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092. 대나무를 둘로 쪼개는 기세로 정면돌파하라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7. 7. 22.

본문


  다음은 삼십팔번 김유석(Kim, You Suck) 씨. 김유석씨 들어오세요. 유석은 반사적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먹이와 종소리를 동시에 기억해, 종소리만 들려도 먹이없이 침을 흘리는 그 개처럼 말이다. 파블로랬나. 파블로프랬나. 그 놈의 개처럼. 그는 황급히 상의 단추를 끼웠으며 바지에 묻은 하얀 실밥을 탁탁 털어냈다. 또한 넥타이를 반듯하게 고쳐 매었으며 거울도 없는데 거울이라도 있는듯 머리칼을 좌우로 단정하게 정리하였다. 하지만 외모의 말끔함과는 무관하게 어딘가 그는 적잖이 주눅이 들어보였다. 긴장 때문일까. 마른 침을 꿀떡 삼키고 그는 자길 호명했던 사람을 따라 '방'에 들어갔다. 그건 정말이지 '방'같은 것이어서 과연 아니 '방'일 수 없는 것이었다. 끼이익. 문에서는 백년 묵은 소리가 났는데 그 음색이며 음량이 적절히도 불길함을 환기시켜, 유석으로서는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끼이익. 바로 그런 것이다. 문의 안쪽은 바깥과 완전히 다른 -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였다. 난류를 타고 어지럽게 휘감아 도는 난데없는 방향제의 내음이나, 춥지도 않고 따습지도 않은 적절히도 적당한 온도나, 뭐 그 밖의 어느 것으로 보나 마찬가지로. 방의 중앙에는 하나의 의자가 불안하게 놓여 있고 원형의 테이블이 그 하나의 의자를 둘러 싸고 있다. 족히 네 사람은 앉을 법한 거기엔 에누리없이 네 사람이 앉아서 유석을 기다린다. 말하자면 갱 영화에서 "어서오라구, 친구.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네"와 비스무리한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유석을 기다리던 네 사람은 분명 사람이었으나 어떤 면에 있어서는 사람보다 더 사람같지 않았고, 또 다른 어떤 면에 있어서는 사람보다 더 사람같았다. 그들은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닌 것이 흡사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보였다. 가령 가장 왼쪽에 앉은 녀석은 머리가 크고 목이 짧은데다가 눈이 째지고 코가 위로 완전히 개방되어있어 마치, 
돼지, 
돼지, 돼지처럼 보였다. 돼지말이다, 돼지. 돼지, 돼지를 닮았으므로 지금부터 그를 돼지라고 부르기로 한다. 돼지는 그의 짧은 목에 넥타이를 단단히 조여매고 있어 만약 누군가 그걸 잡아당긴다면 그대로 목이 졸려 죽을 지경을 하고 있었다. 그를 쳐다볼 때마다 넥타이를 잡아 당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돼지가 말했다. "삼십팔번 김유석씨?" 유석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하되 적당히 큰 목소리로 분명하게 답했다. "예!" "앉으세요." 그는 자리에 앉았다. 


 

  방은 커다란 원형의 모양으로 면접관들이 그를 삼백육십도로 둘러싸고 앉아 있는 모양새였다. 적이 앞에만 있어도 쉽지 않을 터인데 좌우로 앞뒤로 가득 들어차 있으니 부담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유석은 침을 꿀떡 삼켰는데, 행여 그 침 삼키는 소리가 그들에게 들리지나 않았을가 걱정마저 하였다. 왼쪽에서 두번째 앉은 놈은 머리가 조막만하게 작은데 그 대신에 목이 길었다. 턱 끝에서부터 울대뼈까지 족히 두 뼘은 되어 보였다. 그런 목을 가지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니, 그는 두려운 와중에서도 충분히 놀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기린, 
기린, 기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기린, 기린, 기린을 닮았으므로 지금부터 그를 기린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기린은 돼지와는 달리 목이 길어서 양복 상의의 칼라 위로도 길고 시원한 목이 드러나 있었다. 다만 그것은 퍽이나 불안해 보였는데 그의 몸이나 머리의 물리적 부피가 그 경이로운 목의 길이에 부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사슴이 아닌 기린이라한들 모가지가 길어 슬프긴 할 터였다. 기린이 말했다. "삼십팔번 김유석 씨?" 유석은 최대한 빠릿빠릿한 자세로 답했다. "예!" 기린이 말했다. "저희 그룹에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석이 답했다. "예" 기린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김우석씨." 이 대목에서 유석은 아주 조심스럽게 (정말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기린에게 할 말이 있음을 알렸다. "저기…" 기린이 물었다. "뭡니까?" 유석이 답했다. "김유석입니다. 김우석이 아니라……." 기린은 테이블 위의 서류철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말했다. "아무튼요. 우석이나 유석이나 You Suck이나." 



 

   돼지와 기린이 가장 오른쪽에 앉은 면접관에게 눈길을 돌렸다. 유석의 면접은 그 세번째 면접관에서부터 시작하게 될 것임을 유석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세번째 면접관은 머리가 얍삽한 모양새에 눈이 얍삽하게 찢어져 있었다. 전체적 인상이 상당히 표독스러웠는데 특히 그가 말을 시작하자 유석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유석씨. 초등고등학교를 졸업하셨네요." 세번째 남자의 혀는 실처럼 가느다랗고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끝없이 날름거리는 끔직한 모양새가 흡사, 
뱀, 
뱀, 뱀처럼 보였다. 뱀. 뱀, 뱀을 닮았으므로 지금부터 그를 뱀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뱀은 인상만으로도 충분히 독기를 뿜어대는 그런 남자였다. "예, 맞습니다." 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학교는 아니군요." 대답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몰라 망설이던 유석은 끝내 그에게 동의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혹여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 흠결로 잡힐까 염려했던 탓이다. "대학은 초등대학교 출신이네요." 유석이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뱀은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별로 아닙니까?" 유석은 또다시 뱀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뱀이 덧붙였다. "학점도 별로고. 자격증도 없고. 영어 점수도 미달이고. 인상적인 사회 활동도 없군요." 뱀의 혀가 수시로 날름거려 유석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더구나 김유석씨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나이가 좀 많은 것 같습니다. 스펙은 평범한데 졸업은 늦었고... 그렇다면 그 시간동안 다른 준비를 하셨다고 말씀하실 수 있나요?" 유석이 물었다. "네?" 뱀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우리가 본인을 왜 뽑아야 하느냐고요?"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진 뱀의 말에 유석은 화들짝 놀랐다. 식은땀에 와이셔츠가 축축하게 젖었다. 허를 찔렸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그 악명 높던 '압박면접'이로구나. 


 

  "어쩌다가 그 나이까지 취직을 안했습니까?" 돼지가 끼어들었다. 돼지의 그 짧은 모가지를 꽁꽁 동여맨 넥타이는 보는 사람마저 답답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정입니까?" 유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돼지가 재차 물었다. "말하기 곤란합니까?" 유석은 이것이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가계가 어려워 대학 시절 휴학을 많이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습니다." 돼지가 코를 틍틍거렸다. "그래서 졸업하는데 7년이나 걸렸군요. 난 초등대가 7년제인줄 알았습니다." 돼지의 빈정거림은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기린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월 얼마를 법니까?" 유석이 대답했다. "과외도 하고 까페에서도 일했습니다. 모두 합쳐서 월 백만원 정도 벌었습니다. 육개월을 벌어서 나머지 육개월동안 학교에 다녔습니다." 기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가계가 어려우면 빨리 졸업해서 취직하는게 더 낫지 않은가요?" 유석이 말 끝을 흐렸다. "그건…" 기린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김유석 씨가 실은 가계를 책임지고 싶지 않아 졸업을 최대한 늦추었던 것은 아닙니까?" 유석은 강하게 부정했다. "등록금이 없었습니다. 대학도 등록금을 벌어야 다니는거죠." 그러나 기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여기 김유석 씨 성적증명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초등대 장학금 규정입니다. 좀 알아보니 초등대는 재학생의 상당수에게 장학금을 대준다고 하더군요. 초등대 재단이 돈이 많다는 건 알았는데 그 정도인줄은 몰랐습니다." 유석은 그가 도대체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인지 몰라 머뭇거렸다. 돼지가 다시 끼어들었다. "학점이 왜 이 모양입니까?" 유석이 변명했다. "적성에 맞는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돼지가 비꼬았다. "그럼 다니지 말았어야 하는게 아닙니까? 그만큼 집안 사정이 어려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등허리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뱀이 다시 끼어들었다. "집이 월계동으로 되어있는데 맞습니까?" 유석이 대꾸했다. "예, 맞습니다." 이 양반들이 무슨 인사 청문회를 하나, 하는 생각에 의아하면서도 어쨌든 한 고비는 넘겼다는 생각에 유석은 안도했다. 뱀이 물었다. "주영아파트라. 몇 평짜립니까?" 유석은 당황스러웠다. "예?" 뱀이 짜증을 냈다. "탁 까놓고 얘기합시다. 몇 평짜리냐고요?" 유석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스물 네 평입니다." 뱀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았다. "스물 네 평이요? 거기서 다섯 식구가 같이 삽니까?" 유석이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뱀의 혀가 날름거렸다. "좁지 않습니까?" 유석은 고개를 저었다. "좁진 않습니다." 뱀은 유석은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워낙 사납고 소름끼쳐 유석은 그냥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뱀의 다음 말은 그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김유석 씨가 오늘 지원자 중 가장 적은 평수에 삽니다. 짐작하셨습니까?" 유석이 답했다. "아닙니다. 몰랐습니다." 유석은 그들이 부러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분이 치미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뱀이 질문했다. "아버진 뭐하십니까?" 유석이 대답했다. "교사이십니다." 뱀이 다시 물었다. "어떤 교사요?" 유석이 다시 답했다. "중학교 선생님이십니다." 뱀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사라. 좋은 직업이죠. 숭고한 일이고. 김유석 씨는 어떻습니까? 교사라는 직업이." 유석이 되물었다. "예?" 뱀이 부연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냔 말입니다." 유석이 말했다. "훌륭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뱀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김유석 씨가 중고교 시절 만났던 선생님들은 어땠습니까? 그 중 가장 훌륭한 분 얘기를 들려주시죠." 유석은 잠시 멈칫거렸다. 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 들었다. "없습니까? 존경할만한 은사님이?" 빨리 뭔가를 대답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유석은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없었군요. 존경할만한 은사님이. 혹시 모두 개자식들 뿐이었습니까?" 그 과격한 지적에 흠칫했으나 유석은 자기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적잖이 당황하였다. "좋습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교사라는 직업이." "그건…" 뱀이 채근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까?" 유석이 머뭇거렸다. "저기……." 뱀이 한 번 더 물었다. "아버지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까?" 유석은 여전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뱀은 유석을 더 몰아붙였다. "김유석 씨는 아버지를 정말로 존경합니까?" 유석이 답했다. "예, 존경합니다." 얄밉게도 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김유석 씨는 정말로 아버지를 존경하시는군요. 아버님께서 참 든든해하시겠습니다."

  

 

  이번에는 돼지가 나섰다. "이번엔 어머니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군요." 유석은 피로감을 느꼈다. "가정 주부십니다." 돼지가 빈정거렸다. "알겠습니다. 가정 주부, 솥뚜껑 운전이라는 말이죠. 혹시 김유석 씨, 여자 친구는 있습니까?" 유석이 답했다. "예, 있습니다." 돼지는 또 코를 킁킁 거렸다. "예쁩니까?" 유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쁩니다." 돼지는 짖궂은 표정을 지었다. "결혼할 생각도 있습니까?" 유석은 자신있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나이 많다고 타박했으니 결혼을 전제로 만날 법한 나이라는 것도 알겠지, 라고 생각했다. 돼지가 다시 물었다. "그 여자분 직장에 다닙니까?" 유석이 답했다. "예 맞습니다." 돼지의 얼굴은 참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저희가 좀 알아보니 여자분이 수성그룹에서 일하십디다. 대학은 서울대학을 나왔더군요. 회사 내 평판도 나쁘지 않군요. 참 대단한 재원입니다." 유석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그걸 어떻게…" 실은 그걸 어떻게 캐고 다녔냐고 묻고 싶었다. 돼지가 물었다. "좋습니다. 만약에 두 분이 결혼을 했다고 칩시다. 여자분이 수성그룹을 그만두고 가정주부로 집안일만 하겠다고 합니다. 김유석 씨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김유석 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 문제라면 생각해 둔 바가 있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답해야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당사자가 원하지 않아도 출산 휴직을 하게 되면 직장에서 그렇게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단은 분명한 상황 파악이 우선시되어야 하겠지만 가능한 경력을 이어가도록 설득을 해보겠습니다. 돼지가 얼굴을 찌푸였다. "너무 식상한 답변이군요. 정말 그게 답니까? 여자분 연봉이 벌써 사천만원이던데 혹시 돈 때문은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 김유석 씨는 당분간 그만큼 벌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유석은 현기증을 느꼈다. 피가 머리 꼭대기로 쏠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분명 저 혼자 벌어서는 지출을 감당할 수 없을테니까요." 돼지가 빈정거렸다. "아마 스물 네 평 아파트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겁니다." 



 

  이게 무슨 면접이람. 유석은 드디어 역정이 났다. 보통 면접이라면 당연히, 
"당신이 이 회사의 경영주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혹은 
"당신의 상사와 그 윗 상사가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이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혹은 
"당신은 조직과 개인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당신은 한미 에프티에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등의 질문을 받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유석은 그런 질문에 논리 정연하게 답할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해두었더랬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이 면접관이란 자식들은 지금 압박면접이라는 핑계로 면접자를 괴롭히고 있는게 아닌가. 유석은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기린의 차례였다. "김유석 씨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봅시다." 유석은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제 이 정신나간 짓거리가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엉덩이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 동물들에게 호통을 치고 문을 박차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김유석 씨는 애인 말고도 여자친구들이 있습니까?" 유석이 대꾸했다. "만나서 밥먹고 얘기하는 친구들이라면…, 예, 있습니다." 기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유석이 답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 동무들입니다. 남들 다 그렇듯이…" 기린의 그 긴 목은 갈대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아무래도 너무 길어서 그런지 불안해보였다. "김유석 씨 애인도 남자친구들이 있을까요?" 유석은 대충 얼버무였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 친구도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나왔으니까요." 사뭇 재치있는 답변이라고 생각했으나 면접관 중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강건신(Gang, Gun Sin)이라는 이름을 압니까?" 물론이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기린이 물었다. "어떤 사입니까?" 유석이 답했다. "대학 동창입니다. 같은 과를 나왔습니다." 기린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목이 길어 그러지 못하는 듯 했다. "김유석 씨 애인과 강건신 씨도 아는 사입니까?" 유석이 대꾸했다. "예, 그렇습니다." 유석은 궁금한게 많았다. 저들이 강건신을 어떻게 아는지, 또 안다한들 그 이야기를 왜 여기에서 꺼내는지. 기린이 물었다. "그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유석이 대답했다. "저를 통해서 술자리에서 몇 번 같이 만났습니다. 제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이니까요." 기린이 눈을 번쩍였다.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되어 김유석 씨는 좋았습니까?" 유석이 대꾸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 가장 친한 친구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알게 된다는 건 좋은 일이죠." 기린은 그 위태롭게 길다란 모가지를 도리도리 저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령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수도 있죠. 애인을 믿습니까?" 지금 이 자식들이 무슨 개소리를 해대는거야? 

유석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기린이 다시 물었다. "단 일퍼센트도 그런 가능성이 없었습니까?" 유석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죠." 기린이 계속 그를 거슬리게 했다. "혹시 김유석 씨 몰래 둘이 따로 만났다던가 둘이 전화 통화를 했다던가, 그럴 가능성이 없었습니까?" 유석은 당하게 부정했다. "그럴리가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기린이 말했다. "이유라는건 말입니다. 항상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그게 바로 이유입니다."

 

  기린은 테이블에 놓인 산더미같은 서류철을 넘겨보며 혀를 끌끌 찼다. "사람을 너무 믿어선 안됩니다. 세상에는 당신의 눈과 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게 있는 법입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유석은 짜증이 났다. 돼지가 말했다. "김유석 씨 몰래 둘이 여행이라도 갔다고 가정합시다.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유석은 단호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기린이 말했다. "애인분의 마음이 강건신 씨에게 기울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땐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유석은 그의 연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절대 그럴리가 없습니다." 뱀이 끼어들었다. "둘이 같이 잤다고 칩시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다들 미쳤구만. 유석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쳤구만. 당신들 다 미쳤어. 이 따위가 무슨 면접이야!" 하지만 면접관들, 그러니까 돼지와 기린과 뱀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킬킬거리며 웃었다. "왜 화를 냅니까?" 기린의 말이었다. "당신은 탈락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할 자세가 안 되어 있군요." 이건 돼지의 말이었다. "뭔가 찔리고 뭔가 불안한게 있는게지." 뱀이 쐐기를 박았다. 


 

  유석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면접관들의 책상으로 달려들었다.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 돼지의 얼굴을 찍었다. 꿰엑, 하는 소리와 함께 돼지의 왼쪽 뺨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뭐하는 짓이야? 잡아!" 기린과 뱀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유석은 재빨리 테이블 위의 커터칼을 집어 들었다. 기린과 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쓰러져 버둥거리는 돼지에게 다가갔다. 따다다닥. 날카롭게 심을 뽑아낸 커터칼은 이내 돼지의 몸속으로 파고 들었다. 유석은 그걸 힘것 그어 돼지의 몸을 반으로 갈라 놓았다. 돼지의 몸 안에 잘 배열되어 들어가 있던 크고 작은 내장기관들이 뭉클뭉클 쏟아져 나왔고 바닥에 깔려 있던 고급 양탄자가 적갈색으로 물들었다. 유석은 칼을 기린과 뱀 쪽을 향해 들이 대고 소리쳤다. "다시 한번 말해봐, 아까 했던 말 그대로 한번 지껄여보라고." 유석은 매섭게 커터칼을 휘둘렀고 기린과 뱀은 구석진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기린이 소리를 질렀다. "삼십팔번 김유석 씨. 당신은 해고야, 아니 아직 회사에 들어오지도 못했으니 그냥 지원 탈락이겠네." 뱀도 이죽거렸다. "게다가 이제 살인자지. 경찰이 몰려올꺼야." "입 닥쳐." 유석은 그들 쪽으로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갔다. "김유석 씨, 당신이 꿈꾸던 생활은 이제 모두 안녕이야. 어덯게 하면 좋을까." 기린의 비웃음이었다. "당신 아버지는 살인자를 아들로 두게 된거야. 살인자의 아버지가 어떻게 떳떳하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지?" 유석은 소리를 질렀다. "닥치라니깐!" 그러나 뱀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김유석 씨, 당신은 감옥에 갈꺼야. 사형이 아니라면 평생 감옥에서 썩겠지." 다음 말이 이어졌다. "당신 가족들은 그 손바닥만한 스물 네 평 아파트마저 팔아야 할꺼야." 또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럼 당신 애인은 당신을 떠날거야." 또 다음 말이 이어졌다. "어쩌면 강건신이와 눈이 맞을런지도 모르지. 정말로 말이야." 유석은 뱀에게 달려 들었다. 뱀의 역겨운 얼굴에 주먹을 한번 날리고 쓰러진 뱀의 날름거리는 혀를 잘라버렸다. "웁웁웁웁…" 뱀의 혀는 잘려나간 다음에도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유석은 뱀을 사정없이 걷어찼고 피를 토할 때까지 세찬 발길질을 멈추질 않았다. "다시 한번 지껄여봐. 이 교활한 자식들아." 뒤이어 유석은 살금살금 뒤로 물러나 달아나려는 기린 또한 놓치지 않았다. "이런 개자식이!" 기린을 뒤에서 끌어안고 그 가느다란 목을 두 동강 내 버렸다. 뼈가 몇 개인지 모를 그 흉측한 목은 바닥을 막대사탕처럼 굴러다녔다. "니넨 죽어도 싸!"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유석은 감전된 사람처럼 버둥거리는 뱀의 목에 커터칼을 깊게 꽂아 넣었다. 그리고 길게 끌어내려 완전히 반으로 갈랐다. 애써 준비한 정장에 피를 가득 묻힌 채로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문득 유석은 자기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면접관이 셋이 아니라 넷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맞다. 오늘의 면접은 일 대 사 면접이랬다. 한 놈이 더 있는 것이다. "뭐야? 한 새낀 어디 있어? 어디 숨었어?" 돼지, 기린, 그리고 뱀. 더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처음엔 면접관 네 명이 이 방 안에 있었는데…



 

  유석을 제외한 그 방 안의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된 무렵, 그는 손수건을 꺼내 더럽혀진 옷과 구두를 정성껏 닦았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 모로 접혀있는 신문지를 하나 꺼냈다. 압박면접에 대처해야하는 면접자들에게 보내는 조언이라며 오늘 아침 신문에 실렸던 기사를 오래낸 것이다. 

'대나무를 둘로 쪼개는 기세로 정면 돌파하라!'

 

(2007년 07월)

반응형

'낙농콩단 > Season 6-10 (2006-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4. 샤를로트 코르테와 기술해방전선  (0) 2007.09.16
093. 422일간의 세계일주  (0) 2007.08.19
091. 형수님 달린다  (0) 2007.06.24
089. 위켄드 업데이트  (0) 2007.04.29
088. 패닉룸 대소동  (0) 2007.04.01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