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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팔세토칼립스

낙농콩단/Season 21-24 (2021-2024)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1.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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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다시피 상담 치료에서 난감한 부분은 대개 심리학 이론에 내담자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그 중에서도 최고로 난감한 부분은? 당연히 상담자의 의도를 내담자에게 간파당했을 때 발생한다. 우리 상담자들의 입장에서는 (배운 도둑질이 그거인지라)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에 맞추어 내담자의 상황에 맞는 설명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일종의 모범 답안인 셈인데, 문제는 언제부턴가 그 모범 답안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예전 같이 않아서 어지간한 설명으로는 보통 사람들을 수긍하게 만들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일단 인터넷이라는 못된 괴물이 만인을 만물에 대한 전문가 행세를 하게끔 만들었고, 세상도 예전보다는 훨신 각박해져서 남의 말을 잘 새겨듣고 수긍하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상담자가 무슨 설명을 하면 조용히 들어 처먹는 경우가 없고 대개는 반박하기 일쑤이며 심지어 짜증까지 낸다. (상담료를 내고 와서 상담받기를 애써 거부한다는 아이러니는 놀랍다.) 물론 솔직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건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의 현상을 굳이 공식에 대입하여 풀어내려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해프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우리 업계의 이익에 정면으로 반하는 발언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사실 뭐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여기 아주 흥미로운 케이스가 있다. 케이스 번호 #007273. 이 43세 유대계 여성은 남편과 별거 중이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12세 남자아이가 하나 있다. (구체적으로 올해 9월경 바르 미츠바를 앞두었다고 한다.) 남편은 14년 동안의 평탄한 결혼생활 중에 아무 예고도 없이 덜컥 외도를 저질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어떤 뚜렷한 이상 징후도 없었다고 한다. 나는 아주 냉소적인 사람이고 (또 직업이 직업이기 때문에) 실은 그 말에 의구심을 가졌다. 이유인 즉 갑자기 이루어지는 외도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문제가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녀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애써 부정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타깝지만 백이면 백 대개는 그렇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로 그녀가 상담 치료를 받으러 온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 이유만으로 상담 치료를 받으러 온다면 우리 업계는 말 그대로 빗자루로 떼돈을 쓸어담고도 남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남편의 외도 상대가 로봇 청소기였기 때문이다. 정말이다. 정말 로봇 청소기이다. 하나님 맙소사. 아니, 그런 이야기를 도대체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응당 상담의를 찾아와야지. (그렇다. 이 일은 성직자들이 하는 일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있다.) 그 심정이야 십분 이해가 간다. 배우자가 더 매력적인 다른 여자(혹은 남자)에게 끌리는 것은 (물론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 가정 내에서 어엿한 안주인이 로봇 청소기에게 배우자를 빼앗기는 경우를 설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두 글자로 요약하면 '망신'이요, 세 글자로 요약하면 ‘개망신’이다. 정말 그런 이야기를 도대체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상담의를 찾아와 상담료까지 내고 털어놓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그 로봇 청소기가 ‘세뇨리따’가 아닌 ‘세뇨라’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겠지만 그것이 과연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는 언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 우선 로봇 청소기에 성별이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하지만 사람이 로봇 청소기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끌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된 마당에 (이거 J. G. 발라드도 완전 놀라 자빠질만한 일이 아닌가?) 로봇 청소기의 성별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더 놀랄 일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

 

  이후 나는 베스트바이에 갈 때마다 홈 어플리언스 코너를 유심히 보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형상의 로봇 청소기가 있는지 궁금한 마음에서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떻게 외도가 성립하였던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다. 웹 검색 결과에 나오는 로봇 청소기들은 하나 같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로봇 청소기들처럼 생겼다. 그러니까 하키 퍽처럼 생겼다. 그녀는 로봇 청소기의 이름이 ‘위져(Whizzer)’라고 말했다 (청소기에 꽤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런데 ‘위져’라는 브랜드는 없었고 어떤 브랜드에도 ‘위져’라는 제품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남의 불행 앞에서 이런 고약한 호기심을 갖는다는 사실에 자괴감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남몰래 여기저기 둘러보고는 하였지만… 그럴리가. 그냥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로봇 청소기들처럼 생겼다. 다들 하키 퍽처럼 생겼다. 다들 아시다시피 하키 퍽처럼 생긴 남자와 바람이 날 수는 있다. 하지만 하키 퍽과 바람이 날 수는 없다. 하키 퍽을 퍽한다니 퍽이나 말 같은 소리다.
- 실례합니다, 혹시 로봇 청소기는 여기 있는 모델이 전부인가요?
- 예, 손님. 그렇습니다. 보시는 모델이 전부입니다. 혹시 특별히 찾으시는 제품이 있으신가요?
- 아니, 그게, 음… 다 하키 퍽처럼 생겼는데… 혹시 그렇지 않은 모델도 있을까 해서요.
- 하키 퍽이요? 아… 동그란 모양이라는 말씀이시죠?
- 예, 말하자면요. 그렇죠. 
- 이 동그란 모양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로봇 청소기는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하고요. 구석이나 좁은 공간이나 끼임 없이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어야 하죠. 충돌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가구에 닿아 손상을 일으키지도 않으려면 가장자리를 곡면 범퍼로 만드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에요.  
- 그렇죠.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네요.


  그럼에도 나의 상상은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막을 수 없었다. 팔과 다리가 달린 로봇 청소기. 얼굴이 있는 로봇 청소기. 지능이 있고 감정이 있는 로봇 청소기. 그래서 남의 남편을 꾀어내어 가로챌 수 있는 로봇 청소기. 웃을 일은 아닌데 어디선가 슬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가끔은 상담시간 중에도 웃음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로봇 청소기. 시트콤으로 만들어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 아닌가? NBC에서도 CBS에서도 FOX에서도 이런 시트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정말 괜찮다면 내가 먼저 대본을 써볼까? 제목은 ‘러버, 로보, 러버?’ 아니면 ‘석 잇 업 (Suck It Up),’ 아니면 ’메나지 아 트와 (menage a trois).’ 그런 이상한 생각을 너무 많이 했던 건지 급기야 꿈에도 나왔다 (꿈에서는 로봇 청소기가 아니라 로봇 가정교사였지만). 라이브 관객 앞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게다가 추억을 자극하는 흑백 화면이다) 펀치 라인마다 미리 녹음된 관객의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 달링, 그 이야기 들었어?
- 무슨 이야기?
- 옆집 말이야. 윌리암스 씨 댁 부인이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았다네. 
- 그걸 어떻게 알아?
- 윌리엄스 부인이 시내에서 어떤 남자랑 같이 다니더라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해.
- 어떤 남자? 어떻게 생겼는데?
- 머리가 둥글고 덩치도 좀 있는 편이고. 무엇보다 가슴에 화면이 달려있다고.

(관객의 웃음 소리)

- 화면? 오… 알겠어. 그건 아이에듀야.
- 아이에듀? 그게 뭔데?
- 가정교사 로봇. 윌리암스씨 댁에 새로 온 가정교사야.
- 정말이야? 그것 참 신기하네.
- 뭐가?
- 그 댁은 아이들이 없는데? 누구를 가르치라고 데려 온 가정교사야?
- 그 댁 아저씨.

(관객의 웃음 소리)


*


  지난 10주의 상담 세션이 이루어지는 동안 나는 그녀의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늘 비슷하게 시작해서 늘 비슷한 지점에서 끝났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점과 종결점 사이 어디에선가 어김없이 눈물을 한 바가지씩 쏟았다. 이따금 나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고는 하였지만 (어떤 기준으로 로봇 청소기의 암과 수를 결정하는지 등등) 그녀가 눈물을 쏟으면 밀려오는 죄책감에 당혹스러운 마음을 어찌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남편이라는 놈도 참 대단한 작자라는 생각을 했다. 배우자에게 심리적 데미지를 주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로봇 청소기와의 외도라니! 그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이 아닌가. 몇 번을 곱씹어봐도 뜨악하기만 하다. 숙련된 상담의로서 나는 항상 그녀의 이야기가 같은 자리에서 쳇바퀴를 돌지 않도록 다양한 타임 포인트에서, 또 다양한 관점에서 재구성하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어떤 방향에서도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늘 같은 이야기를 늘 같은 방식으로 다루고 싶어하는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지뢰 해체 시뮬레이션과 같아서 이렇게 해보다 쾅! 저렇게 해보다 쾅!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쾅쾅! 어떻게든 눈물 버튼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멋적게 크리넥스를 뽑아 그녀에게 건네는 외에는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보통 우리 업종에서는 크리넥스를 빅-박스 스토어에서 대량 구매하기는 한다.) 어떤 면에서 큰 고역이기도 했다. 아무리 유도해도 매번 같은 패턴으로 되돌아가니 미칠 노릇이었다. 어김없이 점점 히스테릭하게 변하다가 끝내 마지막에는 눈물을 보였다. 매번 그렇다라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치료 효과가 없다는 뜻이고 어쩌면 내가 돌팔이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선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여러 방향으로 객관화를 유도하였던 것이 먹히지 않자 나 역시 차츰 그녀의 반복되는 이야기를 그녀의 시각에서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서서히 그녀에게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녀를 동정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물론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내담자가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꽤 예쁜 여대생들도 있었다. (이 역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가 오히려 상담 시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아이들이 다녀가면 바닥에 흘러넘친 매력을 밀대로 닦아내어야 할 정도였다. 나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고 환기도 시켰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이란 고작 자기 아버지 뻘의 늙은 물리학 교수를 연모한다는 (어쩐지 20세기 단편 소설에 딱 어울리는 전형적 소재. 아닌가!) 정도여서 직업적 호기심까지 동하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요즘 내게 상담 받으러 찾아오는 쪽은 대학 신입생들이 아니라 거꾸로 노교수들이다. 의외로 많은 교수들이 급격하게 변해가는 어린 세대와 교감하는데 두려움을 느끼더라는 사실은 놀랍다. 오죽하면 강의 시간에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되는 말을 구분해 달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나는 항상 이렇게 조언한다.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에 대한 농담은 절대 절대 절대 하셔서는 안된다고.. 이제는 그런 농담이 때와 장소에 따라서 용인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고. 


  아무튼 그녀가 주는 느낌은 예전의 여대생들과는 조금 달랐다. 젊음의 밝고 싱그러움과는 다른 성숙한 매력과 몸에 배어있는 교양이 있었다. (그녀는 뉴욕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지금 나에게 상당한 수준의 시간당 삼담료를 지불하고 있을 정도이니 우리가 소위 말하는 상류층이다.) 굳이 부연하자면 외모 역시 아름다웠는데 어딘가에 왕년의 제니퍼 코넬리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남편의 외도라는 자극적 소재가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방식 역시 나의 직업적 호기심을 발동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


  10주차 상담 세션이 끝났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외부 공간에서의 사적인 만남을 유도했다. 물론 상담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마치 11주차 이후 상담을 위한 새로운 상담 프로그램의 일부인 것처럼 살짝 혼란스럽게 만들기는 했다. 그러면서 휴대전화로 수시 연락을 주고 받도록 유도했다. 사실 휴대전화 번호는 첫 상담시에 (그러니까 두둑한 결제가 이루어졌을 때) 기본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보통이다. 꼭 상담 세션이 아니라도 평소에 마음이 견디기가 힘들거나 털어놓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달라는 취지에서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직자들보다 훨씬 너그러운 사람들이다). 당연히 내게는 두 개의 휴대전화가 있고 두 개의 휴대전화가 있다. 사실 이런 경우에 내담자에게 공유하는 것은 업무용 휴대전화의 번호인데 이 무렵 나는 내 개인 휴대전화의 번호를 슬쩍 넘겨주었다. 이로서 나는 다른 내담자들에게서 오는 연락과 그녀에게서 오는 연락을 효과적으로 분리할 수 있었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고백하다보니 마치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꼭 그렇다고만 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사적인 만남이 상담의 연장선에 있는 것도 백퍼센트 거짓말은 아니었다. 무슨 거창한 데이트를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커피 한 잔을 들고 공원을 걷는 정도,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는 정도. 사무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만 나누었다. 그렇게 해도 되나면 물론 그렇지는 않다. 모든 내담자에게 그렇게 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인정한다. 부끄러운 일이고 비난 받아 마땅할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막 들어온 새로운 뉴스가 있는데 요즘 세상에 직업 윤리라는 것의 무게감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직종에 걸쳐 모든 사람들이 말이다. 상담의도, 성직자도, 가정 교사도, 로봇 청소기도.


  다시 10주가 지나는 동안에 그녀의 심리 상태는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결국 문제의 남편이 ‘세뇨라’ 로봇 청소기와 살림을 차리기로 하면서 (결연히 용의 눈알을 그려넣은) 사건이 있었고 그녀의 열두 살 먹은 아들이 학교 담임 교사에게 부모의 삼각 관계에 혼란스러움을 토로하는 (거의 용의 승천에 비견할만한) 충격적 사태가 있었다. 상담실의 크리넥스 재고가 바닥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반면 좋아진 부분도 있었다. 나와 빈번히 산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것 같기도 했고 이따금 웃기도 했다. 갈수록 나는 그녀와 잘 맞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심사와 문화적 취향에서부터 유머 코드까지. 가령 우리는 공통적으로 말러의 교향곡, 토마스 핀천의 실험적 작품 세계, 그리고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언이 제리 사인필드이고 가장 좋아하는 시트콤이 ‘사인필드(Seinfeld)’라는 사실도 (상당히 확률 높은 우연이지만) 우연 이상의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말하자면 ‘우리’는 로봇 청소기 따위에 끌리는 유형들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가 어째서 그런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십년 하고도 몇 년 더 전에 말이다. 문제의 남편 멜빈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기는 했다. 직접 남편과 마주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센트럴파크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정말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이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유복한 집안 자제요, 대대로 뉴욕에서 자리 잡고 살아와 정계와 금융권의 명사들과 어울리는 남자. 직업도 쓸떼없이 번듯하여 센트럴 파크에서 다섯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직원 수 삼백 명이 넘는 로펌의 시니어 파트너. 그런 남자가 결혼 십년하고도 몇 년차에 갑자기 로봇 청소기와 관련된 이유로 커밍 아웃할 거라고는 세상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J. G. 발라드도 놀라 자빠지고도 남을 일이다.)


*


  그녀는 아들의 상담도 내가 맡아주길 원했다. 아빠와 로봇 청소기의 문제로 혼란을 느끼고 있으니 상담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이해가 상충할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동시에 맡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기는 하나 아이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 연유로 나는 다른 상담의를 추천하기 보다는 직접 제이슨을 (그녀의 아들 이름이다. 앞서 이야기를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상담하기로 결정했다. 원형 테 안경을 쓰고 멜빵 바지 차림새로 나타난 제이슨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뭐랄까 아기 돼지 같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열두 살짜리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이, 챔피언. 너희 아빠의 로봇 친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소년이 느끼는 혼란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나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나는 로르샤흐 검사를 권했는데 (우리 업계에서 궁할 때마다 꺼내는 비장의 카드다) 제이슨은 하얀 종이 위에 대칭적으로 퍼져있는 검은 얼룩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 이봐 멜빈, 이 그림을 보고 무엇이 연상되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아무거라도 괜찮아.
- 대너리스 타르게리엔이요. 드로고를 타고 있네요.
- 누구?
- 대너리스 스톰본 오브 하우스 타르게리엔이요. 더 퍼스트 오브 헐 네임, 퀸 오브 안달스 앤 더 퍼스트 맨, 프로텍터 오브 세븐 킹덤스, 더 마더 오브 드래곤스, 더 칼리스 오브 더 그레이트 그래스 씨, 더 언번트, 더 브레이커 오브 체인스…  ‘게임 오브 스론스(Game of Thrones)’도 안 보셨나요?
- 아… 너는 어떻게 봤니? 그런 걸 보긴 아직 좀 이르지 않은가?
  소년은 더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검지로 안경을 밀어올렸다.
- 집에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데 굳이 프리미엄 케이블을 연결해 놓고 보지 말라는 건… 글쎄요. 고양이 앞에 생선을 두고 6년쯤 기다렸다 먹으란 심보죠.
- 알았다. 드래곤을 타고 있단 말이지?
  소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 제가 그렇게 말했나요? 뭐… 그렇다고 해두죠.


- 그럼 다른 그림으로 넘어가자. 이걸 보고는 무엇이 연상되니?      
- 사이드 붑 쇼네요.
- 아, 알겠다. ‘더 심슨즈(The Simpsons)'에 나오는 빨간 야자수 머리를 하고 큰 발을 가진 악당이지.
- 누구요?
- 사이드 쇼 밥. 광대 크러스티의 조수.
- 누군지 몰라요. 저는 사이드 붑 쇼라고 했어요. 보세요. 모양이 완전 옆으로 빠져나온…


- 그만! 됐다. 알았으니 넘어가자. 다음 그림은 이거다.
- 오! 카다시안 패밀리네요. 왼쪽부터 킴, 클로이, 코트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 아니, 괜찮다. 자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이야기 해주면 된단다.
- 셀레나 고메즈요.


  나는 그림 카드를 집어들고 내 쪽으로 뒤집어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음… 그런 것 같기도 했다. 


*


  얼마 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내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다. 나는 제이슨의 상담 내용에 대한 일이라면 걱정할 일이 없으니 묻지 말아달라고 했다. 로르샤흐 검사에서 보듯이 아이는 아빠나 아빠의 로봇 청소기 친구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성에 관심이 대단히 많은 평범한 십대 소년일 뿐이었다. 물론 당연히 아빠의 일로 혼란스러워 하기는 하겠지만 무슨 그림을 가져다 보여주어도 이성과 관련지을 정도로 할 정도로 과하게 건강했단 말이다. 워낙에 만인이 만물에 대해 전문가 행세를 하는 끔찍한 시대라 나는 덜컥 겁부터 났다. 횔설수설 설명을 해야 했다. 당신 아들은 백퍼센트 괜찮다고.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아니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 그럼요? 
- 선생님, 우리 제이슨의 바르 미츠바에 같이 가주시겠어요?
- 제가요?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마치 친한 친구의 생일파티에라도 초대받는 느낌이었다.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바르 미츠바는 유대인도 아니고 그리 종교적인 사람도 아닌 내게는 낯선 의식이다. 영화에서나 브로드웨이 연극에서 본 적은 있다. 그게 전부다. 평생 시나고그, 그러니까 유대교 회당에 가본 일이 없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들어가도 되나? 잘 모르겠다. 아니, 그 전에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바르 미츠바에 참석하여도 되나? 그것도 모르겠다. 말하는 걸 보면 제이슨은 이미 대중문화와 인터넷의 율법에 의해 성인이 된 것 같은데 굳이 다시 성인식을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그런데 제가 같이 들어가도 되나요? 아시다시피 저는 유대인은 아니…
- 예, 알아요. 홀 안에는 안 들어가셔도 되요. 나중에 식사는 같이 하시고요. 제이슨이 선생님을 많이 따르는데 거기 계셔주시면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이 될 거예요. 밖에 계셔도 전혀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랍비 님에게 말씀드려서 미리 준비해 둘께요.
- 부인, 제이슨은 이미 심리적으로 불안한 것이 전혀 없는 아이에요.
- 감사해요, 선생님.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 미츠바에 가겠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녀도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이 집안의 일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되돌리기에는 늦었다는 사실을. 그녀를 동정하고 연모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긴밀한 가족(Tight-knit family)에 나도 함께 묶여 들어가 있었다. 제이슨의 바 미츠바에는 그녀의 남편 멜빈도 올 것이다. 그녀 남편의 남자친구 로봇 청소기 '위져'도 함께 올 것이다. (이름이 '위져’라고 앞에서 이야기했던가?) 다 같이 모이면 아주 볼만할 것이다. 토라를 히브리어로 낭송하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고 다같이 축제의 시간을 갖겠지. 어쩌면 위져는 홀 안에 들어가게 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는 남몰래 그녀를 연모하지만 어쩌면 그녀 남편의 로봇 청소기 친구보다 더 먼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 밖에서 나는 애꿎은 시계를 만지작거릴 것이고, 그 사이 홀 안에서는 세 사람의 유대인과 한 대의 로봇 청소기가 행진을 벌일 것이다. 서커스도 이런 서커스가 없다. 지상 최대의 쇼가 벌어질 참이었다.

 

(202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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