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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 마지막 콩쿠르 (2/3)
    낙농콩단/Season 5 (2004) 2018.10.31 22:00

      흔히들 바이올린은 음향학적으로 진화가 완성된 악기라고들 하지만 그 무한한 가능성을 끌어내어 쓰는 것은 전적으로 연주자에게 달렸다. 사실 연주자도 저격수와 비슷하다 (정말이다). 신체적 안정과 정신적 안정이 양립되어야 실력을 발휘할 수 있고 순간의 미세한 흔들림에도 결과를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녀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적어도 콩쿠르 2주 내지 3주 전에 도착해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한 문제일 것이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물론 언제나 그렇듯 예외도 있을 것이다)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이나 그 앞뒤의 복잡한 수속 과정에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아주 조금 예민해질 뿐이지만 그 차이가 빵! 과녁을 빗나가게 만든다. 특히 대협곡처럼 접근성이 좋지 않고 낯선 기후의 장소라면 더더욱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대협곡은, 특히 대협곡은 뭔가 이상했다. 신체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미세하게 틀어지게끔 하는 묘한 기운을 지닌 듯 했다. 미적지근한 온도와 건조한 기후의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 때문인지, 아니면 붉은 암석으로 뒤덮힌 가파른 벼랑들의 장엄한 풍광 때문인지, 그 이유는 누구도 자신있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틀어짐의 정도는 어쩌면 2도, 많아야 3도에 불과했지만 그 정도면 일을 그르치기에 결코 모자라지가 않다. 때문에 처음 며칠동안 그녀는 자기가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요가나 명상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호흡을 조절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을 비슷한 처지의 콩쿠르 참여자들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또한 자기 암시를 통해서 실제 경연 상황에서의 압박에 대비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


      빛나는 재능이란 어쩌면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 


      간밤에는 눈부셨지만 아침이 밝아올 무렵에는 이미 색이 바래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여느 날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떴을 뿐인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마음 속 깊고 깊은 곳의 은밀한 영역에서 생겨나고 자라나서 슬그머니 스며나와 몸을 적셨던 것이다. 무겁고 축축하게. 마치 간밤에 끙끙대며 써내려 간 연애편지를 다음날 아침 햇살을 맞으며 다시 읽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런 일이야 특별할 것도 없다. 연주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까닭없이 자신감이 떨어지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순간이면 누구라도 현재를 회의하며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할 수도 있다. 문제는 하필 지금 그녀가 세기의 콩쿠르를 위해 대협곡에 와있고 오늘이 바로 최종심이 열리는 12월 31일이라는 사실이 되겠다. 


      그건 뭐랄까, '어젯밤처럼 완벽하게 해내긴 힘들거야' 정도의 생각이 아니었다. 지난 며칠의 본선 무대에서 그랬듯 ‘적당히 다음 단계에 올라갈 정도는 해낼 수 있을거야’ 정도도 아니었다. 어쩌면 완전히 생 초보마냥 바이올린을 전혀 다루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불길하고 고약했다. 아니, 그럴리가! 겨우 몇 시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그것도 아주 즐거운 기분으로 잠이 들었는데. 잠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헤이즐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악기를 찾았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바이올린을 다룰 때 마치 아기를 안고 어르는 것처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곤 했다. 그녀의 바이올린은 흔히 말하는 명가의 악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평생 바이올린을 만들어 온 이탈리아의 한 장인이 선물한 특별한 것이었다. 장인이 한 콩쿠르에서 우연히 그녀의 연주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장인의 바이올린은 소위 회자되는 명가의 명기들처럼 대단한 후광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좋은 재질의 나무로 오랫동안 숙성시켜 만들어진 것이었다. 연주자라면 악기에 물들어 있는 정성스러움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법이다.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진 앞판은 나뭇결이 생생하게 남아있었고 단풍나무로 만들어진 뒷판은 분명 15년 이상 자연 건조된 것이었다. 줄걸이판과 줄감개도 흑단이 아닌 장미나무였다. 두들겨보면 단단하고 속이 옹골차되 여백의 미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감각과 악기에 대한 감각은 함께 발달한다. 첫 눈에 헤이즐는 그 바이올린이 오직 자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 단 하나의 악기임을 알아보았다. 


      그녀가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만족감이었다. 악기를 안는 순간의 느낌이 첼로나 비올라에 비해 편안하고 만족스러웠다 (물론 첼리스트들이나 비올리스트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리라). 마치 오직 바이올린만이 처음부터 연주자의 심리적 요소를 감안하여 설계한 악기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그녀는 가끔씩 마음이 불안하거나 집중하기 어려울 때면 바이올린을 안고 평온함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오늘만은 그렇지 않았다. 


      평온함이 아닌 불안감이 가시처럼 돋쳐 그녀의 마음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정말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게 되었으면 어떻게 하지? (어쩌면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헤이즐는 조심스럽게 활을 들었다. 조임쇠를 조심스럽게 조였고 그에 따라서 긴장이 풀려있던 활털이 빳빳하게 탄력을 퇴찾아 갔다. 송진을 꺼내 손잡이 바로 윗 부분부터 반대쪽 끝까지 부드럽게 발라주었다. 송진 덩어리가 국수 가락보다 얇고 가는 활털을 헤치는 동안 부서진 송진가루가 하얗게 흩날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스럽게 송진을 바르고 난 다음 부드러운 솔로 한번 더 고르게 묻어있지 않은 송진가루가 덩어리지지 않도록 털어주었다. 활이 준비가 되자 그녀는 오른손으로 바이올린을 들고 받침대를 턱에 가져다 받쳤다. 살짝 밀리고 살짝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왼손으로 활을 잡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또 부드럽게 감겨있는 네 줄 현에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부르르르 네 줄의 현이 떨리며 몸체가 진동했다. 그것은 울림통 내부를 휘돌아 예술적으로 계산되어 파여진 알파벳 에프(f) 모양의 구멍과 예술적으로 계산되어 만들어진 앞판과 뒷판을 타고 그녀의 턱으로 전달되어 왔다. 그야말로 예술적 떨림이었다. (계속)


    시즌 5, 에피소드 51 (200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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