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또 다시 한 번


  어느 순간부턴가 깡통이 다시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랬다. 열 걸음 거리가 일곱 걸음이 되고 다시 다섯 걸음이 되었다. 격납고만큼 커졌던 창고는 어느새 다락방만한 크기로 변했다. 음악이 끊기고부터 계속 오그라들고 있었던 것 같다. 서로 싸우느라 몰랐었지만. 무지개는 사라지고 무채색만 남았다. 활기와 생기가 사라지고 고독과 적막만이 남았다. 꽃도 시들었다. 이럴 때 마법같은 스윙으로 뿌빠디 뿌빠 뿌빠빠, 다시 생기를 불어 넣어주면 좋을텐데 야속한 라디오에선 답이 없었다. 혼자 장단 맞춰 '잇 돈 민 어 띵, 이프 잇 에인 갓 댓 스윙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다시 한 번!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아니야. 전혀 신나지 않았다. 마치 장송곡처럼 느껴졌다. 취한 목소리의 린다가 꽃병을 던졌다.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망할 자식아!" 크리스탈 꽃병은 와장창 깨졌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느 때처럼 버르장머리 없는 여편네에게 본 때를 보여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텔레비젼 속 앤디 그리핀의 비아냥이 들려왔다. "이미 늦었어. 이 딱한 친구야."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박살난 꽃병 조각과 으깨어진 꽃잎, 그리고 흩어진 물이 산산히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캡틴 스미스처럼? 마치 캡틴 스미스처럼! 


물리 101


  캡틴 스미스는 항상 떠 있었다. 지구를 떠나온 뒤로 항상 그랬다. 우리는 그게 출발 당시의 사고로 캡틴 스미스가 죽어서 그런 것이라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품에 안겨 돌고 있는 포카혼타스도 있지만, 그녀는 공기 인형일 뿐이다. 풍선이 공중에 뜨는 건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구를 떠나온 내내 걷고 말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영화속 우주인들처럼 공중을 빙글 빙글 돌지도 않았다. 사물도 제 자리에 있었다. 폴터 가이스트 같은 건 없었다. 집어 던져서 꽃병이 깨졌단 말이다.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린다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것을 보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 느낌이 맞다면 그녀도 나와 같은 걸 보았을 것이다. 잠시 눈에 놀라워하는 감정이 서렸으니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라는 말을 하는 듯 했다. 맞아,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이 어디 한 두가진가. 지구에서 이만큼 멀어져 올 때까지 라디오가 잡혔던 것 하며……. 텔레비젼 속 앤디 그래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도 빼놓지 말라고!" 


캡틴 스미스, 또 다시 한 번


  결국 캡틴 스미스는 애꾸가 되었다. 홧김에 너무 세게 때렸던 탓이다. 살림을 다 들어내고 뒤졌는데도 오른쪽 눈알을 찾지 못했다. 나는 사과의 의미로 안대를 만들어 그에게 씌워주었다. "이제 캡틴 스미스보다는 캡틴 후크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과묵했던 그는 사건 이후 더 과묵해졌다. 그의 변화는 그쪽 커플의 관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잦은 말싸움으로 감지된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의 이상 기후는 결국 나와 린다 못지 않은 진흙탕 싸움으로 귀결되었다. 일주일만에 포카혼타스는 자기가 떠날 거라고 알려왔다. 대신 위자료로 텔레비젼을 가지겠다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기 인형은 텔레비젼을 안고 에어락에 들어가서 내부와 차단시킨 다음에 스스로 바깥쪽 개폐부를 열었다. 쉬익. 아주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바람이 빠진 건지 그녀가 날아간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물리 법칙상 문제는 없어 보였다. 텔레비젼과 그 지긋지긋한 앤디 그리핀도 사라졌다. 1960년대 최고의 시트콤 스타는 "이 미친 원주민 계집아! 당장 내려놓지 못해?" 라는 말과 개자식들! 내가 가만 두나 봐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는 끝없는 우주 공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쉬익하며. 휴, 그렇게 가는 거지.


결혼, 다시 한 번 


  푸른 달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우리는 저 곳에 닿을 수 없을 거라고. 깡통은 점점 작아져 이제 다시 처음의 크기로 돌아왔다. 둘 중 하나가 기지개를 펴면 서로를 건드릴만큼 가까워졌다. 하지만 한 번 멀어진 마음의 거리는 다시 가까워질 수 없었다. 깡통을 중심으로 나는 우주의 왼쪽 공간을, 린다는 우주의 오른쪽 공간을 응시하고 있다. 절대 마주보는 일도 절대 같은 곳을 보는 일도 없다. 우리의 실패한 미션은 말 그대로 실패한 결혼의 그 자체에 대한 은유로 가득차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게 되었지만 도망갈 곳이 없다. 그 많던 방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조종실 한 칸 뿐이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매력이었던 아메리카 원주민, 그 아이만한 결단력이 없다면 어쩌겠어. 좋으나 싫으나 이 안에서 부대끼고 살아야지. 한때는 모든 게 마법 같았다. 이제는 모든 게 암호 같다. 사방을 둘러 보았다. 금속이 타는 냄새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손바닥 만한 공간조차 우울과 절망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에버 에프터


  그 순간 잡음과 함께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또렷하진 않았지만 뭔가 흘러 나오긴 하는 듯 했다. 린다도 겨울잠에서 막 깬 곰처럼 무겁고 게스츠레한 눈길로 관심을 보였다. 잠시였지만 그녀의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귀 기울여보니 듀크 엘링턴의 '솔리튜드 (Solitude)'다. 가수는 아마도 빌리 홀리데이? 저 멀리 우주 어디에선가 우리를 위해 보내어 준 위로는 거짓말처럼 단 한 곡으로 그쳤다. 이후 라디오는 또다시 노이즈조차 없는 끝없는 적막으로 되돌아갔다. 과연 그것은 마지막 '듀크 엘링턴 이펙트'였을까? 알 수 없다.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었고, 또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었으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요함에 짓눌려 나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쳐다보았다. 린다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른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 했다. 우리의 자리는 나란했지만 우리의 마음은 나란하지 않았다. 만약 어떤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존재가 멀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과연 이 꼴이 어떻게 보일까? '저스튼 브로큰'이라고 페인트로 갈겨쓴 웨딩카? 풍선과 깡통을 매달고, 따그닥 따그닥 우울하게 흘러가는? 블루 문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미션은 아무래도 끝난 것처럼 보였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실패한 미션이 아니었다. 이 끔찍하고 목적없는 여행이 우리의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리라는 사실이었다. (끝)


시즌 15, 에피소드 185 (2014년 09월)


WRITTEN BY
김영준 (Y.J.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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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그리핀 쇼


  텔레비젼의 발견은, '듀크 엘링턴 이펙트'의 보다 복합적인 방향으로의 진화를 야기하였다. 눈과 귀에 모두 맞아 떨어지는 사례들이 나타났고, 노래 속의 함축적 의미로 유추하는 것보다 말로의 지목이 확실히 더 직접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앤디 그리핀 쇼>가 있었다. 1960년에 시작된 이 CBS의 히트 시트콤은 그야말로 전방위적 영역에서 우리를 놀라 자빠지게 만들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어느 날 밤, 나는 양치질을 하면서 조종실로 걸어 나오던 중이었는데, 그때 텔레비젼 속 앤디 그리핀은 이렇게 호통을 쳤다. "너 이 놈 자식, 양치질 제대로 하지 않을래?"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저녁 식사 후 린다가 "아! 시원한 코카콜라 한 잔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다" 라고 혼잣말을 하자 텔레비젼 속 앤디 그리핀이 이렇게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코카콜라를 원하나? 그럼 와서 가져가 봐!" 이런 식의 사례들이 수도 없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간격 또한 점점 더 짧아졌다. 살아 움직이는 인물의 발화가 주는 직접 충격은 확실히 강도가 달랐다. 반면에 라디오로 야기되는 사례들은 날이 갈수록 심심해졌고, 큰 감흥을 주지 못했으며, 또 빈도마저 확연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선곡은 예전만큼 우리 생각을 조밀하게 파고 들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순간 이 노래를 틀어준다면 정말 신기할텐데?' 라고 우리가 먼저 지레 짐작을 해도 다른 엉뚱한 노래로 초를 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텔레비젼 속 앤디 그리핀이 껄껄 웃으며 어김없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것 봐. 라디오는 이제 한 물 갔다니까."       


블루 문


  그 무렵 우리는 푸르게 빛나는 달을 향해 비장한 전진을 하는 중이었다. 그 달이 미션의 목표였던 그 달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달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오래간만에 목표 의식을 가지고 조종간을 잡았다. 우리는 허니문을 만끽하는 한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블루문에 투자했다. 캡틴 스미스도 우리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그 또한 적잖이 긴장되고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푸른 달은 보이는 것만큼 가까이 있지 않았다. 가도 가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도록 좀처럼 가까워지는 느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라디오에서 로저스 앤 하트의 '블루 문 (Blue Moon)'이 다시 나왔다. 딘 마틴이 노래한 버전이었다. 처음 푸른 달이 우리의 눈에 띄였던 순간에 로저스 앤 하트의 아름다운 명곡이 흘러 나온 것은 누가 뭐래도 '듀크 엘링턴 이펙트'의 한 가지 사례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게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주 째 푸른 달은 우리의 머리 위에 내내 있었고, 그 사이 우리는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냥 우연이었다. 언제든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우연. 놀랍고 신기한 '듀크 엘링턴 이펙트'가 아니라. 그리고 그 곡을 마지막으로 라디오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고장 같지도 않았지만 남부 악센트의 진행자는 안녕이라는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어쩌면 가청취권을 벗어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가청취권?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에 끊기지 않았겠어?" 캡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가 입을 모아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막대 걸레인지 구두 주걱으로 그들을 밀어 깡통의 저편으로 보내버렸다. 서로 뒤엉킨 상태의 인형 사람과 사람 인형은, 빙글빙글 돌며 멀어졌다.


린다, 또 다시 한 번


  기약없는 미션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다. 목표가 보이지 않았을 때보다, 목표가 보이는 데 가까이 갈 수 없을 때 더 힘들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몸이 지쳐가면서 서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것 같다. 우리는 더 이상 행복한 두 쌍의 신혼 부부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 상상 속의 친구 부부를 둔 한 쌍의 신혼 부부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나, 린다, 그리고 앤디 그리핀이었다. 라디오의 비활성화 상태와는 별개로 텔레비젼은 멀쩡하게 잘도 동작했다. 없는 것 보다야 나았지만 그래도 시트콤 주인공에게 욕을 먹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앤디 그리핀이 원래 저런 캐릭터였어?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나는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내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린다의 주량이 꽤 늘어나기 시작했다. 창고에서 옮겨다 놓은 위스키를 습관처럼 홀짝거리더니 기어코 무언가에 취해있는 시간과 무언가에 취해있지 않은 시간을 비교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기 넘치던 눈은 낡은 항구 도시 어시장의 좌판 위 생선의 그것과 비슷해졌고 건강하고 탄력있던 피부는 탁하고 푸석푸석해졌다. 아름답고 풍성했던 금발도 빛을 잃고 오래된 구리선 같은 눅눅함을 띄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집안 내력


  사랑하는 여자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매력을 잃어버린 것만큼 남자를 화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역사상 수많은 남자들이 이러한 비극 앞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대처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집착, 인내, 무관심, 냉대, 외도…… 그리고 폭력.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버지도 마지막 과였다. 그러니 내가 린다에게 무력 시위를 하게 된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지 모른다. 집안 내력이고 유전일 뿐이니까. 취해서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은 마치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은 별처럼 보였다. 그건 슬펐다. 허나 알코올이 핏줄을 타고 흐르는 동안에 그녀가 뱉는 경솔한 말이나 상스러운 행동 거지는 뼈대 있는 엄격한 남부 백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나를 분노케 만들었다. 그렇게 손찌검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물론 후회했다. 예전의 그녀가 그리웠다. 세상에서 제일 말도 안되는 변명이지만, 그리워서 때리고 또 때리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결혼할 무렵의 밝고 상냥하고 건강한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런 개소리를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구먼!" 라고 캡틴 스미스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찰흙을 친 것처럼 캡틴의 얼굴이 움푹 파였다. 자세히 보니 그 바람에 캡틴의 오른쪽 눈알이 뒤로 넘어간 것 같았지만 딱히 미안하지는 않았다.      


라디오, 또 다시 한 번


  이따금 라디오가 그리웠다. 아니, '이따금'보다는 '자주'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아니, '자주'보다는 '항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노래와 함께일 때 우리는 이렇지 않았다. 하루 하루가 뮤지컬 같았고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쇼 툰으로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디오가 사라진 후 '듀크 엘링턴 이펙트'는 더 이상 놀랍고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이죽거리며 저주를 퍼부을 때 비슷한 상황이 텔레비젼에서 연출되는 정도였자. 우리가 서로에게 욕을 퍼불 때, 텔레비젼 속 앤디 그리핀이 똑같은 욕을 동시에 말하는 정도였다 (더 심한 욕을 하면서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는 경우도 있었다). 살림을 부수고 던질 때 텔레비젼 속에서 동시에 뭔가를 던지고 부수고 깨는 소리가 나는 정도였다. 그건 우리가 사랑했던 '듀크 엘링턴 이펙트'가 아니었다. 폴터 가이스트? 뭐 그딴 거 아닐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직도 블루 문은 우리의 머리 위에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별무리는 유령처럼 음산했고 이 여행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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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린다와 나는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유일한 선택이자 최고의 선택 같았다. “적어도 우리들 중 누군가는 미션에 성공했군” 이라고 캡틴 스미스가 말하는 듯 했다. 그 무렵 깡통은 상당히 넓어져 충분히 신혼 방을 꾸밀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깡통이 넓어지는 만큼 창고도 넓어졌다. 넓어진 창고에는 점점 더 많은 물건들이 쌓여갔다. 우리는 힘을 합쳐 필요한 물건들 옮기고 방을 꾸몄다. 그렇게 결혼 날짜가 다가왔다. 주례는 캡틴 스미스가 봐주기로 했다. 최고의 선택은 아니지만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 밖에도 캡틴 스미스는 결혼식 당일 사회와 베스트 맨과 메이드 오브 아너를 겸해야만 했다. “너희의 결혼식이 간촐하여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몸져 누울 뻔 했어.” 죽을 상을 하고 있는 그를 보자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편 '듀크 엘링턴 이펙트'는 결혼식 도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린다와 내가 입을 맞추려고 하니 라디오 저 편의 세계에서도 우리에게 축전을 보냈다.

- 해리 루비, 버트 칼머, 오스카 해머슈타인 2세의 곡입니다. '어 키스 투 빌드 어 드림 온 (A Kiss to Build a Dream On)' 들어보시죠. 1951년 영화 <더 스트립>에서 미키 루니와 윌리엄 더마레스트가 부릅니다. 


  우리가 춤을 추려는 순간에도 '듀크 엘링턴 이펙트'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 오늘은 어쩐지 이 곡을 틀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제롬 컨의 '더 웨이 유 룩 투나잇 (The Way You Look Tonight)'입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목소리로 보내드립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노래에 맞춰 서로를 안고 천천히 홀을 돌았고 서로의 눈동자 안에서 따뜻한 미래를 보았다. 비록 세상은 차갑고 미션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와 함께 로맨틱한 분위기가 잦아들즈음 주례 겸 베스트 맨 겸 메이브 오브 아너인 캡틴 스미스는 짖궂은 농을 던졌다. “무드 적당히 잡고 빨리 방이나 잡지. 깡통이 넓어져 빈 방도 많던데.” 라디오까지 어김없이 장단 맞춰 거들었다.

- 바로 이어드립니다. 엘라 피츠제럴드가 부릅니다. 콜 포터의 '렛츠 두 잇, 렛츠 폴 인 러브 (Let's Do It, Let's Fall in Love)'.


겟 해피


  우리는 엄청난 피로연을 치뤘다. 정신없이 먹고 마시고 흔들고 피웠다. 뭘 먹었는지, 뭘 마셨는지, 뭘 흔들었는지, 뭘 피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만 정신이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제복과 계급을 지우고 마주한 린다는 정말로 매력이 흘러 넘쳤다.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는 그녀에게 샴페인을 몇 잔 권했다. 그녀의 코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손을 잡아 다시 홀로 이끌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블루스나 폭스트롯이었다. 하지만 라디오는 뜻밖에 콜 포터의 '렛츠 미스비헤이브 (Let's Misbehave)'를 선물해주었다. 익살스러운 리듬에 맞춰 우리는 장난스럽게 춤을 추었다. 우리를 옭아매던 의무, 도덕, 관습이 한 겹씩 벗겨져 나가는 기분이 더없이 유쾌했다. 거품 쏟아지는 샴페인 병을 흔들었다. 폭죽을 터뜨렸다. 흥분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라디오의 선곡은 해롤드 알렌의 '겟 해피 (Get Happy)'로 이어졌다. 


Forget your troubles, come on get happy

You better chase all your cares away

Shout Hallelujah, come on get happy

Get ready for the judgment day


  상황에 어울리지는 곡은 아니지만, 그래 행복해지자, 정신없이 흔들었다. 캡틴 스미스의 무중력 댄스에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처음엔 수줍어 하던 린다도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우리 네 사람의 얼굴이 만화경처럼 돌아갔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먹고 마시고 흔들고 피웠다. 그리고 '겟 해피'를 악을 써가며 따라 불렀다. 겟 레디 포 더 저지먼트 데이! 겟 레디 포 더 저지먼트 데이! 겟 레디 포 더 저지먼트 데이!


캡틴 스미스, 다시 한 번


  꿈같은 신혼이 이어졌다. 우리는 더욱 더 부지런하게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서 깡통 안을 꾸몄다. 무채색을 걷어내고 무지개를 입혔다. 차츰 지구에서 생활하던 시절의 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꽃이 자랐다. 누구도 티타늄 알루미나이드로 포장된 고철덩이 안에 이렇게 생기가 돌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 결점은 캡틴 스미스였다. 우리도 하고, 새도 하고, 벌도 하고, 심지어 교육받은 벼룩도 한다는 사랑을 그 혼자만 못하고 있었다. 린다는 창고를 뒤져 마네킹을 찾아냈다. 인디언 원주민들이나 입을만한 옷을 한 벌 꺼내와 입혔고 검정색 가발을 씌운 다음에 정성껏 화장을 시켰다. "이 숙녀 분의 이름은 포카혼타스에요." 나는 물었다. "갑자기 웬 포카 혼타스?" 린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포카혼타스의 짝이 원래 캡틴 스미스에요. 캡틴 존 스미스. 어릴 때 그림책도 안 읽었어요?" 어려서 그림책도 안 읽긴 했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상관없었다. 그리하여 캡틴 스미스 또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으니까. 신부는 포카혼타스, 베스트 맨은 나, 메이드 오브 아너는 린다였다. 우리는 진심으로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를 축복해주었다. 그들은 서로 뒤엉켜 빙글빙글 돌며 깡통의 이 편 끝에서 저 편 끝까지 왕복 운동했다. 우리도 하고, 새도 하고, 벌도 하고, 심지어 교육받은 벼룩도 한다는 사랑을 이제 그 또한 할 수 있게 되었다. 라디오의 축복도 이어졌다.

- 콜 포터의 '렛츠 두 잇, 렛츠 폴 인 러브 (Let's Do It, Let's Fall in Love)'. 이번엔 엘라 피츠제럴드의 목소리와 함께 합니다.


텔레비젼


  깡통의 확장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평소에도 조금씩 커지는 것 같았고 (정확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라디오에서 '잇 돈 민 어 띵, 이프 잇 에인 갓 댓 스윙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이 나오면 더 빨리 커지는 것 같았다. 그와 비례하여 창고의 면적도 날로 늘어났고 늘어난 만큼 새로운 물건도 발견되기 시작했다. 없던 물건이 생긴다고? 이게 말이되나? 언뜻 이해는 안되지만 아무렴 어때. 스윙을 가진 시절에는 어떤 일도 있을 법한 행운처럼 느껴지는 걸.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창고 구석의 낡은 상자를 발견하였다. 텔레비젼이었다. 발이 네 개 달리고 아래 몸체가 두툼한 흑백 텔레비젼. "빨리 켜 봐." 조종실 한 구석에서 콘센트를 찾아 플러그를 끼웠다. 거짓말처럼 켜졌다. 그리고 <앤디 그리핀 쇼>가 나왔다. 세상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통로를 찾은 기분이었다. "여기가 어딘데 텔레비젼 신호가 잡히지?" 내가 물었다. "여기가 어딘데 라디오 신호는 잡혔는데요?" 린다가 대꾸했다. 하긴 그렇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별똥별이 물고기 떼처럼 흘러가는 곳. 린다가 나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왔다. 캡틴 스미스와 포카 혼타스도 뒤엉켜 빙글빙글 깡통의 앞편으로 흘러왔다. "저게 달이 아닐까?" 내가 물었다. "어떤 거요?" 린다가 물었다. "저 파란 거." 내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랗고 파랗고 둥근 별 하나가 아름답고 위험하게 반짝거렸다. 만약 그것이 정말 달이라면, 우리가 닿고자 했던 바로 그 달이라면, 정처없이 흘러 흘러 온 우리의 미션도 끝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푸른 달을 목전에 둔 바로 순간 또 한 번의 '듀크 엘링턴 이펙트'가 일어난 것은 좋은 징조였을까? 아니면 나쁜 징조였을까? 

- 멜 토메가 부릅니다. 로저스 앤 하트의 '블루 문 (Blue Mo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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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다시 한 번


  나는 여성의 머리칼이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많은 남자들이 그러할 것이다. 더구나 나는 머리가 굵어진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군인 아니면 군인 비슷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만 지냈다. 여덟 달 정도 머리칼을 다듬지 않으면 어느 정도의 길이가 되는지 상상할 재간이 없었다. 솔직히 그 무렵까지도 나는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마저 종종 잊고 지내기 일쑤였다. 남자처럼 말하고 행동하길 강요받는 우리 직종의 특성상 여성성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밀폐 공간에 단 둘이 남겨진 남녀'라는 식의 긴장감 따위가 없었던 것도 같다. 깡통이 워낙 좁았던 탓에 의도치 않게 서로의 몸이 닿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제복과 제복 사이에서는 어떤 짜릿한 전류의 흐름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린다의 눈부신 머리칼이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이 부분은 약간 윤색된 기억임을 인정한다. 그 무렵 우린 매일 머리를 감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므로)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흔들기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눈치없는 주둥이를 멈추는 것만이 한 박자 늦었을 뿐이었다.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캡틴 스미스 역시 놀라서 하얗게 질린 표정이었다.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깡통, 다시 한 번


  신나는 뚜아 뚜아 뚜아로 시작된 변화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린다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거추장스러운 제복과 베레모를 벗기로 결정했는데 (물론 이 결정에 대해 우리의 상사인 캡틴 스미스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발언권이 없었다) 편하고 자유로운 옷을 입기 시작하자 그녀가 분명 나와는 다른 별에서 온 존재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대할 때 조심스러워졌고 한편으로는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둘째는 깡통이었다. 여러 번 이야기 했던 것처럼 그 망할 놈의 우주선은 모양만 괴상한 게 아니라 세 사람이, 혹은 두 사람과 고 죽은 캡틴 스미스 대위가 나눠 쓰기에 너무 좁고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스윙을 갖게 되면서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 성장하기라도 하는 듯 용트림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조금씩 자라났던 것이다. 뿌빠라 띠띠 뿌빠빠!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색소폰 불듯 깡통에 바람을 불어 넣어 부풀리기라도 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뿌빠라 띠띠 뿌빠빠! 단칸방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방 두 개짜리로 변했다. 뿌빠라 띠띠 뿌빠빠! 방 두 개가 방 네 개가 되고 다용도실과 창고까지 생겼다. 뿌빠라 띠띠 뿌빠빠! 조종실도 몰라보게 넓고 쾌적해져 이젠 기지개를 펴다 서로의 어깨를 치는 일도 없어졌다. 뿌빠라 띠띠 뿌빠빠! 캡틴 스미스의 왕복 거리도 상당히 늘어나서 자연스럽게 막대 걸레나 구두 주걱을 자주 사용할 필요도 없어졌다.


정의 내리기


  참,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사이에 린다와 내가 골몰하던 일이 있었다. 바로 그 듀크 엘링턴과 관련된 현상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창고에서 티 테이블과 스툴 두 개를 꺼내왔다. 꽃이 그려진 주전자와 찻잔 두 개도 꺼내왔다. 린다는 꽃병에 꽃을 꽂고 듬뿍 물을 주었다.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이 현상의 성격을 하나 하나 규정해 보기로 했다.


* 말하자면 '듀크 엘링턴 이펙트'란 이런 것이다.

  1.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어떤 것]이 갑자기 머릿속에 팟 하고 떠올랐다. 

  2.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3. 그런데 일정 시간이 (짧게는 몇 초에서 어쩌면 길게는 며칠 내에) 지난 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곳(이를테면 라디오)으로부터 그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튀어 나온다. 

  4.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어쩌면 너희는, 그저 심심하고 할 일이 없어 별 것도 아닌 일을 별 거나 되는 일처럼 포장했는지도 몰라.” 캡틴 스미스의 눈동자는 꼭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앞서 언급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눈을 뜬 상태로 깡통 안을 떠다니고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별 일 아닌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듀크 앨링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고 '생각'하거나 혹은 꺼낼 '의도'를 가졌던 것이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경로로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경로라고? 항상 그런 식이지!” 저만치 멀어졌다가 우리 조종석 쪽으로 다가오는 캡틴 스미스의 냉소적 표정에서 그런 의심을 읽었다. 아니야. 하지만 그때만큼은 캡틴 스미스가 틀렸던 것 같다. 가만 보면 이런 기이한 우연과의 조우는 일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다. 세계는 언제나 별 의미 없이 던진 말에 반응을 보이기 마련 아니던가! 우리가 그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기 전에도 무수히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는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자 더 이상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 내리기가 필요했다. 우리는 이 현상이 발견된 첫 번째 순간의 사례를 기리는 차원에서 '듀크 엘링턴 이펙트'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무수한 반복


  세상 일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 아닌가. 일단 그렇게 멋진 정의를 내리고 멋진 명칭을 붙여주고 나니 더 많은 사례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란 말이다. 우리가 '파리의 아메리카인'에 대해 뜬금없이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자니 라디오에서는 조지 거쉬윈의 '아워 러브 이즈 히어 투 스테이 (Our Love Is Here to Stay)'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싱싱한 체리를 배달시켜 먹으려는 찰나에는 레이 헨더슨의 '라이프 이즈 저스트 어 보울 오브 체리스 (Life Is Just a Bowl of Cherries)'의 차례였다. 우리가 눈부신 항성의 근처를 지나가려는 찰나에는 듀크 엘링턴의 '아임 비기닝 투 씨 더 라이트 (I'm Beginning to See the Light)'의 화답이 이어졌다. 라디오는 이제 우리의 일부였고 우리가 라디오의 일부이기도 했다. 점점 더 빠르게 반복되었다. 3주 간격이 2주가 되고, 2주 간격이 1주가 되었다. 나중에는 하루에도 한두 건씩 벌어졌다. 심지어 나와 린다가 말을 꺼내는 모든 것들이 '듀크 앨링턴 이펙트'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우리는 기뻤다. 즐겁고 신기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 한 마음이라는 감정, 그것은 곧 세상 모든 남녀들의 예정된 방향으로 흘러갔다. (계속)

시즌 15, 에피소드 185 (2014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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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Y.J.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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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깡통에 라디오가 달려있던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알링턴 우주관제센터가 대꾸를 하든 말든 라디오만큼은 문제 없이 수신되었기에 우리는 여지껏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캡틴 스미스의 차가운 몸이 깡통 안을 떠 다니는 상황에서 말이다. 사고 당시 캡틴은 목이 부러져 즉사했는데 우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둥둥 떠 다니는 채로 둘 수 밖에. 그러다 너무 가까이 오면 구두 주걱이나 긴 막대기로 밀어서 되도록 사람 없는 쪽으로 보내기는 했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라디오는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어느 채널이었는지 모르겠다.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진행자인지도 모르겠다 (남부 악센트이 상당히 억센 남자였다). 선곡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노래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대부분이 팝 스탠다드(Pop  Standards) 혹은 그 모태였던 쇼 툰(Show Tune)이어서 마치 이십 년쯤을 거슬러 올라가 살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요즘 최신곡이라고 할 만한 로큰롤을 위시하여 60년대 노래는 단 한 곡도 나오지 않았다. 

그레이트 아메리칸 송북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린다도 그런 음악의 팬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롤링스톤즈의 광팬이었다 (누가 아니었겠는가!). 발사 며칠 전까지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열린 그들의 투어 공연장에 가서 신나게 흔들었던 몸이었다. 린다는, 굳이 편을 가르자면 포크록, 그러니까 밥 딜런쪽이었다. '라이크 어 롤링스톤 (Like a Rolling Stone)'이나 '블로잉 인 더 윈드 (Blowin' in the Wind)' 같은 노래가 나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푸념과 한탄을 하고는 했다. 몇 번은 우리끼리 장단을 맞춰가며 불러보기도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닥 흥이 나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그럭저럭 라디오에 적응도 되었고 미처 몰랐던 팝 스탠다드에 대한 애호마저 생겼던 것 같다. 로저스 앤 하트, 콜 포터, 어빙 벌린, 해롤드 알렌, 조지 거쉬인 등등. 그야말로 미국 대중음악의 골든 에이지를 통째로 복습하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엔가 갑자기 린다가 이런 말을 했다. "소위님은 듀크 엘링턴을 좋아하십니까?" (정확히 기억하는데) 그때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오! 듀크 엘링턴! 그의 곡들도 모두 훌륭하지! 참! 그런데 아직까지 그의 곡만 한 번도 나오지 않았네! 귀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듀크 엘링턴

  놀랍게도 그 순간 라디오에서 듀크 엘링턴의 '테이크 디 "에이" 트레인 (Take the "A" Train)'이 천천히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린다도 깜짝 놀랐다. 캡틴 스미스의 얼굴도 유난히 창백한 것이, 그 또한 이 절묘한 우연에 깜짝 놀랐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깡통이 출발하고도 거의 석 달 남짓. 우리는 주구장창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로 지냈지만 듀크 엘링턴의 곡이 나온 건 정말로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니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사이 콜 포터의 '비긴 더 비귄 (Begin the Beguine)'이나 어빙 벌린의 '하우 딥 이즈 디 오션? (How Deep Is the Ocean?)'이나 해롤드 알렌의 '컴 레인 오어 컴 샤인 (Come Rain or Come Shine)'같은 곡들은 백 번도 더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과연 우연일 뿐일까? 하필 우리가 듀크 엘링턴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순간에 듀크 앨링턴의 곡이 나온 것이? 그렇다. 린다와 나는 이 특별한 사실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두 번째 사례

  물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 현상을 애써 포장하거나 대단한 개념인 양 정의할 생각은 없었다. “어쩌다 한 번 발견된 우연마다 '무슨 무슨 효과'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다면 사전이 기차만큼 길어지겠지 않겠어?” 캡틴 스미스의 지적이 옳았다. 신기했지만 거기까지. 다시 우리는 일상에 파 묻혔다. 그래봐야 끝도 없는 별 구경 아니면 서로 시시콜콜한 잡담을 주고 받는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두 번째 듀크 엘링턴 이펙트가 발견된 것은 한 달 후였다.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나는 것은 이 대목부터다.

 "소위는 카라반이라는 걸 들어본 적이 있나?"라고 내가 물었다. 

 "캠핑카 말씀이십니까?"라고 린다가 답했다. 

 "그렇네. 요즘에야 주로 이동식 주택이나 캠핑카를 그렇게 부르는데 아주 옛날에는 말이야. 낙타 같은데 짐을 실어 이동하는 상인 집단을 의미했다고 하더군"이라고 내가 대꾸했다. 

 "아, 그렇습니까?"는 린다의 반응이었다. 

 "아무튼 우리 깡통이 차라리 카라반 같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네. 어차피 이렇게 지내야 할 거라면 최소한 카라반 같은 구색이라도……." 바로 그 말을 끝맺기도 전에 불쑥 라디오 진행자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어보시죠. '카라반(Caravan)'입니다.

  나는 린다를 바라보았고 린다는 나를 바라보았다. 캡틴 스미스도 서둘러 우리쪽으로 흘러왔다. 우리 중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슨 뜻인지는 모두가 알았다. 기억이 새로워졌다. 맞아. 한 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세 번째 사례

  두 번의 신기하고 흥미로웠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현상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제는 익히 아시겠지만, 미션은 애저녁에 파토가 난 듯 보이고 알링턴인지 달링턴인지 우주비행관제센터와의 연락은 두절 상태였으므로 항상 그러하듯 우리는 수다나 떨고 있었다. 이따금 부유 중인 캡틴 스미스의 차가운 몸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면서 말이다. 그러던 중에 세 번째 사례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사례로부터 3주 후의 일이다. 며칠 사이에 조니 머서의 '스카이락 (Skylark)'이 가수만 바꾸어 열 번쯤 나왔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군 항공대에 닐 암스트롱이라는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도 우리와 비슷한 임무를 준비했다던 것 같더군. 우리처럼 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라는 말을 했다. 

 "저도 이름은 들어봤어요. 루이 암스트롱" 린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자네가 말한 사람은 재즈 가수 루이 암스트롱이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일이 벌어졌다. 라디오 진행자가 특유의 경망스러운 남부 악센트를 뽐내며 이렇게 떠벌렸던 것이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로 보내드립니다. 듀크 엘링턴의 '잇 돈 민 어 띵, 이프 잇 에인 갓 댓 스윙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3주 전, 그리고 다시 그 한 달 전의 기억이 다시금 깨어나기 시작했다. 맞아!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지! 코 끝이 간질간질했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설레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기분도 좋았다. 듀크 엘링턴의 연주와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를 따라 신나게 따라 불렀다.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내친 김에 일어나 몸을 흔들었다. 스윙 리듬에 맞추어.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뚜아. 피닉스에서 롤링 스톤즈 공연장에 갔던 이후로 그렇게 신이 났던 건 처음이었다. 린다의 모습도 신선했다. 우린 서로의 그런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때마침 린다의 베레모가 벗겨졌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금발이 중력을 시험하며 출렁거렸다. 있지도 않은 중력을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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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린다와 내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1967년. 에드워즈 공군 기지. 화창한 날이었다. 구보 중인 공군 훈련병들의 힘찬 구령 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왔고 모하비 사막에서 불어온 모래 바람은 뺨을 간지럽혔다. 린다의 머리칼은, 곱슬이었고, 금발이었고, 소년처럼 짧았다. 지금 남아있는 기억은 이미지가 대부분이어서 흡사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경례를 올렸고 (내가) 경례를 받았다. 딱딱한 차렷 자세로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다가 어디론가 이동했다. 벽돌 건물 2층의 복도 끝 방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경례를 올려야 할만큼 높고 늙은 사람을 만났다. 별이 한 개라고 했던가? 두 개라고 했던가? 아마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녀와 내가 파트너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된 때가. 

  그 후로 우리가 헤어려야 했던 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 늙고 높은 사람의 모자에 박혀있던 별의 수가 몇 개였는지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다섯 개였다고 하더라도 상관 없었다. 우리 눈 앞을 흘러가는 별은 훨씬 많고도 많았다. 그깟 별! 다섯 개 정도는 창 밖으로 손 한 번 내밀면 한 줌에도 쥐어질 것이었다. 처음에 린다는 반짝거리는 별이 좋다고 말했다. 이제는 지겨워한다. 그럴 만도 하다. 잘난 임무는 그 이후로 10년째 계속되는 중인데 지금까지도 창 밖으로 보이는 건 별 하나, 별 둘, 아니면 끝도 없는 별의 무리이기 때문이다. 젠장, 쉽게 말해서 별 말고는 본 게 없다. 정말 별 꼴 다 보겠다. 겨우 이 짓을 하려고 그 고된 훈련을 받았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임무

  그 잘나고 대단한 임무. 우리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우리의 임무는 달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셈법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미 달에 도착했어야 했다. 적어도 9년 11개월 27일 전에는 도착했어야 했다. 그리고 부지런히 다시 돌아갔어야 했다. 지구로.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말이다. 허나 우리의 부메랑은 터닝 포인트를 찾지 못한 채로 아직까지도 앞으로, 앞으로, 끝없이 날아가고 있다. 알링턴 우주관제센터와의 연락은 아주 오래 전에 끊겼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린 것도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이제는 달에 가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건지도 잊어버렸다. 매뉴얼이든, 미션 로그든, 일기장이든 어딘가 적혀있겠지만 찾아보기도 귀찮고 그럴 이유도 없다. 

깡통

  우리는 그걸 깡통이라고 불렀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우주 비행선 말이다. 이유인 즉, 처음 보는 누구라도 캠벨 수프의 깡통을 떠올릴만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봐도 그건 놀라운 속도로 우주 공간으로 솟아오를 만한 모양은 아니었다. 나는 물리학은 잘 모르지만, 수프 깡통 모양이 공기 저항에 참도 좋은 디자인이겠다는 것을 짐작할 만큼의 상식은 있었다. 깡통의 내부는 상당히 비좁았다. 처음에는 딱 세 사람의 우주 비행사만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머지 공간은 죄다 기계 덩어리와 계기판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심지어 우리는 거기 달린 버튼을 다 숙지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함은 나, 린다, 그리고 선임 비행사인 스미스 대위를 말하는 것이다.  

캡틴 스미스

  캡틴 스미스. 그는 이 미션에서 가장 상급자였다. 탄탄한 몸매와 호감가는 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과묵한 남자였다. 모의 비행을 포함한 교육 훈련 기간 중 그가 우리에게 (여기서 우리라고 함은 린다와 나를 말하는 것이다) 던진 농담이라고는 딱 한 가지 뿐이었다. "내 이름은 스미스. 스위스와 혼동하지 말게나." 일부러 웃어주기도 힘든, 그런 충격적인 유머감각을 가졌음에도 우리는 (여기서의 우리도 린다와 나를 의미한다) 그가 그립다. 그의 부재는 한 자리의 텅 빈 좌석만큼이나 우리에게 큰 공허함을 남겼다. 그가 있어도 미션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있다고 우리에게 웃을 일이 하나 더 늘어나지야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립다. 무척.

사고의 전말

  깡통이 출발할 때 캡틴은 좌석 벨트를 매지 않은 상태였다. 그를 대신해 변명을 하자면, 그의 좌석 벨트가 고장난 상태였던 것 같다.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을 때 뒷 좌석에서 (그 자리가 상석이다) 캡틴이 요란스럽게 꼼지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평소 그의 성품과 계급에 비추어볼 때 어울리지 않는 부산스러움이었다. 뭐랄까, 그는 항상 기품있고 절도있게 행동하는 군인의 표본이었기 때문이다. 린다가 물었다. "대위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제야 나도 돌아보았다. 캡틴과 눈이 마주쳤다. 그 표정과 눈동자는 영원히 있지 못할 것이다. 얼굴의 모든 근육이 F로 시작하는 네 글자 단어를 격렬하게 아우성치는 듯 했기 때문이다. 서둘러 알링턴 우주관제센터에 연락을 취해 발사를 늦추고자 하는 찰나에 깡통이 발사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자리를 박차고 솟아오른 것은 깡통만이 아니었다. 휴, 그렇게 가는 거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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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날씨가 많이 흐리다. 밤처럼 깜깜한 낮이다. 바로 이런 날 태양광 자동차가 애물단지가 되는 일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의 애마 솔라 파르네(Solar Farne)에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스사우던 대학의 연구진과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거듭해왔던 바 있다.


- 어이, 프라이데이 좀 내려서 밀어봐!

  프라이데이와는 방글라데시 남부 해안을 돌다가 만났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벵골어로 추정되는 해괴한 말을 쉬지 않고 지껄였다. 프라이데이의 이름은 원래 프라이데이가 아니었다. 아마 나름 이름이 있기는 했을 것이다. 허나 그의 진짜 이름을 발음하기 위해 노력까지 기울일 생각은 없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고용인, 그는 피고용인인 것이다. 마땅히 나의 언어와 나의 문화를 존중하여야 할 필요가 그에겐 있었다. 그래서 프라이데이라고 불렀다. '따리 따리'나 '아쓰떼 아쓰떼'가 아니라 프라이데이라고 불렀다. 금요일에 만났기에 지어준 이름이 프라이데이다. 우리가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만났다면 그의 이름은 달라졌을 것이다.

​  내가 그를 프라이데이라고 불렀을때 비로소 그는 내게로 와서 잡역부가 되었다.

​  허드렛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기에 나는 그를 조수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에게 75 센트의 주급을 주기로 했고, 영어를 배우려는 가상한 노력까지 보여준다면 주당 1 달러까지 인상을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금은 2010년이 맞고, 달러화 가치는 여러분이 아시는 그대로다). 그는 내게 감사를 표했다. 노스사우던의 따지기 좋아하는 책벌레들에겐 절대 기대할 수 없는 싸가지가 프라이데이에게는 있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걸 모르는 멍청이들이 종종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 이봐, 엄연히 착취아니야? 조금 심하단 생각이 드는데?


  당연히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 공짜 세계일주에 먹여주고 재워주고 심지어 공부까지 시켜주는데 왜 내가 쟤한테 돈까지 줘야되지? 게다가 태양광 자동차를 타 볼 기회까지 줬는데. 감지덕지아닌가?

  내 말이 지나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그러는거다. 자기 나라 문자도 읽지 못하는 스무살짜리 방글라데시 청년을 위해 내가 얼마나 더 베풀어주길 원하는가. 쉽게 생각하자. 이 장대한 여행을 마친 다음을 생각해보라. 프라이데이는 그의 고국에서 유일하게 세계일주를 해본 사람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태양광 자동차를 타고 달려본 사람이 될 것이다. 살인적인 출생률을 자랑하는, 인간 많기로 유명한 방글라데시에서 프라이데이는 아주 특출나고 유명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 이익을 감안할 때 어찌 내가 그를 위해 해준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감히 누가 내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에이, 또 구름이 밀려온다. 악셀을 밟아대도 속도가 현격하게 느려지는게 몸으로 느껴진다. 이럴 때는 다른 도리가 없다.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어야지.
- 어이, 프라이데이 좀 내려서 밀어봐.

  프라이데이 없었으면 어쨌을까 몰라. 나 혼자 밀고 뛰고 하려면 십년 감수 했을텐데.


*



  프라이데이는 여러모로 쓸모 있는 하인이다. 힘이 좋아 차도 잘 밀고 세차도 기가 막히게 잘한다. 적도 부근의 기후 아래서도 멀쩡하게 일만 잘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미치고 팔짝 뛸 날씨인데도 말이다. 남유럽 정도의 '정상적인' 날씨만 이어져도 그를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혼자서도 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동네에서는 답이 없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볕이 강한데다가 습하기까지 하다. 땀이 줄줄 흐른다. 밖에 나가서 작업할 사람이 따로 필요하다. 자외선을 반사하고도 남을 억센 피부를 가진 인종의 도움이 필요하다.

  We are the world. We are the children.
​  We are the ones who make a brighter day.

​  서로 서로 부족분을 채우며 돕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라이데이는 사막의 뜨거운 날씨도, 중동의 까칠한 모래바람도, 동남아의 찐득찐득 춥춥한 날씨도 견뎌낼 줄을 알았다. 사막 한 가운데서도 묵묵히 '솔라 파르네'를 밀기도 했다. 갠지스 강에서 빨아온 손걸레로 달아오른 집열판을 닦기도 했다. 갯펄 한가운데서도 몽키 스패너를 입에 물고 차 밑에 기어들어갈만큼 의욕적이기도 했다. 아주 성실한 친구다. 감명받았다. 이대로라면 주급을 1불씩 쳐줄 의향도 있다. 사실 스폰서에겐 프라이데이를 어시스턴트라고 보고했다. 스폰서는 프라이데이의 통장에 주당 120달러씩 꼬박꼬박 입금해주었다. 프라이데이의 통장을 관리하고 있는 나는 거기서 먹여주고(총 1224식), 입혀주고(총 13벌), 재워주고(총 408박), 태워주고(총 63,478km), 영어 회화 공부까지 라이브로 시켜준 값을 제하고 월요일 아침마다 1불씩을 쥐어주었다. 그때마다 그는 항상 방긋 웃는 얼굴로,
- 땡큐
라고 말했다. 뿌듯한 순간이다. 이런 제 3세계 친구를 데리고 다니는 일은 솔직히 전시 효과랄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나쁘지 않다. 태양광 자동차 퍼포먼스는 각국 정부의 지대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솔라 파르네' 그리고 프라이데이가 도착하는 곳마다 취재진과 환영인파가 몰렸고 정치인과 정치인이 되고 싶어 안달난 학자들이 모였다. 그들은 프라이데이를 친구처럼 대하는 내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적당히 까무잡잡한 입술을 좌우로 넓게 벌리며 미소짓는 프라이데이의 얼굴은 훌륭한 외교적 효과를 발휘했다.

  We are the world. We are the children.
​  We are the ones who make a brighter day

  환경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진국과 개도국과 후진국의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는데 모두가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선진국에게는 선진국의 방식이, 개도국에게는 개도국의 방식이, 후진국에게는 후진국의 방식이 필요한 법이다. 대신 그러한 과정에서 후진국 사람들을 돕는 것은 선진국 사람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프라이데이에 대한 나의 배려처럼 말이다. 프라이데이는 모든 면에서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다. 포크와 나이프를 쓰게 된 것은 물론 이젠 수세식 변기도 자유자재로 이용한다. 말을 배우는 속도 또한 점차 빨라지고 있다. 여러분, 며칠 전 나의 테스트 드라이빙을 지켜보던 그가 이런 말을 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 캬! 솔라 파르네!
  그렇다. 짜식이 어느새 내 애마의 이름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

  우리는 여정의 마지막으로 동북아시아의 끝 일본에 도착했다. 여기서의 행사가 끝나면 배를 타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갈 예정이다. 일본인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우리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마치 관광객처럼. 일본 수상과 악수를 하고 여당 야당 대표와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민간 차원에서의 이산화탄소 배출 감소를 상징적으로 합의하는 총리의 친서를 그들에게 전달했다. 서구 컴플렉스를 가진 대표적인 나라답게, 그들은 한낱 일개 사회단체의 고문에 불과한 내게조차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다. 대단히 만족스러웠고 조금은 우쭐하는 마음도 있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  그러나 어느새 몰려온 먹구름에 한두 방울씩 비가 섞여 떨어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악셀을 밟아봐도 소용이 없었다. 어쩌지? 식은땀이 흘렀다. 말똥말똥 우리만 쳐다보고 서있는 저 구경꾼들을 다 어쩐다 말인가. 경외의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저들을 말이다. 이제와서 비온다고 못달린다면 너무 쪽팔린 일이 아닌가. 
- 어이, 프라이데이 좀 내려서 밀어봐.
- 어갠?
  프라이데이도 이젠 '어갠(Again)' 정도의 영어는 할 줄 알만큼 문명화가 되었다. 다만 기분이 좀 상했던 것은 그 귀찮아하는 표정이다. 쯧. 이쁘다, 이쁘다, 해주면 슬슬 기어 오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줄이야 진작에 알았지만 아주 괘씸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나는 프라이데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당장 내려서 밀어라. 셋 셀 동안 밀지 않으면 네 머리를 밀어버리겠다.
- 솔라 기찬네!
  어떻게 알았을까. 솔라 기찬네(Solar Guichanne)는 나와 노스사우던 대학 연구진이 개발 중인 태양광 자동차의 다음 버전이다. 맑은 날의 충전과 별도의 에너지 공급을 통해 흐리고 비오는 날에도 태양광 자동차의 동작이 가능하도록 개량한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슬슬 프라이데이 녀석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많이 키워준 것이 아닌가 몰라. 공짜 세계일주에 먹여주고 재워주고 심지어 공부까지 시켜줬던 것이 슬슬 후회가 된다. 예의 그 순진무구한 미소도 더는 곱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언젠간 이 놈이 내 뒷통수를 치진 않을까?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라는 옛말이 있는 것이다. 


*


​  내 이름은 ‘주세페 파스타 마치니’다. 줄여서 ‘주세피 P. 마치니’라고도 쓴다. 친구들은 날 그냥 친근하게 ‘쭈 ‘라고 부른다. 너희들도 그냥 나를 ‘쭈’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글쎄다. 아직 잘 모르겠다. 너희가 내 친군지 적인지 아직 판단이 안 선다. 친구 맞으면 이리 오고 아니면, 당장 썩 꺼져주었으면 좋겠다. (끝)


시즌 8, 에피소드 093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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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 내 이름은 ‘주세페 파스타 마치니’다. 줄여서 ‘주세피 P. 마치니’라고도 쓴다. 친구들은 날 그냥 친근하게 ‘쭈 ‘라고 부른다. 너희들도 그냥 나를 ‘쭈’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글쎄다. 아직 잘 모르겠다. 너희가 내 친군지 적인지 아직 판단이 안 선다. 친구 맞으면 이리 오고 아니면, 당장 썩 꺼져주었으면 좋겠다!

*


  난 세계일주를 하는 중이다. 직접 만든 태양광 자동차를 타고 세상을 한 바퀴 도는 중이다. 물론 세계일주를 하기에 훨씬 편하고 실용적인 교통 수단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확실히 태양광 자동차는 세계일주가 목적이라면 좋은 생각은 아니다. 그렇다, 여러분. 지금은 쥘 베른의 시대가 아니다. 제트기 같은 걸 빌리면 물리적 의미에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은 하루 안에도 끝장을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다. 이 모든 게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자전거로 대륙을 횡단한다고 해보자. 그의 목적이 횡단 그 자체일까? 마찬가지다. 여러분도 이게 어떤 의미를 지닌 일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태양광 자동차의 가능성을 널리 알리는 한편, 에너지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심각한 얘기를 해보자. 2010년 기준으로 세계 석유 소비량이 48억 TOE(석유환산톤, Tonnage of Oil Equivlent)에 이른다고 한다. TOE란 서로 다른 에너지원의 발열량을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가상단위다. 10의 7승 칼로리에 해당하는데, 사실 감이 잘 잡히지 않는 개념이기는 하다. 참고로 미국의 연간 석유 소비량이 8.8억 TOE이고 너희 한국이 1.0억 TOE 정도 된다고 하니 대강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수치가 십년 후 2020년이 되면 57억 TOE까지 늘어날 거라는 보고가 있다. 2020년의 총 에너지 소비량이 2000년 대비 최소 1.5배가 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미 지구에는 화석 에너지 자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석탄은 약 160년쯤, 석유는 약 40년쯤 정도면 고갈되고 말 것이다. 그런 심각성을 우리 모두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신문과 텔레비젼에서는 항상 뻔한 소리만을 한다. 면역된 사실, 면역된 공포. 언제부턴가 환경, 에너지, 이런 문제들이 일종의 오락거리가 되어버렸다. 어쩌다 신에너지 사업 따위가 화제에 오르기라도 해야 최소한의 엄살이라도 되는 상황이다.

  여러분도 알아두어야 한다. 문제가 정말 피부에 와닿아 느껴질 때쯤이면 그땐 돌이킬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  내가 태양광 자동차를 타고 세계를 돌겠노라 선언한 이유는 대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흔히 아직까지는 애로사항이 적지 않을 거라고 여겨지는 태양광 자동차, 그걸로도 세계를 한 바퀴 돌 수 있다면 어디든 쓰지 못하겠는가? 세계일주도 했는데 설마 출퇴근에 못 쓰겠는가? 세계일주도 했는데 설마 마트에 장보러 갈 때 못 쓰겠는가? 그렇다. 바로 그런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결코 변환 효율이나 충전량의 한계가 문제가 아니다. 기술적 요구가 충족되어도 결국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말짱 꽝이라는 말이다. 눈으로 보여주기 전까지 사람들의 생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란 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충분히 가능하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단지 누가 먼저 해 보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


  태양광 자동차의 원리는 간단하다. 태양의 빛이 전지판에 도달하여 전자의 흐름을 유발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100퍼센트 자연 본연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자연의 선물을 남김없이 활용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현재 가장 나은 방법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대안 자동차도 에너지 낭비를 피할 수는 없다. 어떤 대안 자동차도 이산화탄소 배출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대답해보라. 정말 환경을 생각한다면 과연 하이브리드카를 꿈의 자동차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이브리드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이제 현실을 직시할 때다.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욕심이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미봉책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이컵의 대안으로 재생 종이컵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일일이 머그컵을 들고다니는 걸 귀찮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 샴푸 대신 천연 친환경 샴푸를 사용하는 것은 기특한 선택이지만 그때문에 지구 어디에선가는 우림이 파괴되고 있을 수도 있다. 바로 그런 것이다. 100킬로의 폭주나 90킬로의 폭주나, 폭주는 폭주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감속이 아니라 근원적인 제동을 거는 방법이다.

  나는 태양광 자동차가 장차 교통 및 운송의 측면에서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기술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14개월 동안 세계 137개국을 돌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2009년 2월 27일에 시작한 이 여행은 2010년 4월 22일에 마무리될 것이다. 422일간의 여정이고 4월 22일은 지구의 날. 이 모든게 명확한 의미 아래 계획된 것이다. (계속)

시즌 8, 에피소드 093 (2007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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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이 말랐습니다. 우리는 휴게소에 잠시 차를 세우고 목을 축이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코카콜라를 마셨고 언니는 다이어트 중이라며 글라소 비타민워터를 마셨습니다. 언니가 물었습니다.
 
-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남자가 횡설수설하는데 상자를 타고 다니더니? 횡설수설하는데 상자를 안타고 다니면 다른 놈일 수도 있어.
 
- 다른 누구요?
 -
몰라? 이를테면 셜록이라던가.
 
- . 상자를 타고 다녀요.
 
- 그럼 닥터가 맞아.



  
간단한 맨손체조를 하고 나서 언니는 다시 파란색 아베오에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채웠습니다. 아직도 창고까지는 삼십여분 달려야 한다고 하더군요. 오랜만의 여행이라 피곤했습니다. 조금만 쉬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시트를 뒤로 편하기 밀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번째 질문 - <댁에게 있어 우리 컴패니언들은 어떤 존재인가?> 이어졌습니다. 언니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 타디스의 무서운 점은 말이야. 집과 차를 겸하고 있다는 부분이야.
- 그렇죠. 닥터는 있는 남자인 동시에 있는 남자인 셈이니.
- 인정할께. 나도 부분에 넘어갔어. 스무살때였나 스물한살때였나 첫번째 남자친구는 외딴 섬에 데려갔다가 배가 끊겼다고 좀스러운 뻥을 쳤었거든. 그런데 닥터는, 글쎄, 우리가 존재 블가능한 위성 <깊은 밤의 서정곡> 위에 있는데 이게 블랙홀 안에서 빨려 들어간 상태에서 타디스가 뜰래야 수가 없다고 뻥을 치더라고. 이건 스케일이 다르잖아
​  저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중력 스페이스 허리케인을 생각하면서요.
 
- 지금은 누가 기쁨을 누리고 있을까요?
 -
모르지…… 사라 코너?
 -
지금이야 행복할지 모르겠지만…… 과연 후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밖으로 비쩍 말라 비틀어진 나무들이 열을 지어 지나갔습니다
- 닥터는 말이에요. 무슨 기준으로 우리를, 그러니까 컴패니언들을 선택하는 걸까요?
-
생각엔 우리 안의 약한 부분을 공략하는 같아. 만약 놈의 관심사가 모험과 액션이라면 캠틴 하크니스와 같은 유능한 용사들과 다니는 편했겠지. 만약 놈의 관심사가 지식과 학문이라면 모건 프리먼과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겠지. 하지만 그의 선택은 대개 어린 아가씨들. 대개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살고 있고, 아직 커리어를 제대로 쌓지도 못했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하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란 말이야. 그러다 닥터를 만나고, 쏘고 뛰고 쏘고 뛰고, 휘몰아치는 아드레날린 속에 비로소 뭔가 바쁘고 중요하고 제대로 일을 하고있다고 느끼게 되면 감정적으로 약해진 상태에서 쉽게 넘어가는 거지.



- 마치 얘기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려요.
- , 마음 독하게 먹어야 . 나쁜 네가 아니야. 자식이지.
- 나쁜 것은 컴패니언을 버리는 방법이야. 너도 알겠지만. 한번도 솔직한 적이 없었어. 불가항력적인 사건처럼 포장을 했단 말이야.
- 저한테는 타임-볼텍스 네비게이터가 망가졌는데 필요한 부품이 단종되었다고…… 그래서 영원히 저의 시간대로 찾아올 없게 되었다고.
- 나한테는 어땠는줄 아니? 기억을 죄다 지워버리고. 우리 가족들을 찾아가 자기와 있었던 일을 기억하게 되면 머리가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해 버릴테니 조심들 해달라고 말했대. 기가 막히지 않니?
-
기억을 지워버렸는데 어떻게 용케 기억해내셨네요.
- 그러게 말이야.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 폭발은 개뿔. 그런데 우리 앞의 컴패니언들한테는 심했대. 다른 평행 우주에 가둬놓은 언니도 계시고, 죽은 걸로 위장하여 상까지 치루게 해서 아직도 닥터가 죽은 줄로만 아는 언니도 계셔.
- ! 사실이라면 정말 너무하네요.



*



 
바람을 쐬어야 같았습니다. 차에서 내려 걸었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씩 들고 쌀쌀한 강바람을 맞으며 걸었습니다불현듯 언니가 말을 꺼냈습니다.
- , 혹시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 기억나니?
-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요? 그럼요.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겠어요.
- 닥터가, ……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줬니?
-
어떻게 만지니까 약간 커지고 약간 단단해지고 약간 두꺼워지던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을 뱉고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 닥터가 너한테 그걸 맡긴 적도 있니?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니 얼굴도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하더군요.
- 이따금이요.
  
잠시동안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 언니는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 , 지금 우리 같은 얘기 하고 있는 맞지?



 
그러던 파란색 폴리스 박스를 발견한 정말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공중전화부스들이 늘어서 있는 사이에 혼자만 파란색인 박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언니는 눈을 비벼가며 의심하더군요. 역시 눈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발견했습니다. 얼굴은 다르지만 어쩐지 익숙한 느낌을 주는 남자 하나가 어린 여자애 하나와 프렌치 프라이를 입에 물고 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말입니다. 허무했고, 허탈했고,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쉽게 어처구니 없는 곳에서 만나질 수도 있다니 힘이 빠졌습니다. 타임-볼텍스 네비게이터가 망가졌다면서요. 그래서 다시는, 다시는 저의 세계를 들어올 없게 되었다면서요. 설령 돌아올 있어도 저를 다시 마주하게 되면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 그리고 모건 프리먼도 설명하기 어려운 패러독스가 발생한다면서요. 순간 그리움과 안타까움에 젖어있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저를 본래 그대로의 현실 -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공간에 데려다주기 위해서 치루었던 그의 희생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달도 지나지 않고서 그게 뻥이었음이 밝혀지다니요. 타임-볼텍스 네비게이터라는게 실제 있기나 겁니까? 뻔뻔스럽게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앞에서 저러고 다닌다니요.
- 쳐들어가서, 때려 잡아야겠지?
  
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습니다.
- 남자가 2~3년에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이제 알겠네요. (끝)


시즌 10, 에피소드 123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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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고속도로에서 빠져 국도를 달렸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번째 질문이 가능성이 높은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닥터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 말입니다.
 
- , 닥터가 알기는 안다고 생각하니?
 -
저보다는 많이 알지 않겠어요?
  
언니는 쿡쿡거리며 웃었습니다.
 
- 그래서 우리가 당한거야. 등신처럼.
- 설마, 그래도 명색이 닥턴데.
 
언니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 새끼 학위 확인해봤어?



 
뭐라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학위 확인해볼 생각을 못했었네요. 아무리 석박통합이다 학석박통합이다 학위를 남발하여 '백만박사양병설'까지 제기되고 있는 시대라지만, 당연히 학위가 있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설명의 절반이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자기도 무슨 얘긴지 모르는 것입니다. 까놓고 말해 그의 입은 작죄구나 다름 없습니다.
 
- 그러니까 쥐뿔도 모른다는 뜻이지. 실제 아는 없고 실제 하는 것도 없지. 단지 빨리 말하고, 많이 말하고, 광대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거야.
 
- 확실히 부정할 수가 없네요. 하지만 언니, 하지만 정말 닥터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일단 그는 타디스와 같은 굉장히 복잡한 타임 머신의 주인이잖아요. 그리고 그걸 다룰만한 능력과 지식을 분명 갖춘 남자이기는 하잖아요
- 오너 드라이버라고 자동차를 기술적으로 이해할까?
-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지만…….



- 이렇게 생각을 해봐. 네가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모습을 1960년대 사람들이 보았다고 말이야.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 사람 굉장한데? 외계인인가?' 하지만 진실은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휴대전화에 대해 몰라. 무선통신기술에 대해, 디스플레이기술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어. 우리가 아는 그저 '자라'이나 '유니클로' 'H&M' 같은 것들이지. 하지만 휴대전화가 맛탱이가 갔을 말이야. 다시 껐다 켜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단 사실은 알거든. 대강 사용할 있고 어느 선까지는 트러블 슈팅도 되지. 그것만으로도 1960년대 사람들 눈에는 신기할 꺼야. 어쩌면 우리가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말하기만 해도 놀라워 할꺼야. 단지 주말에 사러 가자는 얘길 하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야.



- 닥터는 우리보다 앞선 시간대의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앞선 시간대의 기술을 이해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단 말이러군요.
 
- 그렇지. 닥터가 '타임로드 테크놀로지'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리 저리 뜯고 만지고 있지만 그게 시대 문명 놈들에게는 정기 부동액 교체만큼 간단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니.
 
- 하지만 어쨌든 그것이 앞선 시간대의 기술이 맞기는 하다면 어쨌거나 상관없는 아닌가요? '닥터가 무엇을 안다' 혹은 '알지 못한다' 규정하는데 있어서 기술적 이해도를 중요한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보는데요.
 
- 문제는 이거야. 닥터, 시공의 주인, 권위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타임로드 테크놀로지'에서 나오는 것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고 설사 전혀 그의 판단이 필요하지 않은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들 앞에서도 그의 주둥이만 바라보게 되는 거야.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야.



*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습니다. <닥터란 남자는 도대체 뭐하는 자식인가?> 말입니다.
 
- 그게 문제죠?
 -
그가 맞는지 확신할 없으니까.
 
- 당연하죠. 우리는 다른 유니버스를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닥터처럼 방대한 차원에서 그림을 수는 없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 다시 말하면 오직 닥터만이 겪어 보았다는 뜻도 되지 않겠니? 무엇으로 증명할 있겠냐는 말이야.
 
- 결과요. 닥터의 선택은 항상, 아니 대개는 옳았어요. 그거 하나면 충분히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요?
 -
결과론이지. 닥터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결과가 많이 달라졌을까? 아닐 수도 있다고 . 아까도 말했지만 닥터는 상황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지 않아. 순전히 선험적으로 재단하고 있을 뿐이지. 문제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진술조차도 일관되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여 모순을 양산한다는 사실이야. 이를테면 이런 식이지.


1-1) 시간여행자도 평행우주만은 없다.
1-2) 시간여행자도 불의의 사고에 의해서는 평행우주에 있다.
1-3) 시간여행자도 어떤 평행우주는 있다.
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여행자가 절대로 없는 평행우주가 (이를테면 싫증난 ex-컴패니언을 가둬놓은) 있다.
1-5) 어떤 특정 사건을 분기로 갈라진 타임라인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우리와 똑같은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게 바로 평행우주잖아!)
결론이제 누구도 난장판을 수습할 없ㅅ엉ㅋ



2-1) 시간여행자는 과거의 사건에 개입하면 안된다.
2-2) 시간여행자가 개입하지 않을 없는 과거의 사건이라는 있다.
2-3) 시간여행자는 과거의 사건에 개입하기 마련이다.
2-4) 시간여행자는 과거의 사건에 개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여행자가 절대로 개입할 없는 과거의 사건이 (이를테면 싫증난 ex-컴패니언과 관련된) 있다
2-6) 설사 완전히 고정되어 명명백백하게 일어나도록 예정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은 다시 쓰여질 있다.
결론이제 누구도 난장판을 수습할 없ㅅ엉ㅋ  



 
부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조차도 저런 목록을 수십개는 작성할 있을 같았으니까요.
 
- 결론은 이거야. 닥터 자체가 패러독스고 동시에 패러사이트야. 비유가 아니라 이게 진실이지.
 
- 그렇긴 하지만 언니 말씀이 지나치신 같아요.
 
- 지나치다니 , 너는 결과적으로 닥터의 결정이 항상, 아니 대개 옳았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어떤 문제가 벌어졌을 닥터가 정확히 하고 있는지. 풀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하는 건지 말이야. 항상 보면 문제를 해결하는 닥터가 아니야. 우연 혹은 기계를 타고 내려온 다른 남자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고 아니?
 -
굿을 하는 것만 능사는 아니죠. 굿판을 짜는 능력도 능력은 능력이죠.
  
언니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 , 진정해. 닥터가 아주 제대로 세뇌시켰구나. (계속)


시즌 10, 에피소드 123 (2009년 12월)


WRITTEN BY
김영준 (Y.J. Kim)
Founder, Publisher, and Editor-in-chief
Reverse Fictioneering Laboratory
Pulp Fiction Center at Twilght Zone
(https://cliche0303.weeb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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