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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해피 발렌타인은 취두부와 함께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1.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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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히도 나는 발렌타인데이의 유래가 무엇이고, 또 그 날 왜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해봐야 성 발렌타인이 억울하게 얽혀 들어갔다는 정도랄까. 가끔은 정말로 궁금해서 우리 시대 지식의 보고라는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보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그런 쓸떼없는 물음의 남발이 우리 인터넷 공간을 시화호마냥 썩어가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정확하지 않은 답변이 정확하지 않은 인용과 정확하지 않은 출처에 의해 달릴 가능성이 무려 99.9998%에 육박한다는 점에서, 당분간은 그냥 혼자 조용히 궁금해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매년 이맘 때가 되면 의문을 갖다가 지나고 나면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


  또다시 발렌타인데이가 돌아온 이 때, 천지에 넘쳐나고 있는 것은 (아니나 다를까) 사랑 고백의 상징 취두부이다.   (츄이도 아니고 추파카브라도 아니고) 다름 아닌 취두부다. 취두부가 무엇인가? 두부를 소금에 절여서 삭힌 것이다. 삭힌 음식이 대개 그렇듯 냄새가 끝내준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중평이다. 과연 거리엔 이미 썩은 계란 냄새가 진동을 한다. 가게마다 취두부를 파느라고 정신이 없다. 심지어 취두부를 안 팔아도 취두부와 연계된 마케팅을 펼친다. 두부집은 대목을 맞았다. 대형마트 입구에는 취두부 코너가 따로 만들어졌다. 편의점조차 발렌타인데이 마케팅을 펼친다. 커피 전문점에도 커피의 좋은 친구로 취두부를 함께 팔기 시작했다. 코를 찌르는 취두부의 로맨틱한 향기로 세상이 진동하다. 마스크에 방독면까지 이중으로 겹쳐 쓴 행사 도우미들이 짧은 치마를 자랑하며 요란스레 몸을 흔든다. 아주 난리가 법석이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많은 취두부가 있었다고? 이제까지 어디에 다 숨어 있었다 나온 건지 의아할 지경이다. 이렇게나 많은데 내게 돌아온 건 하나도 없다. 역시 빈부 격차는 대한민국의 시급한 과제임이 분명해 보인다. 음, 아닌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취두부를 선물해야 하는 날이 발렌타인 데이인가?


  솔직히 말하면 요즘 들어 그런 종류의 개념을 다분히 잃어버린 상태다. 발렌타인데이를 두고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남자가 남자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여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아니면 신의 섭리를 거역하고 여자가 된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여자가 된 남자가 남자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반대로 남자가 된 여자가 남자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남자가 된 여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그것도 아니면 인류 역사상 목격되지도-규정되지도-생각되지도 않은 제3의 정의 내려질 수 없는 새로운 성(性)을 가진 사람이 그 외의 규정된 성을 가진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도통 분간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고등학생 때까지는 분명히 그 정의를 이해할 수 있었던 듯 한데 정작 연애를 해도 되는 나이가 되고부터 그런 감각이 증발하듯이 사라져버렸다. 아무래도 주지도 받지도 않은 상태로 몇 년째 그냥 하릴없이 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공정선거의 구호처럼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 하여간 자고로 매도 맞아 본 놈이 잘 맞는다고, 그것도 받아본 사람이나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술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발렌타인이든, 로얄 살루트든, 죠니 워커 블랙이든, 막거리든 그게 그거다. 도통 뭐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이다.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발렌타인 데이는 ‘여자’가 ‘남자’에게 취두부를 선물하는 날이라고 한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어디 적어놓기라도 해야겠다. 자 그럼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발렌타인데이에 여성들은 사랑하는 남성에게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취두부를 선물한다. 이 해괴한 풍습은 전 세계를 (후각적으로) 마비시킨다. 서로 경쟁하듯 정신나간 짓들을 하고 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역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취두부를 선물하세요." 발렌타인데이 일주일 전부터 거리는 기괴한 냄새로 진동을 한다. 상술의 썩은 내다. 머리 하나는 정말 비상한 일본인들은 여기에 더욱 버라이어티한 논리를 가미해냈다. "(꼭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주변의 고마운 남자들에게 취두부를 선물하세요." 소위 말하는 의리취두부(義理臭豆腐)다. 취두부를 주고 받는 갑과 을의 범주를 굳이 미혼 연인으로 한정하자면 ① 애인 없는 미혼남들, ② 애인 없는 유부남들 (아시다시피 세상엔 애인 있는 유부남들도 존재한다), ③ 애인 없는 싱글파파들의 처지가 불쌍하니 신의 및 의리 및 도의 차원에서 챙겨들주자는 마케팅을 벌인 것이다. 더 많은 취두부가 팔려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러다임의 대전환으로 일단 취두부가 사랑 고백과 무관하게 일단 주고 일단 받아야 하는 것이 되었음에도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의 간격은 더욱 더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남성들 사이에선 취두부를 몇 개나 받았느냐가 인기(혹은 인간관계)의 척도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소수 인기남들은 발렌타인 데이 저녁 무렵쯤엔 온 몸으로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며 다녀야 할 정도가 되었고, 나머지 다수 평범남들은 의리고 도의고 나발이고 여전히 빈 손으로 쓸쓸히 집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본래 남녀 구분이 없는 날을 여성이 남성에게 고백하는 날로 만들어버렸으니 남성에게도 응당 답례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독특한 발상이, 또다시 어떤 비싼 밥 먹은 놈의 머리에서 나왔다. 다름 아닌 화이트데이의 등장이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에 남성들은 사랑하는 여성에게 (이 또한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연두부를 선물한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의리연두부’가 탄생했다. 기작은 똑같다. 취두부를 주고 받는 갑과 을의 범주를 굳이 연인으로 한정하자면 ① 애인 없는 미혼녀들, ② 애인 없는 유부녀들 (다시 강조하지 않겠다), ③ 애인 없는 싱글맘들의 처지가 딱하니 신의 및 의리 및 도의차원에서 챙겨들주자는 말씀. 마찬가지로 연두부를 얼마나 받았느냐가 여성들 사이에서 경쟁의 원리이자 인기의 척도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입장이 갈렸다. 다 똑같은데 화이트데이가 발렌타인데이보다 나은 게 하나 있다. 연두부는 취두부처럼 지독스런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고 화이트데이의 상술이 썩어빠지지 않았단 뜻은 아니지만, 그나마 후각 수용체를 지구에서 25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은하로 보내버리는 일을 두 번이나 겪어야 하지 않는단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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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연인을 위한 발렌타인 패키지

기간: 2월 13일~14일 (1박 2일)
가격: 560,000원부터 (세금 및 봉사료 별도)
포함내역: 그랜드 딜럭스 룸 1박 이용, 리무진 이용, 플라워 장식/ 풍선 장식/ 아로마 캔들 세팅, 취두부 프리미엄 커플 세트(취두부 튀김, 취두부 찌개 포함)와 고량주, 자쿠지 무료 이용, 비데 완비, 군용 방독면 제공, 룸서비스로 조식 제공, 체크 아웃 시간 연장 혜택.
문의: 074-023-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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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취두부를 둘러싼 발렌타인데이 상술에 대하여 개탄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실로 간사한 동물이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취두부를 받을 확률이 단 1퍼센트라도 된다면 발렌타인데이를 옹호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매년 이맘때 아홉시 뉴스에서 정체불명의 외래 명절을 지탄하거나 말거나, 조심스럽게 유리 마개를 벗겨내고 까맣고 부드럽게 썩어있는 그것을 입으로 밀어넣기까지 고약한 냄새를 참아내는 것만이 관심사다. 그게 바로 인기의 맛이고, (일본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의리의 맛이며, (다행히 연인에게 받았다면) 사랑의 맛이다.
  반대로 사랑하는 혹은 그에 준하는 사람에게 취두부를 받을 확률이 제로에 수렴한다면 발렌타인데이와 그 뒤의 음험한 상술을 소리 높여 성토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이 대목에서 성 발렌타인과 천수이볜 대만총통, 그리고 시노자키야(일본의 유명한 두부 회사)간의 검은 커넥션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삼일절도 제헌절도 아닌 날을 이렇게까지 신경 써야 하는지 괜히 통탄스럽고, 정체불명의 외래 명절이 뜬금없이 우리 주머니 쌈짓돈을 탈탈 털어간다는 사실은 울분마저 불러 일으킨다. 혹시 주변에 취두부를 주고 받는 남녀들이라도 '문득' 보이면 혀를 끌끌 차게 되고, 원래 고약한 그 냄새는 구토를 일으킬만큼 지독하게 느껴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된다. 
  왜 하필 취두부일까. 아무리 고단백 저지방 영양식이라도 그렇지, 세상에는 취두부보다 냄새가 덜 나면서도, 더 맛있으면서도, 더 로맨틱한 음식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초콜렛이나 캔디처럼!) 서양인들이 썩은 두부를 주고 받는 동북아시아의 변종 발렌타인 데이 풍습을 얼마나 독특하게 생각하는지는 2004년 발간된 전미국방경영학회의 전미국방경영학회지 제75권 제3-2호에 게재된 다음 논문의 제목만 봐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생물 테러 발생에 따른 피해예측에 관한 연구: 취두부를 중심으로

  이 양반들이 생선 삭힌 걸 아직 맛보지 못했는지 쉬르스트뢰밍을 주제로 출판된 논문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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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발렌타인데이다. 온 세상이 계란 썩는 냄새로 진동을 한다. 엄습하는 황화수소 분자들에 코 점막이 마비되고 후각 신경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이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받을 일이라고는 없다. 아마 내년에도 없을지 모른다.어딜가도 난리 법석인 썩은 두부와 그 썩은 상술이 씁쓸한 한편으로는 속상하고 마음 아프다. 차라리 '쓰레기 만두’ 때처럼 '쓰레기 두부'도 파동 한 번 시원하게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그래서 시중에 풀린 취두부를 전량 수거해서 소각하기로 한다면 올레! 올해 발렌타인데이는 비참하지 않게 건너뛸 수 있을텐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 역시 인간이라는 간사한 동물. 주위 여자 아이들에게 어찌어찌 취두부 좀 받게되면 또다시 발렌타인 데이 예찬자로 돌아설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200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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