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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 마지막 콩쿠르 (3/3)
    낙농콩단/Season 5 (2004) 2018.11.01 10:00

      "지금부터 최종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자가 선언했다. 그 우렁찬 목소리는 깊고 깊은 협곡과 오색 암석을 따라 엷게 메아리 쳤다. 야외 무대 치고는 굉장히 좋은 음향 시설이라는 사실을 헤이즐는 어제의 (리허설을 겸한) 예심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연주를 위해 건축된 실내홀이 아닌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소리를 잡아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수하게 개발된 '그라뉼'이라는 물질 덕분이다. 무색무취의 이 가벼운 입자들은 자력을 가해줌에 따라 공중에서 원하는 모양으로 정렬된다. 이 입자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할 적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함께 모여 면을 이루게 되는 경우에는 진동과 소리를 통과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반사한다. 그것이 바로 그라뉼의 발명 이후 실내악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진 이유다. 그런 까닭에 '그라뉼'의 개발사는 (소재 업계의 여느 회사들과는 다르게) 여러 유명 음악재단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오늘의 이 대회 또한 그들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야외 홀의 바닥은 거대한 자석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자력은 이 홀의 가장장리로 갈수록 강해지고 중앙으로 갈수록 약해졌으며 마침내 자석을 켜고 오늘을 위해 준비된 121만 6430개의 그라뉼을 뿌렸을 때 홀은 거대한 반구형의 투명막으로 뒤덮이는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 소리는 빠져나가지 못했지만 막은 더없이 투명하여 안에 있는 우리는 밖에 있을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협곡과 그것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저녁의 하늘 모두를 감상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무대에서 탄생하는 소리를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감상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홀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볼 수 있었지만 홀 안에서 탄생하고 사라져가는 소리는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헤이즐와 함께 최종심에 올라온 경쟁자는 예상대로 W였다. W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영국 소년이었다. 헤이즐보다는 한 살이 어린 열여덟살이었다. 동전 던지기에 의해 순서는 W가 먼저 연주를 하고 그 다음에 헤이즐가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헤이즐는 객석 맨 첫째 줄에 앉아서 경쟁자의 연주를 지켜보게 되었다. 최종심은 독주로 진행된다. 어느 악기의 도움도 없이 홀로 바이올린 하나만 달랑 가지고 청중 앞에서 재능을 펼쳐 보이는 방식이다. 따라서 관심은 자연히 레파토리로 집중도었다. 과연 저 영국 소년이 무슨 곡을 선곡했을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그런 기가 막힌 선곡을 가지고 나섰을거야. 라흐마니노프의 <보카리제>나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쯤은 어떨까. W가 연주를 시작했다. 이런! 카를 폰 베버의 <사냥꾼의 합창>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기발한 선곡이다. 스즈키 교본의 첫번째 권에도 편곡본의 악보가 있을 정도로 기초적인 선곡을 왜? 처음 바이올린을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곡이니 만큼 역으로 실력을 드러내기에는 더없이 안성맞춤이라는 걸까? 이상한 일이지만 그게 더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경쟁자가 최고 난이도의 곡을 연주하는 것보다도 더. 그녀는 초조함을 느꼈다. 안 좋은 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손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진심으로 그가 실수하거나 활을 놓치길 바랬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간밤에 비하자면 오늘의 그녀는 명백한 불완품이었다. 지난 밤 사이 뭔가 설명할 수 없도록 형편없는 존재가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거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답을 구했다. 눈 뜨자마자 바이올린부터 찾아들고 시작했던 오늘 아침의 연습을 떠올린다. 기억에는 좌절과 절망이라는 단어만이 남아있었다. 활의 움직임은 삐걱거렸고 빗나간 소리는 귀에서 거슬렸다. '도대체 어젯밤의 그 굉장한 재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혹시 내게 남아있던 모든 행운을 어젯밤의 연습으로 모두 소비해 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헤이즐는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W의 실력은 어제 예심에서 봤던 것 이상으로 출중했다. 들판을 달리고 숲속을 헤치는 사냥의 기쁨! 어쩌면 베버가 들었어도 만족스러워 했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황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곡을 가장 기본적이지 않은 수준으로 연주하다니! 이 콩쿠르의 취지에 어울리는 전략 아닌가?


      그녀는 무대에 오르지 않으려는 생각까지 했다. 난생 처음으로 수건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의 실력과 자신감이라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늘 아침과 같은 연주라면 백이면 백, 철저하게 패배하고 말 것이다. 어쩜 기권이라면, 기권이라면 최소한의 부끄러움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선뜻 기권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협곡까지 날아오고 아흔아홉명의 도전자가 단 두 명으로 줄어드는 12월 30일의 대격전을 치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을 지금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 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헤이즐에게는 해야할 일이 있었다. W의 연주가 두 번째 선곡인 쇼팽의 <야상곡 No.20>로 넘어갈 무렵 그는 가만히 자기 바이올린 케이스를 바닥에 눕혀 놓았다. 아무도 모르게 그녀는 지퍼를 열었고 뚜껑을 살짝 벌렸다. 홀 안의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고 있었다. 케이스 안에는 그가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들어 있었다. 헤이즐는 한 손으로 그것을 쥐어잡고 긴장감을 이기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그리고 셋. 그녀는 바이올린 대신에 숨겨 들여온 것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지르며 홀의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고 청색 제복을 입은 몇몇이 그를 향해 달려 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반구형으로 이 야외 홀을 감싸고 있는 백이십여만개의 그라뉼 때문에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안에서 메아리쳤다. 인간의 귀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함성이 밀폐 공간을 메아리치며 몇몇 사람들을 히스테리 상태로 몰아갔다. 무대 위의 W는 장승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는데 W의 등 뒷편으로는 뭔가 뾰족한 것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맞다. 그것은 분명 화살처럼 보였다. 살은 아주 자연스럽게 바이올린과 W의 몸을 하나로 꿰고 있었다. 원래부터 하나였다는 듯이. 그제야 헤이즐는 석궁이 들려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제복을 입은 자들이 아주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불이 꺼졌다. 누군가 전원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동시에 자석이 멈추며 백이십만개의 그라뉼들이 모두 중력의 노예가 되어 땅으로 땅으로 낙하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무색무취의 투명입자들 속에서 그녀는 무너져 가는 무대 위의 W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직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았다. (끝)


    시즌 5, 에피소드 51 (200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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