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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클리닉 자연과 전쟁: 더 해프닝 (The Happening, 2008)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Re:view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9.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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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미국과 유럽에서는 지난 2년 동안 불가사의한 질병으로 많은 수의 꿀벌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 재앙은 식량 공급에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먹는 음식 중 삼분의 일 가량은 충매화에서 얻는데 꿀벌은 이 수분의 80퍼센트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구 재앙의 가능성을 이런 식으로 상상할 수 있다. 즉, '빅뱅(Big Bang)'같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 단지 작은 수준의 간섭으로도 지구는 얼마든지 황폐화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때 인간이 자연적 균형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해야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어떻게 균형으로 되돌아간단 말인가? 만약 미국과 유럽의 벌들이 이미 산업 오염에 일정한 정도와 방식으로 적응했다면 그땐 어찌할 것인가? (슬라보예 지젝, '벌들과 새로운 냉전', <자음과 모음>, 뉴 아카이브, 2008년 가을호, 302페이지)

1. 아버지들이 약해지고 있다. 힘의 문제라기보단 마음의 문제다. 갑작스런 외계인의 습격에 레이(우주전쟁, 스티븐 스필버그, 2005)는 딸내미 손을 붙들고 죽어라고 뛰기라도 했다. 난데없이 아들과 함께 마트에 갇힌 드레이튼(미스트, 프랭크 다라본트, 2007)은 그나마 앞장서서 탈출로를 뚫어보기라도 했다. 비록 그들은 과거의 아버지들처럼 '유능한 영웅'은 아니었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모르면 모르는대로 맨 몸으로 부딪혀가며 '아빠 노릇'을 다하고자 애썼다는 얘기다. 맞다. 과거의 아버지들(혹은 과거를 추억하는 아버지들)은 재난을 마주하매 지구를 구하고, 조국을 구하고, 가족을 구하고, 마침내 자신마저 구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적극적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보유했거나(물리학자/기상학자/지질학자/천문학자/기타학자) 특화된 기술을 지니고 있었거나(우주비행사/파일럿/석유시추공), 최소한 그런 비상식적 상황 대처의 경험을 간직한(전직 요원/전직 특수요원/전직 군인), 혹은 사태에 대응하는 제반 조치를 결정할 수 있는 직권을 지닌(대통령/총리/주요 요인/각종 최상위 연방정보 기관의 디렉터/그에 준할 연방요원) 남자들이었다. 이들은 능동적으로 재난의 원인과 결과, 사태의 추이를 파악할 가능성이 일반에 비해 현저하게 높은 양반들로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여야 직면한 재난의 막을 내릴 수 있는지를 알고 있거나 미구에 자연스럽게 해답으로 접근되어질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런 아버지들이 그려내는 한 편의 영웅담이란 응당 '가정회복기'와 '지구수호기'의 아름다운 일타쌍피로 완성되기 마련이었다. 

2. 헌데 오늘날의 아버지들은 조금 많이 다르다. 아무런 지식, 기술, 경험, 권한을 가지지 못한 남자들이다. 굳이 진부한 표현을 끄집어내자면, 소시민이다. 이들에게는 원인과 결과, 추이와 양상이 모두 무의미하다. 파악이 안된다. 통제력이 없다. 지구를 구하고 조국을 구한다고? 어림도 없는 얘기다. 솔직히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주정뱅이 양반도 집권여당 윤리위원회의 무려 부위원장이 될 수도 있다지만 그래도 자기 몸 건사하고 자기 가족 지키기도 숨가뿐 그들에게 지구 수호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지난 몇 년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여러 측면에서 분석된 결과에 따르자면 이는 헐리우드 재난 영화의 심리적 기작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의 일면이다. 소위 '포스트 9.11. 시대'의 재난, 이제 가장 공포스러운 적은 그 실체를 알고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적이다. 안개 속에 은밀하고 고요하게 그 실체를 감추고 있는 적이다. 파악이 불가함으로써 두려움은 배가 된다. 따라서 이때의 아버지들이 과거 아버지들처럼 포괄적, 구체적 정보력을 지닌 존재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오히려 실망감과 무력감, 그리고 적대감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흔히 우리가 정치가들을 무조건 반사적으로 혐오하듯이 '아마 저 높은 양반들은 우리같은 소시민들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을거야'라고 생각할테니까. 이는 9.11. 이후 다시금 음모론이 번성하게 된 연유를 보여주는 동시에 스스로 판단하여 스스로 구원하고 스스로 가족을 지키며 재난에 대처하고 나름 투쟁하는 신유형 비영웅 아버지들의 등장이 어느 정도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음을 암시한다. 

3. '해프닝'의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이란 구조적 설계는 분명 샤말란식 낙관(落款)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건을 기술하는 태도와 그에 내재된 심리적 기작을 감안하자면 오히려 상기 두 작품, 스필버그의 '우주전쟁'과 다라본트의 '미스트'와 유사한 범주로 분류되어야 하지 않는가 싶다. 주지했다시피 이상의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소시민 아버지에 중심하여 가족의 해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요모조모 뜯어볼만한 흥미로운 구석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해체의 단계다. 스필버그 ‘우주전쟁’과 샤말란 ‘해프닝’의 가족이 이미 해체의 수순을 밟던 중 재난을 맞아 본격 진행된 형태였다면, 다라본트 ‘미스트’의 가정은 재난으로 우연히 해체가 촉발된 것이다. 다음 둘째는 어머니의 존재다. ‘우주전쟁’과 ‘미스트’가 어머니, 즉 모성성의 존재를 애써 배제하고 있다면 ‘해프닝’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억제'하는 입장에 가까워 보인다. 말인 즉, 이런 얘기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재난이 닥쳐올 수도 있는 세상이다. 당신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The One'이 아니다. 국가, 사회, 조직, 경찰, 군대, 영웅, 그 누구도 당신을 돌보아주지 않는다. 솔직히, 자기 한 몸 간수하기도 버겁고 벅차다. 과연 당신은 그런 세상에 자식을 낳아서 기를 자신이 있는가?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자신이 있는가? 손 놓치지 않고 잘 간수할 자신이 있는가? 피난민들의 아수라판에서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호의로운 낯선 부부에게 금쪽같은 딸내미(다코다 패닝)를 빼앗길 뻔 했던 레이(톰 크루즈)의 섬뜩한 경험은 상당히 온당한 의문을 환기하고 있다. "당신은, 그 악몽을 견디어낼 자신이 있는가?" 레이가 만약에 애 없는 노총각이었다면 똑같이 갑작스레 외계인의 공습이 시작되었던들 '우주전쟁'은 아주 다른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미스트'도 마찬가지다. 드레이튼에게 만약 아들 빌리가 없었다면 똑같이 갑작스레 세상이 안개에 덮여버렸던들 이야기의 맥락은 완전히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4. 결국 요는 종족 보존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콘헤드 대소동(스티브 배런, 1993)'식 우스개로의 종족 보존 얘기가 아니다. 가까이는 대를 잇고 가족을 이루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크게는 인류의 존속과 맞물린 문제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사실상 "어떻게 내 유전자를 지킬 것인가?"와 같은 뜻임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의 유전자'가 구체화된 것이 곧 '나의 아이' - 따라서 아이 갖기를 거부하고 있는 '해프닝'의 엘리엇(마크 월버그) 부부는 의외로 미묘한 지점에 놓이게 된다. 생존을 위해 미지의 위협을 피해 탈주하고 있으나, 세대 번식을 통한 자연적, 영속적 의미의 생존은 애써 거부하고 있는 괴리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엘리엇은 레이나 드레이튼에 이르기 이전 버전의 남자로, 마찬가지로 '해프닝'은 '우주전쟁'과 '미스트'에 이르기 이전 버전의 영화처럼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한 남자의 생존기로 읽히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쨌든 낳은 아이를 지키기 보다는 차라리 낳지 않는 편이 쉽겠다고 여기던 남자의 생존기라면 어떨까. 이때 남자는 (레이와 드레이튼의) 이후 버전 남자를 영화는 ('우주전쟁'과 '미스트'의) 이후 버전 영화를 뜻하게 된다. 남자는 (부부는) 어째서 아예 아이를 갖지 않겠노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배우자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어서? 내 한 몸이라면 아무리 세상 살기가 팍팍해도 어떻게든 그럭저럭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애가 딸린다면 운신의 제약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에? 아이를 낳아 키우기에 생길 모든 어려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감각의 발현은 사회의 불확실성을 명징하게 반증한다.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회는 어떤 사회란 두말 할 것 없이 당장이 불안하고 미래가 없는 사회인 것이다. 

5.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낮은 수준이며 (1.19명/2006년 통계) 동시에 초산의 평균 연령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30.2세/2006년 통계).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대로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설령 아이를 갖더라도 가능한 늦게,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다음에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예의 '미지 위협'에 경기 침체, 내지는 불황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들을 대입하면 보다 이해는 보다 간편해진다. '실질 소득이 감소하고 소비가 위축되면서 육아의 부담을 후일로 미루려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더 간단히 압축 요약하자면 무작정 얼라 놓기에 애로사항이 참 많은 이 풍진 세상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작품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미스테리한 집단 자살의 광풍이 아닐지도 모른다. 앨리엇과 앨마 부부의 불화다. 사랑은 식었고 의무감만 남았으며 아이 갖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힘겨운 권태기의 부부 - 자연성이라는 것의 해석 여지야 분분할지언정, 종족 보전을 거부하는 그들이 자연에 반하는 존재들임은 너무도 자명하지 않은가. 이들이 재난을 피해 도망친다. 자연은 재난의 원인이자 결과다. 처음에 앨리엇 내외는 아이가 없음으로 재난에 훨씬 더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함께 도망치던 동료가 자기 딸을 앨리엇 부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닌가. 사라진 애 엄마를 찾아서 돌아올 때까지만 딸을 봐달란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동료 부부의 생사조차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졸지에 그들은 여덟살 제스(에슐린 산체스)의 보호자가 되어 재난으로부터 도망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여정의 양상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동시에 재난으로부터 살아남는다는 것이 뜻하는 바도 달라진다. 

6. 그것은 모의고사다. 일종의 시뮬레이션이고,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가상 체험 버라이어티'다. 불화로 아이를 가지지 못한 부부가 우연히 동료의 딸을 떠맏아 미지의 위협으로부터 탈주해야한다는 설정은 보이는 그대로 유사-부모의 연습과 다름이 아닌 것이다. 앨리엇은 졸지에 떠맡은 제스를 두고 당신 딸이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딱 잘라 대답하지만 (“당신 딸인가요?”/ “아니.”/ “아이 있어요?”/ “아니.”) 허나 여러모로 아이의 안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그들의 선택은 그들 자신을 넘어 제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로 피난의 방법도 달라진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제스는 휴식과 음식이 필요해요." / "확실해? 우린 계속 가야하는데." / "나도 알지만 저 앤 겨우 여덟 살이에요.") 그들 부부는 그때까지 단 한번도 아이를 염두에 두고 살았던 적이 없었다. 제스의 존재는 처음으로 그들에게 자신과 배우자가 염두해야할 다른 누군가다. 가뜩이나 심각한 불화를 겪고 있던 그들에게 돌연하게 요구되는 부모로의 공동 책임감이란 무겁고 힘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고로 의문이 생긴다. 미지의 위협으로부터 탈주해야 한다는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이 난데없는 소꿉놀이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이다. 이 작품이 단순히 현상의 초현실적 면을 다루는 영화라면 이처럼 미스테리의 궤도에서 치명적으로 빗겨가는 설정이 굳이 삽입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왜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하였을까? 따라서 바로 여기에 샤말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담겨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한번 제스가 등장하지 않는 버전의 '해프닝'을 상상해보자. 앨리엇 부부의 냉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미지의 위협은 시시각각으로 그들의 발뒤꿈치를 쫓는다. 생존가설 역시 여전히 모호하다. 여기까지는 언뜻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미묘하게 틀어지는 부분이 분명 생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제스가 없음으로 하여 엉뚱한 지점에서 물꼬가 터지는 것이다. 이 황당한 이야기의 촉매가 바로 제스이기 때문이다. 

7. 누누이 강조했다시피 '해프닝’ 속 인류는 무엇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밝히지 못할 미지의 조화가 작용한 결과라고 그저 지레 짐작하고만 있을 뿐이다. 도망쳐야 살아남을지 가만히 제 자리를 지켜야 살아남을지 모른다. 왼쪽 길로 가야 살아남을지, 오른쪽 길로 가야 살아남을지 그 또한 모른다. 뭉쳐야 살아남을지 흩어져야 살아남을지, 그마저 알지 못한다. 그들이 세운 생존 가설이 모두 빗나갔다는 것은 자연의 의지를 잘못 파악했다는 뜻일테다. 우리 역시 그 의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기고문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심지어 이때 인간이 자연적 균형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해야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미 인간은 자연과의 미스-커뮤니케이션을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천년 이상 반복하여 왔는데 이제와서 그 누적분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전술했다시피 앨리엇 부부는 자연성을 거부했거나 상실했다. 이에 자연이 그들을 위협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잘못인가?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정녕 그렇다면 인과관계를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인간과, 혹은 인간 아닌 다른 존재들과 평등히 소통하고 공존하고자 보다 노력할 필요가 있단 지적은 온당하지만 어쩌면 너무 막연하게만 들린다. 하지만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은 주인공 앨리엇 부부로 대표되는 인간과 자연의 소통 불능에 관한 우화이지만, 어쩌면 그들 부부간의 불화 역시 이미 그 불통의 일부이다. 따라서 남편 앨리엇이 과학교사이고 끊임 없이 논리적 가설을 세우려고 애쓴다는 설정 역시 (재난영화의 클리셰이기 이전에) 이 사태의 원인과 해법을 굳이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음을 암시한다. 그와 아내와의 관계 회복이 재난 극복, 생존, 자연성 회복의 첫 단계이자 마지막 단계일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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