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농콩단/Season 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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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오! 천리장성 (6/6)낙농콩단/Season 4 (2003) 2019.02.02 10:27
천리장성이 반드시 부활하리라고 믿었다. 확신이 있었다. 말하자면 천리장성이란 놈은 어깨 부상으로 잠시 슬럼프에 빠져 방황하고 있는 왕년의 강속구 투수와도 같은 존재다. 지금은 사고도 조금 치고 이런 저런 구설수가 있어 아무도 그의 재기를 장담하지 못하지만 두고봐라. 언젠가 반드시 부활하여 옛 팬들 앞에서 멋지게 다시 공을 던질 것이다. 어쩌면 시간이 약이다. 사람들의 기억력이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위생상태 불량으로 관계법령에 의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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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오! 천리장성 (5/6)낙농콩단/Season 4 (2003) 2019.01.31 10:30
천리장성. 기회가 갑자기 왔던 것처럼 몰락의 순간도 갑자기 찾아왔다. 따지고 보면 그게 다 세상 만사의 원리 아닌가 싶어 문득 숙연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구청에서 위생검사를 나왔다. 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관계당국의 위생검사라는게 한두 번 겪는 일인 것도 아니고, 또 다 그렇고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천리장성>의 위생 상태는 단언하건대 업계 최고 수준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동네 중국집 주방도 이 보다 청결하지는 않았다.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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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오! 천리장성 (4/6)낙농콩단/Season 4 (2003) 2019.01.29 10:12
천리장성의 사내 복지 시스템 구축의 페이즈 2가 시작되었다. 비록 그 사이 매출과 순이익의 반전은 없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시스템을 만드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기까진 더 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첫째로는 직원 전용 카페테리아를 만들어 격무에 시달리는 직원들이 부담없는 가격에 영양가 높은 식사와 활력을 채워줄 음료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 정책의 실현을 위해 카페테리아 전용 주방장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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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오! 천리장성 (1/6)낙농콩단/Season 4 (2003) 2019.01.20 11:57
. 흥한 것은 언젠가 망하고 성한 것은 언젠가 쇠한다. 세상에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란 없다. 이러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가까운 곳에서 그 증거를 확인하고 싶다면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자리한 식당들을 보라. 어느새 생겨나고 어느새 망해서 사라진다. 사실 로마와 같은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흥했다가 망하는데는 몇천년이 소요되는 관계로 채 백년도 살까 말까한 인간의 눈으로 일일이 확인하기 어려운 감이 없지가 않지만,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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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채식주의자 (4/5)낙농콩단/Season 4 (2003) 2018.10.22 22:00
휴 잭스 팀장이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다. 뒤집어지는 속을 부여잡으며 아침에 일어나 필름을 리와인드시켜보니 딱 거기까지만 기록되어 있었다. 괜히 창피하고 괜히 화가 치밀어올랐다. 빌어먹을. 건방진 놈, 네가 나를 거역해? 그러고도 고객지원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여기서 잔뼈가 굵은게 벌써 십 수해인데.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피라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수 있어. 녀석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텐데. 혹시……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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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채식주의자 (3/5)낙농콩단/Season 4 (2003) 2018.10.22 10:00
어찌하여 사람이 고기를 먹지 않을 수가 있는가. 인간은 본디가 잡식 동물인 것을. 잡식. 육식도 하고 채식도 하니까 잡식 동물인 것이다. 휴 잭스 팀장이 채식주의자 바브 E. 큐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그의 상식에 있어서는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늘 고기를 먹어왔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고기를 씹어왔고, 행여 구워먹기가 어려운 날에는 끓여먹기라도 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는 육식이 케레혼 사회를 지탱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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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채식주의자 (1/5)낙농콩단/Season 4 (2003) 2018.10.21 10:00
서로인 유한책임회사 고객지원팀에 새로 들어온 바브 E. 큐 (Barb E. Cue)를 두고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늦은 겨울 무렵이었다. 요는 그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여러분이 아셔야 할 사실이 있다면 케레혼(Kerehwon)이 육식 문화가 대단히 발달한 나라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발달했다’라는 말은 비단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육식이 사회 구성원간의 약속으로 그 사회의 질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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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배터리와 카브레터 (4/4)낙농콩단/Season 4 (2003) 2018.09.29 17:00
갑자기 생각났는데 말이야. 우리 사장님은 은근히 그런 팬 픽션 소설 읽는걸 좋아해. 묘한 만족감을 느낀다나봐. 심지어 둘째 아들내미 (자칫 이름이 ‘카브레타’가 될 뻔했던 그 아이)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여 그런 팬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기도 해. 이유인즉슨 가입을 안하면 금지된 팬 픽션은 읽을 수가 없다는 거야. 금지된 까닭이란 19세 이상도 입을 쩍 벌릴만큼 남사스럽고, 마광수 교수조차 탄식하며 붓을 꺾을만큼 경이로운 변태적 묘사가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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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배터리와 카브레터 (3/4)낙농콩단/Season 4 (2003) 2018.09.29 11:00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팀의 안무를 맡고 있는 매킨지 추 (Makenzie Zhou)가 팀의 랩을 맡고 있는 크리스 P. 베이컨 (Chris P. Bacon)을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치가 않아. 그건 뭐랄까……. 한솥밥을 먹는 동료사이의 느낌이 아니란 말이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그윽하고 더없이 감미로운…….에이, 설마.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우리 <배터리와 카브레터>는 남성 5인조 그룹이야. 지난 삼년간 마치 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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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배터리와 카브레터 (2/4)낙농콩단/Season 4 (2003) 2018.09.27 19:00
이번 앨범은 우리의 열두번째 앨범. 데뷔한지 벌써 3년째니 어느 정도 책임감이 느껴져. 이 바닥에도 선배보다는 후배가 더 많아졌고. 그래서 그런지 이번 앨범 ‘동절기 차량 관리 요령’은 참 힘들게 만들었어. 이렇게 고생스럽게 녹음한 앨범은 난생 처음이야. 사장님도 그러시더라. 이번만큼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다고. 하긴 아홉 곡을 보름이나 걸려서 녹음했으니까. 그리고 엔지니어 아저씨들이 녹음한 걸 파트별로 짜맞추는데 또 보름이나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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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천구백구십사년 어느 늦은 밤 (3/3)낙농콩단/Season 4 (2003) 2018.09.20 20:00
그때 그녀가 소리를 지른다. 낮으면서도 높고 높으면서도 낮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린다. 동시에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바이러스가 토해져 나온다. 이백개? 오백개? 어쩌면 천개? 백신 단말기도 비명을 지른다. 검은 바탕에 초록 글씨. ‘치명적인오류 OE(이)가 015F:BFF9DE97 에서 발생하였읍(습)니다. 사용중인 응용프로그램이 종료됩니다.’ 프로그램을 종료하라면 아무 키나 누르나지만 아무 키나 눌러봐야 먹통일 것을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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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천구백구십사년 어느 늦은 밤 (2/3)낙농콩단/Season 4 (2003) 2018.09.20 15:00
문제의 2994년도 겨울 어느 늦은 밤, 그녀는 갑자기 다섯 개의 바이러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토해내었다. 여느 때라면 프랭키가 채 눈치를 채기도 이전에 '제거'가 이루어지고 간단한 '치료 기록'만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제작사로 전송되어 곧 발표될 다음 버전의 개발에 참고자료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본사의 개발자들은 바이러스의 유형을 분류하고 대책을 세워 세상의 모든 그녀들에게 업데이트를 뿌렸을 것이다. 프랭키는 참 이상하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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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천구백구십사년 어느 늦은 밤 (1/3)낙농콩단/Season 4 (2003) 2018.09.20 11:51
바이러스가 48개 발견되었습니다. 대상 파일의 수에 따라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수십 분 이상 소요될 수 있다는 검사는 기어코 28분의 '소요' 끝에 6만 7천 4백 2십여개의 파일을 '검사'하여 위와 같은 메세지를 뱉어 놓았다. 세 개의 버튼이 새로 생겨나서 선택을 강요하였다. 전체 치료, 선택 치료, 그리고 닫기.* 그녀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2994년도 겨울 어느 날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