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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 리버스 스윕 (4/8)
    낙농콩단/Season 16 (2015) 2019.01.09 11:13

      이상한 일이었다.  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안도감이 들다니. 이 대목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것보다는 물론 두려움이 덜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 남자 또한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람 아닌가. 그는 천천히 (묶여있는) 유니스를 향해 다가왔다. 지하실 특유의 울림으로 인해 남자의 발소리는 그녀의 귀에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소리가 멈추었을 때 남자는 그녀 앞에 있었다. 작은 촛불은 일렁거리며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떻게 보면 열기에 살짝 달아오른 느낌도 들었고, 다르게 보면 꼭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간 유니스는 느꼈다. 묘한 긴장과 흥분을, 동시에.   


    - 일어났어요?

      남자는 (예상보다 훨씬) 부드럽게 말했다. 길에서 여자를 납치해다가 지하실에 감금한 남자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런 목소리였다. 마치 로맨스 영화 주인공의 것처럼. 그녀는 (예상을 뒤엎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일종의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생각만큼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고, 남자가 해코지할 생각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그래서 얼마든지 몸 성히 살아나갈 여지도 남아있으리라는 생각을. 그래, 맞아. 이건 여주인공이 납치 당하는 내용의 영화이긴 하지만 아주 수위가 높은 건 아닌 거야. 적당히 겁만 주는 선에서 조절하는, 전 연령 관람가 가벼운 스릴러 영화 같은 거지. 그런 영화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걸 본 적 있어?


     (말인 즉,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는 뜻이야. 유니스 로즐린 달튼!)


      그녀가 의외로 차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확신 덕분이었다. 

    - 역시 당신이었군요. 여긴 어딘가요?

    - 저희 집입니다. 다만 땅 위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연하지. 누가 봐도 여기는 지하실 아니겠어?)


    - 전 왜 묶여 있는 거죠? 이렇게? 

    - 뭐랄까, 굳이 설명하자면……당신은 손님이 아니니까요. 


      남자는 무표정했고 대답은 심드렁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긴장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괜찮아. 마음 편하게 먹어! 지레 겁 먹을 필요는 없어!)


    - 손님이 아니면…… 늘 이렇게 묶어 두나요?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서 어떤 징후를 읽어내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스트라다 누오바를 누비며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을 속이고 지갑을 열게끔 만들었던 내공으로도 쉽지 않았다. 남자는 위험한 표정을 하고 있진 않았지만 눈동자만큼은 텅 비어 있었다.


    - 일단은 좋아요. 그럼 제가 풀려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 내가 원하는 답을 주면 됩니다.

    - 답이요? 말하자면 일종의 게임 같은 건가요?

    - 게임이라……. 그쪽이 오늘 길에서 날 붙잡고 한 건 뭔가요? 그것도 게임인가요?

      그 말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틀었다. 그 바람에 팔꿈치 쪽의 저릿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통증은 작은 알갱이들의 무리라도 되는 것처럼 혈관으로 몰려갔다.

    - 알았어요. 우선 지금 팔 다리가 너무 저린데 말이에요. 혹시 조금 느슨하게 해줄 순 없나요? 아니면 최소한 족쇄를 다른 위치로 좀 옮겨줘요. 관절이 있는 곳에, 그러니까 팔꿈치와 무릎에 직접 채우는 건 솔직히 조금 심했어요. 정말 고문 당하는 기분이라고요.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이쯤해서 승부수를 한 번 던져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 차라리 노끈으로 묶는 건 어때요? 아니면 수갑이나?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그렇게 노는 걸 꽤 좋아하는데.

      (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제발 제 짐작이 맞게 해주세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그녀는 남자의 허를 찌르고자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남자가 여성을 상대하는데 익숙치 않아 어려움을 느끼는 타입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세게 나가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어.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거지. 물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살짝 ‘그래도 너무 나간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공격에 앞서 먼저 내 수를 지키라는 격언이 있단다. 무모한 도발은 절대 금물이야.”


      (알아요. 하지만 상대의 의도를 알고 싶으면 일단 붙어보라는 말도 있죠……)


      남자는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햇살 좋은 날의 지중해 바다처럼 부드러워서 그녀 또한 한결 마음을 놓게 되었다. 그녀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남자는 아주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고, 덩달아 마음이 놓였는지 그녀도 절로 웃음이 튀어 나왔다. 남자가 ‘하하하’ 소리를 내며 더 크게 웃었다. 그녀도 '깔깔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물론 그녀가 내는 소리는 ‘일단 풀어주기만 해봐. 본 때를 보여줄 테니까’라는 뜻이었다. 웃음이 밀어낸 눈물을 닦아내며 남자는 그녀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여전히 부드럽고, 또 한없이 차분하게.

    - 그렇게 노는 걸 좋아했던 분이 저기도 있죠.


      아마 그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남자가 무심하게 촛불을 들어 가리킨 방향에서 물결처럼 일렁거린 이미지를. 남자는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기를 원했는지를 몰라도 초를 하나 더 가져와 반대쪽 벽에 놓았다. 그곳에는 그녀와 똑같은 모양으로 묶여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여자였다. 양쪽 팔꿈치와 양쪽 무릎에 족쇄가 채워진 상태로, 그곳을 경계로 사지가 끔찍하게 뒤틀려 무기력하게 축 늘어진 몰골이었다. 순간 그녀는 맞은 편에 거울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설마 내가 저런 꼴로 매달려 있는 건 아니겠지?' 밀려오는 두려움에 평상심이라는 이름의 방파제가 무너졌다.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좋게 끝나기 어려울지도 몰라. (계속)


    시즌 16, 에피소드 191 (2015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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