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래미안 광고를 이해하는 방법

쇼트 펀트 포메이션/쇼트 펀트 포메이션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7. 12. 27.

본문

  고운 때깔 아파트에 살면 인생 때깔도 고와진다. 아파트 광고의 제 1법칙이다. 대개는 30대에서 40대 사이의 우아하고 안정감 있는 여배우를 내세워서 그들은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화려하고 안락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고급 아파트의 광고로 갈수록 그 화려함과 안락함은 강도를 더해간다.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리고 인테리어는 고급 호텔에 가까워진다. 어설피 몇천만 원 들여서는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다. 그 안을 거닐고 그 안에서 영위하는 삶이란 분명 매력적으로 보인다.

  역사를 말하자면 초창기의 아파트 광고는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실용성과 편리성, 즉 그것이 도시적 현대적 생활방식임을 홍보하는 측면이 강했다. 이후 수도권 절반 이상의 인구가 아파트에 살게 될 정도로 대중화된 이후에는 다른 아파트 보다 크고 넓은, 즉 평수의 문제로 가져가는 측면이 강했다. 이제 거기에 더해서 '플러스 알파'의 삶을 말한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일상의 영위가 가능하며 모든 문화, 스포츠, 기타 여가 생활을 모두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광고를 보면서 그런 삶을 꿈꾼다. 꿈을 꾸게 한다는 것 - 그 자체로 브랜드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경남 아너스빌, 금호 베스트빌, 대우 푸르지오, 대림 e-편한세상, 동부 센트레빌, 두산 위브, 롯데 캐슬, 벽산 블루밍, 삼성 래미안, 성원 상떼빌, 신동아 파밀리에, 쌍용 스윗닷홈, 에스케이 뷰, 엘지 자이, 코오롱 하늘채, 태영 데시앙, 포스코 더 샵, 풍림 아이원, 한라 비발디, 한신 휴, 한화 꿈에 그린, 현대 아이파크 등. (가나다 순) 물론 여기에도 더 대중적인 브랜드가 있고 덜 대중적인 브랜드가 있고 그나마 양심은 간직한 광고와 그렇지 않은 광고가 있는 데다가 이제는 뭐 너무 익숙한 이름들이기까지 하여 특별한 호사라고 하기까지도 어렵다.

  이들의 광고 전략이 나쁜가?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근본적으로는 아파트 광고라는 것이 통상의 상품 광고들과 차이를 보이는 기괴한 부분(그러니까 당장 없는 상품을 먼저 광고하여 팔아놓고 이후에 상품을 만드는 방식)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어찌할 방법은 없다면 이제는 저 아파트 광고들이 부추기는 이미지의 문제를 생각해 볼 시점이 된 것 같다. 저렇게 그럴듯한 이름들이 붙어지기 전에 지어진 구형 아파트 부녀회들까지 이를 악물고 나서 개명 아닌 개명 작업을 벌이는 상황을 보자면 이 광고들이 심어준 이미지들이 이미 우리 사회의 인지체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1998년에 지어진 '두산 아파트'의 이름을 '위브'로 바꾸면 똑같은 기반 시설의 똑같은 세월을 묵은 아파트임에도 값이 올라갈 것이라는 믿음은 무섭다. 전국적으로 번진 아파트 이름 변경 추진. 부녀회와 그 뒤에 은밀히 숨어있을 각종 집단의 주도 하에 진행되는 주민투표 결과는 이해가 가는 한 편으로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새로 지어진 '위브'와 '위브'로 이름을 바꾸어 달은 두산아파트, 물론 다르다. 하지만 같기를 희망한다. 그 실질적 차이 보다는 당장 보이는 '위브'와 '두산아파트'라는 이름에서 오는 차이를 더 크게 느낀다. '두산 아파트에서의 삶'보다는 '위브에서의 삶'에 더 우월한 가치를 두는 것이다.

  삼성물산 '래미안'의 이번 광고가 이들과 특별히 다른 광고 전략을 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딴 세상, 딴 나라, 딴 인류를 비추는 양 화려하게 포장해 놓은 몇몇 광고에 비하면 많이 검소한 편이라고 까지 할 수도 있겠다. 주거 공간의 내부구조도 등장하지 않는다. 첨단의 부대 시설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탑 모델을 기용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올 한 해 가장 기분 나쁜 광고 중 하나였다는 꼬리표를 붙인다면 억울해 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불쾌하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제까지의 아파트 광고들은, 물론 나빴지만, 거짓된 환상을 심어줄지언정 적어도 저울질은 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스토리라인도 없었다. 그저 가볍거나 몽환적이었다. 때때로 우린 그들의 화려한 삶에 버럭 울분을 토하며 애꿎은 모델들에게 분풀이를 하지만, 거기서 끝났다. 그 이상은 반응해야 할 필요도 반응해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칠렐레 팔렐레 래미안의 정원과 유리돔을 거닐며 철 지난 사랑타령을 하던 장서희, 김성수 주연의 예전 래미안 광고다. 옛 연인이 래미안에서 재회하게 된다는 아파트 공화국에 더없이 걸맞은 설정은 '아주 놀고들 자빠졌다'라는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대부분은 무감하게 받아들였다. 그건 사람들이 드라마를 워낙 많이 봐서일 수도 있고, 그 환상의 주인공 김성수조차 래미안에 살고 싶냐는 질문에 "돈만 있으면," 이라고 대꾸할 만큼 래미안이 비싸서 일 수도 있지만, 환상의 무게감이 제대로 와닿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정말로 나와는 상관없는 그림들이라 믿어버리는 것이다. "클라이맥스를 산다. 래미안!" - 그래, 니들은 클라이맥스를 살아라. 뭐 이 정도의 의연함이랄까.

  하지만 이번 래미안 광고는 안개처럼 뿌옇던 '래미안에서 생활'의 실체를 당당하고 말끔하게 드러낸다. 거짓된 환상이 아니라며 구체적인 질량을 측정하여 들이 민다. 당신의 친구와 당신의 연인이 래미안에 살고 있다는 꽤 구체적인 이야기가 객관적인 척 하는 나레이터를 통해 전달되는 순간 우리는 이걸 무심하게 던져 버릴 수 없게 된다 (註1). 광고는 양팔 저울을 가져다 놓고 '래미안에 사는 사람'과 '래미안에 살지 않는 사람'을 뻔뻔하게 비교한다. '연인' 편에서는 젊은 여성이 처음으로 집에 남자친구를 데려가는 내용을 다룬다. '친구' 편에서는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를 자기네 아파트로 데려가는 내용을 다룬다. 어쩌면 우리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인 걸까? 광고에 본디 소비자들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기 마련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연인'편에서 수정씨가 처음으로 집에 데려가는 남자친구는,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에 동굴 저 너머에 래미안의 이름이 반짝이자 수정씨를 지그시 내려다본다. 과연 우리는 그 눈빛에서 무얼 읽어 내어야 하는가. 부러움이라면 배알도 없는 놈이고, 기쁨이라면 천박한 놈이고, 사랑스러움이라면 변태일테니, 뭘로 보나 다 문제다. 아파트 벽면의 브랜드를 올려다보며 흘러나오는 마지막 멘트 "수정씨는 래미안에 삽니다"는 보는 이를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한편 '친구'편에서 남자아이 창준이는 같은 반 여자아이 소윤이에게 우리 집에 놀러오라고 하고 소윤이는 너희 집에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징검다리를 건너고 돌다리를 지나 아이들은 집에 가지 않고 잘 갖추어진 단지 내 놀이터에서 뛰어 논다. 소윤이가 내일 또 와도 되느냐고 묻자 창준이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묘한 자부심이 교차한다. 역시 아파트 벽면의 브랜드를 올려다보며 흘러나오는 마지막 멘트 "창준이는 래미안에 삽니다"는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상식의 경계가 무너진 느낌이다.

  버블경제와 외환위기를 거치며 아파트 광고 전쟁이 불을 뿜으면서부터 지금까지가 '이미지 전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이미지에 더해 보다 구체적으로 와닿는 현실적 질량을 지닌 것들이 담길 것이고, 삼성물산이 성공적이었다 자평한다는 소문이 있는 이 광고는 (맞다. 만약 당신이 이 광고에서 거부감을 느꼈다면 그들이 설정한 타겟층이 아니었다는 뜻일런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이영애가 '자이'에서 런닝머신을 뛰고 여가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밤이 내리면 드레스 입고 돌아다닌다고 생기는 게 위화감의 원천이라 믿어왔다. 따라서 유명 여배우들이 일제 각성해서 건설재벌들의 광고를 거부하기만 하면 이 미쳐 돌아가는 아파트 문제의 절반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2007년 12월)

 

(註1) 이후 2008년에 이 아파트 광고는 세번째 '동창'편을 내놓는다. 내용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Addition: 2008년  6월 추가)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