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094. 샤를로트 코르테와 기술해방전선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7. 9. 16.

본문

  샤를로트 코르테. 그녀의 연설은 힘차고 조리있었으며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술의 속박에서 벗어납시다!” (원 모어 타임!) “기술의 속박에서 벗어납시다!” 듣고보니 백번 옳은 말이 아닌가. 

  샤를로트 코르테는 '기술해방전선'이라는 단체의 총수였다. 진짜 ‘총수’처럼 생긴 양반들이 득시글거리는 단체에서 가장 ‘총수’처럼 생기지 않은 그녀가 ‘총수’ 노릇을 하고 있다는 범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이유인 즉 그녀, 샤를로트 코르테는 달콤한 초콜렛색 눈동자를 별처럼 반짝이는 아리따운 열아홉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발랄하게 찰랑거리는 금발머리 사이로 드러나는 인형처럼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과 또렷한 이목구비! 남자들이 꼬옥 껴안안주고 싶을 법한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체구!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과 앳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 “기술의 속박에서 벗어납시다!” 듣고보니 정말 백번 옳은 말이 아닌가. 단상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시커먼 아저씨들과 달리 그녀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많은 청년들이 연모와 상사의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많은 처녀들이 시기와 동경의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기술의 속박에서 벗어납시다!” 아! 정말정말 백번 천번 옳은 말이 아닌가!

  '기술해방전선'은 현대사회의 지나친 기술숭배에 반기를 들어 진실된 인간 생활을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결성된 단체다. 그들이 말하는 기술이란 ‘어떤 일을 정확하고 능률적으로 해내는 솜씨’로의 기술보다는 ‘과학 지식을 생산 및 가공에 응용하는 방법이나 수단’으로의 기술에 더 가깝다. 나아가 그 범위에 있어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하는 수준의 기술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첨단의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며, 기술 그 자체를 넘어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표적한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첨단이란 무엇인가. 바늘의 끝. 길고 뾰족한 끝을 넘어 더 뾰족한 끝으로, 더 뾰족한 끝을 넘어 더더욱 뽀족한 끝으로 - 언뜻 콜럼버스나 마젤란이 해냈던 일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하기야 첨단이란 그 얼마나 섹시한 말인가. 마치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이나 넬리 퍼다도의 목소리나 비욘세 놀즈의 대퇴부를 연상시키는 말이 바로 첨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짧고 강렬한 어휘 속에 숨어있는 힘을 사랑한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과학과 기술에서 첨단이 언제나 선인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배워왔다.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군요" (남보다 잘 꾸미기를 열망하는 패션쟁이들에게 이 말은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칭찬이다.) "시대의 첨단을 걷는" (이런 훌륭한 수식어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첨단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도, 그러니까 영화 감독이나 소설가나 음악가나 미술가들조차도 첨단이라는 수사가 주는 매력을 마다하지는 못할 것이다.) 심지어 하다하다 '사상의 첨단'이라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표현까지 나왔다. 이제 머지 않아 장이나 와인처럼 세월에 묵혀야 마땅해보이는 영역까지 첨단의  깃발 아래로 들어갈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덧은 아니다. 여하튼 끝을 달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기분 째지게 좋은 일이다. 남들이 가보지 못한 곳에 도달했다는 얘기는 남보다 앞서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짜릿한 만족감을 마다할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샤를로트 코르테와 ‘기술해방전선’ 조직원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첨단을 향한 강박을 경계한다. 기술이 영혼을 앞서게 되면 인간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다. 가령 지금 시점에서 가장 피부에 와닿는 예를 하나 들어 본다면 아마 휴대 전화일 것이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개인이 개인 전화기를 들고 다닌다는 것은 ‘환상극장’이나 ‘어메이징 스토리’에나 나올법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시청하면서 그런 말도 했을 걸? “이번 주는 좀 너무 나갔네. 과장이 심한 거 아니야?”) 불과 10년 전까지 휴대전화는 아주 돈 많은 사람들, 혹은 아주 바쁜 비즈니스맨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었다. 대학생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면 오렌지족 소리를 듣기 딱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휴대전화 없는 사람이 기인 또는 죄인 취급을 받는다. (기인이자 죄인 취급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휴대전화를 들고 다닌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집전화로 서로 안부를 주고 받으라면? 밖에서 통화가 필요할 때 골목 구석의 공중전화 찾아 뛰어다녀야 한다면?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보다 편리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만큼 더 행복해졌는가 하는 부분은 유감스럽게도 조금 다른 문제처럼 보인다. 한 통계에 따르면 휴대전화 때문에 신경과민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벨소리만 울려도 움찔 놀라는 사람들도 있고 울리지 않은 벨소리를 울린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자기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대의 의도를 괜히 의심하기도 한다. 반대로 받고 싶지 않은 연락을 어떻게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받지 않느냐도 고민 거리다. 이 대목에서 어쩌면 당신은 ‘응? 나는 아닌데?’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또다른 분석 기사에 따르면 스스로 자각하진 못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 휴대전화 노이로제가 무의식에서는 상당 부분 진행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이상한 일이지만 편리해진만큼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어졌고 또 피로해졌다. 그 사이 ‘하루쯤 기다려 줄 수 있었던 일’은 어느새 ‘한 시간도 기다려 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고, 다시금 ‘단 일 분이라도 지체하면 안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모두 다 느리게 달릴 때는 다같이 느리게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다 빠르게 달리니 빠르게 달리는 것은 선택 아닌 필수가 되었다.

  뿐만 아니다. 이제 휴대전화는 사실상 작은 컴퓨터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무선인터넷의 지원으로 언제 어디에서든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졌고 수시로 전자메일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개인 정보 단말기 (PDA), 디지털 카메라, 캠코더, 휴대용 MP3 플레이어,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 (PMP) 등을 단 하나의 작은 휴대전화 단말기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용자들이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하고 구현하고 공유함으로써 활용의 여지는 무한대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기술이 바꿔놓을 현대인의 생활에 대해 장미빛 스케치를 그려내고 있다. 휴대전화가 당신의 비서를 대신해주는 날이 올 거라고, 휴대전화가 당신의 건강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주는 날이 올 거라고, 휴대전화가 당신과 도서관, 은행, 그로서리 스토어, 쇼핑몰, 레스토랑 사이의 연결점이 될 거라고, 휴대전화를 통해 당신이 가공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마치 영화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사람들은 점점 더 첨단의 휴대전화를 열망하지만 실제 그 안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이다. 손 안의 인터넷? 꼭 길을 걸으면서까지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 걸까? 스마트폰? 기기가 아니라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먼저 똑똑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증강현실? 먼저 현실에서 인간답게 사는 방법부터 찾는 것이 먼저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을 정리해서 ‘기술해방전선’의 총수 샤를로트 코르테에게 전자메일로 보냈다.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다.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은 친절한 답장을 보내왔다. 역시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아름다운 아가씨다.

  휴대전화는 첨단의 미래상에 비춰보자면 일부분에 불과할 뿐입니다. 명칭은 다르고 분야는 달라도 결국 모든 첨단 기술의 방향은 하나니까요.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 지닌 기능을 보다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대체하는 것!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을 범위에 있는 사람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거리에 있는 사물을 인식하고, 인간의 다리로는 불가능한 시간에 인간의 다리로는 도달할 수 없을 위치까지 이동하고, 인간의 손으로 해내기 어려운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이 모든 과정은 결국엔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의 완성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요. 그것이 로봇이든, 사고로봇이든, 인조인간이든, 기계인간이든, 사일런이든, 깡통이든, 토스터든, 무슨 말로 불리건 간에 인간의 에고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을 것은 자명한 일이에요. 뿐만 아니라 대체물들은 점점 더 인간화되어 갈 것이고 인간들은 점점 더 기계화되어 가겠죠. 그러다 언제고 번쩍! 인간과 기계의 위상이 뒤집어지는 결정적 시점이 올 것이라 장담합니다. 그 날이 오면 인류는 그들이 그토록 숭배하던 첨단 기술의 집약체에게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지배당하게 될 것이 분명해요. 에고는 실종되고 영혼이 거대한 판옵티콘에 갇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제가 과민반응 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 사회의 기술숭배와 첨단병을 보세요. 지금부터 경계하지 않으면 분명 언제고 현실이 되고야 말 일입니다. 

BlackBerry(R) 에서 보냈습니다. 

  그녀의 답장에 나는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평생 수많은 셀러브리티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은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샤를로트 코르테가 처음으로 내게 답장을 해준 사람이었다. (게다가 러브레터만큼 달콤하지 않은가!) 나는 더욱 더 ‘기술해방전선’의 활동에 매진하고 그녀에게 내 영혼을 바치리라 다짐했다. 

 *

  ‘기술해방전선’의 마르세이유 지부에서 정례 모임을 갖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낭만적인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나는 접이식 자전거를 타고 세 시간을 달려 모임 장소인 이 지역의 유명 이공대학인 에콜 상크랄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 현재 시점에서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큰 기계 덩어리 - 자동차에 대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도 우리 조직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다. (90퍼센트 이상의 조직원들이 자가용이 없이 걷기와 자전거 타기만으로 생활한다.) 자동차 역시 빠른 속도로 똑똑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머지 않아 ‘전격 Z작전’의 ‘키트’ 같은 자동차가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센서 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자동차들은 하루가 다르게 영리해지고 있다. 보행감지, 운전자 졸음감지, 야간 적외선 감지, 크루즈 컨트롤, 주차 도우미 기능… 심지어 몇몇 제조사들은 "차가 비서를 대신할 수 있다"고 선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똑똑한 비서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사장님이 개망나니라면? 그렇다. 우리  우리 ‘기술해방전선’의 또다른 중요한 이슈이자 오늘 모임의 주제다. 편리한 기술로 사람들이 기술에 의존하게 되는 한편으로는 (먼 미래에는 직접 수동으로 평행 주차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을 거라는 농담도 있지) 현재 존재하는 문제들 중에는 꼭 기술이 없어서의 문제만은 아닌 것도 많다. 이를테면 횡단보도 정지선 준수의 문제, 보행 신호에 보행자들을 향해 슬금슬금 밀고 들어오는 '범퍼 시위,’ 운전 중 휴대전화 등의 사용, 꼬리물기, 앞지르기, 칼치기, 갓길주행, 불법주차 등은 기술의 문제만은 아니다. 심지어 음주운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 ‘기술해방전선’의 또다른 중요한 주제가 등장한다. 바로 기술과 그 기술을 사용하는 유저들의 의식 수준의 문제. 기술적으로 이런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시대는 올 것이다. (가령 음주 상태에서 시동을 걸 수 없도록 만든다거나.) 하지만 기본적인 도덕과 상식의 문제를 기술로 제어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꽤나  바보같으면서도 꽤나 서글프게 들리는 면이 있다. 또한 인간들의 기본적인 의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문제는 다른 모습과 다른 경로로 터져나올 것이다. 나아가 (사랑스러운 샤를로트 코르테가 지적했듯) 궁극적으로는 기술이 인간을 모방한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우리의 고약하고 악의적인 면모가 전염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상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번 정례 모임에서 우리들이 심도깊게 토의한 것도 바로 그런 부분에 대한 딜레마이다. 파리에 있을 샤를로트 코르테도 스카이프를 통해 기조 연설을 해주었다. 그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이다.   

  오늘날 기계는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반박하지 못할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흔히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이런 주장을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인공지능과 인공저능(Artificial Imbecility 혹은 Artificial Idiot)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의 끝은 인공저능이다." 기계마저 인간처럼 사유하고 인간처럼 학습하고 인간처럼 의사결정을 내리는 이 첨단 고도의 시대에 어찌 감히 그런 망발을!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이내 깨달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당연한 듯 인공지능을 논하는 우리들 주위에서 '인공저능'의 징후를 찾아낸다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님을 말입니다.   

  아아! 그녀에게는 진실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많은 청년들이 연모와 상사의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많은 처녀들이 시기와 동경의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가령 이 캠코더를 보세요. 일본의 한 전자회사에서 조만간 출시할 제품이라고 하는데요. 특징이 뭐냐면 촬영 상황을 자동으로 인식하는 캠코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 피부색에 최적화시키는 것은 물론, 초점과 노출을 자동으로 조절하여 최상의 녹화가 이루어지게 한다는 이야기에요. 또 이런 기능도 있다고 해요. 찍히는 사람이 미소를 짓는 순간마다 알아서 포착하여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저장해준다는 것입니다. 꽤 멋지죠? 자! 한 번 박스를 열어보겠습니다. 일단 껍데기는 종이 박스이고요. 덮개를 열면 그 안에는 설명서와 스티로폼 충전재가 들어있네요. 스티로폼을 들어보니 타-다! 캠코더가 포장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군요. 조심스럽게 꺼내서… (가격이 한 달 용돈에 맞먹으니까요) 여기 보여드릴께요. 외관이 매끈하고 미려하죠. 잘 만들었네요. 손에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오! 그립감이 아주 좋아요. 상당히 부드럽게 손에 감기는 맛이 있네요. 자! 이제 전원을 켜고 한 번 촬영을 해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여러분을 촬영해드릴 수는 없으니 제가 저를 모델로 제가 테스트를 해볼께요. (이거 참 쑥스럽네요.) 자 이쪽 각도에서 찍어보고 다시 돌려서 조명이 어두운 쪽으로 이동해보겠습니다. 예, 좋습니다. 이제 촬영한 영상을 여러분께 보여드릴께요. 제 얼굴을 따라서 초점이 자연스럽게 조절되는 것이 보이시지요. 밝은 곳에서나 어두운 곳에서나 영상의 퀄리티가 균일합니다. 그리고 여기 포토 갤러리 버튼을 누르면 (다시 한 번) 타-다! 촬영 중간 중간에 베스트 샷을 자동 촬영하여 따로 여기 저장해주었네요. 정말 똑똑하죠? 어때요? 저 예쁘게 나왔어요?

  그녀는 조목조목 다 맞는 말을 하면서도 적절한 유머를 구사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다들 그런 모양이었다.) 일본제 캠코더가 골라낸 그녀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나는 사랑스러운 그녀의 작고 사소한 습관들을 포착했다. 그녀는 가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윙크를 하였고 가끔 보조개가 옴폭 파였으며 그때마다 앵두 같은 입술 사이로 작고 깜찍한 혀를 빼꼼 내밀었다. (인류의 불가사의 중 하나이지만 예쁜 여자들은 이렇게 남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행동을 자기도 모르게 한다고 한다.) 나는 랩 탑을 꺼내 그녀의 공유 클라우드에 접속하여 정신없이 그 사진들을 다운로드 받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다들 정신없어 보였다.) 하루 종일 그녀의 얼굴만 눈 앞을 어른거린다. 아아! 병에 걸린 것 같았다. 짝사랑에 빠진 십대 소년의 열병.

  그녀는 이내 심각한 표정을 하더니 이번 정례 모임의 주제를 다시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 분명 중요한 순간에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겠죠? 그런데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캠코더가 똑똑해졌어도 많은 사람들이 음식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전시하고 자랑하는 이상으로 활용하지 못해요.  발달된 기술도 사람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샤를로트 코르테.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틀림이 없었다. 그것도 아주 사랑스럽고 똑똑한 천사. 

*

  나는 샤를로트 코르테의 트위터도 팔로윙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이런 트윗을 남겼다.

안녕 여러분! 저는 인류의 피로 살찌워진 짐승 놈들과 맞서 싸울 것입니다.
about 4 hours ago via TwitBird iPhone 
@Cylon13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bout 4 hours ago via TwitBird iPhone 
머스트 해브 아이템! RT@cesorg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올해 주목해야할 10가지 전자제품이 소개!
about 5 hours ago via TwitBird iPhone

 

  그게 마지막 트윗이었다. 이후 삼일동안 다른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녀가 삼일이나 트윗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더니만 결국 샤를로트 코르테는 (맙소사!) 며칠 후 텔레비젼 뉴스에 등장하고야 말았다. 세계적인 첨단기술기업 ‘매서브 다이나믹’의 연구소에 잠입하여 블라우스 안에 숨겨두었던 식칼로 윌리엄 벨 박사의 가슴을 스물하고도 세 번이나 찔렀다는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500억 달러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대기업 내부에 감쪽같이 잠입하여 도대체 어떻게 윌리엄 벨 같은 널리 알려진 주요 인물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쁜 여자들에게는 어려운 일을 쉽게 해결하는 재주가 있다. 그녀는 주요 기술기업들에 테러를 계획하는 반혁명분자들의 명단이 담겨 있다며 시큐어디지털(SD) 카드 하나를 윌리엄 벨 박사에게 넘겼는데 박사가 카드 리더기를 찾으려고 서랍을 뒤지는 동안 등 뒤로 접근해서 식칼을 본래의 용도와는 다르게 사용했던 것 같다. 피투성이가 된 꼴로 경찰에 체포된 그녀는 다크웹을 통해 배포된 약 2,340 페이지 분량의 메니페스토를 통해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해명을 했다. 첫째, 그녀는 ‘매서브 다이나믹’사와 윌리엄 벨 박사가 자행하는 연구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신의 영역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둘째, 그녀는 자신의 과격 행동이 세상의 다른 모든 윌리엄 벨들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어 각자 자신의 역할을 돌아보는 효과를 가져오리라고 예상했다. 셋째, 그녀는 진공청소, 물청소, 그리고 특수청소가 가능하다는 최신형 로봇청소기 (1초에 60회나 주변 환경을 분석하여 최적의 알고리즘으로 상황에 알맞는 청소 작업을 수행한다는) ’디지털 우렁각시’의 언박싱 리뷰를 잠시 미루게 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했다. 

  저런! 그녀는 혁명의 영웅이 되기를 바랐으나 누구도 그녀를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술해방전선’의 조직원들마저도. 심지어 넋 나간 표정으로 그녀의 연설을 경청하던 청년들조차도.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속으로 삭히던 처녀들조차도. 아무래도 식칼로, 스물하고도 세 번이나 사람을 찔렀다는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 해 7월 17일. 그녀는 재판을 받았고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상고하기를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접속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트윗은 이것이었다. “10만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목숨을 없앴다.”) 친지들에게 컬러 메일을 쓰는 것은 거부되었지만 단문 SMS까지는 허락되었다. 마지막으로 스카이프로 접속해 온 신부가 그녀 영혼의 안식을 기도해주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과거의 친구들에게 짧은 메세지를 남기고 즉석에서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함께 업로드했다. 같은 날 오후 5시. 속전속결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사형수인 경우 묘한 동정과 묘한 쾌감이 군중들을 자극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걸쳐 늘 있어왔던 일이다. 예상대로 형장의 주위는 구경꾼들로 바글바글거렸다. 사람들이 야유를 시작했다. 귀를 씻지 않고 들을 수 없는 온갖 험하고 저속한 욕설이 광장을 메웠다. ’기술해방전선’의 조직원들은 몇몇은 나왔고 몇몇은 나오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군중들 사이에 숨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요틴을 보고 잠시 실신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의연하게 삼손에게 몸을 맡겼다. 서퍼렇게 빛나는 기요틴 칼날! 나는 더 이상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온 몸의 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소리와 함께 군중의 탄성이 하늘을 찌르고 사그라들었다. 직감적으로 형이 마무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젠 다시 볼 수 없겠지. 초콜렛색 눈동자. 사랑스러운 윙크. 깜찍한 보조개. 관습에 따라 군중들은 사형수의 잘려진 머리를 향해 몰려갔다. 욕을 하고 침을 뱉거나 혹은 축구공처럼 발로 차려는 의도였지 싶은데, 바로 그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히스테리컬하게 비명을 질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과 뒤로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서로 엉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렵사리 사람들을 헤치고 앞쪽으로 나아가려던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샤를로트 코르테! 바로 그녀였다.

  목 위로는 사라지고 몸뚱아리만 남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목이 잘려나간 자리에 가득한 절연전선, 동축케이블, 알루미늄 선, 수지 튜브, 유압 펌프, 자동 제어 모터, 광케이블, 와이어 코일 스프링 등의 절단면! 길 잃은 전기가 새어나와 지글거릴때마다 백옥처럼 하얗다 믿었던 그녀의 피부는 합성수지처럼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끝에서부터 타들어갔다. 초콜렛 같은 눈동자는 텅 비었지만 앵두같은 입술은 근육 경련처럼 움직이며 말을 쏟아내었다. 물론 평소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와는 거리가 먼 괴성이었다. “본 기기는 30초 후 작동을 종료합니다. 반복합니다. 배터리 용량이 2퍼센트 남았습니다. 본 기기는 30초 후 작동을 종료합니다.” 

  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정신이 아득해져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2007년 09월)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