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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 리버스 스윕 (6/8)
    낙농콩단/Season 16 (2015) 2019.01.13 11:07

      고통이란 무엇일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아버지 바람대로 신학교를 몇 년 더 잠자코 다녔으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다른 먼 곳의 누군가를 향해 날아가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남자의 말("그런 장난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어쩌고 저쩌고")을 들으며, 예측 가능한 가장 빙퉁그러진 전개가 만들어 낸 괴상망측하게 뒤틀린 왼쪽 다리를 보며, 맞은 편 벽에 매달려 영원한 침묵에 빠진 칼라 자매님의 무존재를 느끼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내가 도대체 저 남자에게 뭘 잘못한 거지?)


      고통의 성분을 이해하는 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진짜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너무 아팠던 나머지 그녀는 있는 힘껏 악을 썼다. 악을 쓰면서, '왜 진작 이렇게 해보지 않았던 걸까?'하는 생각도 했다. 운이 좋았다면, 인근 지역의 누군가 듣고 경찰에 신고를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살려줘요!"라고 소리 내어 절규해 본 다음에서야 그녀는 남자가 이제까지 굳이 그녀에게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은 마음에 후회스러움이 밀려왔다. 형세 판단이 잘못되었어. 남자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대로 한복판에서 납치되어 벽에 매달렸다는 극단적 조건에서도.


      남자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젖먹던 힘 다하여 괴상을 뽑아내는 그녀의 입을 막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건 좋은 소식이자 나쁜 소식이었다. 숨쉬고 말할 자유를 당장은 박탈당하지야 않는다는 건 좋은 소식, 이렇게 소리를 지른들 소용이 없으리란 사실이 남자의 계산에 들어가 있다는 건 나쁜 소식, 대단히 나쁜 소식.교묘한 패는 한 방에 박살났고 이제 네 귀 중의 두 귀를 빼앗긴 상태다. 남은 수가 뭐가 있을까? 아니, 남은 수가 있기나 할까? 


      “얘야,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뒤집기가 불가능하진 않단다. 세 판 중 첫 판을 내주고도 두 판을 내리 이길 수 있지. 다섯 판 중 두 판을 내주고도 세 판을 내리 이길 수도 있고. 바둑에서도, 야구에서도, 스모에서도, 그리고 인생에서도.”


      (가끔 아버지가 영국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요.)


    *


    - 힌트, 힌트를 좀 줘요.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는데 사실 악다구니를 쓴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해 보였다. 양쪽 무릎 아래에서 강렬한 고통이 치밀어 올라오니 터져나오는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쪽 다리만 아프던 조금 전의 상황이 미치도록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 좋아요. 힌트 겸 세번째 질문을 하도록 하죠. 힌트는 맞은 편의 저 여자분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질문은 이겁니다. 저 여자분은 또 왜 여기에 저런 꼴로 있는 걸까요?


      힌트는 칼라 자매님이다. 그녀는 머리를 굴렸다. 굴리려고 노력했다. 칼라와 유니스는 똑같은 일에 휘말렸고 (아마도 시간 차를 두고) 똑같은 위협을 겪고 있다. 이 일은 두 사람 사이의 어떤 공통분모와 연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5년 전에 만났다. 칼라는 어떤 애였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도 명확했다. 여러 번 떠올렸다시피 칼라는 화려한 걸 좋아했다. 화장도, 명품도, 그리고 그 결과물을 뽐내기도. 유니스는 그런 타입은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리고 자그마하고 화사한 칼라를 볼 때마다 그녀는 솔직히 열등감을 느꼈다. 나이도 많고, 은근히 살도 찌고, 전혀 예쁜 얼굴도 아니고, 사각턱에, 안경제비에…….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이런 일로 파트너를 이루지 않았다면 어울렸을 타입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칼라에 집착하는 남자들이 그동안 꽤 많았더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길에서 스쳐가는 남자들이 너나없이 한 번쯤은 돌아볼 타입이었지.

    - 칼라와 만나던 남자들 중 하나였군요. 저 앤 끝이 좋지 않게 헤어진 남자들이 꽤 있었어요.

      남자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따뜻하게 보여 사람을 안심시키는 지중해 미소.

    - 이제야 조금 노력을 하는군요. 그렇지만 답은 아니에요. 

    - 아니에요?

      남자는 해머를 들어 그 끝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 그렇다면 그쪽을 잡아올 이유는 없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둘 사이의 치정 문제라고 한다면 제 3자를 잡아올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녹이 슨 쇠맛이 나는 것 같았다. 남자는 해머를 만지작거렸다. 이 퀴즈쇼에 시간 제한이 없다고 가정하면 안될 것 같단 생각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칼라와의 공통점. 그녀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이 같이 오해나 원망을 살만한 일을 하고 다닌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대개 사고를 치는 쪽은 칼라였지. 경찰에게 오해를 산 적도 있었고. 스트라다 누오바에서만 여러 차례 그녀들은 경찰의 심문을 받았다. 그 애의 지나치게 화려한 차림새도 그렇고 남자들에게만 (적극적으로) 지분거린다는 점에서 종종 매춘부로 오해받았던 것이다. 순수한(?) 의도의 종교인(?)으로 종교 의식(?)를 주선하고 있음을 설명하여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유니스는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맞아. 그런 일도 있었지. 해머를 만지작 거리는 남자의 손에 시퍼런 힘줄이 불거져 나오려는 찰나에 그녀는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 알겠어요. 당신은 우리가…… 몸 파는 여자라고 생각한 거예요. 당신은 그런 사람들이 불결하고, 또 그래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릴 잡아다가 가둔 거죠. 범죄소설 같은 걸 보면 그런 사건이 많이 나오잖아요. 물론 칼라 저 년이 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충분히 오해했을 법도 하지만…… 우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순수하게 종교적인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좋은 뜻으로 사람들 기를 읽어주고, 또 나쁜 기를 없애는 의식도 열어주고…….

      남자는 실소했다. 그녀는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아니에요. 생각지도 못한 해석이네요. 상상력은 높이 사지만 정답과는 거리가 멀어요.


      얼마나 기회가 남아있을까. 그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디선가 바람은 지하실 안으로 약하지만 꾸준히 새어들어오고 있었고 촛불은 이미 반 이상 타들어가고 남은 상황이었다. 한 번 더 틀리면 어깨로 해머가 날아오겠지. 오른쪽이 먼저일까? 왼쪽이 먼저일까? 순서에 상관 없이 몇 달은 미이라 꼴로 병원 신세를 져야겠지? (물론 일단 살아나간다면 말이다) 그렇게 치면 칼라도 마찬가지다. 저 애는 괜찮은 걸까? 다시 일전의 의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칼라가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저 애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어째서 조용히 있는 걸까? 정신을 잃었어도 살아있는 생명은 끊임없이 소리를 내기 마련인데…… 통증이 만들어 낸 장난이었는지는 몰라도 순간 그녀는 이런 환각을 보았다.


      칼라는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칼라가 고개를 들었다. 족쇄가 묶여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잠겨 있지는 않았다. 팔과 다리를 어렵지 않게 빼내었다. 빨간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고 씨익 웃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그려진 연분홍색 입술(디올 어딕트 454번의 색이다)에 생기가 흘렀다. 그러면 그렇지. 이럴 줄 알았어. 다른 설명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어. 정말 그렇다면 열에 아홉은 남자와 한 패이겠지. 칼라가 남자를 향해 걸어왔다. 루부통 하이힐 소리(그 높은 걸 신고 어떻게 균형을 잡고 걷는지 모르겠어)가 물방울이 물웅덩이에 똑똑똑 떨어지는 소리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칼라는 남자의 어깨에 다정하게 기댄다. "우리 어디로 같이 도망가요"라고 속삭인다. 비율이 맞는 그림이다. 꽤 어울린다. 거 봐, 항상 말했잖아. 키는 문제가 아니야. 오히려 그래서 남자들이 더 좋아할 거라니까.


      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그녀는 남자를 향해 내뱉었다.

    -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과 칼라는 이미 아는 사이에요. 말하자면 한 패죠. 사실 저 애는 멀쩡하게 살아있고요. 저렇게 보이는 건 날 속이려고 분장을 한 거겠죠. 아니, 저 애가 맞긴 한가요? 인형 같은 걸 매달아 놓고 칼라라고 믿게 만든 건 아니고요? 아무튼 이게 다 날 등쳐 먹으려고 만들어 놓은 판이죠. 마지막 반전을 위해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저 헤픈 년은 때가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당신 어깨에 기대어 은밀한 말들을 속삭일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대답해봐요. 내 말이 틀렸나요?


      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요. 아니면 정말 어디가 좀 모자라던가.


      미처 대꾸할 틈도 없었다. 세번째 응징은 빠르고 신속하게 오른쪽 어깨에 이루어졌고 유니스는 그대로 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계속)


    시즌 16, 에피소드 191 (2015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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