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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 (Maestro, 2023)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4.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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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인류 문명은 대중문화 황금기의 정점을 이미 통과했는지도 모른다. 기술의 발전과 소셜 미디어의 등장은 문화의 생산, 소비, 그리고 평가에 대한 방식을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 놓았지만 그 결과는 보시다시피 참혹할 정도의 하향 평준화이다. 명백히 바닥을 향해 가고 있는데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감을 조금도 갖기 힘들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와중에 아주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마치 시간 여행 소재의 코미디에서나 나올 법하다고 여겨졌던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고나 할까? 가진 건 외모 밖에 없다고 조롱당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는 이 시대 라스트 무비 스타가 되었다. 오락물 전문으로 평가 절하당하기 일쑤였던 톰 크루즈와 키아누 리브스는 극장가의 마지막 수호자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장차 (틀림없이!) 재미있고 매력적인 시트콤 배우가 되리라 촉망받았던 브래들리 쿠퍼는 영화배우, 연극배우, 제작자로도 성공하더니 심지어 감독으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스타 이즈 본 (브래들리 쿠퍼, 2018)’을 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은 비단 스테파니 조앤 앤젤리나 제르마노타, 그러니까 레이디 가가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는 다시 없을 문화 중흥기를 주도했던 전설적 레너드 번스타인의 전기 영화 ‘마에스트로’는 쿠퍼가 감독 겸 주연을 맡은 두 번째 작품이다. 정확히는 스크린플레이도 같이 쓰고 프로듀서로도 이름을 올렸으니 1인 4역인데 이 또한 ‘스타 이즈 본’에 이은 두 번째 종횡무진 대활약이다. 뭔가 믿기 어려운 일이 다시금 일어나고 있다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쿠퍼가 눈을 반짝거리는 청년의 번스타인에서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번스타인까지 변신한 결과를 놀라운 분장 기술의 성공으로만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상대역으로 레너드 번스타인의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 번스타인을 연기한 캐리 멀리건 역시 커리어의 정점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히 인상적이다. 두 사람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이 작품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모든 면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이 훌륭하다. 

 

  다만 전기 영화라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은 있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번스타인의 굵직한 커리어 상세를 따라가기 보다는 부부간의 사적인 사연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역사적 인물의 재능, 열정, 철학, 성취, 갈등, 고뇌, 번민, 그리고 레거시는 사실 오늘의 관객이 원하는 이야기라고 보기 어려우며 고로 지금 이 순간 유효한 코드도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사회 명사로 번스타인의 다각적 활동(시민권, 인도주의, 반전평화운동 등)이나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았던 블랙리스트 사건 등 당대의 논란 등 다른 메세지를 담을 수 있는 선택도 굳이 하지는 않았다. 동성애/양성애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부분도 부부 사이의 문제 정도로 제한되고 그 묘사 방식 또한 꽤 나이브하게 느껴지는데 과연 20세기 중반의 시선이 맞기는 한지 아리송하다. 결국 그나마 '사랑'이 시대를 초월하는 테마이기는 하겠으나 그들 부부의 사연은 '뷰티풀 마인드 (론 하워드, 2001)'이나 '사랑에 관한 모든 것 (제임스 마시, 2014)' 같은 경우도 아니다 (註1). 더구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남성을 위해 희생하는 여성 배우자의 구도 역시 이제 더는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2020년대에 던지는 구체적인 메세지가 과연 무엇인지가 모호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전기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반드시 적절한 타이밍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훌륭한 영화가 그렇듯 보통은 오늘의 현실과도 공명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이 준수한 작품에서 그런 부분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2024년 02월)


(註1) ‘마에스트로’와 가장 비슷한 내용의 작품은 ‘드 러블리(어윈 윙클러, 2004)’일 것이다. 천재적 음악가(콜 포터/레너드 번스타인)가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남자 친구들을 사귀는데 아내(린다 리 포터/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 번스타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인내하고 마지막까지 남편의 곁을 지킨다는 내용이 오버랩된다. 두 음악가 모두 그런 아내를 병으로 먼저 잃게 되고 결국 후회와 실의에 빠져 각각 10년과 12년의 고독한 말년을 보낸다. 차이가 있다면 한 남자는 문자 그대로 모든 의욕을 잃었고 다른 한 남자는 모든 의욕을 잃지는 않았다는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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