우엔 향기로 그의 존재를 인식할 수도 있었다. 잘생기고 싱글에다가 (안쓰럽게도) 핸디캡을 안고 있는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될만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직원들이 뒤상씨를 연모했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무의미한 짝사랑은 아니었다. 우리는 작년 봄부터 가을까지 7개월에 걸쳐 만났었다. 우리가 깨진 것은 내 결벽증 때문이었다. 뒤상씨가 입을 맞추려는 걸 내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뒤상씨를 사랑했지만 입과 입을 맞추는 행위는 너무 불결하게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뒤상씨는 날 떠나갔다. 그이는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남자여서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여전히 날 사랑한다고 확신한다. 그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자가 대출 반납기의 등장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라텍스 장갑을 끼운 채로만 책을 만졌다. 1.1%의 불안감 때문이었다. 여전히 페이지들의 손을 타면서 2차, 3차 오염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책은 돌고 돌았다. 화폐처럼. 어차피 다시 그 생물학적 무기들은 돌고 돌고 돌아 대출 희망자들의 손에 들려서 내 앞에 나타날 것이었다. 모쪼록 많은 수의 대출 희망자들이 캐시에게 향하기를! 언제나 그러했듯 저는 굼뜬 동작으로 천천히 처리하는 선임자의 위엄을 누릴 계획이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큰 진보가 아닐 수 없어.


      나는 이 짧은 한 마디로 자가 대출 반납기 2.0의 도입을 논평했다. 마스크를 쓴 채로 캐시에게 의견을 물었다. 

    - 얘, 넌 어떻게 생각하니?

      한심스럽고 위생 관념이 투철하지 못한 나의 파트너는 헤벌쭉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뭐, 좋은 것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멍청하고 대책없는 계집애에게 질문을 던진 자신을 질책했다. 캐시는 반납된 책을 만진 손으로, 자기 코를 만지고 머리를 긁고 귀를 후빈 다음에 자기 샌드위치를 먹은 적도 있는 아이다. 대책이 없단 짧은 말 정도로는 그 무지함을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계속)


    시즌 17, 에피소드 210 (201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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