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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 마지막 콩쿠르 (1/3)
    낙농콩단/Season 5 (2004) 2018.10.31 10:00

    “뭐지? 뭐가 어떻게 된거지?" “뭐지? 뭐가 어떻게 된거지?” 


      헤이즐 너트(Hazel Nutt)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는 자신과 좌우가 반대인 또 다른 한 명의 20대 여성이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와인색 머리칼, 넓고 하얀 이마, 약간 겁이 많아보이는 커다란 눈, 끝이 뭉뚝하여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아했던 코, 그리고 자몽색 입술... 분명히 자신의 얼굴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을 거울 가까이 가져가 자신의 얼굴을 (마치 현미경 아래의 작고 낯선 생물을 관찰하듯이) 자세히 살펴보았다. 뒤이어 달력을 찾아 오늘의 날짜가 자기가 알고 있는 오늘이 맞는지 연과 월과 일을 꼼꼼하게 확인하였고,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진 낡고 손때 묻은 몰스킨 수첩을 꺼내어 넘겨가며 자신의 기억력을 테스트할만한 몇 가지 기억들을 더듬어 비교하여 보았다. 물론 이상한 느낌의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는데 그녀는 틀림없는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수첩 속 글씨의 필체 역시 그녀 자신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뭔가 달라졌다. 분명 뭔가 잘못되고야 만 것이다. 단 하룻밤 사이에 말이다.


    *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바이올린계의 촉망받는 재원으로, 다음 세대를 짊어지고 나갈 유망주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그녀는 신문이며 잡지마다 실렸던 기사들의 단어 하나 하나를 기억했고 기자회견이나 인터뷰 때보다 번쩍이던 카메라 플래쉬의 섬광과 뒤이은 잔상을 기억했다. 남들보다 다소 늦은 주니어 하이 1학년 때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새삼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 역시 별 뜻 없이 잡았던 작고 날렵한 악기가 불과 5년 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국내 대회를 무서운 기세로 석권한 그녀는 스위스로 날아가 세계적인 바이올리스트 올라프 마이프렌자게이(Olav Myfriendsaregay)에게 사사를 받았다. 그리고 재작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3위를 했고, 작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녀는 2주 전 대협곡으로 날아왔다. 인생 최고의 도전을 위해.


      가스파로 디 살로 콩쿠르 (Gasparo da Salo Concours)


      호텔 창문 너머로 대협곡의 마른 바람에 펄럭거리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바탕은 붉은색이고 글씨는 흰색이다. 몇 회라는 문구가 없다는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콩쿠르는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바이올린 콩쿠르. 이번 세기를 마무리하며 단 한 번. 그러니 만에 하나 다음 기회가 있다면 100년쯤 후일지도 모른다. 100년을 기다릴 수는 없는 재능있는 연주자들이 대협곡으로 달려왔다. 이 특별한 콩쿠르는 12월 29일부터 12월 31일까지 삼일동안 이루어지고 31일 밤에 최종 우승자가 가려진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영예는 새해 카운트 다운이 끝나며 해가 바뀌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특설 무대에서의 기념 공연이다. 이미 우승자와의 앙상블을 위해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정상급 연주자들이 줄줄이 며칠 전부터 대기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더없이 환상적인 공연이 될 것이고 우승자에게는 평생 다시 없을 영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승 트로피에 입맞추게 되는 그 혹은 그녀는 다음 세기를 이끌어 갈 빛나는 주인공이 되겠지.


      금세기의 12월 31일까지가 이전 세대의 것이었다면 바로 그 다음 1월 1일부터 펼쳐지는 세상은 새로운 세대의 것일테다. 헤이즐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제 겨우 스무살이었다. 그녀의 전성기는 아직 막을 올리지 않았고 아마도 새로운 시대에서야 펼쳐질 것이다. ‘모든 조건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어’ 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그것은 자만도 교만도 아니었다. 그녀가 최근 주요 메이져 콩쿠르에서 보여준 성과만을 놓고 보면 아주 허황된 꿈만은 아니었다. 3위와 2위를 차지할 수 있다면 거의 때는 무르익은 것이다. 어느날 1위에 올라서는 날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다. 주요 언론에서도 역시 그녀를 우승권에 있는 다섯명의 연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의 예감이 좋았다. 이런 종류의 일에 있어서 예감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이 새로운 도전을 즐거운 맘으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약간의 긴장과 조금의 흥분을 애써 억누르면서. 그녀는 홀로 호텔방에서 크라이슬러나 생상스의 쾌활하고 밝은 곡을 연주했다. 적막한 공간을 부드럽고 아늑하게 채우는 선율 속에서 그녀는 상당히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좋은 예감. 컨디션이 좋을 때 나오는 미세한 징후들 (이를테면 항상 까다로웠던 박자가 정확하게 맞아들어가거나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변주에 스스로 놀란다거나 하는 것들)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내일 무대 위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바이올린처럼 활을 사용하는 악기에선 ‘활쓰기’가 특히 중요하다. 흔히 활쓰기의 3요소를 활의 속도, 활의 압력, 그리고 활의 위치로 꼽는데, 지난 밤 그녀의 연주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완벽하여 활의 속도와 압력, 그리고 위치가 한치의 낭비와 군더더기도 없을 더없이 효율적이었다. 그녀의 연주는 곡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했다.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돌았다. 더 없이 황홀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비발디와 비니압스키를 연달아 연주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청중이 없는 것이 심히 안타까울 정도의 우아하고 깔끔한 연주였다. 이대로 밤이 새고 해가 뜨도록 바이올린을 켜고 싶었다. 콩쿠르가 막을 올렸다가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


    시즌 5, 에피소드 51 (200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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