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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의 사회학: 미스트 (The Mist, 2007)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Re:view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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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개는 아주 영리하고 뛰어난 장치다. 이제껏 어떤 작품도 이만큼 매혹적인 고립의 순간을 연출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역시 스티븐 킹'이라는 감탄사는 이제 너무 많이 반복해서 식상하지만 원작을 제멋대로 눙치지 않고 제대로 만들어준 프랭크 다라본트에게는 얼마든지 넘치는 사랑을 표해도 나쁘지 않겠다.

 

안개는 칸사스로에서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안개는 처음 호수 맞은 편에서 목격했을 때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밝은 흰색에 아무 것도 반사되지 않는 안개. 안개는 천천히 다가와 태양을 전부 삼켜 버렸다. 태양이 있던 자리엔 겨울 날 흐린 구름 사이로 보이는 보름달처럼 은동전만한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註1, 78페이지).

 

2. 안개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그로서리 스토어 (이하 마트) 안에 갇힌다. 그들은 마트라는 일상적 공간에서 그저 순간적으로 포착된 무작위적 마을 구성원의 조합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개에 갇히는 순간 그들은 은연중에 특정 집단을 대표하는 교묘한 상징성 또한 함께 띠게 된다. 여기엔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으며, 백인이 있고 흑인이 있으며. 어린아이가 있고 노인이 있으며, 내부인(마을주민)과 외지인이 있다. 직업적으로도 다양하다. 브랜트 노턴(안드레 브라우퍼)처럼 일류 변호사에서부터 마트 기술자와 같은 블루칼라 노동자, 그리고 아르바이트생과 평범한 주부까지 존재한다. 나아가 이들의 대표성은 정황적으로도 충분히 납득할만하다. 폭풍이라는 재난 상황과 이어질 물자난에 대한 우려로 인해 동시에 마트로 모여든 상태이기 때문이다. 고로 여느 때의 마트보다 훨씬 더 정확한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의 마트라는 무대는 마을의 일부인 동시에 마을의 전부이기도 하다. 이들은 안개에 갇히는 순간부터 하나의 새로운 사회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3. 뿐만 아니라 마트라는 공간은 이 게임의 성격을 규정하는 역할도 한다. 일단 마트에는 식료품이 가득하다. 상황이 장기화되면 냉장식품은 더러 상하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구성원들이 굶주림 때문에 싸워야 할 일이 벌어질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 이들은 먹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혹은, 먹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지도 않는다. 거꾸로, 진열대 가득한 먹거리는 오히려 가망없는 탈출을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다. (심지어 원작에서는 마트 안에 갇힌 사람들이 바베큐를 만들어 나눠 먹는 장면 묘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마트 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기본적 욕구 충족으로 인한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고도소비사회의 대표적 상징인 마트에서 되려 현대인들을 해체시켜 다시금 원시시대로 돌려보낸 혐의는 아무래도 '생물학적 요인' 보다는 '사회적 요인'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4. 마트 내부의 분란을 일으키는 근원적 요인은 물론 안개다. 정면이 모두 통유리로 되었다는 점에서 외부의 위협(안개 혹은 안개 속의 무엇)은 흡사 물리적 실체를 간직한 것처럼 보여지고 위협의 정보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묶여진 그들 모두에게 동시에 공유된다. 하지만 분란의 직접적 원인은 유약하고 이기적인 개인들의 총합인 인간 집단의 이합집산이다. 때문에 위협의 실체가 외계인이냐, 괴수냐, 테러리스트냐, 혹은 그 밖의 무엇이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게 된다. 안개의 원인은 '스코틀랜드의 사자'다. 실은 무엇이어도, 혹은 무엇이 아니어도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 전쟁 (2005)'에서 레이(톰 크루즈)의 아들 하비는 이렇게 묻는다. "테러리스트인가요?" 레이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위협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위협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단 믿음도 사실 착각에 불과하다. 상황 관계의 논리적 분석 역시 해당사항이 없다. 적어도 이 분류의 재난 영화들에선 그렇다. 미지의 위협이 외계인에 의한 것이든 테러리스트에 의한 것이든, 혹은 외계인이 하늘에서 떨어졌든 땅에서 솟았든, 레이가 해야할 일은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정체모를 공격과 혼란상태의 군중을 피해 도망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위협의 유발 원인이나 실체, 혹은 제거 방법이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잘못된 금기를 바로잡고 사건을 해결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 뿐이다. 허나 레이는 그런 범주의 인물이 아니었다. 이는 '미스트'의 드레이튼(토마스 제인)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안개가 어떤 이유로 깔렸고 안개 속에 있는 촉수 괴물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드레이튼의 목적은 안개를 걷어내고 촉수 괴물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그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들 빌리를 보호하고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다.

안개는 천천히 다가오며 푸른하늘과 페인트칠을 새로 한 아스팔트를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삼켜 버렸다. 잘 만들어진 특수효과를 보고 있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윌리스 오브라이언이나 더글러스 트럼벨이 꿈꾸었을 그런 세상 말이다.푸른 하늘이, 커다란 수건만 하던 하늘이 줄무늬로 바뀌었다가 다시 연필 선만큼 얇아졌고 결국 기어이 사라져 지금은 형태도 없는 잿빛 괴물이 거대한 쇼윈도우에 몸을 비벼 대고 있었다 (같은 책, 80페이지).

 

5. 안개의 역할은 이중적이다. 두려움의 원천인 동시에 두려움으로부터 그들을 가려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원작의 드레이튼은 유리창 너머의 빽빽한 안개를 앞에 두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쩌면 안개는 우리를 숨겨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현미경을 들이대고 관찰하려는 대상은 안개 속의 무언가가 아니다. 반대로 안개 속에 무언가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 잡힌 집단이다. 그 집단의 내부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 작품은 마트의 내부에서 바라보는 안개 속의 외부도 보여주지만 반대로 외부에서 들여다보니 마트의 내부를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안개 속 저 너머에서부터 마트의 정면으로 서서히 다가와 파고드는 화면은 완벽하게 제 3자의 객관화된 시선처럼 느껴진다.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 철저히 이기적 개인으로 분리된 사람들. 여기에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것은 첫 한 사람의 탈출자다. 집에 두고 온 어린 자녀들이 걱정되어 밖으로 나가겠다는 한 젊은 부인을 두고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붙잡지도 혹은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는다. 가지 않는게 좋겠지만 간다면 막을 수 없다는, 설령 나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혹은 우리가) 나서서 도와줄 생각은 없다는 표정이다. 그녀가 나간 후에도 여전히 같은 질문은 계속된다. 바깥의 안개 속은 안전한가? 

 

6. 안개가 안개라면 나가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여든 명이 각자의 의사에 따라 나가고 남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여든 개의 입이 떠들지만 여든 가지 선택이 나오지는 않는다. 일치 단결하여 상호 협력하지도 않는다. 정보는 부족하고 판단력은 마비된 이기적 개인들은 스스로 각자의 운명을 판돈으로 거는 대신에 '오피니안 리더'를 택함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확인하길 바란다. 이기적 개인이 모여 추구하는 공동선 - 바로 정치로의 작동이다. 가장 먼저 대두되는 것은 '남을 것이냐 나갈 것이냐'의 논란이다. 이는 다시금 보다 구체적인 성격을 가진 두 집단으로 바뀌어간다. 드레이튼을 위시한 몇몇 사람들이 서층 저장고에서 위협의 일부를 (촉수 괴물) 맞닥뜨리며 대립과 분열은 보다 첨예해진다. 그동안 그저 막연하게 '나가야 할 것 같다'였던 사람들과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사태를 지켜보자'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위협의 실체적 증거를 눈으로 확인한 강경파와 그들에 동조하는 무리들(썸띵 인 더 미스트, 'Something in the Mist'), 그리고 그 증거의 신뢰성을 믿기를 거부한 신중파와 그들에 동조하는 무리들(낫띵 인 더 미스트, 'Nothing in the Mist')이 있을 뿐이다.

8. 여기서 '낫띵 인 더 미스트'의 리더가 드레이튼의 이웃 브랜트 노턴이라는 점은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 대립을 대치 상황에 겹겹이 끼워넣으려는 전형적 장치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흥미로움도 준다. 고학력에 전문직인 노턴은 잘 교육받고 자기 생활을 풍족히 누리는 미국인의 전형이다. 동시에 고소득자인 자신이 자기보다 낮은 생활수준의 사람들까지 거둬먹여야 하는 구조에 불만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들을 설득시키는 재주로 먹고 사는 변호사다. 고로 이 시골마을의 특별할 것 없는 마트 안에서 벌어진 첨예한 대립을 정치적 구도로 보이게 만들 재주를 가졌다. 촉수 괴물로부터 도망쳐온 드레이튼파가 가장 먼저 설득시키려고 하는 인물이 노턴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누구도 믿지 않을 이 비현실적 상황을 사람들에게 납득시켜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허나 노턴은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의 기반은 이성이고 논리다. 저장고에서 촉수 괴물을 보았다는 드레이튼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는 잘라 말한다. 노턴과 그를 따르는 패거리는 (낫띵 인 더 미스트; 원작의 표현에 따르면 '골통클럽') 가장 먼저 마트를 떠난다. 

9. 이후 사람들의 의견은 '섬띵 인 더 미스트'로 완전히 정리되는 듯 보인다. 입장을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소수파인 골통클럽의 실패를 통해 안개 속에 뭔가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열과 대립의 2막이 시작된다. 마트 내 사람들은 적극적 방어파와 소극적 체념파로 나누어진다. 드레이튼과 올리, 그리고 마트의 지배인 등 그에 동조하는 다수는 개 사료푸대를 전면에 쌓고 보초를 세우고 밀대를 준비함으로써 방어의 태세를 갖추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어떤 사람들은 약을 먹고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목을 맨다. 술에 절거나 아예 정신 줄을 놓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급속도로 무너지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섬띵 인 더 미스트'라는 드레이튼 등의 말이 맞았다는 것은 노턴을 따라 나서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행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그들의 미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력, 판단력, 행동력이 뛰어난 드레이튼이나 사격 실력이 뛰어난 올리가 자신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나? 아마 아닐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이해를 열망하게 된다. 뭔가 이 비현실적 상황을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갈구하는 것이다.

10. 그리고 커모디 부인이 등장한다.

11. 처음엔 그 누구도 커모디 부인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노망난 늙은이의 주절거림 쯤으로 생각했고 모두 그녀를 싫어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커모디 부인이 무의미한 방어나 무기력한 체념, 둘 중의 하나가 아닌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희생자가 늘면서부터다. 작은 괴물이 마트 내로 난입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이 상식 이상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린 원시 인류의 선택 - 바로 종교의 등장이다. 처음에 이는 기독교였다. ("보려하지 않는 자들만큼 어리석고 눈 먼 자 없으니 이제 눈을 뜨고 꿈에서들 깨어나요. 이 모든 건 예언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15장.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 일곱 천사의 일곱 제앙이 마치기까지는 /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하지만 곧 기독교를 빙자한 커모디의 사적 집단으로 변한다. 주도권은 서서히 커모디에게 넘어간다. 처음엔 한 명, 그리고 그 다음엔 두 명, 이윽고 열두 명. 드레이튼이 이끄는 적극적 방어파가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한 채 희생자만 늘이는 상황이 지속될수록 역설적이게도 커모디의 영향력은 커진다.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커모디를 숨겨진 상징으로 이끌어 연결할 끈끈한 대사를 배치한다. 커모디가 어린 소녀들에게 겁을 주며 하는 말 ("신은 한 분이란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시지. 그 분은 엄격한 무적의 신이세요."). 그리고 그녀와 사사건건 충돌하는 젊은 여성 아만다 덤프라이스가 내리는 평가 ("커모디 부인의 시각은 너무 구약 성서에 치우쳐 있어요.").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압제와 수탈의 역사이지만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근대 이후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의 논리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한편 갑자기 나타난 안개와 괴물을 설명하는 가장 설득력있는 근거 - '애로우헤드 프로젝트(註3)'는 몇몇 단편적 정보의 조각들을 모아 볼 때, 인간의 정복적 근성이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분석이 가능한데, 정복은 구약적 세계관이 지닌 대표적인 속성인 동시에 배타적인 기독교식 제국주의의 은밀한 키워드다.

 

12. 따라서 '미스트' 속의 세계는 다음과 같은 재구성이 가능하게 된다. 무리한 소유욕 혹은 오만한 정복욕이 빚어낸 위협과 공포가 외부에 있고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진실을 왜곡하고 공동체를 호도함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무리들이 내부에 있다. 한 뿌리에서 자라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자리바꿈을 하며 원인이 결과로, 다시 결과가 원인이 되며 상황을 악화시킨다. 결과는 고립이다. 그들을 물리적으로 고립시킨 건 안개나 안개 속의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 고립시킨 것은 그들 스스로다. (혹은 그것을 이용하여 공포와 두려움을 확산시키는 세력들이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처한 현실을 상기해 볼 때 꽤나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물론 커모디 부인은 처음부터 그런 걸 노리진 않았다. 애초부터 살짝 맛이 간 그녀에겐 광신만이 스스로를 이 저주받을 상황으로부터 구원받는 길이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적극적으로 상황을 이용하고 힘을 추구한다. 외부 위협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따르기 때문이다.

13.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드레이튼파 일곱 사람은 도리어 소수파가 되어 버린다. 이들은 광기가 지배한 사회에서 내몰려 무엇이 있는지 모를 안개 속을 유영할 처지가 된다. 교주화 되어가는 커모디 부인을 경계하며 탈출을 결의하는 이들의 푸념은 오싹한 구석이 있다. 안개 속의 괴물만큼 두려운 괴물들이 마트 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력은 드레이튼을 비롯한 이들 일곱이 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들 일곱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거칠게 나누자면 계급적으로는 중산층은 된다. 드레이튼이 그렇듯 정상적인 가족을 꾸리며 적당한 질의 삶을 살고 있고 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적당한 교양을 지니고 마을 평균 이상의 삶을 누릴만큼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보다 심층적으로 바라보자면 이성적 맹신, 그리고 종교적 광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려고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잠식당하지도 않는다. 인간으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마지막까지 기본적인 상식과 온전한 가치로 사고하려고 애썼다. 그렇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한다. '그들의 선택이 옳은가?'는 이 대목에서 정확한 질문이 아니다. 탈출이라는 선택은 단지 상호 배타적 의견이 충돌하는 집단이 분열하는 와중에서 특정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단순한 전개였을 뿐이다. 고로 '그들은 구원받을 길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보다 타당하다. 다라본트는 상업영화의 숙명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느낀 문제 의식의 표현인지, 어떻게든 결말을 지어보이지만 원작에서 스티븐 킹은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오히려 두려움을 극대화시킨다. 할아버지, 할머니, 젊은 남자, 젊은 여자, 그리고 아이의 조합 - (만약 그 끝이 구원이라면) 구원의 기준에 합당한 유사 가족만을 방주에 태워 보낸 채 괴물들이 울부짖는 안개 속을 서서히 달려가게 한다. 계기판을 통해 점점 기름이 바닥나고 있음을 인지하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 원작자 스티븐 킹이 선택한 결말이다 - 그는 드레이튼의 입을 빌어 스스로 '히치콕 식 결말'이었다고 인정한다.

13. '미스트'는 흥미롭다. 텍스트는 다층적이고 여러 갈래로 가지를 치고 있다. 동시에 적은 예산과 알뜰한 연출로 잘 짜여진 서스펜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상식적 문법을 따라가면서도 문법에서 벗어난, 혹은 문법상 필요없는 단서들을 의도적으로 잘 보이게 배치하는 것은 흥미롭다. 가령 괴물이 커모디 부인의 목에 앉았다가 그냥 날아가는 장면이 그렇다. 또 허리의 줄을 매달고 나갔던 카우보이 패션의 남성이 하반신만 남아 딸려오는 장면 (원작에서는 그냥 피 묻은 줄만 딸려 오는 것으로 묘사) 이후 다시 그걸 고집스럽게 외부의 시선으로 비추는 까닭도 그렇다. 원작에서는 좀 맛이 간 수준이었던 커모디의 대사를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성경 인용으로 바꾼 의도도 (예컨데 앞서 언급했듯 "커모디 부인의 시각은 너무 구약 성서에 치우쳐 있어요." 같은 노골적 대사의 삽입) 마찬가지다. 파시즘의 광기에 내몰리는 젊은 군인 조셉을 유다에 비유하는 ("안개 속에 또 다른 유다가 있도다.") 커모디의 노골적인 대사는 말할 것도 없다. 드레이튼의 어린 아들 빌리가 보이는 퇴화적 징표 (참 오지랖도 넓은 아버지가 대중 앞에 나서 활동하는 동안 빌리는 여러 여자들의 손에 의해 돌보아진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다시 집에 남겨두고 온 드레이튼의 부인 스테이시와 마트에서 만난 젊은 여성 아만다 덤프라이스의 은근한 대체 가능성 암시도 흥미롭다 (원작에서는 드레이튼과 아만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는데 이 외도의 가능성은 커모디파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행위다). 또한 여든 명의 사람(미국인)이 한 공간에 모였는데 아만다 덤프라이스 단 한 사람만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과 탈출 씬의 막바지에서 그 총을 제 손에 쥐고자 목숨을 거는 드레이튼의 행동도 미묘하다. 드레이튼의 웨건이 서서히 마트를 빠져나가는 동안 '떠나는 자들'과 '남는 자들'이 엷은 안개와 마트의 창유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기이한 장면도 여운을 남긴다.

 

14. 결정적으로 드레이튼의 웨건에 '여덟 명'이 타려다가 결국은 '다섯 명' 밖에 타지 못했다는 사실은 복기할만하다. (노아의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 올라탔다. 드레이튼파 여덟 사람은 다섯 사람만이 웨건에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여덟이 아니라 다섯이다. 하나는 마트 안으로 되돌아갔고 하나는 방주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헤메다 죽었으며 하나는 방주 바로 앞에서 괴물에게 휩쓸려갔다. 이 재구성된 유사 가족은 흡사 방주에 올라탄 모습으로 이성과 종교의 광기에 의해 난도질당한 세계를 떠난다. 다만 총을 가지고 방주에 올라탔다.) 이는 이 작품이 과거 노아의 재구성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노아, 혹은 제 2의 노아를 이야기하고 있을 여지를 드러낸다. 홍수는 안개와 괴물로 바뀌었다. 과연 심판의 끝은 구원인가? 1980년의 스티븐 킹은 확답을 보류하고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하지만 포스트 9.11. 시대의 프랭크 다라본트는 나름의 정답을 내놓은 것처럼 보인다.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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