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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 리버스 스윕 (5/8)
    낙농콩단/Season 16 (2015) 2019.01.11 10:47

     거울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주문을 걸었다. 미약한 촛불에 의지한 빛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위가 눈에 익어왔다. 눈을 몇 번 더 깜빡일 시간이 지나자 (그 사이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맞은 편의 여자는 체구가 꽤 작아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빨간 머리처럼 보인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의심과 확신의 경계에 있었지만 이미 마음 속으로는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작은 체구의 빨간 머리를 알았다. 몇 년 사이 꽤 가까이 지냈다. 오늘만 해도 짝을 지어 함께 길을 나서지 않았던가. 칼라 자매님. 작은 체구가 (정확히 말하자면 작은 키가) 컴플렉스였던 그 애는 늘상 위험하리만치 높은 구두를 신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미 맞은 편 여자의 뒤틀린 다리 끝에 걸려 있는, 아주 눈에 익은 크리스찬 루부탱의 검정색 6인치 하이힐을 향해 있었다. 여자들에게 구두란 지문이나 치열만큼 확실한 신원 확인의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오! 하나님! 오! 하나님! 오! 제발!


      신학교가 싫다고 야반도주한 주제에, 이제와서 하나님을 찾는단 사실이 아이러니하긴 하다는 생각을 잠시 (아주 잠시) 했던 것도 같았다. 아버지라면 틀림없이 이런 말씀을 하시겠지.


      “그러게 내가 뭐랬니. 정석대로 둘 때 두 배는 강해지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야.”

      (제발 좀 닥쳐요!)


      두려움과 슬픔에 유니스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두 눈은 퉁퉁 부었고 입 안에서 단내가 났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은 부끄러움이라도 타는 것처럼 귓볼까지 빨갛게 변했다. 아마도 그녀의 그런 반응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눈 앞의 (끔찍한) 업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귀속된 것임을 확실히 하려는 듯, 구석에서 자루가 긴 해머를 끌고 와서 그녀 앞에 수줍게 섰다. 


    (그러니 따단! G등급 전연령 관람가처럼 여러분을 방심하게 했던 이 영화는 사실 NC-17 등급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칼라는…… 오, 하나님. 도대체 칼라는 왜 여기에? 

    - 저 숙녀분 이름이 칼라인가요? 어쩐지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 왜? 도대체 왜? 뭘 잘못했길래?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다시 퀴즈를 시작을 해봅시다. 저 여자는, 그러니까 칼라는 도대체 뭘 잘못했던 걸까요?

    - 몰라. 모른다고! 이 미친 새끼야!


      해머의 끝이 그리는 완만한 곡선은 느린 화면처럼 눈에 들어왔다. 기존에 인지하던 체계와는 다른, 새로운 시간의 흐름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 놀라운 경험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그녀는 미처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족쇄에 걸려 있는 오른쪽 무릎 바로 아래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발목 아래로는 중력을 따라 고정된 무릎과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맙소사! 칼라에게 (적어도 칼라의 오른쪽 다리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남자를 유혹하는데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그 외엔 철저하게 무능했던 칼라 자매님은 네 번의 소중한 기회를 허투르게 써버리고 만 것이었다. 


    *


    유니스의 어린 시절. 야구광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야구가 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딸을 무릎에 올려놓고  경기 내용을 해설하는 실로 고약한 취미가 있으셨다.

    - 야구나 바둑이나 마찬가지야. 아마추어들은 한 수 한 수의 성공에 일희일비하지.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전체 대국의 큰 그림을 파악하는 것이란다. 그래서 항상 형세판단을 게을리 하면 안되지. 국지전에선 얼마든지 질 수 있어. 져도 괜찮아. 그 대신 전체 대국에서 이기면 돼. 


      “지금도 마찬가지란다. 네 귀(귀퉁이) 중에 한 귀를 빼앗긴 셈이지만 그 정도로 지지는 않아.”

      (하지만 너무 아파요. 아프다 못해 감각을 느끼지도 못하겠는걸요.)


    *


      해머가 축축한 시멘트 바닥 위로 털털거리며 끌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왜소한 체격을 감안하면 그 정도 무게의 연장을 자유자재로 다룰만큼 힘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남자의 (짧고 가벼운) 한숨 소리를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고통과 추위 속에서도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세 번 더 얻어 맞고 칼라 자매님과 똑같은 꼴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칼라는 어떤 상태인걸까?' 처음엔 그 애가 죽기라도 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식으로 얻어 맞았으면, 사지가 부러졌겠지만 죽었을 거라고 미리 단정할 이유는 없었다. 혹시 견디지 못하고 혼절이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어떤 신호들 - 앓는 소리라던가, 침 삼키는 소리라던가, 의지와 무관하게 경련으로 나는 소리라던가, 그런 것들조차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주 작은 소리도 천둥처럼 울리는 지하실이다.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그녀가 놓쳤을 리 없었다.


    - 두번째 질문입니다. 아마 지금 가장 궁금하게 생각할 내용을 이야기해보죠.

      남자의 목소리는 끔찍하리만치 차분했다. 방금 막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몸을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만 여전히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는 않았다. 여성과 상대하길 두려워하는 것……. 그저 등쳐먹기 쉬운 먹잇감의 특성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하필 이런 사이코가 걸릴 줄이야! 그녀는 남자에게 '닥쳐!'라든가 '꺼져!'와 같은 말을 하고 싶은 말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불필요한 자극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깨달았기 때문에 애써 그런 마음을 제어하려고 노력하여야만 했다.   


    - 당신이 여기 이렇게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 그건…….

      (몰라서 물어? 네 놈이 납치해다가 여기 묶어놓았기 때문이지!) 


    - 내가 뭐가 잘못을 했기 때문이군요.

      그녀는 실없이 웃었다. 스스로도 꽤 괜찮은 한 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질문의 답을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정말로 그녀는 자신이 왜 잡혀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적절한 회피와 방어를 겸해 어쨌든 답안은 제출했다. 또한 남자가 원할만한 대답이다. 이런 끔찍한 일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으니, 그야말로 저런 사이코들이 좋아할만한 모범답안 아닌가! 게다가 남자의 요구는 내는 문제를 맞춰보라는 것이었지 틀리지 않은 답을 말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히 대처한 것 같아 그녀는 다소 의기양양해졌다.


      (자! 이제 우리는 한 점씩 단수로 몰린 상태로 서로 물려 있어. 어떻게 나올 건데?)


      생각해보니 참말로 야구광이자 바둑광의 딸 다운 표현이기는 했다. 아버지라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그걸 바둑 용어로 '패'라고 한단다. 야구에서 비슷한 상황으로는…”


    아니면,


      “얘야, 조심해! 해머가 또 날아온다?” (계속)


    시즌 16, 에피소드 191 (2015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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