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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농콩단/Season 17 (2016) 2018.11.21 11:00

      쟝 마리 시립도서관에 자가 대출 반납기 6.0이 들어온 것은 다음 해 5월의 일이었다. 그것도 최신 모델 두 대를 한번에 도입했다. 자가 대출 반납기 6.0의 특장점은…… 자가 대출 반납기 5.0의 혁신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유저 편의를 위한 작지만 큰 변화를 추구한 제품이라고 매뉴얼에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데 많이 달라진 것처럼 포장하여 나온 제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이름은 캔디와 체리였다. 


      로즈, 캔디, 체리…… 폴 댄서들의 무대 별명을 지을 때나 고민해 봄직한 목록처럼 들리지 않는가? 다음에는 슈가, 핑크, 록시, 폭시도 나올 판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캔디는 생기 넘치는 붉은 눈동자에 탄탄하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높은 솔 음의 근처를 맴도는 명랑하고 경쾌한 목소리가 듣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반면에 체리는 갈색 눈동자에 부드럽고 피부를 가진 아이로 다소 차가운 듯 음계의 어느 반음 근방에서 갈라지는 듯한 새침한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뒤상씨가 둘 모두를 마음에 들어했느냐고? 말해 입 아픈 소리. 알랭 들롱을 닮은 뒤상씨는 쟝 마리 시립도서관의 셔터를 내리기도 전에 캔디와 체리와 함께 가발 쇼핑부터 나섰다. 당장 출근 이틀째부터 캔디는 샤기 스타일의 짧은 붉은 머리칼을, 체리는 어깨 위에 닿을 정도 길이의 단발 갈색 머리칼을 쓰고 나타났다. 의도적으로 눈동자 색에 맞추어 고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머리색이었다.  

          

      쟝 마리 시립도서관의 역사상 대출/반납계에 이렇게 많은 직원이 일한 적이 없었다. 뒤상씨는 손수 파티션 하나를 더 가져와 세움으로써 한 사람과 세 로봇이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내 업무 공간은 정확히 과거의 절반이 되었는데 사실 자리가 좁고 넓고는 별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자리가 2분의 1이 되는 대신에 일이 200분의 1로 줄어든다고 한다면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썩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어떤 면에서는 200분의 1로 줄어들었다는 말도 과장이었는데, 많은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대부분의) 도서관 이용객들이 로즈, 캔디, 체리만 찾았기 때문이었다. 내게 다가와 뭔가를 묻거나 요청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로즈, 캔디, 체리 앞으로 늘어선 줄이 너무 길어 기다리기 부담스러울 정도가 되자 내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자가 대출 반납기 3.0이나 자가 대출 반납기 4.0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분명 내가 바라왔던 바였지만 묘하게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부터는 전세가 역전되어 나도 모르게 로봇 아이들을 따라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애써 미소 지으며. 그렇게 나름 노력도 해보았지만 내 앞으로 다가와 대출이나 반납을 진행하려는 이용객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말하자면, 일종의) 관리직으로 올라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로봇 아이들보다 직급, 연차, 연봉이 높으므로 만약 누군가 승진을 한다면 마땅히 이런 순서가 되어야 옳을 것이었다.


    (1 순위) 나, 소피.

    (2 순위) 자가 대출 반납기 3.0

    (3 순위) 자가 대출 반납기 4.0

    (4 순위) 로즈

    (5 순위) 캔디와 체리


    *


      캔디와 체리가 있다고 뒤상씨가 로즈에게 신경을 덜 쓰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1교대가 3교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 얼마나 외로움에 취약한 남자인가! 동시에 세 여자로도 채워지지 않는 거대한 공허함을 운명처럼 품고 산다니!). 다만 로즈 입장에서는 이상 징후를 느꼈던 것 같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있어 보였다. 언젠가부터 그 아이가 내게 푸념을 늘어 놓는 시간이 늘어났다. 

    - 언니, 요즘들어 뒤상씨가 절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이런 부분만 보더라도 자가 대출 반납기 5.0의 언어 구사 능력은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에 결코 국한되지 않았다.

    - 어떤 면에서?


      로즈는 주위를 힐끔거리더니만 속삭이듯 내게 속 마음을 털어 놓았다.

    - 아무래도 캔디나 체리에게 집착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아요.

      나는 생각했다. 오! 이 가련한 고철 덩어리야. 그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다. 네가 마지막이지도 않을 것이고.

    - 요즘 뒤상씨가 네게 시큰둥하게 구니?

      로즈는 고개를 저었다. 금발이 치렁거리며 눈부신 빛의 산란이 일어났다.

    - 아니요. 저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예전과 다르지 않아요. 문제는……. 

    - 문제는?

    - 다른 아이들 앞에서도 그렇다는 거예요. 캔디랑 있을 때는 캔디가 그의 전부인 것처럼 보여요. 또 체리와 함께 있을 때는 체리 없이는 잠시도 못 살 것처럼 행동해요. 그 사실이 저를 괴롭게 해요.

    - 그걸 어떻게 알았니? 그러니까 뒤상씨가 캔디나 체리랑 같이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 훔쳐봤어요. 몰래 숨어서.

      그건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도 항상 숨어 뒤상씨의 취미 생활을 훔쳐 보았었으니.     

    - 언니, 뒤상씨는 여전히 날 사랑하는 거겠죠?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으로는 나의 그이 뒤상씨를 두고 이런 말을 하는 (너무 예쁜) 그 아이가 껄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그 마음을 느껴보았기 때문에 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인 캐시가 그런 말을 했을 땐 짜증이 났는데 로봇인 로즈의 그런 말은 크게 싫지 않다니. 그랬다. 분명히 나는 로즈가 싫지 않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나의 그이를 무려 일년동안 점유했던 몹쓸 계집애지만, 분명 싫지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좋았다. 이를테면 위생 관념. 그 아이도 나처럼 비닐 장갑, 라텍스 장갑, 페브리즈, 액상 비누, 손 세정제, 물휴지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깨어 있는 내내 보이는 구석 구석을 쓸고 닦았다. 세균 배양 접시와 다를 바 없던 도서관 대출 반납 도서들을 살균해주는 건 덤이었다. 누구와 달리 그 아이는 절대로 반납된 책을 만진 손으로, 자기 코를 만지고 머리를 긁고 귀를 후빈 다음에 자기 샌드위치를 먹지 않았다. 심지어 그 아이가 뒤상씨의 몸을 쓰다듬는 상상을 해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분명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일정 성분은 동질감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캔디나 체리에 대해서도 유효했다. '우리'의 대출/반납계 조합이 과히 싫지 않았다고나 할까.


     *


      뒤상씨가 3교대 휴먼-로봇 인터페이스 연애로 공허한 마음을 채워가고 있는 사이, 문제아 캐시 펠티에 양은 일곱 번 정도 3층의 디렉터 사무실에 무단 침입을 했다. 세 번 정도는 그 방 창문에 돌을 던졌다. 어떻게든 뒤상씨의 얼굴을 보고 대답을 듣겠다는 결심이었던 것 같았다.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며 출입 제한 조치를 받게 되엇을 때 그 아이는 여덟 번째 무단 침입을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시행했다. 도서관 옥상에서 거꾸로 줄을 타고 내려와 뒤상씨의 방으로 들어가겠다는 작전이었다. 그 거창한 계획은 그 아이가 도서관 측면 벽의 배관 하나를 잘못 잡는 바람에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았다. 3층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것이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척추를 다쳐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아이가 반납된 책을 만졌던 그 손으로, 그러니까 자기 코를 만지고 발 뒤꿈치도 긁은 다음, 어쩌면 그 사이에 은밀한 부위도 만지작거리다가 샌드위치까지 먹었던 그 미끌미끌한 손으로 배관을 잡았다가 미끌어진 것이라고 확신했다. 딱하지만 어쩌겠는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위생적인 캐시의 자리는 이 위생적인 도서관에 더 이상 없었다. 뒤상씨도 그녀를 원하지 않았고 대출/반납계도 완벽한 조합으로 꾸려져서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려는 것은 과한 욕심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계속)


    시즌 17, 에피소드 210 (201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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