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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 리버스 스윕 (3/8)
    낙농콩단/Season 16 (2015) 2019.01.06 11:15

      팔이 욱신거리는 고통 속에서 그녀는 깨어났다. 조금 더 명확히 정신이 돌아오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다. 분명히 뭔가로 세게 얻어맞은 듯 했다. 그녀의 양 팔꿈치는 족쇄 같은 것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양 무릎도 마찬가지였다.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보았지만 족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맨 살과 맞닿은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소름끼칠 정도로 끔찍했다. 절로 몸이 떨렸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곳에서 단 한 줌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빛이었다. 그리고 희망이었다. 온기는 없었고 대신 습기가 가득했다. 어디선가 작은 동물들이 아주 재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두려운 마음이 검푸른 안개처럼 피어 올랐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유니스 로즐린 달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그러나 그녀는 곧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 똑바로 차린들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차가운 기운이 뼈속 깊숙히 스며들어 생각을 마비시켰다. 그러고 보니 외투가 사라졌어. 여기에 매달아 놓기 전에, 누군가 외투를 벗긴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옷은 그대로였다. 빨간색 롱 가디건과 라비아스 청바지 모두 그녀가 기억하는 그대로였고 (오! 하나님!) 다행히 누가 옷과 몸에 손을 댄 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굽 높은 구두도 그대로 신겨져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 남자를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늘의 먹잇감' 말이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순간에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이런 짓을 한 걸까? 한없이 유순하고 만만하게만 보이던 사람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쉽게 믿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 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조심성 없이 먼저 접근했던 건 너였어.”


      (틀린 말씀은 아니에요. 하지만…….)


      가끔씩 그녀는 자신을 꾸짖고 비난하고 힐책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시달렸다. 물론 그 목소리는 그녀 안의 어느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당하는 듯한 기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압박이 만들어 낸 자기 방어의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녀의 상담의는 이런 말을 했었다. 올바른 분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여전히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기계적으로 등장하는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야구에 대한 비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확률을 우습게 여기면 못써. 악수와 묘수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거든.“ 


      (알아요. 요행을 바라지 말고 정석대로 하란 말씀이죠?)


    *


      어쩌면 어둠이 시간 인지 능력을 앗아가는지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도 공포에 압도당하여 소리를 지르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확신이 점차 강해졌다. 상대는 멀쩡히 길에서 여자를 납치해다가 이렇게 벽에 매달아 둔 사람 아니겠는가! 좋은 사람일 가능성보다는 나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다면 굳이 만남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탈출 가능성을 떠나 대비할 시간이 있어 나쁠 것은 없었다.


      그녀의 생각은 다시 남자에게로 옮겨갔다. 유순하고 굼뜬 그 남자. 손쉬운 먹잇감. 손쉬운 요릿감. 겉모습만 봐서는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남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가령 제 3의 악당이 있어 자신과 남자의 뒤에서 슬그머니 나타났던 것이다. 이 시나리오가 맞다면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비슷한 처지가 되어 여기 어딘가에 묶여 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 보았다. 짙은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도 여전히 단서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만약 여기 어딘가에 묶여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풀려나려고 몸부림을 친다면 지금과는 다른 소리가 들릴 텐데 말이야. 지금처럼 공허한 바람 소리가 아니라 심장이 뛰는 소리,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람의 소리가 들리겠지.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왜 하필 내가 선택된 걸까?


      “누굴 원망할 것도 없다. 네 잘못이야. 길거리에서,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먹고 산단 생각을 할 때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에 대해 가정해 보지 않았던 거니? 만약에 그 남자들이 마피아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니? 혹은 연쇄살인마라면? 세상 일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제발, 그만 하세요. 그리고 제 일을 사기라고 부르진 말아줘요.)


      물론 가짜 의식을 핑계 삼아 남의 돈을 뜯어낸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녀와 자매님들이 하는 일은 선량한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맞았다. 사기의 정의와 범위를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설정하든 상관없이 이 일은 사기였고 범죄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일은 사기 이상의 무엇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의지에 맞서는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녀는 밤중에 무작정 신학교를 뛰쳐나와 배를 타고 베니스로 도망을 왔다. 그리고 이 일을 시작했다. 신의 의지에 반한다는 것보다 아버지의 의지에 반한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들었다. 더구나 이 일에는 (그녀의 꿈이었던) 연기와 상통하는 요소가 있었다. 본디 훌륭한 사기는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칠 수 있는 법이다. 또한 사실 배우의 연기라는 것은 오락 산업이 만들어 낸 사기의 일종(가공의 자아에 더 깊이 몰입할수록 더 많은 박수를 받는)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 윌리엄 달튼경의 딸인 유니스 로즐린 달튼양이 감히 길거리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한 사람의 훌륭한 배우로서 어수룩한 남자들을 벗겨먹는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남을 속여 돈을 뜯는 일에 크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이유에서였다.  


      ‘칼라. 맞아.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그 애가 신고를 해줄꺼야.’


      유니스의 생각은 이윽고 칼라에까지 다다랐다. 맥도날드 창가 자리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자매님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먹잇감을 따라갔던 자매가 약속한 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은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어쩌면 이미 신고가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경찰이 이미 수사를 시작했겠지. 스트라다 누오바로부터 멀리 끌려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희망은 있었다. 모든 걸 운명에 맡겨야 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 부디 경찰들이 이 곳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칼라. 이제 내 운명은 자매님 손에 달렸어. 당장 경찰서로 찾아가. 내가 없어졌다고 말해줘. 그리고 우리가 잭팟이라고 점찍었던 그 남자(오늘의 먹잇감 혹은 오늘의 요릿감)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말해줘. 물론 그 남자가 범인일 거라고 꼭 단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든 도움이 될 꺼야. 그런 사소한 조각들을 모아다가 퍼즐을 맞춰 완성하는 게 그 사람들의 일이니까.’


      유니스와 칼라는 3년 전에 만났다. 피렌체 출신의 칼라는 유니스보다 다섯살 정도 어렸다. 빨갛고 탐스러운 머리칼이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본인은 작은 키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 듯 했는데, 아무래도 남자들이 보기엔 그런 자그마한 체구가 오히려 더 매력적일 수 있단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화려한 몸치장에 노력을 기울이는 점, 6인치 이하의 힐을 신지 않는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면 확실히 그랬다. 그 애는 임무를 수행할 때도 악착같이 성적인 매력을 앞에 내세우려고 애썼지. 마치 그런 부분을 배제하면 자신이 한없이 무기력한 어린아이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각자의 스타일을 최대한 존중하는 자매님들이지만 그 사이에서도 칼라의 과감한 방식은 늘상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남자를 유혹하는 것이 액땜 의식을 위한 비용을 뜯어내는 작업과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느냐는 식으로. 그렇지만 유니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유혹도 연기의 일종이며 사기와 상통하는 면이 있음을 들어 그 애를 두둔하고는 했었다. 파트너로 월요일과 수요일에 함께 나서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자매님들은 그 애를 싫어했으므로. 


    ‘그러니 칼라 자매님! 이 언니한테 은혜 갚을 기회가 생긴 거야.’


      어김없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확률을 우습게 여기면 안된다니까. 경찰이 신고를 접수하고 수사를 개시하여 여길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반면에 널 여기에 묶어놓은 놈이 여길 들여다보기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간단한 산수란다. 얘야.”


      (그럼 절더러 뭘 어쩌란 말이죠? 이렇게 묶인 채로…….)


      하지만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잠시 후 낡은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인기척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촛불의 일렁거림과 그에 따라 출렁거리는 사람의 그림자 외에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계속)


    시즌 16, 에피소드 191 (2015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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