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의 사회학: 영화 '미스트'에 관하여

1. 안개는 아주 영리하고 뛰어난 장치다. 어떤 작품도 이만큼 기가막힌 고립(孤立)의 장치를 찾아내진 못했다. 역시 스티븐 킹, 이라는 감탄사는 이제 너무 많이 뱉어버려 식상하지만 원작을 제멋대로 눙치지 않고 제대로 만들어준 프랭크 다라본트에게는 얼마든지 넘치는 사랑을 표해도 나쁘지 않겠다. 올 겨울, 가장 잘 만들어진 장르영화다.

1.5. 안개는 칸사스로에서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안개는 처음 호수 맞은 편에서 목격했을 때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밝은 흰색에 아무 것도 반사되지 않는 안개. 안개는 천천히 다가와 태양을 전부 삼켜 버렸다. 태양이 있던 자리엔 겨울 날 흐린 구름 사이로 보이는 보름달처럼 은동전만한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註1, 78페이지).


2. 안개의 정체를 알 지 못한 채 사람들은 마트 안에 갇힌다. 그들은 마트라는 일상적 공간에서 포획된 그저 순간적인 무작위적인 마을 구성원의 조합이지만 안개에 갇히는 순간, 그들은 교묘한 대표성 또한 함께 띠게 된다. 여기엔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으며, 백인이 있고 흑인이 있으며. 어린아이가 있고 노인이 있으며, 내부인 - 마을주민과 외지인이 있다. 직업적으로도 다양하다. 브랜트 노턴(안드레 브라우퍼)처럼 일류 변호사에서부터 마트 기술자와 같은 블루칼라 노동자, 그리고 아르바이트생과 평범한 주부까지 존재한다. 상황적으로도 이들의 대표성은 납득할만하다. 폭풍이라는 재난 상황에서 물자난의 긴박한 두려움이 원인이 되어 동시에 마트로 모여든 상태이기 때문이다. 고로 여느 때의 마트보다 훨씬 더 정확한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의 마트라는 무대는 마을의 일부인 동시에 마을의 전부이기도 하다. 이들은 안개에 갇히는 순간부터 하나의 새로운 공동 운명체 인간 집단 - 사회(社會)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3. 뿐만 아니라 마트는 게임의 난이도를 적절하게 매만져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마트에는 식료품이 가득하다. 그 중 더러의 냉장식품은 상하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구성원들이 굶주림 때문에 싸워야 할 일이 벌어질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 이들은 먹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혹은 먹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지도 않는다. 진열대 가득한 먹거리는 오히려 가망없는 탈출을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며 심지어 원작에서는 마트 안에 갇힌 사람들이 바베큐를 만들어 나눠 먹는 장면 묘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마트 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먹고 자는 기본적 욕구 충족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트 내에서 야기된 아수라판의 혐의는 아무래도 '생물학적 요인' 보다는 '사회적 요인'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4. 마트 내부의 분란을 일으키는 근원적 요인은 물론 안개다. 정면이 모두 통유리로 되었다는 점에서 외부의 위협(안개 혹은 안개 속의 무엇)은 흡사 물리적 실체를 간직한 것처럼 보여지고 위협의 정보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묶여진 그들 모두에게 동시에 공유된다. 하지만 분란의 직접적 원인은 유약하고 이기적인 개인들의 총합인 인간 집단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다. 때문에 위협의 실체가 외계인이냐, 괴수냐, 테러리스트냐, 혹은 그 밖의 무엇이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게 된다. 무엇이어도 무엇이 아니어도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건 단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위협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일 뿐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 전쟁(2005)'에서 레이(톰 크루즈)의 아들 하비는 이렇게 묻는다. "테러리스트인가요?" 레이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상황을 보다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고 위협으로부터 탈출할 길도 생길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은 사실 착각에 불과하다. 적어도 이 분류의 재난 영화들에선 그렇다. 미지의 위협이 외계인에 의한 것이든 테러리스트에 의한 것이든, 혹은 외계인이 하늘에서 떨어졌든 땅에서 솟았든, 레이가 해야할 일은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정체모를 공격과 혼란상태의 군중을 피해 도망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위협의 유발 원인이나 실체, 혹은 제거 방법이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잘못된 금기를 바로잡고 사건을 해결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 뿐이다. 허나 레이는 그런 범주의 인물이 아니었다. 이는 '미스트'의 드레이튼(토마스 제인)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안개가 어떤 이유로 깔렸고 안개 속에 있는 촉수 괴물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드레이튼의 목적은 안개를 걷어내고 촉수 괴물을 때려잡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그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들 빌리를 보호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구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유일한 일이었던 것이다.

4.5. 안개는 천천히 다가오며 푸른하늘과 페인트칠을 새로 한 아스팔트를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삼켜 버렸다. 잘 만들어진 특수효과를 보고 있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윌리스 오브라이언이나 더글러스 트럼벨이 꿈꾸었을 그런 세상 말이다.푸른 하늘이, 커다란 수건만 하던 하늘이 줄무늬로 바뀌었다가 다시 연필 선만큼 얇아졌고 결국 기어이 사라져 지금은 형태도 없는 잿빛 괴물이 거대한 쇼윈도우에 몸을 비벼 대고 있었다 (같은 책, 80페이지).

5. 이와 같은 접근법은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인들의 심리를 은밀하게 대변한다 (註2). 제국의 심장부에서 제국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가 공격당하는 순간 - 차라리 잘 만들어진 특수효과라고 믿고 싶던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그들에게 위협은 어느 날 갑자기 뉴욕 한 복판에 떨어져 너와 나의 일상을 거칠게 파고들 수도 있는 것(클로버필드, J.J. 에이브람스, 2008)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스필버그의 '우주전쟁', 다라본트의 '미스트', 에이브람스의 '클로버필드', 이상의 세 작품이 극한 상황을 다루는 태도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소위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다루었지만 놀랍게도 그 실체를 향한 접근법은 깨끗히 지워버렸다 (註3). 특히 '우주전쟁'과 '미스트'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실제 없으나 실제 있다고 믿어지는, 말하자면 '스코틀랜드의 사자' 역할을 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따라서 이 작품이 현미경을 들이대고 관찰하려는 대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안개 속에 뭔가가 있어 언제 어느 순간에 마트 안으로 쳐들어와 우릴 죽일지도 모른다" 라는 두려움이 상시 지배하고 있는 원시적 인간 집단의 내부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건 테러의 두려움이 만든 미국사회의 모습이고 명분없는 전쟁이 빚어내는 악순환의 결과다.

5.5. "그러니까 안개 한쪽이 갑자기 어두워지는데, 때로는 얼룩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멍 자국처럼 큰 검은 공간이 생기기도 해. 그러다가 다시 회색으로 돌아가. 그리고 그 놈이 꿈틀거리며 주위를 맴돌아. 아르니 심스도 밖에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하더군. 그 사람, 박쥐만큼이나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인데 말이야." (같은 책, 158페이지).

6.0. 이런 이야기를 지어내보자.
<어느 날 안개가 몹시도 지독하게 세상을 덮었다. 동굴 속에 머물던 유인원들은 사냥을 위해 밖을 나가려다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다록 지독한 안개였기 때문이다. 그들 중 누구도 태어나서 이만큼 두껍고 농밀한 안개를 본 일이 없었다. 이런 안개 속에선 맹수가 덮쳐와도 당하기 전엔 알 수가 없다. 맹수가 동료를 덮쳐도 위치나 방향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나가서 사냥을 해야하나?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다고 동굴에 틀어박혀서 종일 아무 것도 안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른 누군가가 반박했다. 내일이면 걷혀지겠지. 누군가의 말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또 다른 누군가의 면박이었다. 안개는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눈에 띄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도 안개는 점점 짙어져 동굴의 전면을 새하얗게 메웠다. 우유빛 물방울의 조밀한 틈새를 뚫고 맹수의 울부짖음이 들려올 때마다 여자와 아이들은 부르르, 두려움에 떨었다.">

6.5. 전에 말했듯이 사람들이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은 너무도 다양하다. 그럴 리 없다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같은 책, 155페이지 인용).

7. 6번 문단과 같은 확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보듯 안개라는 절묘한 장치는 현대, 그것도 특히나 고도소비사회의 대표적 상징인 마트에서 되려 현대인들을 해체시켜 다시금 원시시대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게 되었고 불과 도구를 사용할 줄 알게 되었으며 - 마트에는 모든 게 있다 - 발달된 지능으로 자유롭게 사유하게 되었건만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너지는 세계무역센터 앞에서 그러하였듯,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대재앙 앞에서 그러하였듯, 어떤 문명인도 원시적인 외력에 문명적으로 대처하고 판단할 수는 없단 뜻이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안개가 마트를 둘러싼 후 한 부인이 최초로 마트를 빠져나가는 부분이다. 그녀는 집에 두고 온 어린 두 자녀가 걱정되어 나가겠다고 하는데, 이때 사람들은 최소한의 양심으로 그녀를 만류하되 적극적으로 붙잡지도 혹은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는다. 가지 않는게 좋겠지만 간다면 막을 수 없다. 간대도 내가, 혹은 우리가 나서서 도와줄 생각은 없다는 표정이다.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 그들은 이미 이기적 개인으로 철저히 분리된 것이다.

6.5. 우리는 여자가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안개가 여자를 휘감고 조금씩 빨아먹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하얀 종이에 목탄으로 사람을 그린 모습이 저럴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완전한 백색 침묵 속에서 우회전 표지판이 살짝 떠올랐다. 여자의 팔과 다리와 핼쓱한 금발머리는 완전히 사라지고, 여름 원피스의 붉은 끄트머리만 잠시 하얀 림보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마저 사라졌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같은 책, 89페이지).

7. 최초의 1인 - 그 젊은 부인이 빠져나갔지만 마트 안의 누구도 바깥이 안전한지, 혹은 안전하지 않은지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안개가 닥쳐오는 순간, 그들은 엉겹결에 문을 걸어 잠그고 마트 안에 남았지만 사실 안개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註4). 안개가 안개라면 나가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여든 명이 각자의 의사에 따라 나가고 남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여든 개의 입이 떠들지만 여든 가지 선택이 나오지는 않는다. 일치 단결하여 상호 협력하지도 않는다. 정보는 없고 판단력은 마비된 이기적 개인들은 스스로 각자의 운명을 판돈으로 거는 대신에 '오피니안 리더'를 택함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확인하길 바란다. 이기적 개인이 모여 추구하는 공동선 - 바로 정치(政治)로의 작동이다. 가장 먼저 대두되는 것은 '남을 것이냐 나갈 것이냐'의 논란이다. 이는 다시금 보다 구체적인 성격을 가진 두 집단으로 바뀌어간다. 드레이튼과 올리, 짐, 마이론이 마트의 서측 저장고에서 촉수 괴물과 맞닥뜨리고 철없는 아르바이트생 노옴을 잃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다. 막연하게 '나가야 한다'였던 탈출파와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사태를 지켜보자'였던 신중파는 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집단으로 단단하게 굳어진다. 위협의 실체적 증거를 눈으로 확인한 전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썸띵 인 더 미스트', 그리고 증거의 신뢰성을 믿길 거부한 후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낫띵 인 더 미스트'라고 각각 주장한다. 마트 내 군중들의 첫번째 분열이요 그들 앞에 던져진 첫번째 시험이다.

8. 여기서 '낫띵 인 더 미스트'의 리더가 브랜트 노턴이라는 점은 드레이튼과의 사적인 대립을 대치 상황에 겹겹이 끼워넣으려는 전형적 장치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흥미로움도 준다. 그는 "당신 고소할꺼야" 라는 대사에서 보듯 ("고소해 버리겠어! 이번엔 콩밥 먹을 줄 알아! 이 사람이 날 모욕했습니다. 댁들이 증인이요.") 전형적인 미국인의 표상이기 이전에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재주로 먹고 사는 변호사다. 좀 천박한 용어를 빌자면 고학력에 진문직이다. 고로 이 시골마을의 특별할 것 없는 마트 안에서 벌어진 첨예한 대립을 정치적 구도로 보이게 만들 재주를 가졌다. 촉수 괴물로부터 도망쳐온 드레이튼파가 가장 먼저 설득시키려고 하는 인물이 노턴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누구도 믿지 않을 이 비현실적 상황을 사람들에게 납득시켜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허나 노턴은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의 기반은 이성이고 논리다. 저장고에서 촉수 괴물을 보았다는 드레이튼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는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여러분이 이걸 믿으신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만약 저 사람들이 거짓말이나 헛것을 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셔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증거가 불충분하단거죠.") 차라리 촌놈들이 자길 놀리려고 수작을 부린다고 믿는 편이 그에겐 훨씬 합리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진짜 논리가 아니고 그의 이성은 진짜 이성이 아니다. 이 마을 사람들과 드레이튼에게 품고 있던 사적인 원한을 분리시키지 못한 논리요 이성이기 때문이다. 보지 않고는 믿지도 않는, 심지어 믿지 못할 것은 보지도 않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전례없는 재난 앞에 도움이 될까?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듯 하다 (註5). 노턴과 그를 따르는 패거리 - 원작의 표현에 따르면 '골통클럽'은 가장 먼저 마트를 떠난다.

9. 이후 마트의 헤게모니는 '섬띵 인 더 미스트'로 완전히 넘어간다. 입장을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소수파인 골통클럽의 실패를 통해 안개 속에 뭔가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트는 다시금 다수의 '방어파 - 섬띵의 공격에 대비하자'와 모든 걸 포기한 소수의 '체념파 - 정말로 섬띵이 있으니 우린 다 죽게 될 것이다'로 나누어진다. 드레이튼과 올리, 그리고 마트의 지배인 등 그에 동조하는 다수는 개 사료푸대를 전면에 쌓고 보초를 세우고 밀대를 준비함으로써 방어의 태세를 갖추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어떤 사람들은 약을 먹고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목을 맨다. 술에 절거나 아예 정신 줄을 놓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급속도로 무너지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섬띵 인 더 미스트'라는 드레이튼 등의 말이 맞았다는 것은 노턴을 따라 나서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행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그들의 미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력, 판단력, 행동력이 뛰어난 드레이튼이나 사격 실력이 뛰어난 올리가 자신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나?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이해를 열망하게 된다. 뭔가 이 비현실적 상황을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갈구하는 것이다.

9.5. 커모디는 마치 태엽인행 같았다. 잠도 자지 않는 것 같았다. 커모디의 입에서 도레, 보슈, 조나단 에드워즈의 그림에서나 봄 직한 끔찍한 이야기들이 끝없이 뛰쳐나와 점점 절정을향해 치닫고 잇었다. 커모디의 무리는 부흥회의 광신도처럼 커모디를 따라 무언가를 중얼거렸고 앞뒤로 몸을 흔들기도 했다. 눈은 텅 빈채 반짝거렸다. 사람들은 커모디의 마법에 홀려있었다. (같은 책, 217쪽)

10.0. 앞서 지어낸 이야기의 뒷부분을 조금 더 만들어보자.
<안개는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가시질 않았다. 동굴 속의 유인원들은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발을 동동 구르며 시작도 끝도 없을 것만 같은 백색 물방울들의 저주를 바라보기만 했다. 보이기는 하나 만져지지는 않는 그것 - 안개는 그 속을 알 수가 없어 더욱 두려웠다. 젊고 패기있는 몇몇이 별 것 아니라 자신하면서 그 안으로 뛰어 들었지만 아직까지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 남자들은 모두 사냥 도구를 챙겨 들고 경계를 섰다. 여자와 아이들은 뒤로 물러나 동굴 깊숙한 곳에 가 있도록 했다. 밤이 깊었을 때 생전 처음보는 생물이 동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부리가 있었고 날개가 달렸으나 새는 아니었다. 훨씬 컸고 훨씬 징그러웠다. 그들은 전력을 다해 대항했지만 많은 가족과 친구를 잃을 수 밖에 없었다. 미지의 생물들은 어둠이 내린 뒤에 더 활발하게 움직이는지 밤마다 동굴을 공격했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고 두려움은 갈수록 커졌다. 그 무엇도 암담한 상황을 헤쳐나갈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 때 한 노파가 말했다. "내 평생 이런 난리를 겪어보지 못했어.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것은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를 능멸했기 때문이야.">

11. 처음엔 그 누구도 커모디 부인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註4). 미친 늙은이의 주절거림 쯤으로 생각했고 모두 그녀를 싫어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커모디 부인이 무의미한 방어나 무기력한 체념, 둘 중의 하나가 아닌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희생자가 늘면서부터다. 작은 괴물이 마트 내로 난입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이 상식 이상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린 원시 인류의 선택 - 바로 종교의 등장이다. 처음에 이는 기독교였다. ("보려하지 않는 자들만큼 어리석고 눈 먼 자 없으니 이제 눈을 뜨고 꿈에서들 깨어나요. 이 모든 건 예언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15장.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 일곱 천사의 일곱 제앙이 마치기까지는 /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하지만 곧 기독교를 빙자한 커모디의 사적 집단으로 변한다. 주도권은 서서히 커모디에게 넘어간다. 처음엔 한 명, 그리고 그 다음엔 두 명, 이윽고 열두 명. 드레이튼파가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한 채 희생자만 늘이는 상황이 지속될수록 역설적이게도 커모디의 영향력은 커진다.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커모디를 숨겨진 상징으로 이끌어 연결할 끈끈한 대사를 배치한다. 커모디가 어린 소녀들에게 겁을 주며 하는 말 ("신은 한 분이란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시지. 그 분은 엄격한 무적의 신이세요."). 그리고 그녀와 사사건건 충돌하는 젊은 여성 아만다 덤프라이스가 내리는 평가 ("커모디 부인의 시각은 너무 구약 성서에 치우쳐 있어요.").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압제와 수탈의 역사와 다름이 아니다.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근대 이후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의 논리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한편 갑자기 나타난 안개와 괴물을 설명하는 가장 설득력있는 근거 - '애로우헤드 프로젝트(註3)'는 몇몇 단편적 정보의 조각들을 모아 볼 때, 인간의 정복적 근성이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분석이 가능한데, 정복은 구약적 세계관이 지닌 대표적인 속성인 동시에 배타적인 기독교식 제국주의의 은밀한 키단어다. 따라서 '미스트' 속의 세계는 다음과 같은 재구성이 가능하게 된다. 무리한 소유욕과 오만한 정복욕이 빚어낸 위협과 공포가 외부에 있고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진실을 왜곡하고 공동체를 호도함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무리들이 내부에 있다. 한 뿌리에서 자라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자리바꿈을 하며 원인이 결과로, 다시 결과가 원인이 되며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결과는 고립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을 물리적으로 고립시킨 건 안개나 안개 속의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 고립시킨 것은 그들 스스로, 혹은 그들을 이끌어 두려움 앞에 서게 하는 주도 세력들이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처한 현실을 상기해 볼 때 꽤나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물론 커모디 부인은 처음부터 그런 걸 노리진 않았다. 애초부터 살짝 맛이 간 그녀에겐 광신만이 스스로를 이 저주받을 상황으로부터 구원받는 길이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적극적으로 상황을 이용하고 힘을 추구한다. 외부의 위협 강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따르기 때문이다.

11.5. 속죄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속죄야. 지금껏 신은 채찍과 갈편으로 우리를 가르치셨어!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금하신 비밀을 탄한 대가를 치러야 해! 이 땅이 입을 열어 추악한 악몽을 드러내고 있다고! 태산도 이 악목들을 막아주지는 못 해! 죽은 나무도 피난처가 될 수 없단 말이야! 어떻게 끝내지? 이 일을 어떻게 끝낼 거냐고? (중략) 속죄. 바로 그거야! 속죄만이 안개를 물리칠 수 있어! 속죄만이 이 괴물과 악몽을 막을 수 있어! 속죄만이! 속죄하지 않으면 너희들의 눈을 뒤덮은 안개가 너희들을 눈멀게 할지니라! (중략) 성서에 속죄가 뭐라고 씌여 있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눈과 마음에서 죄가 사해진다고? (같은 책, 220-221페이지)

12. 이로써 드레이튼을 비롯한 일곱 명은 (드레이튼의 아들인 빌리는 어린 아이니 제외) 도리어 소수파가 되어 버린다. 이들은 광기가 지배한 사회(마트)에서 내몰려 무엇이 있는지 모를 안개 속을 유영할 처지가 된다. ("나가야 할 이유가 또 있어요." / "난 남은 여생을 여기서 보내고 싶진 않아." / "여기 있느니 해보다 죽겠어요.") 교주화 되어가는 커모디 부인을 경계하며 탈출을 결의하는 이들의 푸념은 오싹한 구석이 있다. 안개 속의 괴물만큼 두려운 괴물들이 마트 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력은 드레이튼을 비롯한 이들 일곱이 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들 일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거칠게 나누자면 계급적으로는 중상(中上)은 된다. 드레이튼이 그렇듯 정상적인 가족을 꾸리며 적당한 질의 삶을 살고 있고 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적당한 교양을 지니고 마을 평균 이상의 삶을 누릴만큼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보다 심층적으로 바라보자면 이성적 맹신(盲信), 그리고 종교적 광신(狂信),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려고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잠식(蠶食)당하지도 않는다. 인간으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마지막까지 기본적인 상식과 온전한 가치로 사고하려고 애썼다. 그렇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한다. '그들의 선택이 옳은가?'는 이 대목에서 정확한 질문이 아니다. 탈출이라는 선택은 단지 상호 배타적 의견이 충돌하는 집단이 분열하는 와중에서 특정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단순한 전개였을 뿐이다. 고로 '그들은 구원받을 길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보다 타당하다. 다라본트는 상업영화의 숙명(宿命)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느낀 문제 의식의 표현인지, 어떻게든 결말을 지어보이지만 원작에서 스티븐 킹은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오히려 두려움을 극대화시킨다. 할아버지, 할머니, 젊은 남자, 젊은 여자, 그리고 아이의 조합 - (만약 그 끝이 구원이라면) 구원의 기준에 합당한 유사 가족만을 방주(方舟)에 태워 보낸 채 괴물들이 울부짖는 안개 속을 서서히 달려가게 한다 (註7). 계기판을 통해 점점 기름이 바닥나고 있음을 인지하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 스티븐 킹이 취한 결말이다 - 그는 드레이튼의 입을 빌어 스스로 '히치콕 식 결말'이었다고 인정한다.

13. '미스트'는 흥미롭다. 텍스트는 다층적이고 여러 갈래로 가지를 치고 있다. 상식적 문법(文法)을 따라가면서도 문법에서 벗어난, 혹은 문법상 필요없는 단서들을 의도적으로 잘 보이게 배치한다. 가령 괴물이 커모디 부인의 목에 앉았다가 그냥 날아가는 장면, 허리의 줄을 매달고 나갔던 카우보이 패션의 남성이 하반신만 남아 딸려오는 장면 - 원작에서는 피 묻은 줄만 딸려 오는 것으로 묘사, 이후 다시 그걸 고집스럽게 외부의 시선으로 비추는 까닭, 원작에서는 좀 맛이 간 수준이었던 커모디의 대사를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성경 인용으로 바꾼 의도 - 예컨데 앞서 언급했듯 "커모디 부인의 시각은 너무 구약 성서에 치우쳐 있어요." 같은 노골적 대사의 삽입, 파시즘의 광기에 내몰리는 젊은 군인 조셉을 유다에 비유하는 ("안개 속에 또 다른 유다가 있도다.") 커모디의 노골적인 대사, 최초로 마트를 떠났던 1인의 젊은 여자가 지닌 상징성, 드레이튼의 어린 아들 빌리가 보이는 퇴화적 징표 - 오지랖 넓은 아버지가 앞장서 싸우는 동안 빌리는 여러 여자들의 손에 의해 돌보아진다, 그 점에서 다시 집에 남겨두고 온 드레이튼의 부인 스테이시와 마트에서 만난 젊은 여성 아만다 덤프라이스의 대체 가능성, 여든 명의 사람(미국인)이 한 공간에 모였는데 아만다 덤프라이스 단 한 사람만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 탈출 씬의 막바지에서 그 총을 제 손에 쥐고자 목숨을 거는 드레이튼, 드레이튼의 웨건에 '여덟 명'이 타려다가 결국은 '다섯 명' 밖에 타지 못했다는 사실, 미국 영화로는 드물게 인종간 역할 배분의 정치적 공정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느낌 (註8), 드레이튼의 웨건이 서서히 마트를 빠져나가는 동안 '떠나는 자들'과 '남는 자들'은 엷은 안개와 유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기이한 장면, 얼마든지 다양한 독해가 나올 수 있는 구조다. 이 모든 것이 잘 짜여진 서스펜스 구조 안으로 응집되어 있고 적은 예산과 알뜰한 연출만으로 가능했다.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2008/02/24) 



(註1) 스티븐 킹 단편집 : 스켈레톤 크루,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2006). 이하 모두 본문 인용도 이 번역본에 기준함.
(註2) 사실 스티븐 킹이 '안개'라는 중편이 발표한 것은 1980년의 일이다. 당시 작품집 이름은 '다크 포시스(Dark Forces)'. 물론 당시는 9.11 테러가 발생하기 훨씬 전이었으므로 당연히 테러 이후의 미국을 의도한 바는 아니다. 하지만 H.G. 웰스의 '우주전쟁'과 스티븐 스필버그 '우주전쟁'의 관계가 그러했듯 중요한 것은 과거의 텍스트가 오늘의 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註3) 안개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여든 개의 입이 말하는 다양한 억측과 마찬가지로 '애로우헤드 프로젝트' 역시 한 가지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다. 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부분이 있어 조금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즉,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의 답으로 적절한 것은 이제껏 듣도 보도 못했던 세균전이나 핵폭발이 아니라 마을에서 불과 50킬로미터 떨어진 군부대에서 지난 수 개월 동안 이루어지고 있었던 (혹은 그렇게 믿어지던) '애로우헤드 프로젝트'쪽일 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
(註4) 곰곰이 생각해보면 안개의 역할은 이중적이다. 두려움의 근원이 되었으나 동시에 두려움으로부터 그들을 가려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원작의 드레이튼은 유리창 너머의 빽빽한 안개를 앞에 두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쩌면 안개는 우리를 숨겨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움직임으로써 마트의 안에서 안개로 빽빽히 들어찬 밖을 비추기도 하고 반대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가령 안개 속 저 너머에서부터 마트의 정면으로 서서히 다가와 파고드는 화면은 등장인물 중 누구의 시선으로도 불가능한 제 3자의 것이다. 이로써 이 작품은 안개의 이중성을 십분 활용하고 마트 내부를 관찰하는 시각에 객관적 성격을 부여한다. 덕분에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 혹은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아주 우아한 알레고리가 된다.
(註5) 드레이튼은 화가이지만 생계가 어렵던 시절부터 영화 포스터를 비롯한 헐리우드 관련 일을 많이 해왔다. 노턴은 드레이튼과의 논쟁 중에 그 점을 강조한다. 노턴은 잘 교육받고 자기 생활을 풍족히 누리는 미국인의 전형이다. 동시에 고소득자인 자신이 자기보다 낮은 생활수준의 사람들까지 거둬먹여야 하는 구조에 불만도 가지고 있다. ("당신들은 외지인 싫어하잖소, 아니오? 난 여기에 세금도 내고, 여기서 돈도 쓰는데…….") 하지만 그는 공공의 위기 상황에서 헐리우드 삽화를 그리는 화가보다도 하는 일이 없다. 오직 말 뿐이다. 이 지점에서 과거 아둔함의 표상이었던 헐리우드가 최근 무섭게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註6) 원작에 의하면 커모디 부인은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사람들에게 괴짜로 인식되어 있었다. 주술이나 기괴한 잡동사니를 사람들에게 팔았고, 모두가 그녀를 싫어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드레이튼이 커모디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떠올린다. 영화는 보다 직접적이다. 종교라는 큰 범주에서 관찰하기보단 커모디의 입을 빌어서 그녀의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피력한다. 이 작품은 결코 에둘러치지 않는다. 커모디의 일장연설을 보라.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우리가 벌 받고 있음을? 왜냐고? 주님의 뜻을 거슬렀으니까. 태고부터 내려온 금지된 율법에 대항했으니까. 달 위를 걸어 다니질 않나. 그렇죠? 여러분? 아니면, 아니면…… 원자를 쪼개질 않나, 아니면…… 줄기세포도 낙태도…… 오직 주님에게만 허락된 생명의 비밀을 파괴했어.") 이 작품이 커모디에 부여한 정치사회적 성격이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부분이다.
(註7) 드레이튼의 유사 가족은 꽤 눈에 잘 띄는 장치다. 사실 스티븐 킹이 애초에 그런 의도로 썼을 것이라 본다. 아만다는 여러 차례에 거쳐 위태로운 마트 안에서 빌리를 돌봄으로써 - 약국 탐사에 나서는 드레이튼은 빌리를 아만다에게 맡긴다 -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한다. 뿐만 아니라 원작에선 드레이튼이 아만다 덤프라이스에게 성적 매력을 느꼈고, 모두가 잠든 사이에 관계를 가지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는 아내 스테이시와 빌리를 떠올리며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지만 아만다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진 못한다. 영화에선 이 부분이 빠졌다. 하지만 원작과 마찬가지로 커모디는 아만다와 드레이튼의 관계를 의심하는 묘한 뉘앙스의 말을 한다. 따라서 이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놓고 읽는다면 의문은 이렇게 확장된다. 드레이튼의 유사 가족은 커모디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마트 내에선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결정권(마트 정문에서 가까이에 있는 웨건)을 가진 드레이튼은 탈출해야한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註8) 노아의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 올라탔다. / 노아의 시대에는 인종의 구분이 생겨나기 이전이었다. / 재구성된 다섯 가족은 흡사 방주에 올라탄 모습으로 이성과 종교의 광기에 의해 난도질당한 세계를 떠난다. 하지만 여덟이 아니라 다섯이다. 하나는 마트 안으로 되돌아갔고 하나는 방주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헤메다 죽었으며 하나는 방주 바로 앞에서 괴물에게 휩쓸려갔다. 게다가 이 새로운 드레이튼의 가족은 총을 가지고 방주에 올라탔다. 이 두 가지 사항은 이 작품이 과거 노아의 재구성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노아, 혹은 제 2의 노아를 이야기하고 있을 여지를 드러낸다. 홍수는 안개와 괴물로 바뀌었다. 심판의 끝은 구원인가? 확답을 보류하는 스티븐 킹의 입장이나(20세기판 노아), 딱 잘라 말하는 프랭크 다라본트의 입장을(포스트 9.11.시대의 노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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