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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의 세계: 퍼펙트 크라임 (Crimen Ferpecto, 2004)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Re:view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4.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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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는 껍데기의 세계다. 가짜가 진짜를 압도한다. 가짜를 진짜처럼 여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손님은 몸매가 좋으셔서 이 옷이 어울리신다는 말은 가짜다. 비디오 상품의 제목이 ‘완전범죄’로 표기되든 ‘전완범죄’로 표기되든 상관없다. 실제가 뭐든 값만 맞으면 되는 세계다. 라파엘(길레르모 톨레도)은 카사노바 기질을 십분 활용하여 손님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값비싼 옷을 사게 한다. 아침 열시부터 밤 열시에 이르기까지, 노동의 대가는 아무도 없는 야밤의 백화점에서 그 환상과 가짜의 세상을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다. 가격 탭이 떨어지지 않은 고급 수트와 드레스를 입고 최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가격 탭이 떨어지지 않은 와인을 가격 탭이 떨어지지 않은 글라스에 따라 마신다. 완벽한 껍데기의 세계다.

라파엘: 잠깐 머물고 잠자는 곳일 뿐 진짜 내 집은 아니지, 난 우아한 세상에서 살고픈 우아한 사람일 뿐이야.

 

  여기 라파엘 자신의 것은 없다. 그가 밤마다 탐닉하는 백화점의 여직원들도 마찬가지다. '내 것'이 아니라 오직 '백화점 것'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 세계에 대한 집착을 조금도 버리지 못한다. 그에게 이 세계를 버린다는건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2. 실상 플로어 매니져 따위는 되지 않아도 좋을 것이었으나, 그 자리를 경쟁자에게 빼앗기는 순간 진짜와 가짜가 어지럽게 뒤섞인 그의 즐거운 새벽 생활도 같이 끝난다는게 문제다. 또한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플로어 매니져가 이 세계를 지배하거나 혹은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면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왕이다) 다른 놈에게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플로어 매니져는 회사 주식도 받고 모든 매출의 커미션도 먹는다. 특히 머리가 벗겨진 중늙은이에 비역질쟁이 돈 안토니오(루이스 바렐라)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안토니오가 남성 잡화 매장에서 넥타이나 양말을 팔아서 매출을 올리지는 수준이다. 모든 면에서 라페엘은 구사하는 세련되고 우아한 기술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라파엘을 극적 승리로 이끌었던 만이천유로짜리 부도 수표처럼 그가 자랑하는 기술은 속이 비어 있다. 그가 말끔한 외모와 능란한 말솜씨 덕분에 잠시 손님을 속여넘길 수 있었던 것처럼 손님들도 그럴듯한 포장으로 그를 속여 넘길 수가 있었다. 그의 패배는 그가 이제껏 견지해오던 세계관의 패배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플로어 매니져가 되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런 민낯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오는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하다.

3. 하지만 라파엘이 본질를 꿰뚤어보지 못하는 것은 그때 뿐이 아니다. 우발적으로 시작된 범행의 유일한 목격자 - ‘예요 백화점’ 최고의 추녀 로로디스(모니카 세베라)에게도 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라파엘은 십년을 같이 일하면서도 로로디스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정말로 못생겼기 때문이다. 단지 그녀가 자신의 위장증인이 되어주며 경찰을 따돌릴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칼자루를 넘겨주었을 뿐이다. 공석이 된 플로어 매니져 자리는 꿰어찼다. 의류 매장의 왕이 되었다. '예요 백화점'의 주식을 갖고 매출액의 커미션을 받는다. 새벽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허영과 사치를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댓가는 로로디스의 끊임없는 요구다. 몸을 요구하고 권력을 요구하고 사랑을 요구한다.

 

라파엘: 고등 생물은 어떤 환경에도 잘 적응한다. 어떤 역경 하에서도 생존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린 의지를 단련시킨다. 겉으로는 그 반대가 진실처럼 보일지라도…….

 

  그러나 단 하나의 규칙(로로디스의 요구를 만족시킨다) 하에 유지되는 관계가 라파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까닭이 단순히 강압적인 부분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진짜 문제는 오직 그녀가 지독한 추녀라는 사실이다. 즉 머리는 나빠도 몸매는 좋은 록산느도, 신이 빚은 가슴을 가진 엘레나도. 유부녀이면서도 탈의실에서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수잔나도, 심지어 노예가 되어도 좋다는 소니아도 아닌, 하필 ‘로로디스’라는게 문제다. 밤마다 ‘가격 탭이 떨어지지 않은’ 환상적 세계를 함께 누리기에 로로디스는 완벽히 자격 미달이다. 심각하게 자격 미달이다. 라파엘이 그녀에게 건네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가짜다. 거짓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속삭이는 거짓 또한 거짓일 뿐이다. 

로로디스: 난 그만 꺼지란 말이군요. 여긴 예쁜 년들한테나 어울리지! 모든 놈들이 탐내는 예쁘게 생긴 계집들…… 내 말이 맞죠?
라파엘: 수많은 마초들이 그렇게 생각할진 몰라도 나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남성들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중시하지. 당신에겐 그런 아름다움이 굉장히 많아.

 

4. 물론 로로디스 역시 속물 중에 속물이 맞다. 그럼에도 라파엘이 그 사실을 인지하는 제일의 근거는 그녀의 못생긴 얼굴이다. 그 속물성이 아름다운 얼굴과 빼어난 몸매 속에 감춰져 있었다면 아마 그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야수처럼 맹렬하게 라파엘의 ‘우아한 세계’를 침탈한다. 황홀했던 속녀복 매장의 미녀들을 몰아내고 어디서 끌어모았는지 꼭 자기와 닮은 추녀들을 고용하게 한다.

 

라파엘: 가장 놀라운 일은 괴물같은 추녀들이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숙녀복 매출이 20% 증가했다는 점이다. 고객들은 그 괴물들을 편안하게 느꼈다. 이들 옆에 서면 누구라도 그레이스 켈리처럼 보일 테니까…….

 

  로로디스의 존재는 라파엘의 세계관과 합치하지 않는다. 그 사실은 이 작품의 도입부 라파엘의 독백에서 잘 드러난다.

 

라파엘: 난 여자를 사랑한다. 그들 모두를, 아니 거의 대부분을. 여자들에게 독신남만큼 매력적인 건 없다. 텔레비전에서 봤다. 여자의 유전자는 결혼을 추구한다. 우리를 통제하고 지배하고 번식하려 한다. 그게 생활환이다. 그래서 깃털을 뽄내고 가꾸는 거다. 하지만 주택대출을 받고 새끼들이 생기면 그 순간 끝이다. 생각만으로도 오싹하다.

 

  완전 범죄’라는 명제에서 ‘완전’에 방점을 찍기 위해 라파엘이 선택한 길은 그가 그토록 거부하던 ‘일부일처제’의 늪으로 향한다. 라파엘은 로로디스의 아버지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라파엘: 고통스러워 보이나? 아니다. 완전히 넋이 나갔다. 공포에 눈감아 버린 거다. 모든 걸 잃었으니 남은 건 텅 빈 잠뿐이다. 하지만 그건 그나마 견딜 만해 보인다.

 

  로로디스의 아버지는 하루 종일 잠만 잔다. 식탁 앞에서도, 거실에서도, 심지어 시끄러운 스포츠 스타디움에서도. 로로디스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는 ‘미니어쳐 모으기’다. 세상을 본딴 또 하나의 가짜 세계다. 라파엘은 그를 이해한다.

 

라파엘: 정말로 죽을 맛인 건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비정상의 여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이 정신 나간 집구석과 결혼하게 되면 자기도 저런 모습이 되어 차라리 잠을 택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라파엘은 그때까지도 진짜 세계를 본딴 작은 세계라는 미니어쳐의 속성을 이해하지만 자신이 진짜 세계를 본딴 커다란 껍데기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는 못한다.

5. 완전 범죄는 없다. 그의 세계는 ‘완전 범죄’와 ‘전완 범죄’의 의미적 차이가 없는 세계다. 그는 로로디스와의 타협으로 ‘완전 범죄’를 꿈꾸지만 그건 사실 ‘전완 범죄’일 뿐이다. 앞과 뒤가 바뀌었고 위와 아래가 뒤섞였다. 껍데기가 알맹이를 지배한다. 특수체형의 괴물들이 숙녀복 매장을 점거하고 우아한 독신생활은 점점 절망적 강제 결혼의 늪으로 빨려 들어간다.

 

라파엘: 그 순간 지옥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악마의 존재도. 악마는 까만 치마를 입고 크림색 브래지어를 한다. (중략) 멀쩡하다가도 우울해질 때가 있다. 우울함이 사라지면 비로소 노이로제가 시작된다. 이를테면 전쟁이나 강제 수용과 같은 극단적 경우에 우리의 의식은 불명해지고 마음은 산란해지며, 더 이상 현실과 비현실을 구별할 수가 없게끔 된다.

 

  그가 탈출을 감행하는 대상은 궁지에 몰린 ‘매력 독신남 라파엘’의 인생이 아니다. 맹렬하게 결혼을 추구하는 여자의 유전자다. 그것도 분명히 열성으로 짐작되는 여자의. 그의 유일한 의논 상대가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죽은 안토니오’의 영혼이라는 유머러스한 비틀기가 바로 그 근거다. 라파엘의 심리 세계에서 안토니오에 대한 죄책감은 로로디스에 대한 증오와 거부감을 압도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완전 범죄’가 성립되지 않은 것은 예상치 않게 로로디스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로로디스로부터 빠져나가면 ‘완전범죄’가 완성된다는게 라파엘의 공식이다. 그는 성공을 자신한다.

 

라파엘: 중요한 건 결과다. 게임은 끝났다. 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여자에게도, 경찰에게도 죽은 사람이다. 마침내 자유로워졌다. 비결이 뭔지 궁금한가? 바로 '너 자신을 알아라'다.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아니, 소크라테스였나? 더 좋은 걸 바랄 수도 있지만 난 이걸로 만족이다. 내가 원하는 걸 가졌다.

 

  하지만 그의 가설은 꿈이다. 그는 한 번도 거짓으로 점철된 껍데기의 세계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200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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