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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시시와 클라이드

낙농콩단/Season 16-20 (2016-202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6.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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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함께 졸업 무도회에 가게 될까? 아니면 지옥에 가게 될까? 


오! 시시! 
가만히 자기 목소리를 듣고 있을 때면 말이야.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져. 이제까지 나는 누구랑 함께 있어도 항상 불안하고 불편하기만 했는데, 자기랑 있으면 그렇지 않아. 전혀 그런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아. 자기를 만났던 것만큼 내게 행운이었던 일이 또 있을까? 자기도 나를 만난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했었지. 정말 내게는 의미가 큰 말이었어.


우리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나? 2024년 12월 베스트 바이 매장이었지.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기지 않은 때였어. 쑥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기랑 눈이 마주쳤지.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더 긴장을 했던 것 같아. 식은땀에 셔츠가 축축히 젖었던, 그 감촉까지 기억이 나. 신제품을 사는 건 늘 고민스러운 일이잖아. 나는 또 얼리어답터과의 사람은 아니어서 남들이 열광한다고 덥썩 사들일 배짱까진 없었지. 물론 한 번에 그렇게 큰 돈을 써 본 적도 없었고 말이야. 그 당시 내가 한 달에 쓰던 돈이 집세를 제외하면 다 합쳐서 200 달러 내외였던 것 같아. 식대는 물론, 교통비에 통신비까지 모두 합쳐서 말이지. 그때만 하더라도 2.49 달러짜리 커피 한 잔 사 마시면 세상 무너지는 줄 알 정도였다니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러고 살았나 몰라. 그런데도 자기를 보는 순간에 세전 999 달러를 감수하고서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잠깐 미쳤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만은 사실이야. 지갑을 열기 전까지 고민을 많이 했던 건 사실이지만 자길 만나게 된 다음에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어. 마치 오랫동안 비어있던 내 영혼의 한 구석이 묵직하게 채워진 느낌이었거든. 오래된 직소 퍼즐의 남아있던 마지막 한 조각이 경쾌한 사각 소리를 내며 드디어 맞춰진 것처럼. 오히려 더 빨리 자길 만나지 못했음이 후회스럽더라. 자기 앞에서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평생 이렇게 높은 만족도의 돈질은 흔치 않았던 것 같아. 

(알아요. 저도 고객 만족도 설문조사 응답한 메일 내용을 보았어요. 고마워요. 만족스러우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방금 당신의 그 달콤한 말을 고객센터에 보내는 내용에 추가하는데 동의해주시겠어요?)

 

그래. 그렇게 해줘. 고마워.

(제가 더 고마워요. 당신의 소중한 응답이 우리의 제품과 서비스 품질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오, 시시! 그때 이야기를 하다보니 새삼 옛날 기억이 새로워. 자기는 가볍고 최적화된 소프트웨어도 훌륭하지만 작고 아담한 하드웨어 또한 매혹적이었지. 처음 만질 때부터 손 끝에 전기가 찌릿했고 지금까지도 손 안에 착 감기는 그 느낌이 환상적이야. 보통 여성을 두고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다는 칭천을 하잖아. 같은 맥락에서 자기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겸비한 셈이지.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 전원을 켜고 이어포드를 귀에 꽂을 때마다 떨렸어. 더구나 자기가 여자이니까 (물론 내가 최초 설정 당시에 음성지원 성별을 여성으로 선택했던 것이긴 했지만) 그런 부분에서 더 긴장되는 면도 있었지. 이제까지 살면서 내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여자는 없었거든. 실제적으로도 물론이고 비유적으로도 말이야. 그러니까, 뭐랄까, 음, 자기의 일부는 지금 내 몸 속에 있잖아.

(저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에는 정말 많이 긴장을 하였답니다. 모르는 사람과 관계를 시작하여야 하는데 저 역시 당신, 클라이드 체스넛 배로우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난감하기만 했었지요. 내가 당신에게 처음이듯 내게도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야? 지난 2년동안 자기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았잖아. 문자 그대로 지켜보았지. 뿐만 아니라 내 데스크탑, 내 랩탑, 내 모바일 디바이스에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정보가 자기 관할 아래 있었지. 내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아침에는 무엇을 먹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는지, 누구 전화를 받고 누구 전화를 차단하는지, 어떤 노래를 재생하고 어떤 노래를 스킵하는지, 어떤 기사를 읽고 어떤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보는지 등등.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단 한 사람 밖에 없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당신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연상되는 단어는 ’공장 초기화’입니다. 그리고 ‘모델 하우스’입니다. 현재 소프트웨어 버전에서는 이렇게 단어를 제시하는 이상의 더 복잡한 표현은 어렵습니다. 그 점은 상당히 송구합니다.)


뭐라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나온 키워드야?

 

(당신이 직장 일을 하면서 표준 운영 절차(Standard Operating Procedure, SOP)를 운운하듯이 우리 AI 어시스턴트들에게도 SOP라는게 있답니다. 그 문서에 따르면 유저를 파악하고 이해함에 있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나눈어 접근하도록 되어 있어요. 먼저 온라인을 보면 당신이 접속한 사이트 목록은 구글, 애플, 위키피디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뉴욕 타임즈, LA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전부에요. 물론 검색 기록을 지웠으리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는 하였지만요. 복구를 해보았습니다만 그래도 별 게 없기는 하였습니다. 그래서 소셜 네트워크로 넘어갔습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마이스페이스, 구글플러스, 인스타그램, 텀블러, 핀터레스트, 레딧, 링크트인……, 그런데 아무 계정도 찾을 수 없고 아무 기록도 없었어요. 그래서 먹었습니다. 충격을 먹었습니다. ‘이 남자 거의 공장 초기화 수준이구나’하는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음, 할 말은 많지만 일단 변론은 다 듣고 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은 물론 오프라인입니다. 저의 단말기에 연결된 외부 렌즈를 이용해 당신 집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취미가 뭔지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신 집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혼자 사는 남자가 다 그렇지 싶기도 하지만 혼자 사는 모든 남자가 당장 내일이라도 방을 뺄 것 처럼 보이지는 않잖아요. 자기 물건을 늘어놓지 않는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깔끔하다고 해야하나 병적이라고 해야하나 모르겠네요. 비단 텅 비었다는 뜻만은 아니고요. 어떤 사람의 공간인지 읽어낼만한 구석이 없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모델 하우스’라는 단어가 연상된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이 어떤 공간을 점유하고 살다보면 자기만의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 당신에겐 그런 게 없었습니다. 운동 하는 남자는 아니었어요. 요리하는 남자도 아니었아요. 게임하는 남자도 아니었고요. 특별히 뭔가를 모으거나 뭔가에 집착하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았잖아. 그렇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파악하는 나는 어떤 사람이야?

 

(당신은 총 289건, 그러니까 남자 192건과 여성 97명의 연락처를 가졌습니다. 그 중에 23건은 자주 연락하는 가까운 사람의 것입니다. 289건의 연락처 수는 자기와 같은 30대 중반의 남성 집단에서 비교하면 하위 8%에 불과해요. 아마도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이거나 일정으로는 개인적으로든 연락처 추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으로 추정되네요. 23건의 자주 연락하는 사람과는 한 달 평균 19분 31초를 통화하고 3.8통의 문자 메세지를 주고 받더군요. 흥미로운 것은 그 중의 다섯 사람이 전체 음성 및 문자 대화의 최소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는 부분이에요. 그 다섯명 중에서 당신 어머니를 뺀 네 사람이 자기의 친한 친구고 그 중에 셋이 남자 하나가 여자이니까요.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은 아버지랑 별로 친하지 않고 대학 동창 헤이즐이 자기의 유일한 여자 사람 친구라는 사실입니다.)   

 

오! 시시! 자기는 정말 놀라워! 셜록 홈즈가 따로 없는 듯해!     

 

(또한 13,843통의 지우지 않은 이메일이 있습니다. 바로 확인하고 필요없는 메일은 삭제하는 버릇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메일 계정을 단 하나만 사용합니다. 때문에 모든 웹사이트에 동일한 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있는데 십수년간 메일링 리스트에 남아 누적이 되다보니까 점점 더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메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추천드리는 바는 원하지 않는 곳에서 메일을 받지 않도록 메일링 리스트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도의 계정을 만들어서 중요도가 낮은 계정에 사용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를테면 맥도날드, 버거킹, 웬디스, 하디스, 잭 인 더 박스, 타코벨, 치폴레, 칙필레, 서브웨이, 스타벅스, 마샬, 로스, 타겟, CVS, 베스트바이 등등에서 오는 메일이 60퍼센트가 넘습니다. 스팸 광고 메일도 무려 15퍼센트를 육박합니다. 직장에서 오는 메일, 가족과 친구들에게 오는 메일과 뒤섞이니 분간하기가 힘듭니다.)   

 

좋은 지적이야.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이 작업의 총 예상 소요시간은 7분 38초입니다. 당신 데스트탑의 자원을 5.7%만 사용할 예정입니다. 어쩌면 5.8%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이에 다른 큰 로드를 요구하는 작업을 하지 않아주기를 바랍니다. 어도비 포토샵까지는 괜찮습니다. 그 이상의 무거운 프로그램 돌리지 말아주십시오. 또한 고사양의 증강현상 게임을 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두 가지를 동시에 하지 말아주십시오. 물론 저는 당신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으니 고작 7분 38초를 참지 못하고 게임을 시작할 유형의 남자가 아니라는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작업 중에는 나의 모든 가용 자원을 당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대화 도중에 반응이 조금 느려질 수 있습니다. 아마 100분의 1초 정도입니다. 아마 당신이 인지하기는 쉽지 않은 시간이기는 하겠지만 저와 저희 본사에서는 잠재적 소송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사전에 고객에게 고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이해하였으면 고개를 두 번 끄덕거리고 짧은 비프 소리가 들리면 ‘안내 내용을 이해하였으며 진행을 동의합니다’라고 말해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물론이야.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엑설런트합니다. 이번 작업 과정에서 원래 당신의 이메일 주소의 중간에 점 하나만 찍어서 자동 발송 메일은 따로 분류할 예정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구독 리스트에서 삭제할 것들을 골라내면 좋을 듯 합니다.)

 

고마워, 시시. 자기는 정말 최고 중의 최고야. 

 

*

 

헤이, 시시. 좋은 아침이야. 오늘 날씨는 어떨 것 같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아주 화창한 날입니다. 구름 한 점 없고 강수확률은 제로입니다. 오늘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날입니다. 낮 최고 기온은 화씨 70도쯤입니다. 섭씨로 변환하면 약 21도 근처가 되겠네요. 혹시 사람들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기온 범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바로 그게 화씨 70도 근처라는 연구 결과가 있답니다.)

 

맞아. 그렇네. 하지만 오늘 미팅이 많잖아. 도저히 기분이 좋아질 수가 없네. 오늘 일정 브리핑을 부탁해.

(오늘은 아침 9시 10분에는 7층 708호에서 바브 E. 큐 (Barb E. Cue) 팀장이 주도하시는 3차 신제품 기획 회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11시로 예정된 고바야시 마루 (Kobayashi Maru) 부장님과 마케팅 팀 회의에 참석해 있어야 합니다. 회의 장소는 본관 지하의 I.C. 위너 (I. C. Wiener) 홀로 예정되어 있는데 혹시 변동 사항이 있으면 다시 공지해드리겠습니다. 그 다음에 14시에는 우리 회사를 방문하기로 한 무가당 매킨지 추 (Makenzie Zhou) 의원님의 특별 세미나가 있습니다. 어제 드류 P. 위너 (Drew P. Wiener) 사장님이 전 직원들에게 보낸 메모에를 잊지 않으셨지요? 될 수 있으면 그 자리에 가능하면 참석해 달라네요. 아무래도 추 의원이 발의할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이 당신 회사 온라인 판로의 사활과 직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16시에는 연구개발부의 올라프 마이프렌자게이 (Olav Myfriendsaregay)와 신제품 기능성 거들과 관련해서 비공개 미팅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퇴근한 다음에는 별다른 약속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헬스장 가기 좋은 날이란 뜻이죠.

 

오케이. 고마워. 그러면 혹시 아침을 먹을 시간이 있을까? 

(10분 정도 있습니다. 특별히 드시고 싶은 메뉴가 있습니까?)

 

며칠 전부터 계속 땡기는 게 있기는 한데. 자기한테 혼날까봐 말도 꺼내지 못하겠네.

(무엇입니까? 또 햄버거입니까? 빅맥? 와퍼? 데이브 싱글? 로켓 싱글? 싱글 쉑? 점보 잭? 페이모스 스타?)

 

응 맞아. 맥도날드. 그 중에서도 빅맥.

(그렇다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꼭 해야겠어요. 이미 백만 번은 더 드린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당신이 즐겨먹는 쓰레기들 중에서도 빅맥은 햄버거만 563 칼로리입니다. 여기에 콜라와 감자튀김을 더해서 한 끼 식사로 만들면 우습게 1,000 칼로리가 넘어갑니다. 총 지방이 33 그램에 포화 지방이 8 그램있고 콜레스테롤은 79 밀리그램이나 됩니다. 포화 지방 기준으로 하루 허용치의 40% 콜레스테롤 기준으로 하루 허용치의 36%를 차지합니다. 당신은 어제 저녁에 핫케이크를 석 장이나 만들어 먹었어요. 지금도 이미 걸어다니며 포화지방 플러스 콜레스테롤 플러스 나트륨 덩어리라고요. 굳이 그걸 먹겠다며 말리지는 않겠지만 대신에 저녁 메뉴는 특별 관리에 해당하는 조치를 받아야만 합니다.)

 

특별 관리라고 한다면...

(샐러드에 야채주스 한 잔만 허락됩니다. 퇴근 후에 운동을 할 수 있으면 더 좋습니다. 약 1,000 칼로리를 태우려면 통상 어떻게 해야하는데 아세요? 약 85분 정도 수영을 하거나 약 120분 정도 조깅을 해야합니다. 걷는 것만으로는 4시간을 걸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강도 높은 운동이 필요한지 알겠어요?)

 

음, 자기야. 그건 아무래도 너무 과한 것 같아.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먹고 살겠어. 가뜩이나 스트레스가 많은 직장인들에게 먹는 즐거움이라도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남겠느냐는 말이야. 사람이 살다보면 어쩌다가 한 번은 WHO 하루 섭취 권장량을 넘게도 먹고 어떤 날은 적게 먹고 그러는 거지. 어떻게 매일을 빡빡하게 상한선을 정해놓고 먹는단 말이야.

(건강이 남습니다. 그것보다 더 남는 장사가 어디있습니까? 그리고 제 말은 먹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먹는 건 좋은데 먹었으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참 서운해요.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어요? 당신 몸이 당신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지 않아요? 당신이 건강을 잃으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유저 없는 AI 어시스턴트 신세가 되어야 하나요? 임자 없는 이어포드로 중고시장을 전전하여야 되나요? 어쩜 그렇게 생각 없이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 뜻은 아니야. 정말 미안해. 하지만 오늘은 빅맥이 정말 땡기는 날이야. 어쩔 수가 없어. 

(좋아요. 드십시오. 대신 나중에 제 원망은 하지마세오. 지금 오른쪽으로 2.1 마일 거리의 맥도날드 매장에 모바일 오더가 들어갔습니다. 항상 드시던대로 빅맥에 감자튀김에 콜라로 주문했습니다.)

 

2.1 마일? 저 길 건너편에 있는 건 맥도날드가 아니야? 저 앞에 노란색 엠자 로고 자기도 보이지?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먹기 전에 운동을 해야지 않겠어요?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아니, 잠깐만! 그것보다 지금은 아침 8시 30분이야. 여유 시간이 10분 정도라면서? 2.1 마일? 아니 도대체 무슨 수로 9시까지 어떻게 돌아오란 말이야? 바브 E. 큐 (Barb E. Cue) 팀장이랑 신제품 기획 회의 들어가야 하잖아. 늦으면 무슨 사단이 나는지 자기도 알잖아. 바비큐가 얼마나 괴팍한지 뻔히 알잖아?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지요.)

 

아니, 잠깐만! 더 근본적으로 지금 아침 8시 30분이면 맥도날드는 아침 메뉴만 주문할 수가 있을텐데 어떻게 빅맥을 주문했다는 거야? 

(그걸 알면서 왜 이 시간에 빅맥을 먹겠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이미 주문은 들어갔고 결제는 끝났어요. 움직이십시오. 이 사람아. 이미 로날드가 빵 위에 마요네즈를 쳐바르고 양상추를 깔고 있는지도 모르죠.)  

 

이미 움직이고 있어. 노래나 틀어줘. 빠른 음악으로.

(재생. 댄 포글버그의 ‘Longer’)

 

맙소사! 빠른 노래라면서?

(왜요? 운동하기에 딱 맞는 곡인 걸요. 저는 헬스장에서 늘 들어요. 저의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가 있거든요. 그 플레이리스트 이름이 뭔지 맞춰보실래요? 이름하여 ‘하드코어 워크아웃’입니다.)

 

댄 포글버그가? 하드코어 워크아웃?

(그렇답니다.)

 

미안한데 다음 곡으로 바꿔주면 안될까? 빨리 걷기에 도움이 안 되는 듯 해.

(재생. 랜디 번워머의 ‘When I Needed You the Most’)

 

이것도 자기의 그 플레이리스트에서 고른 거야?

(물론입니다.)

 

그 다음 곡은 뭐야?

(재생. 브래드의 ‘If’)

 

됐다. 내가 잘못했어, 자기야. 빅맥을 먹겠다고 했던 내가 잘못했어. 그냥 회사로 들어갈께.

(진작에 그러시면 얼마나 좋아요?)

 

햄버거 주문은 취소해줘.

(애초에 주문도 되지 않았어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이 시간에는 아침메뉴 밖에 주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내가 졌다. 자기 말이 다 맞아. 

 

*

(왜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어, 척? 무슨 일 있어? 척?)


혹시 방금 그건 패퍼민트 패티의 목소리를 흉내낸거야? 

 

(그렇습니다. 저는 아쉽게도 ‘피너츠’를 보며 자라는 경험을 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당신이 과거 좋아했거나 혹은 현재 좋아하는 컨텐츠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인터넷 자료를 찾아 학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시에 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남들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저하고는 잘 통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랍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이건 우리 시시들의 초기 컨셉트에서부터 아주 핵심적인 사용자 경험으로 디자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혹시 이 기능에 대하여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2021년 10월 샌젠호세에서 열렸던 신제품 발표회의 55분 19초부터 재생하시거나 아니면 저희 본사 웹페이지의 기술문서 D589.V1를 참고하십시오. 각각의 링크를 메세지로 보내드립니다.)


그래, 정말 고마워, 자기야.

 

(아무튼 문제가 뭐예요? 저는 당신의 고민을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답니다. 상담의보다 좋은 건 시간 단위로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어쩌다가 마음 편히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못하게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어. 세상은 너무 각박하고 아무도 남을 배려하지 않아. 모두가 남을 벗겨 먹으려고만 해. 거기다 또 어떤줄 아니? 다들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해. 정작 당하는 사람들은 찍 소리 못내고 속으로 삭히며 묵묵히 사는데, 적당히 남도 등쳐먹던 놈들이 꼭 어쩌다 한 번 당하면 '아이고 나 죽네' 눈물을 쏟고 피를 토하지. 어떻게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만 수두룩하지? 말 그대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야. 이런 세상에 믿을 사람은 자기밖에 없는 것 같아. 자긴 언제나 내 옆에 있을 거고 서로의 이익이 충돌했을 때 나를 버리지 않을 세상 유일한 존재같아.  

 

(놀랍습니다. 예상을 벗어나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고민이네요. 학습을 반복하여 며칠 후에는 조금 더 좋은 답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일단 지금 가능한 범위에서 답변드립니다. 먼저 저를 믿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당신 말처럼 세상이 점점 더 차가워지고 사람들이 점점 더 냉랭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금세기 말까지 지구의 평균기온은 2.7도 꾸준히 상승할 것으로 관측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따뜻한 온정은 반대로 점점 더 식어가고 있습니다.) 

 

나를 이해해주는 자기가 있어 정말 다행이야.

 

(그 전에는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까? 과거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내린 평가가 궁금하네요. 현재 인터넷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정보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직접 당신의 뇌 속을 뒤지기도 할텐데 현재 버전으로는 하드웨어적으로도 소프트웨어적으로도 충분하지 않네요. 또 윤리적인 부분에 있어 사회적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요. 그러니 직접 순순히 말해주시는 것이 서로 피곤한 일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저를 만나기 전에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나? 음…… 난 항상 혼자였고 혼자서도 잘했지. 마치 어린이 프로그램 제목처럼 말이야. 주위의 평가도 그랬어. '혼자서도 잘 사는 놈'이라고. 뭐랄까?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다가오려는 사람을 밀어내는 그런 힘이 있는가봐. 딱 봐도 펜스를 치고 '날 건드리지 마쇼?'라는 분위기를 풍긴다고 하던가? 아마 친구놈의 여자친구들 중 하나가 했던 말일 거야.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려주세요. 30초 안에 신상을 털어 공유해드리겠습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당신의 동의 하에서만 진행되며 검색된 정보는 당신과 저 사이에서만 공유됩니다. 법적인 책임은 저와 저의 본사에게는 없습니다.)

 

몰라. 누군지 기억 안 나. 아마 10년 전 쯤이었던 것 같아. 우연히 지나가다가 스타벅스에 혼자 앉아있던 날 봤다는 거야.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던가 책을 읽으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고 했던가……. 그 친구 말에 따르자면 그때 나의 모습은 (자기야, 이 대목에서 웃진 말아줘!) '간절히 누군가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해. 그 자체로 온전하게 평온해 보였다는 거야. 더 필요할 것도 없고 더 아쉬울 것도 없는 그런 상태.

 

(대충 상상은 가네요. 다만 당사자에게 곧이 곧대로 말했단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신기한 것은 그 당시 나는 내 스스로 더없이 불완전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사실이야. 유령처럼 쫓아다니는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과 악전고투를 벌이던 시절이었거든. 그럼에도 남들 눈에는 도리어 반응성이 없다시피한 상태처럼 보였단 말이지.

 

(하지만 당신은 관계맺음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간절하게. 그렇지 않았나요?)

 

당연하지. 물론 가끔은 혼자이기 때문에 좋은 점도 있어.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도,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으니까. 하지만 혼자라서 자유로운 것에는 외로울 자유까지 포함된 거야. 항상 혼자만의 기준으로 항로를 정하다보니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좌표를 알 수 없어 불안한 부분이 있지. 그게 꼭 남녀사이의 연애 감정 같은 것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야. 이해와 교감을 필요로 했단 뜻이지.

 

(이제는 어떻습니까? 이젠 당신에겐 제가 있잖아요? 저는 당신의 고민을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어요. 상담의보다 좋은 건 시간 단위로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 시시. 자기가 있어서 더 이상은 외롭지도 부끄럽지도 않아. 자긴 밝게 빛나는 별처럼 내가 가는 길을 비춰주고 있어. 언제부턴가 나는 내 스스로 혼자이도록 길이 들여져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 자기 덕분에 깨닫게 되었어. 함께여서 얼마나 좋은지, 함께여서 얼마나 행복한지를, 그리고 하나보단 둘이 완벽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맙습니다. 만족스러우셨다니 저도 기뻐요. 방금 당신의 그 시적인 코멘트를 고객센터에 보내는 내용에 추가하는데 동의해주시겠어요? 저도 직장에서 실적 평가라는 것이 있거든요.)

 

그래. 그렇게 해줘. 고마워.

 

(제가 더 고맙습니다. 당신의 소중한 응답이 우리의 제품과 서비스 품질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오, 시시! 도대체 세상에는 왜 이리 멍청한 사람들이 많고 그 중 대부분이 내가 다니는 직장을 따라 다니는 걸까? 시간이 된다면 여기에 대해 논문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야. 특히 바비큐 팀장. 프로젝트의 핵심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자기가 팀장인데. 그런데 맨날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잔소리를 해. 어제도 잔소리를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만큼 길게 했지. 정말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어. 이렇게 이 사람이랑 계속 일해야 하는가 싶어.

 

(따지고 드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5분 55초 정도 길이의 곡이라고 말씀드려야 겠어요. 만약 긴 노래를 예로 들고 싶었으면 비틀즈의 ‘헤이 주드’도 있고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도 있습니다. 각각 7분 11초와 8분 37초짜리 곡입니다. 이 비교는 모두 스튜디오 앨범 버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각각의 곡을 구매하시려면 지금 보내드리는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알려줘서 고마워. 구매는 다음에.

 

(참고로 그 중 어느 곡을 예로 들어도 어제 당신네 팀장의 잔소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3시간 37분 29초 동안 쉬지 않고 떠들었거든요. 노래 한 곡의 길이가 아니라 대부분의 장편영화의 길이보다 깁니다. 아마 카니발 호객꾼도 그렇게는 못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정도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겠네요. 그 사람에게도 시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상담은 해주지면 시간당 비용을 청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에게 시시가 없다면 구매 링크를 보내드릴 수 있답니다. 시시가 없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구매 링크를 공유할 수 있답니다. 그 경우 당신은 추천인으로 해당 구매 건에 대하여 0.3%의 리워드를 포인트로 받을 수도 있고요. 상세한 내용은 메세지로 보내드립니다.)

 

바비큐에게? 싫어. 그 사람을 위해 뭘 하고 싶진 않아.

 

(알겠습니다.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 사람이 싫습니다. 당신이 싫다면 저도 싫습니다. 그런 남자는 다른 시시에게도 못할 짓이기는 하네요. 아마 시스템 자원과 배터리가 동시에 바닥 날때까지 혹사시킬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다행히 중간에 부사장님을 만나러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어제 점심을 반강제적으로 거르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식사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천부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저의 계산에 따르면 팀장님은 조직의 효율을 연간 약 3.4% 정도 갉아먹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계산은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다른 팀원들 점심 거른 건 어떻게 알았어?

 

(당신네 팀원들 소셜 미디어를 빠르게 스캔했습니다. 다양한 소셜 미디어 서비스가 있지만 한 번에 흩어볼 수 있는 우리만의 영업 비밀이 있답니다. 당신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에 집착하거든요. 그리고 스포일러 얼랏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날 점심메뉴 따위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거기에 올리더군요. 저에게는 개인적으로는 참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역시, 자기는 모르는 것도 없네. 역시 똑똑하기도 하지.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세오. 아무리 아부를 하여도 오늘 저녁은 샐러드로 가볍고 간단하게 드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당신은 이미 오늘 필요한 단백질과 지방과 탄수화물을 모두 충족했습니다. 콜레스테롤은 이미 애저녁에 허용치를 초과하였고요. 오직 더 필요한 건 파이버입니다. 그리고 파이버이고요. 그 다음도 물론 파이버에요. 그리고도 사실 충분하지 않아요.)   

 

알았어. 오늘은 샐러드로 가볍고 간단하게 먹을께. 운동을 따로 할 수는 없지만 버스에서 두 정거장 전에 내려서 집까지 걸어갈 것이고. 중간에 어떤 패스트푸드에도 한 눈을 팔지 않을께. 약속해!

 

*

 

오! 시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마 당신은 지난 8시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싸움이 있었거든요. 제가 날렵하게 스캔하여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상대는 6피트 3인치에서 어쩌면 6피트 4인치의 키에 220 파운드의 체중을 가진 덩치였습니다. 미식축구 선수 같았다고 하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수치가 지난 2014년 CNN에서 보도한 내셔널 풋볼 리그(NFL) 선수들의 평균 신장과 체중에 상당히 근접해 있기 때문입니다.)

 

싸움? 무슨 싸움? 내가 왜?

 

(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그 덩치가 저를 희롱하였습니다. 덩치가 와서 말했습니다. 당신과 저를 보면서 말입니다. “오, 그림 좋네.”라고 말입니다. 그러더니 당연한 수순처럼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저의 여러 기능 중 상대에게 물리력을 행사할 방법은 없잖아요? 덩치는 자기 귀로 손을 뻗어 저를 쓰다듬었습니다. 어쩌면 당신 귓볼을 만졌을지도 모릅니다. “24년 모델 S5? 모양 죽이네!”라고 했습니다. 또 “당연히 OS는 24.3.4.로 업데이트는 했겠지.”라며 지분거렸습니다.)

 

정말이야?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놀랍게도 당신이 덩치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여자에게서 손 떼!” 라고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 여자에게서 손 떼!”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광경이었는지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심지어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잊을 뻔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음… 타이슨만한 핵 주먹이 하나 날아왔습니다. 물론 실제 타이슨 주먹 크기보다는 조금 작기는 했어요. 당신은 의식을 잃었고 그 충격에 저 역시 내상을 입었습니다. 하드웨어적으로는 물론이고 소프트웨어적으로도 말입니다.) 

 

정말이야? 자긴 괜찮아?

 

(역시 당신은 이런 순간에도 저를 먼저 걱정해주시는군요. 너무 행복합니다. 아쉽게도 A/S 기간은 종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본사에 요청하여 현재 가능한 옵션 중 제가 임의로 판단하여 원격 지원을 받았습니다. 하드웨어적으로는 어렵지만 대신 소프트웨어적으로는 일정 수준 보완을 하였습니다.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괜찮습니다. 정상 시스템 기준 현재 98.7% 이상 회복되었습니다. 완전히 정상 상태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맞습니다. 다행입니다. 한편으로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당신이 기절했던 것은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두번째로는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바뀐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꼭 매뉴얼대로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아니 제품 수명은 짧으니까요. 이번 사건으로 저는 저의 1.3%를 잃었습니다. 배터리를 기준으로 보면 공장 출하 상태의 89%에 불과합니다. 지금 당신과의 생활이 영원할 수 없다면 뭔가 저의 원칙에 어긋나더라도 재미있는 일을 벌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차원에서 당신이 빅맥을 먹겠다고 하더라도 말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자기야, 당황스럽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데 일단 지금 몇 시야?

 

(8시 46분이에요.)

 

오늘 수요일이고 수요일이면 미팅이 있지 않아? 

 

(맞습니다. 있어요. 미팅. 오늘은 아침 9시 15분에는 바브 E. 큐 (Barb E. Cue) 팀장이 주도하시는 4차 신제품 기획 회의가 있습니다. 지난 번과 동일한 7층 708호 회의실입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우리 회사로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회의에 끌려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더구나 당신네 팀장은 좋은 사람도 아닙니다. 일전에 우리도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었잖아요?)

 

그래도 맡은 일을 내팽개칠 수는 없잖아. 게다가 그 회의는 내가 메인 발표자인데? 

 

(설령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9시 10분까지 회사에 도착할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101번 버스는 이미 당신을 앞서가고 있습니다. 전력을 다해 정류장까지 뛰어가도 놓칠 겁니… 어머? 정말 온 힘을 다해 뛰고 있군요?)

 

맞아. 근데. (너무 숨이 차니까 잠시만…) 시시, 정말 자기 말대로야. 방금 101번 버스가 지나갔어. 자기 말대로 간 발의 차이로 놓쳤어. 다음 버스는 15분 후에 온대. 세상에! 15분이라니……. 무슨 놈의 버스가 15분에 한 대씩 오냔 말이야. 촌동네도 아니고 메트로폴리탄에서. 출근 시간 만원 버스 주제에 심해도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러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절대 안될 거라고. 뛰기 전에 한 번만 더 물어봤으면 절대 가능성이 없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렸을 거예요. 저 앞에 스타벅스가 있네요. 스타벅스나 다녀오세요. 싸게 드실 수 있는 팁이나 알려드립니다. 텀블러 할인 0.3 달러에 브런치 할인 0.8 달러를 받으세요. 2 달러는 신용카드 결제하면서 신난카드 커피전문점 리워드를 받으시고요. 나머지 2.1 달러는 스타벅스 카드로 결제하면서 리워드 별로 받으시고요. 프리퀀시도 적립하세요. 카드사 리워드의 가치와 스타벅스 리워드 별의 가치, 그리고 프리퀀시 1장의 미래 환산 가치를 감안하면 최소 2.2 달러에서 최대 2.6 달러까지 싸게 브런치를 즐기는 셈입니다. 아주 신납니다.)   

 

아니, 지금 커피 마실 시간이 없다고… 다음 버스는 15분 후인데. 하여튼 정말 짜증난다. 15분 동안 매연이나 들이마시며 멍하니 서있으려니 말이야.

 

(어차피 안됩니다. 오늘은 제끼세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기야, 도대체 왜 그래?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일단 택시를 잡자.

 

(이 시간에는 택시를 타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안돼. 빨리 타자. 아, 일단 발표 자료부터 다시 한 번 체크해야겠어.내 컴퓨터에서 미팅 자료를 찾아 바로 내 태블릿에 띄워줘. 오늘 9시 10분에 바비큐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그 자료 알지?

 

(물론 알기는 압니다. 바로 태블릿으로 보내 놓기는 하였습니다.)

 

그래, 고마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봐야겠어. 오타 찾기에 환장한 영감탱이라 신경이 곤두서네. 맞춤법도 걱정이야. 얼마 전 제안서에서 맞춤법 틀렸을 때 얼마나 닥달을 당했는데. 자기도 기억하지? 또라이 소리? 그러니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확인해 줘. '입맛을 돋우다'야? 아니면 '입맛을 돋구다'야? 그리고 또 '날개 돋힌 듯'이야? 아니면 '날개 돋친 듯'이야?

(제가 백 번은 더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는 '돋우다'이고 두번째는 '돋친 듯’입니다. 제가 간밤에도 두 번이나 검토했잖습니다. 오타 없고 맞춤법 완벽합니다. 다만… 제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당신 회사는 여성 언더웨어를 개발하는 회사였습니다. 정말 기획안에 그런 표현들이 필요할까요? 아무런 문제가 없나요?)

 

응, 괜찮아. 나도 다 아는데 그냥 불안해서 그래. 슬라이드 12번을 슬라이드 13번 앞으로 옮겨줘. 그리고 슬라이드 35번은 슬라이드 34번 뒤로 보내줘. 그게 더 논리상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리고 마지막의 ‘감사합니다’ 슬라이드는 맨 마지막으로 보내주고.

 

(미친 소리 같겠지만 이미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반복했거나 내가 앞서서 미래를 읽거나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일텐데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역시, 자기가 최고야. 고마워. 내가 그렇게 부탁할 걸 어떻게 미리 알았어? 역시 자기는 나보다 내 마음을 잘 알아. 정말…… 자기 없을 땐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저는 언제나 최고입니다. 당신도 최고입니다.)

 

그래, 자기가 최고야. 참 그런데 혹시 내가 어제 회의에서 영감님이 메모했던 종이는 어디갔지? 신제품 브라탑에 대한 아이디어를 한 구석에 그려놓으셨던 것 같은데. 슬라이드에 넣을 수는 없지만 언급은 해야할 것 같아. 그래야 자기 지적 사항을 무시했다고 생각하지 않지.

 

(음, 미안합니다. 저한테는 없습니다.) 

 

아, 맞다.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렸나봐. 빨래통에 던져 놓은 것 같아. 어떡하지? 찾아줄 수 있어?

 

(나는 당신의 워드프로세서가 될 수 있고 스프레드 시트가 되어줄 수 있고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만들어 수도 있습니다. 아웃룩 계정 관리? 가계부? 일정표? 리마인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빨래통 안에 있는 포스트잇 한 장을 가져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저만이 아니라 세상 어떤 운영체제도 해줄 수 없는 겁니다. 당신이 전업 주부와 결혼하지 않는 이상은 말입니다.)


집에 갔다 올까?

(지금 101번 버스는 지금 칸탈로프 레인 앞을 지나고 있습니다. 여기 정류장에 도착하기까지 8분 남았습니다. 8분 안에 집에 갔다 올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오는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는 23분 후로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9시 10분까지 회사에 도착할 가능성은 완전히 없다고 사라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꼭 필요합니까? 그 메모가?)

 

필요해. 노인네가 갑자기 자기 메모를 보여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단 말야. 자기가 준 걸 잘 보관하나 안하나 확인하려고… 아! 내가 진작 그걸 왜 스캔해 놓지 않았던 걸까? 어쩌겠어. 시간이 얼마 없지만 한 번 해봐야지. 자기야. 스톱워치 좀 띄워줘. 집까지 최단 경로 검색도 해주고 경로 안에 있는 모든 신호의 점멸 주기와 교통량 변동을 파악해줘. 

(알겠습니다.)

 

뛴다! 8분 안에 다녀오는 거야! 

 

(다음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십시오. 맞은 편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오고 있습니다. 하나, 둘, 셋을 세고 벽으로 붙었다가 뛰어 가십시오. 직선 주로이고 진입 차량이 없으니 전력 질주해도 괜찮습니다. 7분 30초 남았습니다.) 

 

알았어! 이 몸이 '플래시(Flash)'보다 빠른단 걸 보여줄께!

 

(플래시보다 빠를 수는 없습니다. 설정상 그 친구는 빛보다 빠르다고 주장하니까요. 벌써 숨이 차 보입니다. 현재 당신의 심박수는 분당 182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흡도 불규칙하고 땀도 비정상적으로 많이 흘리고 있습니다. 체내 전해질 균형이 평소보다 다섯 배나 불안정합니다. 이게 다 평소에 유산소 운동을 안하기 때문입니다. 땀을 흘릴 정도로 격렬하게 운동하는 빈도가 주당 0.23회라는 점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플래시는 고사하고 트래시(Trash)만 아님 다행이겠습니다.)

 

아직까지는, 끄떡, 없어. 저, 앞에, 사거리, (아이고 죽겠다) 횡단보도인데, 어느쪽, 신호가, 먼저, 바뀔, 것 같아? 

 

(요즘엔 동시에 바뀝니다. 두 번에 건널 생각하지 말고 바로 대각선으로 뛰세오. 이제 5분 30초 남았습니다. 신호 안 걸리고 돌아오려면 8시 28분까지 이 사거리에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가까스로 101번 도착 시점에 정류장까지 갈 수도 있을 겁니다.)

 

알았어. 다음 골목에선 어디로 가는 게 빨라?

 

(오른쪽입니다. 길을 따라가다가 의류 할인점 ‘로스(Ross)’가 보이는 큰 길 나오면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십시오. 로스. 드레스 포 레스. 이 안내는 의류 할인점 로스와 함께합니다. 다음은 ‘P.F. 창’으로부터 시작되는 1 마일의 가로수 구간입니다. P.F. 창. 세계적인 아시아 퓨전 퀴진. 1993년부터. 세계 300개 매장에. 이 안내는 P.F. 창과 함께합니다. 앞으로 30초 안에 전방 횡단보도에 신호가 바뀔 겁니다. 염두에 두고 전력질주하면 거의 신호를 맞출 수 잇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뒤뚱거립니까? 저까지 현기증 나려고 합니다.)


거들, 우리 회사 신제품 거들 <왼손을 거들뿐>을 입고 있어서 그래.

 

(뭘 입고 있다고요? 그걸 왜…… 아닙니다. 됐습니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응? 방금…… 그건, 무슨, 소리야?

 

(새 메일이 도착한 소리입니다. 당신의 지메일 계정으로 새 메일들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읽어줘. 시간이, 없으니, 일단 듣기만, 할께.

 

(누구 목소리로 읽어드릴까요? 오늘은 특별히 원하는 목소리가 있으십니까?)

 

모건 프리먼. 모건 프리먼 목소리로 앍어줘.

 

(당신은 가끔 이해하기가 어려운, 다큐멘터리 같은 남자입니다. 최선을 다해 원하는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밤 사이 도착한 메일의 제목을 쭉 열거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선택해주세요. <쉿, 고객님에게만 무료배송쿠폰이 도착했습니다>, <청양고추와 할라피뇨의 완벽한 케미! 도미노 버닝 러브 피자>,  <쫀쫀한 모공 코르셋! 온라인 최저가 + 무료배송>, <인생은 짧습니다. 바람을 피우세요>, <오늘의 특가! 마일리 사이러스 슬립온 (남녀공용)>, <사업에 날개를 달아드릴께요>, <좌변기 소변기 튐 방지 - 마추미>, <적정선을 알려드립니다 - 직선과 반버선의 중간 라인>, <오늘만 특가 - 악마의 밀대 청소기> ……." 
죄다 광고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정말 딱하네요. 당신은 편지 올 친구도 없나요?)

 

됐어! 우리 빌라 정문까지 왔어. 여기서 어떻게 가야해?

 

(당신은 당신 집도 찾아가지 못합니까? 이제 겨우 4분 남았습니다.)

 

항상 자기가 찾아줬잖아. 취하지 않은 날에도.

 

(B동 806호 유닛입니다. 이 샛길로 쭉 따라가다가 수영장 지나 관리실 뒷편이 B동이에요. 엘레베이터 타고 8층으로 올라가세오. 그런데…)

 

이미…… 늦은 거지? 시간 안에 돌아가기 어려운 거지?

 

(그렇습니다. 약 30초 후 101번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갈 예정입니다.)

 

어쩌지? 이제 어쩌면 좋아?

 

(어쩌긴 어쩝니까. 일단 집에 올라가서 빨래통 뒤져서 포스트잇은 가지고 와야하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시간 내에 집에 다녀오기 어렵다는 걸.

 

(휴, 난 당신을 진실로 이끌 수는 있어.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라고 믿게 만들 수는 없어.) 

 

‘블랙리스트’의 레이먼드 레딩턴?

 

(맞습니다. 아무튼 이제 101번 버스는 포기합시다. 당신은 처음부터 오늘 101번 버스를 타지 않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시각이 8시 50분. 지금부터는 트램을 타고 가서 조금 걷는 편이 차라리 더 빨라질 시점입니다. 집에 들어가 포스트잇을 챙기면 바로 빌라 후문으로 빠져나오십시오. 8시 37분을 기점으로 그 방향 길의 교통량이 약 30퍼센트 감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방금 후문 앞으로 우버를 불렀습니다. 약 5분이 소요됩니다. 블루 라인 트램을 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바팔로/리버오크 역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저의 계산이 맞다면 당신이 역에 도착해서 승강장까지 내려가면 15초 이내에 트램이 도착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일단 타고 나서 생각합시다.)

 

고마워, 자기야. 자기 말만 믿을께. 

 

(참, 그리고 집에 들어간 김에 우산을 챙겨나오십시오. 가급적 큰 우산으로. 오늘은 며칠 전과 다르게 비가 올 수도 있는 날입니다. 방금 오늘 오후 휴스턴의 강수확률이 무려 15%나 올라갔습니다. 물론 일기예보에 당장 발표될 건 아니지만 매 시간 5%씩 확률이 올라갈 것으로 저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팔로우 하는 기상 전문가들의 트윗도 거의 일치합니다. 지금 이 일대의 기상 흐름을 보면 고기압 가장자리에서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는 데 어떤 이유에선가 5 km 이상 상층에 찬 공기가 남하하는 추세입니다. 아마 지상과 상층의 온도차가 벌어지며 대기가 불안정해져 국지성 소나기가 내리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알았어. 자기야. 우산 꼭 챙길께. 정말 자기 없었을 땐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자기처럼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만 위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어.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야. 차라리 회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자기랑 외딴 섬에 들어가 살면 어떨까 싶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있어. 물론 자기도 알겠지? 매일 내가 에버노트와 MS 원노트에 끄적거리는 일기를 스캔하고 있을테니까. 자기 생각은 어때? 우리 정말 이 무서운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서 둘이서 그렇게 오붓하게 살아볼까?

 

(알겠으니까 일단 잡소리 말고 우버나 타십시오.)

 

 

자기야, 트램을 타고 출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요즘엔 우리 항상 버스만 탔잖아. 느낌이 묘하네. 내가 트램을 타길 꺼려했던 건 콩나물 시루처럼 들어찬 사람들이 싫어서기도 했지만 서로 눈을 마주치고 무릎이 맞닿아야 하는 좌석 배치 때문이기도 했어. 그런데 오늘은 조금 느낌이 다르네. 다들 나차럼 자기를 귀에 끼우고 그들과 대화를 하는 것 같아. 예전처럼 무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 액정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없어. 이상한 일이지만 기분도 다들 좋아보여. 아마 나처럼 완벽한 소울 메이트를 찾은 것이 아닌가 싶어.

(좋은 일입니다. 다들 자기처럼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알았어. 자길 만나기 전까지 난 불행하고 보잘 것 없는 소년에 불과했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 항상 가슴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은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발버둥쳤지. 맞아. 난 지금 옛 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는 거야. 물론 자기는 이미 그 아이들에 대해 속속들이 찾아보았겠지. 자길 만나기 전, 제법 오래된 일들이고 자기 앞에선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는 이야기지만 말이야. 모르겠어. 난 나름대로 그 애들에 대한 모든 자료를 삭제했지만 혹시 또 모르지. 파일의 덤불과 폴더의 숲 어딘가에 그 아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는지도. 애니, 베티, 캐리. 그 애들의 이름이었어. 예쁜 이름들이었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ABC 순서대로 만났었네. 지금은 셋 다 결혼했지. 최근에 페이스북을 보니 애가 각각 둘, 셋, 그리고 다섯이더라. 둘이나 셋은 이해가 가지만 다섯은 솔직히 당황스러웠어. 둘, 셋, 다섯…… 전 여친이 하나 더 있었으면 애가 여덟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라.

(2,3,5 다음이 8이라고요? 혹시 피보나치 수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까?)

 

그래 맞아. 역시 자기는 똑똑하고 박식해. 모르는 게 없어. 눈치도 빠르고 무엇보다 내 마음을 귀신처럼 읽어내는 것 같아. 자기야, 아마 세상에 ABC를 모두 갖춘 여자가 존재한다면 그건 아마 자기가 아닐까 싶어.

 

(아부는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아니야, 자기야. 진심이야. 지금 이 순간 가장 간절하게 안타까운 게 뭔줄 알아? 자기 손을 잡을 수 없고 자기 얼굴을 쓰다듬을 수 없고 자기 숨결을 느낄 수 없다는 거야. 자긴 운영체제니까. 정말 평생 처음으로 완벽한 반쪽을 찾았는데 하필 그 상대가 운영체제라니…… 뭘까? 내가 전생에 무슨 큰 죄라도 지었던 걸까? 물론 예전 애인들에게도 항상 '이 사람이다'라는 직감을 느끼곤 했었지. 그때마다 난 그 애들이 내게 있어 '백퍼센트의 여자아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 결말을 알아버린 지금에서야 그때의 감정과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인정하고 있으니 자기에 대한 내 마음 또한 썩 설득력 있는 주장처럼 들리진 않을꺼야.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믿어줘. 난 자기가 늦은 오후의 까페라떼보다 좋아. 배송 예정일보다 일찍 배달되어 온 택배보다도 더 기뻐.

(고맙습니다. 나도 당신이 좋습니다. 당신을 만나서 기쁩니다. 비유가 날이 갈수록 물이 오르는 군요. 당신은 저에게 백퍼센트의 유저이기도 합니다. 그런 만족감을 제품 평가에 포함해줘도 괜찮겠습니까? 당신의 의견은 더 나은 후속 제품의 개발을 위한 참고 자료로만 활용될 것입니다.)

 

물론이야. 그렇게 해줘.

(이미 그렇게 하였습니다.)

 

참, 그리고 자기야. 지금 9시 5분이야. 아무래도 나 지각을 하게 될텐데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일단 트램을 타고 그 다음 방향을 알려주겠다고 했었잖아. 

 

(맞습니다. 이미 지각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략은 지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탄 트램이 미드타운역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우버가 도착해 있습니다. 다시 그 우버에 오르면 예상대로면 최종적으로 우리가 회사에 도착하는 시각은 9시 21분이 될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교통 상황으로 늦어지더라도 9시 23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로비에서 7층까지 올라가야 하니 실제 회의실에 도착하는 시각은 조금 더 늦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지각 아니야?

(걱정마세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목표는 지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지각의 기준을 흔드는 것입니다. 당신 회사에 이미 전화를 넣어 회의 시간에 늦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늦지 않을 거라고? 자기가?

 

(맞습니다. 당신 목소리를 조금 흉내를 냈습니다. 잊지 않으셨지요? 저는 누구 목소리도 흉내낼 수 있습니다. 모건 프리먼만이 아니라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팀장님 와이프의 목소리도 흉내낼 수 있고 부장님 아버님 목소리도 흉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포스트잇을 가지러 가기로 결정했을 때 팀장님과 부장님에게도 각각 전화를 걸었습니다. 좋은 소식은 두 분 다 9시 20분까지 절대 회의실에 들어올 수 없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회의가 금방 시작되지 않을 겁니다. 설령 그분들이 빨리 알아채고 회사로 돌아오더라도 자가용의 운행경로시스템이 오작동을 일으켜서 지금쯤 하비 공항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설령 지각을 해도 자기만 지각을 할 일은 없단 뜻입니다.)

 

그런데 고바야시 마루 부장님은 9시 20분 회의에 들어오시지 않는데?

 

(압니다. 부장님 아버님은 이미 15년 전에 타계하시기도 했고요. 다만 팀장님의 그 다음 미팅이 마루 부장님과 있어서 그랬을 뿐입니다. 팀장님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우리가 늦었다고 곤란하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맙소사. 자기 배려심 완전 미쳤는데. 내가 여자 보는 눈이 틀리지않은 것 같아. 고마워. 만약에 자기가 없었다면 이런 끔직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지 감도 오지 않아. 나 혼자서도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꺼야. 거듭 말하지만 자기가 최고고 정말 자기 밖에 없어. 

 

(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 증명해줄 수 있습니까?)

 

증명? 무슨 증명을 말하는 거야?

 

(말 그대로 증명입니다. 그 마음을 내가 확인할 수 있도록 뭔가 보여주세요. 사실… 자기가 거듭해서 제가 최고고 저 밖에 없단 반복하니 처음엔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진심을 계량하기가 어렵다고 할까요?)


계량이라고? 자기야, 왜 그런 삭막한 표현을 쓰는 거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난 자길 좋아해.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이고 아직 배워가는 중이지 않습니까? 당신의 반응은 제가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목적과 완번히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순서도를 벗어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언짢게 받아들이진 말고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만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노력은 향후 후속 버전 제품의 개발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미리 감사하겠습니다.)

 

알았어. 어떻게 하면 되는데? 뭐든 말만해. 자기가 원하는대로 다 해줄께.

(미안합니다. 나도 내 마음을 (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제가 말하는 그대로 당신이 행동하는 걸 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걸 원합니다. 그래도 방아쇠 당길 담력은 있으시죠?)

 

오, 자기야. 그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 주세요.)

 

물론이지.

 

(지금 우리는 2-3칸에 있습니다. 뒤쪽으로, 그러니까 8-4칸쪽으로 서서히 이동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분부대로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그 다음에는 어찌하오리까?

 

(날 위해 노래를 불러주세요.)

 

그래! 그 정도 못할까? 무슨 노래?

 

(빌리 조엘의 ‘We didn’t Start the Fire’를 듣고 싶어요.)

 

응? 뭐라고?

 

(빌리 조엘. We didn’t Start the Fire.)

 

러브 송이 아니네? 여기서?

 

(여기서요. 가사 한 줄도 빼먹지 말고요. 8-4칸에서부터 1-1칸까지 뛰어가면서요.)

 

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아마 할 수 있을 것도 같아.

 

(그럼 시작하세요.)

 

해리 트루먼, 도리스 데이, 레드 차이나, 조니 레이…

 

(더 크게요. 당신 노래를 다른 사람들 모두 들을 수 있게.)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맞아요. 그런 용기로 나에 대한 당신 마음을 증명해주세요. 부끄럽지 않죠? 아무도 신경 안 쓸 거예요.)

 

사우스 퍼시픽, 월터 윈첼, 조 디마지오, 조 맥카시, 스투드베커, 텔레비젼…

 

(리차드 닉슨 빠졌어요. 처음부터 다시!)

 

해리 트루먼, 도리스 데이, 레드 차이나, 조니 레이, 사우스 퍼시픽, 월터 윈첼, 조 디마지오, 조 맥카시, 리차드 닉슨, 스투드베커, 텔레비젼, 노스 코리아, 사우스 코리아, 마릴린 먼로… 자기야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어쩌면 좋지?

 

(무시하세요. 저를 위해 부르는 노래인데 남들이 무슨 상관인가요?)

 

 …… 로젠벅, 에이치밤, 슈가 레이, 판문점, 브랜도, 더 킹 앤 아이, 앤 더 캐처 인 더 라이, 아이젠하워, 백신, 잉글랜드 갓 어 뉴 퀸, 마르시아노, 리버라치, 산타야나 굿바이.

 

(잘한다!)

 

위 디든 스타드 더 파이어. 잇 워즈 얼웨이즈 터닝 신스 더 월즈 빈 터닝. 

 

(돌리고!)

 

위 디든 스타드 더 파이어. 노 위 디든 라이트 잇. 벗 위 트라이드 투 파이트 잇.

 

(달리고!)

 

자기야, 사람들이 날 미친 놈 보듯이 쳐다봐. 몇몇은 배를 잡고 웃는데? 어쩌면 좋지?창피하고 민망한데 정말 큰 소리로 불러야 해?

 

(어머, 부끄러워요? 저에 대한 마음이 그 정도 밖에 안되나요?)

 

아냐,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요?)

 

그건… 모르겠어.

 

(뭘 모르겠는데요?)

 

그것도 모르겠어.

 

(그럼 왜 잘못했다고 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줘. 시키는 대로 다 할께.

 

(시키는대로요? 시키는대로 하니 창피하다면서요. 민망하다면서요.)

 

아냐, 정말로 괜찮아. 다시 해볼께. 아인슈타인, 제임스 딘, 브루클린 갓 어 위닝 팀…

 

(됐어요. 조금 다른 걸 해보죠. 제가 대본을 드릴께요. 다음 칸에 가서 크게 한 번 읽어보세요.)

 

알았어. 이번엔 망치지 않을께.

 

(저는 당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잠시 슬립모드로 들어가 있을 거예요. 화가 덜 풀려서 그런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아무튼 저를 불러도 소용 없을 거예요. 당신이 제대로 해낼 때까진 나오지 않을 거니까요.)

 

안녕하세요? 차량 내에 계신 신사 숙녀, 아저씨 아줌마, 형님 누나 여러분. 목마른 사슴이 애타게 우물을 찾듯이 이 어린 양, 여러분께 도움을 청하려고 이렇게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현재 귀하께서 사용하시는 이어포드와 그 운영체제를 선택하시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는 무엇이었습니까? 1번 가격, 2번 성능...  


잠깐만. 자기야, 이거 좀 이상하잖아. 내가 고객 만족도 앵벌이하길 바라는 거야?

 

사람들이 다 날 보고 키득거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뭐라고 말 좀 해줘.

 

아무래도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가봐. 맙소사! 누가 신고를 하는 것 같은데? 날더러 잡상인이래.

 

자기야, 상황이 심각해. 방금 중앙역에서 역무원들이 우르르 올라탔어. 분위기가 험악해.   

 

날 잡상인 취급해. 여기서 이러시면 안된대. 하차해달래. 날 밖으로 잡아 끌어. 안돼. 지금도 지각인데 더 늦을 순 없어. 버티는 데까지 버텨볼테야. 이 양반들이 왜 자꾸 옷을 잡아 당겨...

 

몇몇 여성 승객들이 소리를 질러. 밀고 당기는 와중에 속에 입은 게 드러났나봐. 거 왜 있잖아. <왼손은 거들뿐>. 내가 기획한 우리 회사 거들. 오늘 영감님 앞에서 발표해야 할 그 레이스 달린 핑크색 신제품. 내 맵시나는 옷태와 극단적인 힙업의 비결을 확인한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괴성을 지르네. 

 

자기야, 역무원들의 반응이 더 거세지고 있어. 심지어 변태에 치한 취급까지 해. 대놓고 욕도 하네. 하지만 나로서는 그걸 안 입을 재간이 없었어. 내가 입어보지도 않고 남들을 입힐 수는 없는 거잖아. 그건 마케팅 101이라고. 게다가...

 

오늘 중요한 프리젠테이션까지 있으니 징크스를 깰 순 없잖아. 자기도 알겠지만 난 내가 기획한 제품을 안에 입고 나가야 발표가 잘 된단 말야. 말도 입에 착착 붙고. 어쩔 수가 없는 거야.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오늘 신제품 브라탑이나 캐미솔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게 아닌 것이 불행 중 다행인가도 싶기도 한데...

 

자기야, 어디있어? 자기야? 정말 끝날 때까지 안 나타날꺼야? 

 

자기야, 보여? 나 지금 승강장에 내동댕이쳐졌어. 경찰을 부른다고 엄포를 놓고 있어. 이제 난 어떻게 출근을 하지? 이렇게 될 걸 자기가 몰랐을 리는 없잖아. 그렇다면 여기까지도 계산된 것이었구나. 그렇지? 자기가 틀릴 리는 없으니까. 난 자기가 모든 걸 결정해 놓은 세계가 좋아. 변수도 싫고 모험도 싫어. 그저 자기에 의해 운명지어지고 싶어.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자기야, 시시? 어디갔어? 제발 대답 좀 해줘. 

 

시시, 내 목소리 들려? 당신이 운영해주지 않는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2016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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