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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윌슨, 혹은 누가 누구와 손잡았었나 하는 잔인한 문제: 찰리 윌슨의 전쟁 (Charlie Wilson's War, 2007)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Re:view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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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응이 격정적이다. 다시 불이 켜진 극장을 메우는 건 분노한 관객들의 거친 숨소리와 욕지거리다. 네티즌 평점을 징벌의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뇌이버(결코 오타 아님)에서 느껴지는 반응은 그 이상으로 심각하다. 10점 만점에 4점이 간당간당하다. (개봉 7일째, 2월 13일 기준)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런 묘한 평점은 '작품의 만듦새'만으로 나오지 않는다. 대개는 괘씸죄를 묻는 것이며 자기들 스스로 화를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오는 보복성 반응이다. '시종 미국을 찬하는 영화'란 냉소에서부터 '감독을 죽이고 싶다'라는 이글거림도 적지 않다. 영화평 단골 손님인 '내 인생 최악의 영화'란 억센 과장도 언제나 그렇듯 등장한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톰 행크스가 손수 제작자로 나섰고 마이클 니콜스가 메가폰을 잡았으며 아론 소킨이 각본을 맡았다. 게다가 줄리아 로버츠와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이 공연했다. 모두 프로 중의 프로임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에까지 노미네이트 된 이 작품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이처럼 국내에서는 성난 관객들의 융단 폭격을 받고 있는 것일까? 

2. '찰리 윌슨의 전쟁'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선 제작자 톰 행크스와 감독 마이클 니콜스, 그리고 각본을 담당한 아론 소킨이 평소 견지하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작품의 무대가 '하필이면' 아프가니스탄임을 분명히 명시할 필요가 있다. 아프가니스탄, 9.11.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리스트 소탕을 외치며 에피타이저로 삼아 공격한 그 곳이다. 그런 아프가니스탄이 사실은 냉전시절 소련의 침략으로부터 미국이 수호하려 애썼던 땅이라는 아이러니한 얘기다. 둘째로는 당연히 '시대극'이라는 결정적 전제를 빼놓지 말아야 한다. 시대극이 제작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현재에있어 어떤 유효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곤란하다. 반공을 추억할 영화라면 굳이 '찰리 윌슨의 전쟁'이 하필 이제와서 제작되어 2008년의 스크린에 걸릴 이유도 없다. 원작소설 또한 2003년에 출간되었는데 역시 뜬금없이 하필 그 시점에 서점가를 장악할 이유가 없다. 반공이라는 기치는 지금의 미국에게 그리 유효한 것이 아니다. 냉전은 이미 18년전에 막을 내렸다. 만약 노골적인 제국주의 예찬을 하고 싶었다면 아프리카 내전 하나를 가상으로 상정하여 비슷한 영웅적 개입을 만들어내어도 된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전쟁 장면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지지직거리는 당시 자료화면으로 대체된다. 아프간 저항세력이 소련군을 격추시킨 승전아닌 승전의 기록은 빰빠밤 장엄한 음악 속에 슈팅게임의 점수 합산 화면을 보여주듯 처리된다. 그렇담 그 반공 이데올로기가 침략 이데올로기의 정당화로 현재에 작동하는 걸까? 아니다. 역시 타이밍의 문제다. 원작의 내용과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부시 행정부가 '명목없는 전쟁'으로 코너에 몰린 하필 지금의 시점에서 그런 목적의 영화가 만들어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작품 구조적 측면으로도 그렇다. 만약 이 작품이 "우리 미국의 영웅 찰리 윌슨 의원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레드 아미 - 소련 빨갱이들을 몰아내는데 큰 공을 세웠어요. 짝짝짝짝" 하는 영화라면 CIA 명예요원 임명식장의 윌슨 의원이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하고 마지막에 다시 임명식장으로 돌아와 박수를 받으면서 끝내는 식의 '상당히 복잡한 구조' 또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린 롤랜드 에머리히나 윌리엄 프리드킨, 그리고 마이클 베이가 맥시멈-도즈 수준의 애국심을 밀어 넣는 뻔뻔스런 영화를 얼마나 고민없이 쉽고 명랑하게 만들었던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않던가.

3. 상식적으로 영화가 어떤 목적성을 충실히 발현하고자 하는 경우에,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호감가는 주인공들을 창조하는 것일테다. 헌데 '찰리 윌슨의 전쟁' 속 인물들을 두고 호감을 논하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도무지 제 정신이 박힌 양반들로 보이진 않아서다. 찰리 윌슨(톰 크루즈)은 술과 여자가 충족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방탕한 하원의원, 조앤 해링(줄리아 로버츠)은 미국 내 기독교 세력을 좌지우지하는 미모의 백만장자이자 '극우' 로비스트(註1), 거스트 애브라코토스(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만 약간 덜 떨어져 보이는 그리스계 극렬 반공주의 CIA요원, 이 작품은 이들에게 별로 호감가는 구석을 남겨두지 않는다. 호감을 가져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톰 행크스, 마이크 니콜스 혹은 아론 소킨이 평소 피력하던 정치색을 상기해 볼 때, 그들이 마냥 좋아라 할 유형의 인물 또한 아니다. 아론 소킨이 평소 '하자있는 프로페셔널'들에 관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냥 인간적으로 그려지던 다른 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혹시 사건의 전개에 따라 비호감 캐릭터를 호감 캐릭터로 바꿔나감으로써 호응을 극대화하려는 음험한 전법은 혹시 아니었을까? 하지만 찰리의 삼총사는 이와 같은 유형에 포함될 수 없을 것 같다. 조앤은 끝까지 대책이 안 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극우 기독 특유의 대쪽같은 씻김굿으로 일관하고 거스트는 끝까지 불도저처럼 돌진하는 맹목적인 반공의 화신이다. 찰리 윌슨만이 조금 변해서 술과 여자보다 세상에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만으로는 대단한 개심(改心)을 논하기 어렵다. 이들의 관계에는 인간적 유대감도 없다. 찰리가 조앤과 손을 잡은 이유는 순전히 그녀가 섹시하고 많은 기부금을 물어줄 수 있는 영향력있는 로비스트여서다. 거스트와는 CIA 내부의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실용적인 이유때문에 손을 잡았다. 거스트는 조앤을 싫어하고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싫은게 극우파들이야.") 조앤도 거스트를 싫어하며, 찰리의 비서('찰리의 엔젤'이라 불림)들을 천박하다는 이유로 싫어한다. 한 마디로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도 이들은 여전히 시쳇말로 비호감이며, 혹은 백번 양보하여 그나마 예전보다는 조금 덜한 비호감이란 것이다. 이 작품은 '이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해라' 따위의 압력도 동원하지 않는다. 시종 "쟤네 좀 봐라. 정말 웃기지?" 하는 식으로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나사가 몇 개쯤 빠진 인물 군상을 조롱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다음이다. 만약 그 어지러운 도떼기 시장에서 찰리 삼총사를 제외한 채 그나마 감정이입이 가능한 인물을 찾고자 한다면 어떨까? 가능한 일일까? 유감스럽지만 불가능해 보인다. 바꿔 말하면, 호색한 마약쟁이 국회의원, 기독세력과 극우세력을 양 손에 주므르는 음험한 마녀 로비스트, 무대포 반공주의자 뚱뚱보보다 나은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 된다. 왜 이런 결론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을까? 간단하다.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찰리 윌슨의 전쟁'은 이 사람들이 벌이는 일이 멋지고 쿨하다거나 대단한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그들에게 호감을 가져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들을 통해 뭘 억지로 말하려고도 들지도 않는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는 광대놀음의 연속일 뿐이다. 왜일까? 그것만으로도 관객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캡틴 레이프 맥컬리가 하는 짓마다 상식 이하여도 '진주만'은 감상적 애국주의를 선동할 수 있었을까? 스티브 힐러가 모든 관객에게 미움을 받아도 '인디펜던스 데이'는 그 은밀히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있을까? 아니다. 허브 브룩스가 밉상에 왕재수라도 '미라클'은 그 뜻한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잇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하지만 '찰리 윌슨의 전쟁'은 그래도 상관없는 영화다. 모든 사람들이 '걔네들 진짜 마음에 안들어!' 라고 외치며 극장 문을 나서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 반응을 이끌어 내는 자체가 목적인 영화였기 때문이다. 

4. '왜 하필 아프간인가?' 라는 우문(愚問)에는 조지 크릴의 원작소설이 당시 있었던 실화를 옮긴 것이니 '왜 하필 아프간이냐고 물을 수 없다'는게 현명한 답변이다. 하지만 '왜 이제와서 화제가 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결코 우문이 아니다. 매우 중요하고 몹시 결정적인 질문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조지 크릴의 원작소설이 하필 2003년에 출간되고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건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9.11. 테러 이후였고, 부시 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의 초토화에 열을 올리던 시점에서 원작소설이 화제를 일으켰던 이유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고자 소련의 군대를 몰아낸 곳을 십오륙년 후 테러지원국이라 침공하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다. 왜 미국의 한 북 평론가는 이 원작을 두고 '9.11.이란 충격에 찬물을 끼얹는'이란 평가를 내렸나? 원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CIA는 왜 논란에 휩사였는가? 톰 행크스는 무엇에 반해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는가? 그리고 왜 마이크 니콜스와 아론 소킨을 끌여들였는가? 그 답은 원작의 다음 부분에 있다.

"1993년 당시 아프간에는 도로도 없었고 학교도 없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듯 손을 떼어버렸다. 바로 그것이 탈레반과 오사마 빈 라덴에게 주도적 영향력을 쥐어준 셈이 되었다. 정작 소련군의 격퇴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못한 빈 라덴이 탈레반에게 귀빈대접을 받으며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여지를 선물해 준 것이다." (조지 크릴, 註1)


5. 결국 이 대표적인 헐리우드의 리버럴들이 갑자기 냉전 시대를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이유는 역으로 오늘 탈냉전 시대에서 미국의 역할을 조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들은 분명 세계의 분쟁에 있어 '미국의 역할' 자체를 방관하자는 입장은 아니다. 개입이 패권주의의 또다른 표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회전문 로비스트들이 수뇌를 차지하는 현재의 미국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핑계로 안보 장사와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벌이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정답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때문에 행크스와 니콜스, 그리고 소킨이 생각하는 '찰리윌슨의 전쟁'은 끝난 것도 그렇게 끝났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고 그렇기에 지금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뛰어든 것이다. 찰리 윌슨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몰아낸 것만이 아니라 그 이후 재건과 회복을 다시 침공받지 않을 여력을 만들어 주어야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급급한 현실은 너무 일찍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 이후로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들은 찰리 윌슨의 입을 빌어 이 부분을 지적한다. 

찰리 윌슨 : "우린 유럽의 재건엔 수십억불을 쏟아붇지 않았습니까? 단지 몇백만불이면 됩니다. 그럼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을 수 있어요."
동료 의원 : "하지만 찰리, 아무도 파키스탄에 학교를 짓는데는 관심이 없어요."
찰리 윌슨 : "…… 아프가니스탄입니다. 파키스탄이 아니라."

6. 심지어 찰리 윌슨도 알고 있다. 인간적으로 흠결이 많고 색마에 마약쟁이 정치인으로 자격 미달인 그조차도 그런 식의 반쪽짜리 전쟁이 옳지 않음을 안다. 그의 전쟁이 끝마쳐지지 못한 채 끝남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아프가니스탄은 다시금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으로 고통받고 어린아이들은 피죽도 못 먹은 채 말라가거나 몇 년을 못 버티고 죽는다. 그게 바로 지금의 현실이다. 뿐만 아니다. 9.11. 테러 이후 빈 라덴이 숨어있다며 미국이 제일먼저 작살낸 곳이 아프가니스탄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오늘날 흔히 아프가니스탄은 '전쟁의 신에게 저주받은 땅'으로 통한다. 1919년 독립했고 1973년 군주제를 폐지했으나 이후 23년간 내전을 겪었다. 1979년에는 소련군의 침략마저 받았다. 미국의 CIA는 아프간에 17억 달러치 스팅어 미사일과 바주카포를 비밀리에 지원했다. 일설에 따르면 게릴라전과 테러에 대한 기술 또한 전수했다고도 전한다.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 라는 기치 아래 벌인 일이다. 헌데 소련이 물러간 1992년 이후 미국도 아프간에서 손을 뗀다. 최소한의 재정 지원도 외면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공백 상태는 내전으로 이어졌고 다시금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 탈레반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소련을 물리치도록 미국이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테러 기술을 전수한 당시의 저항세력이 오늘날, 맙소사, 무자헤딘이 되었다. 즉 '찰리 윌슨의 전쟁'이 취하는 스탠스는 9.11. 음모론을 제기한 마이클 무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신 무턱대고 음모론을 파헤치기보다는 현실적이고 양심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작금의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극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정말로' 없었는가?" 라고 묻는다. 국내 관객들의 오해와는 다르게 미국을 찬하는 것이 아니라, '이봐. 우리 이런 나라 아니잖아, 그렇지?'라고 도발하듯 부추기며 다시 생각해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지금의 명목 없는 '테러와의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이것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슬며시 그 질문에 대한 답도 내어 놓으면서 말이다 (註2, "These things happened. Were glorious and changed the world…… And we fodemos them at the end of the game.")


(2008년 04월)


(註1) 조앤 해링은 정치운동가이자 전직 토크쇼 사회자이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소련의 만행을 개인적 경로로 입수하여 찰리 윌슨을 비롯한 국회 주요인사들을 로비함으로써 소련 토벌의 목표를 달성한다. "Never in my wildest dreams would I have thought I would have ended up in the underbelly of the world fighting the demons of communism." (How Joanne Herring won Charlie Wilson's War, By Philip Sherwell, Telegraph, 2007.12.02)
(註2) 월드워치 연구소의 마이클 워치는 유엔개발계획의 자료를 예로 들어 다음 사실을 지적한다. 전세계의 후진국과 개도국에서 최소한의 기초 교육이 가능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돈이 60억불, 그들에게 수도와 위생 시설의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데는 90억불이다. 전 세계 모든 산모들에게 건강하고 안정적인 산후조리가 가능하도록 하는데는 120억불이 필요하고 지구상에서 건강과 영양의 문제를 사라지게 하는데는 130억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구상 모든 나라들이 군비경쟁에 쏟아붓는 금액을 합치면 무려 7800억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2001년 9월 11일의 사건은 인간의 안전을 보장하고 테러리즘이 싹트는 토양을 제거하는데 실패하면 얼마나 큰 비용이 낭비되는지를 상기시키는 준엄한 경고였다. 우리가 정해놓았던 우선순위가 바뀌지않는 한 이런 비용은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다."), 무엇이 극단주의를 만드는가, 함께 사는 길, 2002년 6월, 책속의 책, 13-1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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