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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 리바운드 걸 (6/8)
    낙농콩단/Season 17 (2016) 2018.11.20 11:00

      며칠 후, 자가 대출 반납기 5.0 (a.k.a. 로즈)는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 가발을 쓰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뒤상씨가 선물해줬다는 풍성하고 탐스러운 금발이었다. 포니 테일로 묶어서 길게 내려 뜨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고운 금빛 머리채가 좌우로 찰랑거렸다. 머리칼이 더해진 것은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넣은 것에 견줄만했다. 여자가 보기에도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매혹적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옆자리 캐시 역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와 맞서야 하는 것처럼 절망적인 기분이 대출/반납계를 휘감았다.


      그녀가 처음 도서관에 도입되었을 때, 내가 그녀를 C3PO와 비교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비유였다. 굳이 스타워즈를 전고로 삼을 것이었다면…… 뭐랄까, R2-더블D2쪽이 훨씬 적합한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왜 D2가 아니라 더블D2인지는 알아서 생각하시길 바란다). 


      로즈는 원래 아름다웠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졌다. 분명 사실이었다. 분명 로즈의 눈은 처음보다 더 커졌다. 코도 조금 더 높아졌다. 가슴도 (확실히) 커졌다. 몸매 또한 점점 더 R과 T 사이에 위치한 알파벳에 가까워졌다. 아름다움이 진화의 정방향에 있노라 가정한다면 그녀는 분명 진화하고 있었다.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듯이 하드웨어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한 것인지도. 


      예상대로, 뒤상씨는 (나의 뒤상씨는) 로즈가 만들어내는 막강한 중력 우물로부터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애인을 돌려가며 사귀어 온 그로서도 이만큼 강렬한 상대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평소 한 여자와 두 달 이상의 만남을 지속해오지 못하던 그였다. 하지만 로즈와의 관계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여섯 달이 지나도록 견고했다. 몸이 달아 불안해하는 쪽도 늘 뒤상씨였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호출했다. 혹은 (시도 때도 없이) 로즈가 자신을 호출하도록 지시했다. 열람실에서, 비품실에서, 심지어 자기 사무실에서. 업무 시간 전에, 업무 시간 후에, 심지어 업무 시간 중에도. 

    - 언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에요?


      자가 대출 반납기에게 남자를 빼앗긴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될 (하지만 자신의 희박한 위생관념에 대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캐시 펠티에 양의 푸념이었다. 모두가 짐작하시겠지만 나는 세 가지 이유에서 그 아이의 말이 언짢았다. 첫째, 그 아이가 나한테 말을 붙였다는 점. 둘째, 나를 자꾸 '언니'라고 부른다는 점. 셋째, 겨우 두 달짜리 주제에 마치 뒤상씨가 완전한 자기 남자였던 것처럼 굴고 있다는 점. (다시 한 번 강조하다면 날 사랑하는 뒤상씨는 외로움을 몹시 타는 남자고 캐시는 그의 수많은 리바운드 걸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물론 한 가지 점은 고소했다. 어쨌거나 '여자 사람'이 '여자 로봇'에게 '남자 사람'을 빼앗겼다는 사실은, 두 글자로 요약하면 '망신'이요, 세 글자로 요약하면 '개망신' 아닌가. 로봇보다 매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인증한 꼴 아닌가! 이보다 더 망신은 2층의 표정없는 사서 아줌마들에게 남자를 빼앗기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 안되겠어요 분명히 항의를 해야겠어요.

      그 아이의 표정은 전에 없이 결연했다. 마치 혁명을 목전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 무슨 항의를 한다는 거야?

      의아한 표정으로 내가 되물었다.

    - 기계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있잖아요.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군. 그땐 그런 생각을 했다.  맹꽁이 같았던 캐시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조금만 더 있으면 러다이트 운동이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ce Against the Machine)'을 운운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는 그런 내용을 다룬 책도 많았다. 그 덜 떨어진 계집애가 읽었을리 만무하지만). '사실 네가 빼앗겨서 억울했던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남자잖아!'라고 지적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솔직히 그 아이에게 어울리는 구호는 '실리콘밸리를 점령하라!'라기 보다는 '뒤상씨를 점령하라!'겠지. 아니 본인은 이미 점령했다고 믿고 있으니 '뒤상씨를 사수하라!'쪽이 더 나으려나? 

    -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까지 있을까? 아직까지는 이렇게 잘 공존하고 있잖아. 솔직히 로즈가 우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잖니.

    - 마리 언니와 르네 언니를 생각해봐요. 언제 우리 차례가 될런지 몰라요. 

      그때까지도 나는 그 쫓겨난 파트-타임 아이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확신하지를 못했다. 언젠가 그만 두게 하려고 뽑는 직원이 파트-타임 아닌가. 자가 대출 반납기들이 아니었어도, 늦던 빠른던 그 아이들은 도서관을 나가야 했을 것이다.

    - 저길 봐요. 우린 사람이고 저 것은 로봇이에요.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 자가 대출 반납기 구모델들을 바라보는 로즈의 눈빛을 본 적이 있니? 그 모습을 보니 생각하는 능력이 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더라.

    - 설마요. 저 애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밖에 없다고요.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외에도 상당히 많은 의사 표현이 로즈의 뇌에 (메모리든 뭐든) 저장되어 있음을 나는 알았다. 뒤상씨와 함께 보내는 은밀한 시간에 그녀가 속삭이는 말들을 훔쳐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라든가, <머뭇거리지 마요, 내 사랑>이라든가, <내 귓볼을 깨물어줘요>라든가, <당신 걸 보여주시면 제 걸 보여드릴께요>와 같은. 


    - 하지만 우리는 감정이 있고 지향점을 지닌 생명체란 말이에요.

    - 2층의 사서들과는 다르게 말이지.

      그 말에 캐시의 웃음보가 터졌고 나도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 그 아이와 어울려 웃고 있다는 생각이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시는 자가 대출 반납기 신규 모델 도입을 막는 1인 시위를 벌였다. 나는 무슨 그 아이가 하루 아침에 캣니스 에버딘이라도 된 줄 알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 무렵 수잔 콜린스의 황당한 판타지를 열신히 읽고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아이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운 발전이었지만 질투심만으로 혁명을 추동하기에는 확실히 한계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캐시의 캐퍼시티(용량)는 어떤 일을 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그 아이가 뭘 해보기도 전에 해고 통지가 먼저 이루어졌다. 

    가방 끈만 긴 것이 아니라 해고 경험도 풍부한 뒤상씨는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 대면 통지 대신에 짧고 간결한 이메일로 해교를 통지했다고 했다. 캐시는 샌드위치를 먹던 손으로 눈물 콧물을 닦고 다시 그 손으로 개인 물품을 정리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비위생적인 손으로 뒤상씨는 건드릴 일이 더는 없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 아이가 자가 대출 반납기에게 남자를 빼앗긴 최초의 여성일지는 모르겠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더 기막힌 사례가 없으라는 법도 없다. 무인 발권기에게 연인을 빼앗긴 남성 혹은 여성이라든가, ATM과 바람난 배우자를 둔 남성 혹은 여성이라든가, 주차권 발급기와 도망간 약혼자를 둔 남성 혹은 여성이라든가. 더구나 그 아이는 뒤상씨의 연인이나 배우자나 약혼녀도 아니지 않았는가. 그저 또 하나의 '리바운드 걸'일 뿐이었지. 뒤상씨에게 유일하고도 영원한 사랑이 있다면 바로 그건 나를 향한 것일 터였다. 


     *


      로즈의 매력은 변화 무쌍했다. 그녀에 흠뻑 취한 뒤상씨는 본연의 직무를 나 몰라라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정신적인 요소와 육체적인 요소가 모두 있었다. 2층의 사서 아줌마들이 없었다면 쟝 마리 시립도서관의 행정이 올-스톱 되고도 남을 지경까지 갔다. 반면 최초의 '로봇 라이브러리 어시스턴트' 로즈쪽은 전혀 일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기 일에 철두철미했다. 변함없이 정확했고 신속했으며 깔끔했다. 나무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녀가 친절하기까지 했다는 부분이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일어서서 이용객들을 맞은 적이 없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한 적도 없었다. 다른 누가 그렇게 행동하여야 한다고 말해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 로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친절하게 이용자들을 맞았다. 그녀가 상대했던 모든 이용객이 만족스러워 했던 것은 비단 그녀가 미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

    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나도 일어나야 할까? 웃어야 할까?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할까?). 많은 도서관 이용객들이 로즈 앞으로 줄을 섰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내가 그렇게 바라왔던 꿈이 (되도록 나 말고 다른 직원들 앞으로 줄을 섰으면 했던 바로 그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가슴에 손을 얻고 자문해보았다. 지금 기쁜가? 아니었다. 기쁘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고 싶은가? 역시 아니었다. 그럴 마음이 들질 않았다. (계속)


    시즌 17, 에피소드 210 (201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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