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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와일드, 웨스트: 3시 10분 유마행 (3:10 to Yuma, 2007)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Re:view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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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모어 레너드의 1953년작 단편 '3시 10분 유마행'은 1957년에 델머 데이브즈 감독에 의해 글렌 포드와 밴 헤프린 주연의 작품으로 한 차례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이 두번째 영화화에는 제임스 맨골드가 나섰고 크리스찬 베일이 댄 에반스를 러셀 크로우가 벤 웨이드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멋지다. 

2. 이 작품에서 발견하는 세계는 기존 서부극의 그것과 같은 듯 하면서도 묘하게 다르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시와 비의 경계가 어둑하다. 지구를 움직이는 것은 영웅의 숭고함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요? 세상에는 좋고 아름다운 것이 많고도 많지만 결국은 돈이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렇게 솔직히 말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삼킨다. 

3. 댄 에반스(크리스찬 베일)가 악명높은 강도 벤 웨이드(러셀 크로우)의 호송에 자원하고 나서는 이유는 대단한 정의감이나 특별한 의무감이 아니다. 돈 200불 때문이다. 돈이 왜 필요한가? 그의 농장은 빚더미에 올랐다. 악덕 빚쟁이 홀랜더는 돈을 내놓지 않으면 농장을 불태워버리겠노라 그를 위협한다. 그리고 그 땅을 철도회사에게 팔아넘기겠단다. 사실 댄은 둘째 아들 마크가 아파도 약 값을 마련하기가 빡빡한 상태다. 물값, 식료품값, 약값, 사료값, 모든게 그에게는 문제다. 다리도 성치못해 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그에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하루 일당은 2불. 홀렌더라는 이름의 자본은 그의 농장으로 흘러드는 물길마저 끊어버렸다. 농장은 오늘도 처참히 말라간다. 유일한 생계수단을 고사시켜놓고 빚을 갚으라 독촉한다. 당초부터 불가능한 요구다. 돈의 힘을 앞세운 엄연한 폭력이다. 홀랜더는 이렇게 덧붙인다. ("자넨 엄연히 큰 돈을 빌렸고 나에겐 그것을 회수할 권리가 있어.") 요컨대 이것은 처음부터 덧셈과 뺄셈의 간단하지만 잔인한 산수문제였다. 

4. 세계가 돈에 의해 움직이듯 이 이야기의 무대를 만든 것도 돈의 문제다. 남태평양 회사가 벤 웨이드의 유마 호송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그의 일당에게 입은 40만불 이상의 금전적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댄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회 또한 돈에 의하여 주어진다. 댄의 하루 일당은 2불이다. 두 아들을 데리고 종일 일해도 5불이 안된다. 컨텐션 근처의 철도회사 노동자들은 한 달에 40불의 임금을 요구한단다. 댄의 소 두 마리는 100불의 값어치를 못한다. 댄은 벤 웨이드의 호송에 자원하는 댓가로 뜬금없이 200불을 요구한다. 이 숫자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후 대화의 맥락을 확인하자면 빚을 모두 갚고 가족과 농장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이다. 그러나 언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목숨이 위험한 임무를 떠맡으면서도 딱 200불이냐고 못박을 필요가 있었을까? 가령 천불이라면 어떤가. 심지어 호송되는 당사자 벤 웨이드조차 이 점을 지적한다. ("천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네. 목동도 고용할 수 있고 애들도 좋은 학교도 보내서 훌륭히 키울 수 있지. 자네 아내 또한…… 성실하고 유능한 목장주 남편을 자랑스러워할테고.") 흥미로운 것은 결말부에 제시되듯 만약에 댄이 200불 이상을 요구했어도 40만불이 넘는 손해를 입은 버터필드는 어느 정도 감수를 마다하지 않았을 거란 사실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200불의 의미'는 실용적인 것보다는 상징적인 것일 혐의가 짙어진다. 이를 짐작케하는 댄의 대사가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생각했어요. 난 다리를 잃었는데 정부는 나에게 뭘 주었는지…… 198불 36센트.") 200불은 그가 군복무중 입은 부상때문에 정부로부터 지급받은 보상금의 근사치다. 200불. 다시금 그 액수의 현실적 가치를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첫째, 200불은 댄의 백일치 일당이다. 둘째, 댄이 자신의 아이들까지 데리고 일했을때 오십여일치에 해당하는 급여다. 셋째, 그 돈이 없어 댄은 홀랜드 무리에게 온갖 수모를 겪었다. 넷째, 남태평양 회사와 버터필드가 벤 웨이드 강도단에게 입은 손해의 이백분의 일이다. 다섯째, 철도회사 공사장 인부들의 다섯달치 임금이다. 하지만 거기가지다. 댄의 농장에 목동을 따로 고용할 수 있는 돈은 아니다.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는 돈도 아니다. 아내의 자랑스러움을 얻고 유능한 가장으로 떳떳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돈도 아니다. 

5. 이것을 부조리에 대한 일종의 고집스러운 저항으로 읽자고 주장한다면 그건 분명히 오버센스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 차원에서 심리적인 저항이 그만의 방식으로 고집스럽게 계속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댄 에반스는 엄연히 한 가정의 가장이다. 정의가 아닌 돈 때문에 벤 웨이드 호송에 나섰지만, 경제적 궁핍함이 아니라면 결코 그처럼 위험한 일에 부러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에 벤 웨이드는 더 많은 돈을 제시하며 자신을 풀어달라고 댄을 유혹한다. 바로 다음 대목이다. 


벤 웨이드: 그래, 200불이 생기면 뭘 할텐가? 

댄 에반스: 글쎄…… 빚이나 다 갚으면 다행이겠지. 

벤 웨이드: 만약에 내가 그 두 배를 준다면? 빚도 갚은 참에 소도 백 마리 더 사지 그래. 새 축사도 짓고. 

댄 에반스: 내가 그럴거라고 생각하나? 

벤 웨이드: 이봐, 날 풀어주기만 하면 400불이 생기는 거야. 

댄 에반스: 그 정도 가치밖에 없다니 의왼걸? 

벤 웨이드: 아니…… 아니야. 사실은 천불을 생각하고 있었네. 버터필드의 마차에는 그 열 배가 있었으니 내 몫을 모두 자네가 모두 가져도 좋아.


6.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벤 웨이드의 자유가 댄의 의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댄이 동의하거나 혹은 말거나 벤은 탈주할 것이다. 컨텐션의 호텔에서나, 역으로 가는 길목에서나, 유마행 열차에 태워지기 직전에서나, 혹은 기차가 출발한 다음에라도 벤 웨이드는 어떻게든 도망치고야 말 것이다. 그건 예정된 일이고 댄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벤 웨이드를 놓아주는 것은 가능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인 참에 자기 손으로 생색이나 낼 수 있는 기회다. 잡혀가는 자(벤 웨이드)는 의뭉스럽게도 그 기회를 지키는 자(댄 에반스)에게 넘겨준다. 아주 여유 넘치고 너그럽기까지 한 표정이다. ("신의 심판을 피할 수 없듯이 내 부하들이 나를 구하러 오는 걸 자네가 막을 수는 없어. 하지만 지금 자네가 날 풀어준다면 피차 일이 한결 쉬워지는거지.") 그럼에도 댄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는다. 200불 대신에 무려 천불을 얻을 기회임에도. 여기서 그의 판단은 비단 200불과 천불의 화폐로의 단순 가치 비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벤 웨이드가 사회악이기 때문에 그와의 거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를 세우는 것도 아니다. 돈의 문제이나 이상하게도 돈의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는 200불의 상징적 의미라는 게 크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아들 윌리엄 앞에서 지켜야 하는 당당한 아버지로의 책임감을 웅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7. '200불'이라는 말은 이 작품의 시나리오에 총 열한 번 등장한다. 대부분은 댄 에반스가 취하기로 한 보수를 가리키는 그 200불이지만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새로운 층위에서의 '200불'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바로 벤 웨이드를 구하러온 부하 찰리의 입에서 나온 '200불'이다. 그는 댄과 컨텐션 보안관 일행에게 붙잡혀있는 벤 웨이드를 구해내기 위해 대로 한복판에서 이렇게 외친다. ("이봐들! 내 말좀 들어봐! 저 위에 벤 웨이드가 있어! 그 유명한 벤 웨이드가 말이야! 철도회사가 그를 3시 10분 유마행 열차에 태워 교수대로 보내려고 이리로 데려온 거야. 여기…… 200불을 현찰로 내놓겠어. 당신들 중 누구라도 벤 웨이드를 구하기 위해 저 위의 한 명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기꺼이 이 200불을 드리지! 분명히 약속하지.") 이에 컨텐션의 카우보이들은 너나없이 총을 들고 몰려나와 댄의 일행이 숨어있는 호텔을 에워싼다. 5대 7의 박빙이었던 싸움은 이내 5대 30 내지 40의 열세로 굳어진다. 선과 악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부분이다. 카우보이들은 옳고 그름의 심각함보다 200불의 현찰을 가깝게 느낀다. 다시 한 번 떠올리자면 '하필 200불'은 이 작품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던가? 댄이 벤 웨이드 호송에 자원하며 요구한 금액이자 과거에 정부로부터 얻은 보상금에 상응하는 액수다. 그런 이백불이 저 한낮의 대로에서는 '저 위의 아무라도 한 명'만 죽이면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하필 그 금액은 단 돈 1센트도 어긋나지 않고 똑같다. '저 위의 아무'에 포함된 댄 에반스라는 남자는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보안관들이 도망치고 정작 벤 일당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버터필드조차도 포기하려는 그 찰나에도 댄은 200불을 벌기 위해 겨우 200불로 환산된 목숨을 건다. 계산이 뭔가 이상하다. 벤 웨이드는 여유만만 수갑에 묶인 채 그 모든 광경을 즐긴다. ("곧 버터필드도 자네를 버리고 도망갈꺼야. 그런데 왜 자네와 자네 아들만이 남아서 개죽음을 당해야할까? 버터필드가 잃어버린 돈 때문에?") 그의 이해하기 어려운 고집은 이 험난한 여정 내내 그의 곁을 맴도는 크나큰 의문이었다. 전술했다시피 그는 결코 정의나 뭐 그 비스무리한 대단한 것들을 위해 이 일에 나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컨텐션의 카우보이들과는 달리 최소한의 옳고 그름 정도는 구분할 줄 아는 책임감을 지녔다. 그렇다고 치자. 최소한 앞뒤없이 대책없는 돈의 노예는 되지 않았다고 치자. 그런데 외뢰인마저, 피해 당사자마저 제 목숨 건지려고 내빼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미련하게 임무를 수행하려는, 그래서 벤 웨이드를 3시 10분발 유마행 열차에 태우려는 그의 믿기 어려운 발악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말이다. 

8. 세상은 어떻게 살아야하나요? 그건 말이지…… 가난과 고생 속에 거칠게 주름진 눈으로 그는 아들을 바라본다. 아버지는 나름의 그 답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희망보다는 분노가 기대보다는 불신에 찌든 것이다. 아버지는 이제껏 얻는 것보단 잃는 게 항상 조금씩 더 많은 삶을 살아왔다. 말하자면 억울한 인생이었다. 아버지는 신을 믿지 않는다. ("지난 3년간 나는 신의 응답이 있기만을 기다리며 한 다리만으로 버텨왔어. 그런데 신은 결국 들은 척도 안하셨지.") 세상에는 좋은 사람보다 나쁜 사람이 더 많고 상식적이 일보다 비상식적인 일이 더 많다는 사실도 알고있다. 무엇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피부 깊숙히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아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돈이 모든걸 결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세상은 벤 웨이드와 같은 강도가 활개를 치는 곳이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벤 웨이드는 컨텐션으로 향하는 댄의 일행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 수갑을 차지 않고 수갑 찬 자를 지키고 서 있더라도 말이다. 가령 터커는 댄의 축사에 불을 지른 왈패고 바이런은 아파치 부족을 잔혹하게 살육했던 장본인이다. '벤 웨이드가 나쁘다'라는 명제는 옳은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나쁜 세계의 일부가 벤 웨이드다'라는 진단이 옳은 것일까? 벤 웨이드는 스스로를 악당이 아니라 악당일 수 밖에 없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얘야. 만약에 내가 악당이 아니었다면 내 부하들이 나를 가만히두지 않았을꺼야.") 살고자, 또 살아남고자 약육강식의 세계 논리에 적응했을 뿐이라는 얘기다. 악명 높은 강도의 고백은 틀린 말이 아니다. 댄 에반스는 자신이 호송하는 악명높은 강도보다 더 악당같은 놈들을 알고있다. 이제껏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실패한 목장주와 화려한 무법자가 이루는 잠시의 교감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피차 절실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점점 자본의 아래로 결집하고 끝내 하나의 위계 아래 자리하게 될 것이다. 유마에서 컨텐션으로 이어지는 레일은 점점 더 길어져 끝내 비스비에 있는 댄의 목장마저 처참하게 밟고 지나게끔 될 것이다. 이건 서부세계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버지,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살아야하나요?" 물론 이 작품에 그런 대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종 그 말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귓전을 맴돈다. 


(2008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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