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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Il Y A Longtemps Que Je T'aime, 2008)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0.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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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영화 속 인물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감자형과 양파형이다 (그렇다. 내 맘대로 만든 분류법이다). 감자형은 몸으로 말한다.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조금 깊숙히 들여다 볼라치면 패이거나 멍이든다. 겉이 아니면 모두 속이니 바깥쪽과 안쪽의 층위 가 없고 농도 구배가 없거나 적다. 그냥 보이는 것만큼의 인물이다. 반면에 양파형은 속으로 말한다. 깊이가 서서히 드러난다. 바스라지게 얇으나 명확하고 질긴 층위가 존재한다. 한 겹 벗겨내면 또 다른 한 겹, 다시 한 겹 벗겨내면 또 다시 한 겹. 그렇게 원심으로, 구심으로 접근한다. 나이테를 따라 속속들이 시간과 기억이 기록되어 있다. 속 겹 깊숙히 배인 향기가 드러나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인물. 그래서 양파형이다. 대표적인 감자형이라면 글쎄, 과거 설경구가 분한 인물들을 선호할 수 없었던 이유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최근이라면 김명민이 분한 인물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매력적인 배우라는 사실은 알겠는데, 그가 맡는 역할은 하나같이 납득하기가 쉽지 않은 이상한 사람들이다. IQ도 모자르고 EQ도 결여되어 있고, 아무튼 영혼 없는 기계같아 조금 무섭다.

 

  소설가 필립 끌로델의 감독 데뷔작인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의 주인공 줄리엣(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은 전형적인 양파형 인물이다. 드라마 속에 미스테리의 틀을 감춘 작품의 구조 또한 그녀의 양파성을 드러내는데 최적화되어 있는 상태다. 15년만에 교도소에서 나와 여동생에게 얹혀살게 되는 이 중년 여인에게 모든 극의 전개 가능성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생 레아(엘자 질버스테인)는, 그리고 또 영화는, 줄리엣이 마음의 빗장을 끌러낼 때까지 그저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한다. 이렇듯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문제에 참을성 있게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다. 과거에 갇혀있는 줄리엣의 상처 치유와 당장 현재를 살아야하는 줄리엣의 사회화, 이 두 가지를 하나의 과정으로 엮어낼 수 있는 것 역시 서두르지도 윽박지르도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 한 겹을 벗겨내 그녀의 비밀 가까이 접근하는 만큼, 가정과 사회에서 '지워진 존재'였던 그녀의 현실 복귀가 진행된다. 이따금 정형화된 템포에 흐름을 예상 가능한 순간이 있지만, 긴장감을 어그러뜨릴 정도는 아니다.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는 ‘잉글리쉬 페이션트(앤서니 밍겔라, 1998)의 캐서린 역으로 잘 알려진 배우다. 프랑스 국적을 얻은 영국인인 그녀는 실제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기도 하다. 나머지 배우 대부분이 프랑스인임을 감안하면, 가족과 공동체에 스며 들어가는 과정에서 어쩐지 겉도는 듯한 묘한 인상을 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과연 그녀가 다른 셀에 그려져 겹쳐진 존재처럼 보이는 순간이 적지 않다. 어울려 웃고 떠들어도 결코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을 숙명. 이것이 그녀의 세심한 연기만으로 가능했던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국적과 외모와 억양을 모두 고려하여 (실제로 영화 초반부 식사 장면에서 조카가 그녀의 억양을 다른 식구들과 비교하는 대목이 있다) 철저하게 계획되어 가능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감탄스럽기만 하다. 


(201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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